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가 참여한다는 점에서 게임이 결과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정적이라는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과정성은 적절히 실천되지 않거나 과소평가 되고 있음
학습 단계(튜토리얼 이상으로)와 레벨디자인을 체스를 배우면서 행마법을 익히는 수준으로 여기는건 게임이 다른 스포츠나 보드 게임이 아니라 '디지털' 게임임을 간과하는 것임
게임성을 내세워 다른 예술 미디어, 특히 영화와의 독립성을 위해 시스템과 상호작용이라는 요소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게이머들 (특히 고전 rpg팬들중에) 사이에선 특히 그런 경향이 있는듯함
여기서 중요한건 이 게임을 컴퓨터를 통해서 구현한다는 것인데, 그건 입출력 사이의 계산을 우리가 하는게 아니라 컴퓨터가 알아서 처리한다는 뜻임
그런데 여기서 처리 과정이 숨겨짐. 체스 말 옮길 때처럼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게 아니라 그냥 이거누르면 이거 나간다 정도로 기능만 알 수 있는거임
이걸 '블랙박스'라고 부르는데 당연히 우리가 아는 자동차에 달려있는 그건 아니고 내용물을 모른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씀. 컴퓨터 말고도 공학이나 과학쪽에서도 쓰는 말인거같음
아무튼 이 블랙박스가 중요한건 게임 시스템을 직접 알 수 없고, 소스코드 직접 열어본다 해도 실질적으로 플레이할 때 (예시로 든 체스의 룰을 아는 것과 다르게) 그 모든걸 온전히 이해하고 판단한다는건 불가능함.
사실 컴퓨터가 나서서 대신 해주겠다는 일인데 굳이 직접 할 필요도 없긴하지
이런 성질은 단지 결함으로 남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동안 항상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거임
기존 보드게임에서 예측 불가능성은 같이 하는 다른 플레이어나 랜덤성(주사위로 상징되는)에 있지만 디지털겜은 거기에 더해 본성적인 미스터리를 갖고있음
알아내고 찾는게 중요한 어드벤처 장르는 사실상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 봐야겠지
그게 게임이 시스템이나 구조 자체가 아니라 직접 플레이하는 과정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이유가 되는거임
로그라이크나 이머시브심 처음 할 때의 당혹스러움도 룰을 먼저 알아야 제대로 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듯함
그 시스템만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 경험과정에서 본 걸로 '어떻게 시스템을 해석하는지'의 문제는 소거됨
적어도 다크소울은 이 점을 잘 활용하는 게임으로 보임. 북방의 수용소가 튜토리얼 설계면에서 인상적인 구역이지만
그냥 조작법을 알려주는것만이 아니라 게임 전반적으로 이런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알아내야할 것들이 있음
그걸 플레이어가 발견해야 되는 거임. 그 과정이 디지털게임에서만 가능한 '탐험'도 되는겠지
플레이어 입장에선 다소 수동적인 장면 연출이나 아이템 설명같은 특유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이런 개념과 영합하는 것임
미야자키가 좋아하는 ico 개발자의 딴겜 '라스트 가디언'은 나는 안해봐서 걍 저 gmtk 영상만 보고 말하는거긴한데
저기 나오는 트리코라는 묘하게 생긴 동물은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이고, 그 점을 연출로 활용함
그 핵심은 '어느정도 예측할 순 있지만 완전히 알 수 없는 작동방식' 때문일 거임. 실제 동물들이 그런 것처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컴퓨터의 기계성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단지 추상적으로 그려져서 상상되는게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으로 드러날 수 있음
처음에 게임적 숭고(ludic sublime)라는 개념은 '엘더스크롤 오블리비언' 풍경을 두고 한 말인데
오픈월드는 풍경이 그냥 배경이 아니라 실제로 전부 시뮬레이팅된다는 점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게임 세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주고 그 전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숭고하다'고 함
오픈월드 겜에선 이게 '풍경'으로 시각적으로 드러나지만 다른게임들도 결국 세계 전체를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함
여기서 숭고는 칸트 미학개념의 숭고를 따름
그런데 '모른다는 점'에서 이런 숭고함이 드는 것이라서 게임을 알아갈 수록 점점 약해지는건 있음
다크소울도 흑기사 글레이브 빠르게 얻는 루트로 가면서 효율 따지며 스피드런을 할 수 있는 식으로.
점점 질서가 잡히면 알아가는 느낌은 줄어들고 전체적인 공간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거임
이렇게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일상적인 놀이'가 되는 변화는 다크소울1 후반부 맵 자체의 구성에도 있다고 말함
후반 지역들은 탐험해야할 세계라기보단 플레이를 하는 공간으로, 서비스로서 존재한다는 관점임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숭고함은 남아있는 거라 봄
전에 다크소울 참여한 개발자가 방송하면서 이 상자에는 왜 인간성이 들어있고 재는 왜 저러고있고 이런거 하나하나 설명해주던거나
고전게임 이스터에그가 십몇년 지나고나서야 발견된다든가 하는 경우가 일단 그렇겠지
꼭 그런거 아니더라도 우리가 게임에서 보는 것들을 그대로 코드로 치환할 수 없는한 웬만큼 질서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상상적인 것일 뿐임
그러니까 완전히 아는게 불가능하다는 본질이 중요함
이 숭고함 때문에 게임은 시스템 자체로 환원할 수 없고 과정적이라는 본질을 가짐
다크소울이 다른 겜에 없는 숭고함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고 보는게 맞는듯함
리마스터 나온 시점에 다크소울은 이미 웬만큼 다 알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있음
당시에 쓰여진 글(마지막 출처)에서는 이런 비유를 함.
"다크소울이라는 게임은 2011년 출시된 이후로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로드란에 돌아오는 매 순간은 망자화를 벗어나고 의미를 찾아 새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원문들
http://gamestudies.org/1103/articles/martin
http://gamestudies.org/1501/articles/vella
http://gamestudies.org/2004/articles/welsh
세 줄 요약
1. 디지털게임은 (다른 게임들과 다르게) 시스템을 완전히 알 수 없다
2. 그 모르는 부분은 플레이하면서 과정적으로 유추할 수만 있다
3. 그 과정에서 게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게임적 숭고'다
내가 글을 제대로 이해한건지 모르겠는데 게임적 "숭고함"이라는게 우리가 닼소 1을 처음 접했을 때 닼소의 세계를 컨텐츠이자 서비스로 바라보기보다는 비밀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로 느끼고 거기서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을 말하는거임?
비슷한거같음. 처음부터 게임판이기 이전에 거대한 세계로 먼저 다가온다는 말이지. 칸트 숭고 개념이 나도 설명만 봤는데 그 전체가 상상의 범주를 벗어난 크기를 볼 때 드는 느낌이라고 함
ㅇㅎ 이해됐음 ㄱㅅㄱㅅ 이런 요소가 누군가의 인생겜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가치인거 같음 손상되기도 쉽지만
재밌게 잘 읽음. 칸트의 숭고 개념은 보통 미적인 것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설명을 많이 함. 미적인 것이 형식적인 것(동시에 형식적이기 때문에 지적으로 이해가능한 것. 미학에서 형식=정신적인 것으로 취급됨)의 범주라면 숭고는 몰형식적 형식으로, 형식적인 틀 안에 가둘 수 없는데 동시에 인간은 자기 형식의 한계 내에서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런
모호한 범주에 있는 개념으로 이해됨. 미와 숭고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체스 게임에서 행보를 배우는 건 형식의 문제지만, 게임의 메커니즘은 플레이어를 압도하는 미지를 선사하고, 그 미지는 미와는 다르게 순수하게 즐겁다기보다는 동시에 공포를 느끼게 함(다크 소울을 처음 시작하면 느낄 수 있는 공포들)
하지만 게임을 진행할수록 이런 '게임적 숭고'에서 오는 공포와 경외는 약화되고, 미지였던 부분들은 점차 이해가능한 형식적인 것으로 격하된다고 봄. 다크 소울의 1회차가 주는 경험이 숭고라면 2회차와 그 이상의 반복 플레이가 주는 경험은 점점 더 형식적인 것에 가까워지는듯
특히 게임 개발자라면 게임 전체를 단순히 스크립트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그런 점에서 칸트가 처음 숭고의 대상으로 설정했던 거대한 자연 같은 존재와는 좀 거리가 더 멀어지는듯. 게임은 어찌됐든 인공물이고 개발자라면 그 게임의 '블랙박스'를 더 잘 이해하는 편이니..
맞다 그리고 중간에 언급된 GMTK에서도 자주 다루던 주제인데, 민-맥싱(필요없는 스탯은 최대한 낮추고 강점은 최대한 강화하는 캐릭터 빌딩), 최적화, 효율 추구적 게이밍과 게임적 숭고 사이에서 오는 긴장 같은 것도 또 재밌는 주제라고 생각함. 다크 소울도 pvp를 하고 민맥싱, 최적화 빌딩 단계에 가면 또 게임 경험이 완전히 변하니까
완전 제대로 이해했네. 참고한 글 마지막 링크가 또 그 문제를 다룸. 커뮤니티와 멀티플레이어가 어떻게 게임에 숨겨진 정보를 노출시키고 보다 빨리 적응하도록 하는지..
GMTK 저사람꺼 영상 재밌더라 - dc App
게임은 그저 '룰이 존재하는 경기'일 뿐이고 그 룰의 내적 완성도만이 게임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다 라고 주장하는 한국 평론가 보면서 너무 극단적인거 아닌가? 게임이 그것뿐인가 싶었는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 그에 따른 탐험욕구의 만족 또한 디지털 컨텐츠로서 게임이 가져다줄 수 있는 독특한 감각이라고 봐야겠네
그래서 이번 스팀 여름세일때 무슨게임 삼
그래서 DLC 언제나옴?
좀 지나치게 소울 시리즈 올려치기 같노
숭고라는 단어때문에 올려치기라고 오해하는거 같은데 그런 의미가 아님
꼭 소울 시리즈라기보단 야숨이나 레데리같이 상호작용이 다양한 방대한 규모의 게임에도 적용되는 글인듯.
글과 댓글 모두 잘 읽었다
개추 - dc App
겜 1회차 할때 모험하던 맛이 너무 좋지 ㅋㅋ 회차 돌수록 그 맛이 사라지는건 어쩔수없지만 너무 아쉬움
개추
간접적 정보제공이 사용자 경험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논지 자체에는 매우 공감하는데, 프로그램 코드를 모르는 채로 플레이한다는 사실과 의도적 정보 통제로 유도되는 현실감 사이에는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함
구체적인 구조를 모를 뿐이지 결국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 자체는 다들 알고서 시작하는 걸텐데, 이건 책이 종이뭉치라는 사실이나 영화가 짜고치는 연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같음. 그럼에도 여전히 게임/책/영화를 즐긴다는 것도 똑같고
픽션에 몰입하기와는 무관하다는 뜻이라면 동의함. 숭고함 자체로 그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지 않겠지만 경험의 성질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는 생각함. 말한것처럼 게임을 하면서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상기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믿고자하는데, 매체의 특성을 잘 활용하는건 도움이 된다 정도로 말할 순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