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프롬문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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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 루카리아 마술 학원은 틈새의 땅 최고의 지성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당연히 최고의 지성 중에서도 급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 중 단연 최고로 뽑히는 사람은 천재라고 불린다. 학원은 그들을 '보석'이라 칭했다.

천재가 아닌 이들. 그들은 범재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학원은 그들을 '휘석'이라 칭했다. 그들의 마술의 근간이면서도 흔하디 흔하다는 작은 조롱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아래, 천재와는 대칭점에 존재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둔재라 불렸다. 학원은 그들을 딱히 뭐라 칭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둔재는 쫒겨나거나, 스스로 나가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리고 여기, 학원의 유일한 예외, '둔석' 토푸스가 있다. 어려운 마법은 익히지 못한다. 수업 진도는 간신히 좆아올 따름. 시험에는 낙재하기를 여러 번. 그렇다고 딱히 결투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치 없는 돌, 둔석이라 불리게 되었다.

교회의 무너진 돌담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던 토푸스가 바스락 소리에 깬다.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슥- 닦으며 생각한다.

'이 주변엔 스켈레톤 밖에 없을텐데?'

스켈레톤은 사납고 난폭하지만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는 못한다. 즉, 스켈레톤의 영역에 절묘하게 걸친 이 교회는 역으로 스켈레톤에게 보호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째서 레아 루카리아 학원의 학생인 토푸스가 이런 외딴 교회에 있는가. 학원에서 추방되었을까? 아니면 학원에서 도망쳐나왔을까?
학원에서는 매년마다 기초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에게 '휘석 머리'를 수여한다. 휘석 머리는 곧 탐구를 인정받았다는 증표. 즉 진정한 마술사로써의 첫걸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여식날, 그의 동기들에게 휘석 머리가 주어졌다. 올리비니스, 카를로스, 하이마, 라줄리... 그리고 단 한 개의 쌍현.

그 많은 휘석 머리 중 토푸스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절망하는 그에게 '둔석'이라는 조롱이 들려왔다. 둔석은 휘석이 될 수 없음을, 어쩌면 그는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없이 학원에서 뛰쳐나왔다. 마술의 길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대체 누가 있어서 그 사이 파쇄 전쟁이 터지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일어날 때 학원의 문을 닫는 것은 철칙. 학원으로 통하는 문에는 엄중한 봉인이 가해졌고, 그 길로 토푸스가 학원에 돌아갈 방법도 사라지고 말았다.

분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자신이 '보석'이더라도 이런 취급을 받았을까? 아마 뻐꾸기 기사단이라도 내보내 애타게 그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둔석인 것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발소리의 주인은 어느새 그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다부진 체격. 왼팔에는 작은 라운드 쉴드가, 허리춤에는 화살통과 직검 한 자루가 메여 있다. 비어있는 오른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끔 긴장된 상태로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관리하고 있지만 역부족인지 군데군데 망가진 낡은 갑옷은 지금껏 거쳐온 전투의 흔적을 드러내는 듯 했다.

그는 지쳐있었다. 그 눈동자는 빛을 잃어 어두운 색이었다.

그는 빛 바랜 자였다.

그러나 그 두 눈동자 속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꺼지지 않을 거센 불길이.

토푸스도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내는 강하구나. 동시에 자기를 해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너는 빛 바랜 자구나."

먼저 말을 걸었지만 쉽게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는 듯 했다. 적대적이라기보단 조심스러움에 가깝다. 마치 허술한 함정에 다가가는 모험가처럼...

"혹시 룬을 가지고 있다면 좀 베풀어주지 않겠어?"

"아."

뭔가 깨달은 듯 빛 바랜 자가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패치인 줄 알았네."

"패치?"

"그 대머... 아닙니다."

"???"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빛 바랜 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작은 룬 조각을 꺼내들었다. 얼마만에 보는 룬인가.
룬은 곧 축복의 파편, 생명의 원천이다. 틈새의 땅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고마워. 너는 좋은 사람이구나. 이래뵈도 나는 레아 루카리아 학원에서 사사받은 몸. 혹시 마술을 배우길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수 있어."

...라고 허세를 부려보지만 사실 토푸스도 알고 있는 마법이라야 극히 기초적인 몇 개 정도다. 이렇게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까닭도 빛 바랜 자가 마술에 대해 완전히 무지해보였기 때문이다.

"마술이라면 막대기에서 파란 돌덩이 같은 걸 쏘는 그런겁니까?"

"막대기라니... 지팡이라고 불러주게. 아무튼 제대로 봤네. 그 파란 돌덩이를 우리는 '휘석 마술'이라고 부르지."

"저도 쓸 수 있는겁니까?"

"물론. 좋은 스승과 올바른 노력만 있다면 누구든, 어떤 마술이든 쓸 수 있는 법이지."

...그렇게 말했지만 형편없는 자신의 마술 실력을 생각해보면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밤 사이 토푸스는 몇 개의 기초 마술을 가르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알고 있는 마술 전부였다.
능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빛 바랜 자는 이미 배운 마술들을 초보적인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토푸스의 자신감이 더욱 꺾이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로 재능에 차이가 난단 말인가?

날이 밝았을 때, 토푸스는 넌지시 빛 바랜 자에게 말했다.

"미안해. 베풀어줬는데도 대단한 마술을 알려주지 못해서... 아, 그렇지. 아쉬운 대로 대신 이 땅에 대해 내가 아는 것들을 알려줄게. 여기서 북쪽으로 수면 높이 치솟은 건물이 보이지?"

그의 마음의 고향 레아 루카리아.
토푸스는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풀어냈다.
레아 루카리아로 향하는 길은 봉인되었다. 그러니 휘석 열쇠를 찾아, 봉인을 통과해라.

"...그리고 혹시라도 휘석 열쇠를 하나 더 발견하면, 그걸 나에게 줄 수 있겠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염치없는 부탁이었다. 그는 황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나도 알아, 나는 둔석. 마술 재능은 눈꼽만큼도 없지. 그래도 다시 한번, 그 배움터에 돌아가고 싶어."

쇠락하는 세상에 단 하나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학원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토푸스의 간절함이 전해졌는가, 잠시 그와 눈을 맞춘 빛 바랜 자가 토푸스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토푸스가 상상조차 못해본 단어를 발음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빛 바랜 자는 염소를 닯은 영마를 소환하더니 훌쩍 떠났다. 북쪽으로, 안개 낀 습지를 향해.

다시 혼자 남은 토푸스는 멍하니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아직 빛 바랜 자의 온기가 조금 남아있는 듯 했다.

"스승...이라..."

예상치 못한 따듯한 울림이었다. 이 못난 둔석도 자신을 스승이라 불러주는 제자가 생겼다. 비록 정식 사제 관계는 아니었지만 토푸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토푸스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그가 혼자 연구하고 있었던 이론. 레아 루카리아의 동기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이론이라며 비웃었던 그것. 하지만 토푸스는 운명처럼 알 수 있었다. 이것만큼은 그가 틀리지 않았다고.

한동안 멈춰있었던 글자들에, 다시 한 번 잉크가 흔적을 더하기 시작했다.

-----

"으아아아..."

토푸스는 자신의 매끈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홀로 교회에 남아 이론 연구에 메달린지 며칠쯤 지났을까.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거대하고, 아주 깊은 계곡 같은 벽에.

마술의 탐구는 마치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 너머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탐구자 하나하나의 힘은 미약하기에 선조가 쌓아올린 지식의 탑 위에 올라서나 간신히 그 너머를 보게 되는 법이다.

토푸스가 탐구하는 길은 지금껏 다른 이들이 걸어간 적 없는 길. 그럼에도 험난한 길 곳곳의 이정표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걸어나갔다.

그 이정표가 지금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니, 희미하게나마 기억은 있었다. 레아 루카리아 곳곳에 존재하는 도서관, 그 중에서도 구석진 곳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다.

그의 이론에 빠진 조각, 그것을 채워줄 이론이 그곳에 있었다.
문제는 학원 내부로 진입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필요한 이론을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
아니, 그럴만한 능력도 시간도 없었다.

책 내용을 떠올리려 해봐도 뿌연 안개가 기억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기억력이 조금만, 정말 조금만 좋았더라면. 재능의 한계를 체감하며 얼굴을 구긴다.

"스승님?"

"엇? 아."

토푸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빛 바랜 자가 바로 앞에 서있었다. 고뇌에 빠져있다보니 누가 오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

어찌됐건 스승과 제자의 연이었다. 스승으로써 못 보여줄 꼴을 보여주자 토푸스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학원으로 간게 아니었어? 뭔가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사실 이걸 찾긴 했는데..."

빛 바랜 자는 등짐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보였다. 회청색 몸체에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그것.

"휘석 열쇠를 찾았구나!"

그가 꿈에서조차 찾아헤매던 열쇠를 가져온 것이다. 단숨에 우울했던 기분이 날아가며 토푸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토푸스는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레 휘석 열쇠를 들어올렸다. 이 정교한 장식, 마력에 반응해 미약하게 빛을 발하는 작은 휘석 조각. 묵직한 생김새에 비해 기묘하게 가벼운 무게. 틀림없이 진품이었다.

"그런데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알려주지 않았다. 학원으로 통하는 문을 봉인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마법진. 그 거대한 봉인 마술에 열쇠 구멍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틈새의 땅 각지에 퍼져있는 전송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마법진을 통과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휘석 열쇠였다.

"전송문을 써본 적이 있어?"

"비슷한 건 써본 것 같기도 하네요."

"좋아. 열쇠를 마법진에 접촉시키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마법진이 널 레아 루카리아의 정문으로 보내줄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하네요."

"마술이란 게 원래 그래."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날이 밝는대로 출발하기로 한 빛 바랜 자는 밤 늦게까지 토푸스와 담소를 나눴다. 리에니에 호수를 헤매면서 만난 이상한 개구리 닮은 인간들부터 휘석 브레스를 쏘는 드래곤까지, 토푸스였다면 해쳐나오지 못했을 여행담은 그의 가슴마저 뛰게 만들었다.

"스승님도 학원에 같이 가시겠습니까?

"정말 고맙지만 그건 불가능해. 휘석 열쇠는 사용자를 기억하거든. 네가 문을 열어도 나는 통과할 수 없지."

안타깝다는 듯 빛 바랜 자가 탄식했다.

"대신 또 다른 휘석 열쇠를 구한다면 나에게 주지 않겠어?"

"학원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보겠습니다."

배려심 넘치는 말에 토푸스도 깊이 감사하며 밤이 깊어갔다.

...

고요한 새벽, 토푸스는 조용히 눈을 떴다. 변함없는 별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먼 옛날에는 별이 하늘을 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점성술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며 운명을 점쳤던 시절이 있었다. 점성술사는 시간이 지나 별의 마술사가 되었고, 점성술은 쇠퇴하였으나 별을 탐구하는 휘석 마술은 계승되었다.

'레아 루카리아...'

토푸스의 마음의 고향. 무슨 수를 써서든 돌아가고 싶은 장소. 어쩌면 휘석 열쇠가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운명일지도 몰랐다. 둔석이라는 운명의 속박을 깨고 하늘을 내달릴...

토푸스는 슬쩍 빛 바랜 자를 보았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숨소리,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가슴팍. 분명 깊이 잠들어있다. 그간 홀로 활동하느라 숙면하지 못한 탓인지, 토푸스가 곁에 있자 죽은 듯이 잠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몰래 열쇠를 가져가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토푸스가 몰래 자리를 떠나도 모를 것이다. 날이 밝아 빛 바랜 자가 쫓아오더라도 그는 이미 학원 안에 있을 것이다. 휘석 열쇠는 귀하디 귀한 물건. 두 번째 휘석 열쇠를 학원 밖에서 구할 확률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고, 봉인된 학원의 문은 그 자체로 철벽이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으리라.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마술을 인정해주고, 못난 자신을 스승이라 불러준 남자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빛 바랜 자가 간다 하더라도 두 번째 휘석 열쇠를 구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대로 변방 구석에서 천천히 썩어갈 운명이었던 자신이 다시 한 번 탐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바로 그 탐구를 하기 위해 학원에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일생일대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다.

토푸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에 스며드는 뱀처럼, 그의 손에 빛 바랜 자의 배낭에 천천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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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의 고향, 레아 루카리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는 수많은 서고 중에서도 인적 드문 서고. 사람 그림자가 은밀하게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혹시라도 다른 이에게 들킬 새라 조심스레 꽃발을 하며 걷는 남자의 이름은 토푸스였다.

토푸스는 어떻게 학원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
때는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스승님'

'오랜만에 보네.'

거친 모험을 거친 듯 빛 바랜 자의 갑옷은 크게 헤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길이 나올 듯한 눈동자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전에 봤을 때보다도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쪽지로 부탁하신 책은 결국 못 찾았습니다.'

'그런가... 그럴 수 있지.'

쪽지로 책 제목을 적어 배낭에 넣어놨다. 혹여 토푸스 자신이 학원에 못 들어가더라도 책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절반의 성공이었으니. 아침 일찍 빛 바랜 자가 떠날 것임을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빛 바랜 자는 대신이라는 듯 등짐에서 뭔가를 꺼내보였다. 작은 열쇠. 이전에 그가 보여줬던 열쇠하고는 살짝 다른 생김새의 휘석 열쇠였다.

열쇠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빛 바랜 자, 정말로 두 번째 열쇠를 구해왔구나. 믿고 있었다고... 젠장!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열쇠를 받아들어 굳게움켜쥔다. 이것으로 그는 다시 학원에 돌아갈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휘석 마술을, 별을 탐구할 수 있다.

'괜찮다면, 언젠가 학원에 찾아와줘. 그때는 나도 조금은 좋은 스승이 되어있을지도 몰라.'

빛 바랜 자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곤 케일리드 방향으로 향했다. 좋은 스승... 하나뿐인 제자에게 토푸스가 전수해줄 마술은 당연히 그것이었다. 이제 학원에 돌아가서 책만 찾는다면 완성시킬 수 있는 '역장 마술 이론'. 마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토푸스는 서둘러 학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그 학원의 수많은 서고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쓸쓸한 곳. 등불 마술의 빛에 기대어 토푸스는 책을 찾아나갔다. 분명 이 곳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이론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마지막 조각...

스스로 재능이 없음을 알기에 남들보다 몇 배를 노력했다. 그래서 남들이 관심조차 주지 않는 책까지 읽어보기를 수천 권. 기억의 편린이, 그의 본능이 그에게 알려준다. 이 근처에 그가 찾고 있는 책이 있노라고.

...

없었다.
벌써 수백 권, 이 잡듯이 서고를 뒤졌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엉망진창이긴 했다. 설마 누군가 먼저 도착해 서고를 뒤져본 것일까? 그래서 그 책을 가져간 것인가?

당혹감 속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다급해질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법.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마음을 진성시킨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서고 밖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책 더미가.

그리고 책 더미 사이로 운명처럼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책이. 낡디 낡은 가죽 표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제목. 분명 토푸스가 찾던 책이었다.

'왜 책이 저기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책을 찾았으니 다행이었다. 토푸스는 천천히 책에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토푸스가 찾아 헤매던 마지막 조각. 이제 곧 완성될 자신의 이론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피융-
날카로운 파공음이 생각을 찢어놓는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에 온 몸이 곤두선다. 죽음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가 그를 사로잡는다. 급히 눈동자를 굴려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두번째 활시위를 당긴 인형 병사가 보인다.

"윽!"

급하게 바닥에 엎드려 화살을 피한다. 인형 병사는 마술사들의 종복이자 레아 루카리아의 경비. 외부인에게 무자비한 화살을 퍼부어 쫒아내는 불침의 병사다.

'외부인...'

아픈 울림이다.
하지만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화살이 날아온다.

핏-
화살이 스쳐지나가며 뺨에서 붉은 핏물이 조금 베어나온다. 조준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것은 시간문제.

책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지금이라면 아직 서고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책을 회수할 기회는 앞으로도 오지 않겠지. 경보가 발생했으니 인형 병사는 점점 더 모여들 것이다.

한다면 기회는 지금뿐.

이를 악 물고 다리를 박찬다.
온 힘을 다해 팔을 뻗는다.

네 번째 화살이 시위를 떠난다.

-----

푸른 로브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상처를 막고자 움켜쥔 손가락 사이사이로 생명이 빠져나간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눈앞이 흐려지면서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자신의 자리에 도착한 토푸스는 먼지 쌓인 책상 위를 쓸어냈다. 레아 루카리아의 외지고 어두운 서고, 그리고 그 서고에서조차 쫒겨난 것처럼 밖에 방치되다시피 배치된 그의 책걸상.
떠난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가. 낡고 먼지투성이인 책상이지만 반가움에 토푸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쓰던 양피지, 그가 공부하던 책... 지금까지 얼마나 그리워하고 또 기대해왔던가.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따위 지금은 사치였다.
토푸스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빠져나간 피만큼 창백해진 손가락 마디가, 붉게 물든 로브가 그에게 남은 시간을 말해줬다. 인형 병사가 쏘아낸 화살은 매우 안 좋은 위치에 명중한 모양이었다. 간신히 책을 가지고 도망치긴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었다.

'마지막까지 되는 일이 없구나.'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까지 도달했다. 남은 것은 이론의 완성뿐. 토푸스는 책을 펼치고 낡은 깃털펜을 집어들었다. 그가 놓쳤던 부분이, 그가 막혔던 부분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간다. 서둘러 스크롤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간다.

"윽..!"

순간 저릿한 통증과 함께 그의 손에서 펜이 떨어진다. 가볍디 가벼운 깃털펜이 천근만근 무거운 대검같다. 흘린 피의 무게만큼 기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한다.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일생 마지막 소원. 토푸스는 생각했다. 자신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학원에서 수양했다.
스스로 뛰쳐나갔다. 그럼에도 학원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둔석이었다. 그럼에도 스승이라 불러준 사내가 있었다.
...빛바랜 자 덕분에. 기적처럼 나타난 사내가 그를 일으켜 세웠고, 샛별처럼 오래된 목표에 길을 밝혀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죽기 전 마지막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대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황금나무여, 마리카여, 아니면 아무 신이라도 좋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순간 어떤 생각이 토푸스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는 룬조각을 꺼내들었다. 빛바랜 자에게 간단한 마술을 가르쳐주고 수업료로 받은 룬. 소중하게 아껴둔 그것이 폭발하듯 황금빛 섬광을 내뿜으며 부서지고 토푸스에게 흡수되었다. 아주 조금 기력이 회복된다. 간신히 펜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정도로 충분했다.

기다란 양피지 위에 깃털펜이 춤을 춘다. 그 잉크가 남기는 흔적은 밤하늘을 지나는 유성처럼,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처럼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낸다. 레아 루카리아의 마술은 별의 마술, 카리아 왕가의 마술은 달의 마술... 토푸스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별도 달도 아닌 새로운 지평을 열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또 다른 룬조각이 부서진다. 별의 등불을 가르쳐주고 받은 룬조각. 어두운 밤이나 지하에서 쓸 수 있겠다며 좋아하던 빛바랜 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는 모닥불 대신 쓸 정도로 능숙해셔 있었다.

다시 황금빛 섬광이 터져나온다. 휘석 돌팔매를 가르쳐주고 받은 룬조각. 급할 때 활을 대신해서 쓸 수 있겠다고 했었다. 토푸스는 훨씬 강력한 휘석 마술도 많다며 괜히 허세를 부려보기도 했다.

비틀-
순간 힘이 풀리며 몸이 기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보지만 이미 흐려질대로 흐려진 시야에는 자기 스스로 쓴 글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몇 줄, 단 몇 줄이면 완성할 수 있는데...!

그때 아직까지 쓰지 않은, 아주 작고 희미한 룬조각이 손에 잡힌다. 비록 그 빛은 미약하지만 심장이 뛰듯 맥동치는 것처럼 보였다. 토푸스가 빛바랜 자를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룬. 둘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깊은 밤에 대화를 나누고,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서로의 사명을 도우며 토푸스는 느꼈다. 별의 길이 둘의 운명을 이끌었음을. 둔석으로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을 그의 운명을 깨부쉈음을.

최후의 섬광이 빛났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이론의 빠진 부분을 완성해적는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 힘을 다한 손에서 깃털펜이 굴러떨어진다. 토푸스는 양피지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쥐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론이, 대업이 완수되었다. 혼자였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으리라. 이제는 여한이 없다. 아니, 다만 아쉬운 것은 자신의 제자가 걸어갈 길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일까.

토푸스는 레아 루카리아의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빛 한 점 들지 않는 칠흑의 하늘. 변함없는 부동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듯 수십, 수백의 별무리가 쏟아지며 하늘을 밝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라단을 쓰러뜨렸구나.'

누가 했는지도 알 것만 같았다. 그의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최고의 제자. 빛바랜 자는 역경을 딛고 별을 향하고 있었다.
슬며시, 토푸스의 입꼬리가 치켜올라갔다.

그리고 서고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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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인가...'

더 이상 입 밖으로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검에 몸을 지탱하고 있는 빛바랜 자는 초점 잃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물 속인양 허공을 유영하는 황금빛의 괴생명체.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끔찍하다. 놈은 찬란하게 빛나는 절망이자 황금빛 죽음이었다. 놈이 하늘로 쏘아올리는 무수한 금빛 창은 벌써 몇 번이고 그의 몸에 바람구멍을 뚫어놨으며, 놈이 날려보낸 금빛 구체는 마치 의지를 지닌양 그를 쫒아와 닿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어떤 방법을 써봐도 피할 수 없었다.

'기드온이 옳았나... 과연 신이라는 건가.'

성배병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쉴 시간 따위 주지 않으려는듯, 놈의 날개가 빛나며 하늘로 뭔가를 쏘아보냈다.

곧이어 그의 코 앞에서부터 금빛 창이 메섭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여러 번 본 공격. 그러나 파훼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캉-!
자세를 낮추고 굳게 다잡은 방패에 창이 충돌한다. 마치 트롤의 망치가 때린듯한 충격이 내장까지 파고들지만 방패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막아도 막은 것이 아니다. 금빛 창은 곧 신성력의 결정체. 방패를 들고 있는 손이 신성력에 의해 타들어간다.

"크으윽-!"

격통에 자세가 무너진다. 동시에 방패가 열린 틈으로 수 발의 금빛 창이 들어와 다리를 관통한다.

움직일 수 없다.

'죽음'

두 글자가 그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자 짐승의 울음소리가 광활한 세계를 울렸다. 아마도 승리의 포효. 그리고 처형을 알리는 선고.

찬란한 빛의 짐승의 손에 모여든다. 모이고 또 모여서,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그것은 신성력의 덩어리 그 이상의 것이 된다. 스치기만 해도 신성력에 의해 불타오르는 궁극의 살상무기. 게다가 덩어리에서 넘실대며 나오는 극히 일부인 신성력 불꽃조차 생명을 불태우기에 충분하다.

방어도, 회피도 불능.

그림자마저 태우며 절망이 엄습할 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토푸스.
그의 작은 스승.
더 높은 경지에 이르고자 레아 루카리아 학원으로 돌아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둔듯 했다. '둔석'이라 불렸던 토푸스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생을 마감했는가?

아니, 그는 분명 완성했다!
잠들 듯 눈을 감은 그의 손에는 한 뭉치의 스크롤이 소중하게 감춰져 있었다. 토푸스와, 빛 바랜 자의 이름이 새겨진 스크롤이.

토푸스가 완성한 것은 방어 마술. 이론적으로는 마술로 역장을 생성해 어떤 힘조차 비틀어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 무궁무진한 잠재력에 빛 바랜 자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처음 마술을 시전해봤을 때 그는 생각했다.

'이걸 어디에 쓰지?'

방어를 위한 마술이야 이미 몇 개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적의 마술을 부수고 그 힘을 휘검으로 역전개하거나,
예를 들면 깊은 암흑을 만들어 마술을 끌어당기거나.

비슷한 용도의 마술이 있으니 '새로운' 마술이라고 해도 특별한 점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토푸스 최후의 유작은 빛 바랜 자의 머리 속에서조차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지혜는 번뜩이는 법이다.

빛 바랜 자는 허리춤에서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낡고 때 탄 지팡이. 토푸스의 품에서 회수한 그의 유품. 높게 치켜든 지팡이에 심상치 않은 마력이 집중되었다.

'당신이 진실로 옳았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스승님!'

황금빛 태양이 세상을 불태우는 순간에 아주, 아주 미약한 청록빛 물결이 작게나마 빛을 발하며 퍼져나간다.
비교조차 되지 않는, 초라하기까지 한 크기. 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하늘에서조차 색을 잃지 않고 빛나는 별빛처럼 빛 바랜 자는 고고하게 서있었다.

황금빛 광채는 역장에 닿는 순간 그 표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 빗겨나갔다. 분명 어떤 힘조차, 심지어는 신의 힘조차 비틀어버린다.

토푸스의 마지막 이론, 신의 앞에 증명되다.

크르릉-
당황스러워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마주하며 빛 바랜 자는 다시 한 번 일어선다.
그의 눈에는 이제 절망이 아닌 희망이 타오른다.

부서진 둔석 안에는, 분명 청록빛 보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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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완성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