[시리즈] 프롬문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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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대문학) 최고의 특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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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고요했다. 그 커다란 성의 규모에 걸맞지 않게 침묵이 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어있는 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틈새의 땅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광장에 잔뜩 몰려있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 도는 묘한 긴장감이 기묘할 정도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분위기와 대조되는 색색의 깃발이 광장에 장식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농담으로도 질이 좋다곤 못 하겠지만 허기를 달랠 정도의 음식도 탁자 위에 잔뜩 마련되어 있었다. 흡사 축제 분위기를 흉내 내려고 한 것 마냥…

축제? 그렇다.
틈새의 땅에는 언젠가부터 어떤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케일리드 평야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적사자성에서 전쟁 축제가 열릴 것이라고. 하늘에 별이 차오르는 밤에 '그'와 함께 축제를 즐길 것이라고.

그 말에 틈새의 땅을 헤매는 수 많은 강자들이 적사자성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가 전쟁 축제를 천명한 이상 불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 강요하지도, 권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싸움을 위해, 전쟁을 위해.
전사의 피가 그들을 불러모았고, 영웅의 혼이 그들에게 검을 들게 했다. 틈새의 땅의 강자라면 누구라도 원할 수 밖에 없는 기회였다.

그래서 영웅들은 어색하게 광장에 모여앉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축제가 시작하는 그 때를, 별이 차오르는 그 밤을.

그리고 오늘 밤, 축제의 마지막 손님이 광장에 발을 들였다. 결코 크지 않은 덩치. 투구에 장식된 회색의 털장식은 먼지투성이였고 사슬 갑옷은 군데군데 부서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들고 있는 무장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언제든 뽑아들 수 있게 준비한 대검 한 자루, 왼팔에는 단단하게 고정된 중형 방패, 등에는 기다란 기마병용 랜스를 메고 있었다. 허리춤에 묶어둔 단검들은 투척하거나 생활을 위한 것임이리라. 전체적으로 후줄근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방랑 기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눈이, 그 기색이 평범하지 않았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역경에도 이겨낼 수 있으리란 기백을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몹시 당당하고 발걸음은 힘찼다. 그 또한 영웅이었다.

그래서 그가, 빛 바랜 자가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숱한 영웅들은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틈새의 땅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스톰빌을 단신으로 돌파하여 접목의 고드릭의 거대한 룬을 찬탈한 자' 또는 '마법 학교 레아 루카리아의 철통 방벽을 뚫고 대서고의 비밀을 파헤친 자' 등의 소문은 영웅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용했던 광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빛 바랜 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허투루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빛 바랜 자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모두가 사선을 넘고 전장을 해쳐나온 백전의 용사들. 모두가 전사였고, 모두가 영웅이었다.

예를 들어 두 자루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늙은 검객.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국적인 형식의 갑옷을 입은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피를 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피냄새에 다른 영웅들도 그의 근처에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어 거대한 망치, 거대한 석궁, 거대한 갑옷을 가진 거대한 남자. 저 거대하고 무거운 장비들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의 표정은 그의 갑옷에서 뻗어나온 두 갈래 뿔장식처럼 강인하고 단단해보였다.

예를 들어 몸통이 매우 둥글게 강조된 갑옷과 챙이 넓은 강철 모자를 쓴 남자. 언뜻 우습게 보이는 갑옷이지만 분명 공격을 흘리기엔 최적의 형태이리라. 둔중한 갑옷에 안 어울리게 얇은 자검과 지팡이를 무기로 삼는 듯 보였다.

그 외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영웅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커다란 늑대인간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빛 바랜 자도 아는 사람이었다.

"블라이드."

"아, 역시 너도 왔나. 엇갈리지 않았을까 신경쓰였는데 필요없는 걱정이었군."

블라이드는 늑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얼굴이 늑대였다. 늑대와 인간이 절반씩 섞인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반늑대'라고 불렀다. 이토록 직관적인 칭호가 또 있을까. 그의 등에는 언제나 냉기를 뿜고 있는 커다란 대검, '왕가의 대검'이 걸쳐져 있었다. 빛 바랜 자보다 훨씬 큰 덩치는 두르고 있는 모피 장식으로 인해 1.5배는 더 커보였다. 그 외모에 걸맞게 야생적으로 싸우는 훌륭한 전사였고, 라니의 기사였다.

"너야말로 용캐도 잘 찾아왔군."

"…들었지? 별 부수는 라단이 라니의 운명을 막고 있다고."

블라이드가 이상한 곳에서 길을 잃은 모습을 지금껏 몇 번이나 봐왔던가. 빛 바랜 자가 그 점을 꼬집었지만 블라이드는 못 들은 척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라단이 쓰러지면 라니의 운명도 다시 움직일 것이라고."

블라이드는 긴장한듯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과거 가장 강했던 데미갓에게 도전한다. 검과 엄니로 길을 연다, 알기 쉬워서 좋군."

"그래, 전장에서 등을 부탁하지."

"기대하고 있으라고,"

그리고 블라이드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여기 함께 온 사람…? 아무튼 너를 아는 모양이던데."

"누구?"

빛 바랜 자의 물음에 블라이드는 턱 끝으로 구석을 가르켰다. 빛 바랜 자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다.

'항아리…?'

왜 블라이드가 사람…? 이라며 말끝을 흐리는지 알 법 했다. 전사 항아리들은 틈새의 땅에서도 상당히 귀하고 기묘한 존재들이니까. 그들은 말 그대로 항아리였다. 단단하지만 깨지기 쉬운 도자기로 된 둥근 몸통, 그리고 그곳에서 뻗어나온 기다란 팔다리.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앞을 보는지 그 무엇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드물게 세상에 나와 그 강력한 존재감을 뽑내곤 했다.
그리고 저 항아리는 빛 바랜 자가 만나 본 적 있는 항아리인듯 했다.

"알렉산더?"

"오, 귀공! 역시 왔나."

항아리는 팔짱을 낀 채로 빛 바랜 자에게 몸을 돌렸다. 추측컨데 아마 저 부분이 정면이리라.

"자네도 들었겠지. 이 전쟁 축제가 누구에게 받쳐지는지. 바로 그 라단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더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함께 두려움이 섞여나왔다.

"…그래, 난 떨고있어. 두려운 거지. 하지만 이 전율이야말로 도전해야 할 시련이라는 증거!"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어 보인다.
…비록 떨리는지 여부는 빛 바랜 자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는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공도 지켜봐줘. 철권 알렉산더, 결코 겁 먹지 않고 용감히 끝까지 싸우리라 맹세하마."

"마지막까지 꼭 지켜보도록 하지."

전사 항아리, 알렉산더와의 대화를 마치자 빛 바랜 자는 광장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영웅들이 한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의 가장 앞, 단상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묘한 기대와 두려움에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그는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깔 모자 같은 두건, 그리고 그 두건 사이로 흘러나오듯 풍성함을 자랑하는 회색 수염.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색을 입힌 화려한 갑옷.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언뜻 광대로 착각할 수 있는 복장. 하지만 광장에 모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 노인, 범상치 않다.

"오랜만이군, 제렌…"

빛 바랜 자의 옆에서 블라이드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오래 전 알던 사이인걸까.
제렌은 단상 위에서 광장을 슥 훑어보았다. 척 보기에도 다들 한 가닥씩은 하는 인물들이 수십 여명 모여있었다. 이 정도 수라면, 이 정도 인물들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쩌렁쩌렁한 외침으로 광장을 울렸다.

"용사들이여, 잘 왔다! 별은 차올랐다, 축제의 때가 왔다!"

얼마나 기다려왔는가. 라단의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소문을 퍼뜨리고, 적사자군과 함께 붉은 부패를 막아내고, 그 와중에도 실력을 갈고 닦았다. 이제 끝을 볼 때가 되었다. 전쟁 축제는… 단순한 먹고 마시는 축제가 아니었다. 이는 추모제였고, 고별제였다.

총명하고 강력했던 라단 장군은 패쇄전쟁 최후의 전장에서 말레니아의 붉은 부패에 몸 안 쪽부터 침식당해 제정신을 잃고 케일리드 전장을 헤매고 있었다. 이 어찌나 가슴 찢어지는 슬프고 괴로운 일이 아니겠나. 멀리서 라단이 통곡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제렌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곧, 명예로운 죽음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결심한지 수 백 일.

"패쇄전쟁 최대의 데미갓, 장군 라단은 지금 그대들을 기다리신다! 용사들이여, 싸워라! 긍지와 함께 대적을 해치우고, 거대한 룬을 그 손에 쥐어라!"

라단 장군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자신이 완전히 미치기 전에,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최후의 싸움을 준비해달라고. 라단의 거대한 룬을 계승할 강한 존재를 찾아달라고. 이만큼이나 영웅을 모아들였다. 분명 이 중 하나는 그 자격을 증명하리라.
지금까지보다 더 크게, 제렌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외쳤다.

"자, 전쟁 축제다! 라단 축제다!!"

동시에 광장 전체가 떠나가라 영웅들이 호응하며 소리질렀다. 싸움에 대한 기대감으로, 혹은 싸움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는 듯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제 시작이었다.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각자의 무기를 들고 영웅들은 광장을 나섰다.

라단 축제, 개막!

---

적사자성 성하에는 케일리드 전장으로 통하는 차원문이 있다. 영웅들은 줄 지어서 차원문을 통과해 옛 전장으로 향했다. 기대감, 흥분, 공포, 투쟁심,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그들은 모래 언덕 아래에 도착했다.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빛 바랜 자는 차원문을 통과한 순간 인파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무엇을 기다리고들 있는 것인가. 다들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의아함에 빛 바랜 자가 발끝을 세워 인파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모래 언덕 끝에 걸린 거대한 남자를.

그는 홀로였다.
남자는 황혼의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질녘의 태양보다도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붉은색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남자는 울부짖었다.
과거 영광스러운 황금빛으로 빛났을 갑옷은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져 있고, 별 부수기의 전승을 기억한 거대한 쌍대검은 군데군데 날이 나가 있었다.
그뿐일까, 케일리드의 광활한 들판을 내달렸을 두 발은 썪어 떨어져나갔고 지성마저 부패시킨 저주에 두 눈동자는 총명한 빛을 잃고 말았다.
가만 두어도 죽을듯한, 죽음을 짊어진 남자는 분명 전성기에는 한참 못 미칠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누가 남자를 약하다 말 할 수 있을까. 서로 간에 수백 걸음의 거리가 있음에도 영웅들은 상처입은 짐승과 코를 맞댄듯한 압박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눈을 떼지 마라. 그 송곳니가 목덜미를 물어뜯을테니.
숨 돌리지 마라. 그 발톱이 심장을 파헤칠테니.

그는 파쇄 전쟁의 영웅, 전쟁의 신, 별을 부수는 자, 최강의 데미갓-
라단이다.

라단은 오른손을 등 뒤로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등에서 뭔가를 뽑아내, 자신의 거대한 덩치처럼 커다란 대궁에 그것을 걸었다. 원근감이 이상했다. 이토록 먼 거리에서조차 대궁과 그것에 걸린 물건은 충분히 커다랗게 보였다. 곧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몇몇 영웅은 생각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뭘 하려는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거리에서 활을 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분명 그럴터였다.
조금 더 예민한 영웅들의 위기 감지 능력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급하게 외쳤다.

"피해!"

빛 바랜 자는 다행이도 조금 더 예민한 영웅 중 하나였다. 그가 급하게 옆으로 몸을 빗겨선 순간, 그의 바로 옆에 있던 누군가는 보라색 빛줄기와 함께 마술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쌔앵-하며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사라져버린 그 누군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마치 책형을 당하듯 거대한 무언가가 그의 가슴팍을 관통해 바닥에 박혀있었다. 화살인가? 아니, 장창이었다. 양손으로 휘둘러야할 만큼 기다란 장창이 한 명을 꼬챙이 꿰듯이 뚫어버린 것이다.

영웅들의 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저렇게 커다란 장창을, 마치 화살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쏠 수 있는건가?
그리고 그들은 깨달았다. 움직여야 했다.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대궁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영웅들이 흩어졌다. 누가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전장을 해쳐나온 그들의 경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퍼져서 거리를 좁혀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

어느새 다시 장창을 대궁에 건 라단이 시위를 당겼다. 장창 끝에서 아까의 보라빛 마력이 모여든 것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조준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한 명이 커다란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땅에 박아세웠다. 온 몸과 땅에 기대어 공격을 저지한다-라는 생각은 다음 순간 산산히 부서져 흩어졌다.

말 그대로, 라단의 장창은 대방패를 뚫고 뒤에 있는 남자를 산산조각내버렸다. 비산하는 육편과 핏물을 보며 영웅들은 더욱 빠르게 달려나갔다. 영웅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만에 선두는 이미 절반 가까운 거리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접근하는 영웅들을 보던 라단은 오른손을 하늘로 뻗어올렸다. 그러자 라단의 등 뒤로부터 장창 무더기가 날아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시위에 걸고 하늘을 향해 쏘아올렸다.

착각일까,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이변을 감지한 빛 바랜 자가 잠시 시선을 위로 향한다.
장창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리듯, 두꺼운 장창의 비가 황혼의 태양을 가리며 땅으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비규환이었다. 영웅들은 하늘로부터 무작위로 쏟아져내리는 장창의 비를 피하고 쳐내기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런 그들을 라단은 다시 한 번 보랏빛 마력의 장창으로 저격하며 하나 둘, 쓰러뜨렸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한 명이 라단의 앞까지 도달했다. 지친 숨을 헐떡이며 라단에게 도착하는 그는 크게 도약하며 창을 찔러들어갔다. 오늘, 처음으로 라단에게 가해진 공격.

콰직-
마치 벌레를 잡듯, 거대한 대검이 그의 몸을 갑옷째로 반으로 가르며 피와 내장을 뿌렸다.

중력의 문장이 새겨진 전설의 흑철 쌍대검, '별 부수기'가 어느새 라단의 손에 들려있었다.
한 명의 희생으로 간신히 장창의 비와 저격이 멈췄다고 생각한 영웅들이 잠시 숨을 돌리려 했다.
…명백한 착각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박감이 그들의 숨통을 조이고 어깨를 짓눌렀다. 라단, 그가 거대한 대검을 양손에 들고 모래 언덕 아래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볼 품 없게 생긴 말이 그제서야 시선에 들어온다. 녀석은 떨어진 라단의 발을 대신해 라단을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라단은 혼자였다. 하지만 말을 타고 돌격해오는 그의 모습은 천군만마의 군세와도 같았다.
그가 내달리는 경로가 초토화되며 피와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영웅들은 생각했다.

이런걸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이건 학살이고, 살육이었다. 명백하게 그들은 사냥당하고 있었다.
승산이 없다 생각했는지 저 멀리 대방패와 창을 들고 있던 누군가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모습도 보였다.

캉-!
커다란 쇳소리가 울리며 불꽃이 튀었다. 처음으로 한 합을 받아낸 그는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었다. 산양의 트라고스, 그와 부딪히며 라단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기다란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블라이드가 달려든다. 양손으로 굳게 잡은 왕가의 대검을 휘두르며 라단과 검을 맞댄다.
그러나 동시에 두 명을 상대하면서도 라단은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지며 라단의 대검이 내려쳐진다.
그 순간 옆에서 빛 바랜 자가 달려들며 방패로 대검을 밀어낸다. 비스듬하게 방패면을 깎아내며 모래 바닥에 큰 상흔을 남긴다. 정면으로 막았으면 방패까지 토막났을 것이라는 예감에 빛 바랜 자도, 블라이드도 오싹함을 느낀다.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내자 흩어져있던 영웅들도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만큼 모이면 라단조차 공격을 다 받아낼 수 없으리라고 영웅들은 생각했다. 이제 역으로 사냥을 시작할 때였다.
보랏빛 구체가 라단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구체에 닿는 순간 몸이 라단 쪽으로 확 빨려들어간다. 저항할 수조차 없이 라단의 발치까지 끌려온 그들은 하늘 높이 치켜올려진 그의 쌍대검을 보았다. 사냥당하는 쪽은 라단이 아니었다. 포위망을 형성한게 아니었다. 포위망을 만들도록 라단이 유도한 것이었다.
너무 많이 몰려있었다. 도망치려는 인파들은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고, 깔아뭉개지며 더욱 혼란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라단의 대검이 벼락처럼 떨어진다.
화약고가 터진 것 같은 강렬한 폭발음과 충격이 땅을 뒤흔들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공격이 떨어진 곳에 생긴 거대한 구덩이가 드러났다. 뼈도 못 추릴듯한 무시무시한 위력. 방금의 일격으로 몇이나 죽은 것일까.
폭발을 간신히 피한 빛 바랜 자가 상황을 살피는 사이, 라단은 자신의 쌍대검을 바닥에 박아넣었다. 보랏빛 마력 다발이 흘러넘치듯 뿜어지길 몇 초나 지났을까. 라단은 다시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아까보다도 거대하고 흉악해져 있었다. 중력의 마력으로 대검에 이어붙인 암석과 장병기의 파편이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라단은 다시 한 번 말을 달렸다. 다시 트라고스에게로,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란듯이 참격을 가했다.

쩌억-
일격에 트라고스의 갑옷 뿔 한 쪽이 떨어져나가며 트라고스가 바닥을 굴렀다. 검에 실린 압력이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막을 경우 예상되는 것은 확실한 죽음. 살아남은 영웅들은 침을 삼켰다. 어떻게든 흘리거나 피해야만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수적 우위를 이용한 지구전. 많이 이들이 당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수십이었고, 라단은 혼자였다. 버티면서 체력을 갉아먹는다면 언젠가는 라단도 지칠 때가 올 터. 인내를 가지고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고민할 새도 없이, 라단은 말을 몰아 영웅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검과 창, 화살과 마술이 난무하며 전장을 뒤흔들었다. 저 멀리서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

석양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영웅들의 작전은 어쨌건 제대로 통하긴 했다. 물론 그 뒤에 스러져간 수많은 희생도 있었다. 의미있는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라단조차 수 시간에 걸친 격전에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지친 것은 라단이 아니라 그의 비쩍 마른 말일지도 모른다. 녀석은 처음에 비해 부쩍 느려지고,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도 한참 짧아져 있었다. 그 연약하고 불안한 네 다리는 분명 지쳐있었다.
그래서 영웅들은 간신히 라단을 포위할 수 있었다. 라단을 중심으로 두고 영웅들은 그제서야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공격. 그 라단조차 두 눈, 두 팔로는 전부 대응할 수 없다. 갑옷에 상처가 늘어가고, 노출된 피부에서 피가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얕은 상처였으나 데미지는 조금씩 축적되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일까. 영웅들은 피로를 잊고 검과 창을 찔러들어갔다.
그 순간, 라단의 발 밑 모래가 폭발하듯 솟구친다. 동시에 라단의 모습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대신 커다란 분화구 같은 것만이 남아 있었다.

"뭣?"

당황스러운 물음이 영웅들 사이에서 번져나간다. 그 커다란 덩치, 지쳐버린 말,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영웅들. 갑작스레 사라질 방법이 있을리가 없다.
잠시 소란과 함께 영웅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조용해졌다. 침묵.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약속이라도 한듯 모든 영웅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고요하다.
부자연스러운 무음 속에 영웅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그들 자신의 심장 고동소리 뿐이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맥박치고 있다.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단련된 본능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진다.
지금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어던지고,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온다고, 올 것이라고. 압도적인 공포가, 절망이, 죽음이 올 것이라고.

"…위다."

마침내 누군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깼을 때, 영웅들은 보았다.

하늘이 불타고 있다.
불타는 하늘이 가까워 온다.
불길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인영만이 누구의 행위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몇몇 영웅들의 손에서 미끄러지듯이 무기가 떨어진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태풍이나 해일에 검과 방패를 가지고 맞설 수 있는가? 지진과 산사태에 창을 찔러넣을 것인가? 자연 재해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

누군가는 꽁무니를 뺐고,
누군가는 울며 목숨을 구걸했으며,
누군가는 체념의 말을 뱉었다.
몇몇만은 다시 검을 쥐었다.

비명 소리도, 기도 소리도, 울음 소리도, 공포도, 절망도, 투쟁심도 집어삼키며…


.

---

지이잉-
블라이드는 심각한 두통을 느끼며 일어났다. 잠시 기절했던 모양이다. 아픈 머리를 부어잡고 잠시 몸상태를 살펴본다. 귀가 먹먹하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입 안도 터졌는지 피맛이 돌았다. 라단이 별처럼 떨어지며 지면을 강타한 충격이 그만큼 컸던 모양이다.

'라단?'

그러고보니 라단은 지금 어디에 있는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높이에서 낙하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하지만 오늘 라단이 보여준 모습은 그 무엇도 상식의 범주 그 이상이었다. 라단이 멀쩡함을 직감할 수 잇었다.
잠시 체력을 회복한 블라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휘청하더니 모래 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며 굴러갔다. 폭발 직전에 그는 평지에 가까운 지면에 있었을텐데? 모래 먼지가 좀 가라앉고 나서야 블라이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직경 수십 미터의 크레이터. 블라이드는 그 가장자리에 있었다. 단신의 힘으로 일대의 지형지물을 갈아엎을 정도의 힘. 그 강대함에 블라이드의 털이 삐쭉 솟았다.

블라이드는 사면을 타고 크레이터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크레이터의 중심에서부터 전투의 소음이 울리고 있었다. 두꺼운 흙먼지의 장벽 너머로 라단에 맞서고 있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특이하게 생긴 검 2자루를 능숙하게 다루는 검색, 노인. 그리고 전사 항아리 '철권' 알렉산더가 분투하고 있었다.

블라이드가 곧장 전투에 합류하려던 순간, 쇳소리와 함께 노인과 알렉산더가 크게 뒤로 밀려났다. 거리를 벌린 라단은 칼 끝으로 발 밑을 내리쳤다. 그러자 중력파가 작게 퍼지며 수십발의 중력 탄환이 날아갔다. 중력의 탄막. 어디로도 피할 길이 없었다. 저항조차 못 하고 끌려가는 둘에게 라단의 자비없는 도약 내려찍기가 천벌처럼 강타한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함께 피인지 뭔지 모를 즙이 튀며 알렉산더가 쓰러졌다. 검격에 스치듯 맞은 노인도 피를 토하며 하늘을 날았다. 순식간에 둘을 처리한 라단은 이제 블라이드에게 돌진해왔다.
첫 검격을 피하고 왕가의 대검을 휘두른다. 순식간에 몇 합을 주고받으니 그 격차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1대1로는 승산이 없다. 칼을 마주할 때마다 그 충격이 블라이드의 속을 뒤집어놨다. 울컥하고 올라온 핏물을 삼키며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은 더 없나? 빛 바랜 자는 어디에 있지?'

몇 발자국 옆에 산산조각 난 샤로리나의 파편이 널부러져 있었다. 셀브스의 인형도 당한 모양. 이제는 정말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몇 남지 않았다. 그 중… 빛 바랜 자는 보이지 않았다.
절망스러운 상황, 내려쳐지는 검을 간신히 막으며 충격에 다리가 풀렸다. 이를 악물고 검을 밀어내며 한 바퀴 회전해 다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블라이드는 보았다.
흙먼지의 검은 장막을 찢어내고 나오는 은빛의 섬광을. 전장의 먼지를 흑색의 망토처럼 두르고, 빛 바랜 자는, 토렌트는 달려나갔다.
박차를 가하면 가할수록 말발굽이 대지를 박차며 속도에 속도를 더한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모래 알갱이가 따갑게 부딪혀와도 빛 바랜 자의 시선은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본다. 오른팔로 감싸쥔 기다란 은빛 랜스가 그가 바라보는 끝을 향한다.
충분히 가속한 영마의 기수가 랜스로 찌르는 충격은 실로 수십 톤에 달한다. 그 라단조차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맞는다면… 말이지.'

그러나 그 공격은 지극히 뻔한 직선. 어떻게든 발을 묶어야 한다는 생각에 블라이드는 골수까지 힘을 뽑아 맹공을 퍼부었다.
겨우 수 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빛 바랜 자가 랜스를 내지른다.
최적의 순간, 최고의 속도로 내지른 최강의 일격. 이 공격은 분명 거인조차 분쇄하리라.

랜스를 쥔 오른팔을 뻗은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 빛 바랜 자는 보았다.
라단이 장벽을 세우듯 땅에 박아넣은 대검을. 그리고 완벽하게 내지른 랜스의 창끝을 대검의 두터운 검신으로 받아냄과 동시에 대검을 회전시켜 옆으로 흘러내는 모습을…
마치 물수리가 수면을 스치듯, 랜스의 끝은 허망하게 바람을 갈랐다. 공격이 흘러나간 반발력에 토렌트가 크게 휘청였다.

그렇다. 라단은 최강의 데미갓. 단순히 완력만으로 그 칭호를 얻었을 리가 없다.
심지어 라단의 시선은 빛 바랜 자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블라이드의 맹공을 부수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뻔한 공격은, 이미 무력화된 적은 시야에 두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라단의 등 뒤에서 토렌트와 함게 지면으로 쓰러지기 직전, 빛 바랜 자는 생각했다.

'작전대로다.'

무너지는 자세에서 빛 바랜 자는 왼손에 굳게 맞잡고 있던 것을 공중으로 던져올렸다. 다음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솟아오르며 토렌트와 빛 바랜 자는 지면에 격돌, 먼지 구름 속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벼락 같은 외침이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라단 장군-!!!"

물결치는 듯한 검신을 가진 대검을 역수로 쥐고, 성주 제렌은 오랜 친구의 목덜미에 그것을 깊숙히 박아넣었다.
가죽과 근육을 뚫고 피가 튄다.

빛 바랜 자의 왼손에 지탱해 토렌트의 그림자에 숨어, 제렌은 기다리고 있었다. 필살의 칼날을 박아넣을 그 순간을.
지금까지 라단의 바로 옆에서 그를 보필해왔던 제렌이었기에, 라단의 실력을 가장 신뢰하고 있는 제렌이기에 노릴 수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라단의 몸 깊숙히 죽음이 닿는다!

'얕았다!'

숱한 전장을 누빈 노장 제렌은 손 끝의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노쇠했다지만 제렌 또한 검의 명수. 그가 실수했을 리는 없다. 분명 그의 플랑베르주는 정확하게 라단의 목을 노렸다.

'그 타이밍, 그 간격, 그 사각에서조차 피한건가!'

깨닫는 순간 대방패 같은 손바닥이 날아와 제렌을 튕겨냈다. 라단은 오른쪽 어깨죽지에서 검을 뽑아냈다. 물결 같은 칼날이 상처를 헤집으며 부패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갑주를 적신다.

큰 상처였다. 그러나 전투가 불가할 정도의… 라단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제렌은 곧장 검을 집어들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 위로 라단의 노도와도 같은 공격이 쏟아졌다. 무시무시한 연속 공격. 그 사이를 제렌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해내고 있었다. 노장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날렵하고 정밀한 움직임. 그 발걸음에, 그 손짓에 단 한 치의 낭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라단과의 1대1이 성립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블라이드는 입을 쩍 벌리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플랑베르주가 라단의 팔에 선을 그으며 뒤로 빠졌다. 한참 얕다. 하지만 이보다 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쌍대검의 폭풍 속에서 파고들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파고들 틈을 찾는 제렌, 파고들 틈을 내주지 않는 라단.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먼저 균형이 무너진 쪽은 제렌이었다.
노쇠한 몸, 이렇게 싸우는 것조차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순전히 운에 가까웠다. 모래 밑에 묻혀있던 옛 전장의 파편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파편을 밟자마자 미끄러지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휘청인다.

"젠장."

욕설과 함께 피가 하늘에 뿌려진다. 죽지는 않았다. 오랜 친구에게 손속을 두어 위력을 조절한 모양이었지만, 더 이상 싸움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은 되었다.

절망의 기운이 전장을 짓눌렀다. 이제 전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라단과 그 말뿐이었다. 그 많던 영웅들은 라단의 화살에 관통되고, 검에 찢기고, 심지어는 폭발에 휘말려 뼛조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더 이상 방법이 없는건가.'

이제 남은 것은 블라이드 혼자인 듯 했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라단의 그림자는 사신의 그것과 같았다.

구원의 손길은 샛별처럼 다가왔다. 피로가 묻어나오는 숨소리, 여기저기 부상의 징후가 느껴지는 움직임, 격전에 부서지고 망가진 갑옷의 마찰음. 지쳐 있었고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발걸음에 힘이 담겨 있었고, 가슴은 당당하게 펴져 있었다. 자연스레 뿜어져나오는 기백에 라단도 블라이드도 빛 바랜 자를 돌아보았다.

빛 바랜 자는 검을 빼들었다. 검집에서 매끄럽게 빠져나온 대검이 달빛을 가르고 부쉈다. 그 칼끝은 라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결투를 신청하는 기사처럼 느껴졌다.

라단은 크게 웃었다.
케일리드 평야의 전장에 울릴 정도로 커다랗고 호탕한 웃음이었다.
중력의 힘을 품은 보랏빛 마력 다발이 그의 온 몸에서 뿜어져나와 모래 속에 파묻혀있던 자갈과 무기 조각을 퍼올렸다. 그리고 라단을 감싸듯, 그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파편들은 라단의 검을 따라 춤추듯 파도쳤다. 격렬하게 회전하는 파편과 쌍대검은 이미 폭풍이었다.

닿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분쇄하는 중력의 대폭풍.
그 경이적인 광경을 앞두고 빛 바랜 자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그려본다.
측면, 후퇴, 도약… 어떤 경우에도 활로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활로는 언제나 정면.
폭풍의 품 속에서 가장 고요한 곳은 태풍의 눈이기에, 그는 발을 내딛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리는 다리를 억누르고 앞으로.
심장이 화산처럼 고동치고,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한다.

라단의 칼 끝이 빛 바랜 자의 코 앞까지 떨어진 순간, 빛 바랜 자의 감각은 시간을 지워냈다.

위에서 떨어지는 참격.
슬쩍 고개를 비틀어 옆으로 비껴낸다.
스친 투구 장식이 터지듯 허공에 흩어진다.

왼쪽에서 베는 종아리치기.
살짝 몸을 띄워 검의 궤적 위에서 회전한다.
미처 공격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방패가 떨어져나가 폭풍 속에 분쇄된다.

공격 사이로 들어오는 날카로운 파편.
다소의 피해는 몸으로 받아낸다.
창날이 옆구리에 박히며 피가 나부낀다.

검격에, 폭풍에 거스르지 않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 잡초가, 깃털이 되어라.
폭풍을 유영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라.

목덜미를 노리고 떨어지는 쌍수 교차 참격.
땅에 닿을 듯 크게 숙이며 사선 아래로 미끄러진다.
이제 몇 발자국. 더욱 앞으로-

더 정밀하게, 더 완벽하게. 수십 연격 속에서 빛 바랜 자는 거침없이 흩날렸다. 폭풍새의 춤사위처럼 더없이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공격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난 순간, 그 간격은 종이 한 장조차도 되지 않았다.

라단의 다리 밑으로 빠져나가 뒤를 돌아본다. 라단도 동시에 몸을 틀어 빛 바랜 자를 바라본다.
처음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 시선이 엮인다. 그 짧은 사이에 빛 바랜 자는 라단의 표정을 읽었다.
라단은 웃고 있었다. 즐거워죽겠다는 듯,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가 말려올라가 있었다.
동시에 둘 모두 알아차린다.
전사의 피가, 무인의 본능이 마지막임을 고한다.

최후의 일격이 서로의 틈을 메운다.

빛 바랜 자는 똑똑히 보았다. 제렌이 상처 입힌 오른쪽 어깨죽지가, 그 상처가, 그 통증이 라단의 반응을 일순간 늦추는 것을.
그리고 직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의 차이로 자신의 검이 늦을 것임을.

그리고 그는 보았다. 회전하며 날아오는 왕가의 대검과, 그것을 던진 만신창이인 블라이드를. 거대한 대검은 정확하게 라단의 발치에 꽂혔다. 그리고 푸른 섬광과 함께 냉기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 따위, 라단을 움찔하게조차 못한다. 그러나 폭발과 동시에 뿜어져 나온 냉기가 발을 타고 올라와 아주 조금, 라단을 느리게 만든다.
시간으로는 불과 0.0x 초…

충분했다.

빛 바랜 자의 투구가 박살나 바닥에 떨어진다.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모래를 적신다. 빛 바랜 자의 발 끝이 피웅덩이에 잠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피웅덩이를 따라 시선을 욺긴다.

라단의 목덜미에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두 자루의 커다란 쌍대검이 땅에 떨어졌다.

라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있었다. 대신 모든 것을 털어냈다는 듯 후련해보이기까지 하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말없이 빛 바랜 자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꽃이 피듯 손가락이 펼쳐지자 따듯한 기운이 확 퍼진다. 강력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부서진 고리. 거대한 룬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친구, 자신의 늙고 비쩍 마른 말과 제렌을 바라보며 차가운 땅에 몸을 뉘였다.
전설이 쓰러졌다.

살아있는 신화였던 라단이 쓰러지고 그 유산은 빛 바랜 자가 찬탈했다.
그리고 칠흑 같은 밤하늘에서 하나 둘씩, 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라단을 추모하듯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별은 어느새 수백 수천이 되어 아름다운 은하수를 그려냈다.

그리고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이 은하수의 행렬을 따라 적사자 성을 지나 사라진 순간…
굉음이 대기를 요동치고, 섬광이 새벽처럼 밝아왔다.
빛 바랜 자도, 블라이드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멸망한 고대 도시, 노크론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음을, 멈춰버린 세계의 운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가족의 피를 딛고, 운명의 수레바퀴는 다시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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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씨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