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프롬문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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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자 성서) 카를라의 메차쿠차 점자 성서 강독
· (점자성서) 검은 달의 검
· (점자성서) 바위와 강철
· (점자성서) 그을린 호수 아래에서
· [퓰리처] (블본문학)이 앞 강적 있음, 그러므로 모으기 공격이 효과적
· (아시나 비전서) 그 땅에는 먼 훗날까지 오니가 살았다고 한다
· 점자성서)별의 세기의 밤은 길고도 길다
· "네펠리 루가 거대한 코코넛을 흔들며 유혹해왔다."
· (엘든문학)불의 거인이 청동 거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 특대문학) 프붕이와 특대무기
· 특대문학) 최고의 특대검
· 특대문학) 흑기사 형제 이야기
· 특대문학) 위대한 형제들
· 특대문학) 대장장이 안두래이의 일화
· 프롬문학) 거인과 난쟁이
· (프롬문학) 저주를 품은 거목
· 한 발 늦은 야다림의 코 문학
· (프롬문학) 야남의 성탄제
· (프롬 문학) 마야자키전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1/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2/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3/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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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로 문학] 아시나를 위하여 (2/3)
· [세키로 문학] 아시나를 위하여 (3/3 完)
· (프롬문학) 잔야에 늑대는 수라가 되었다
· (엘든문학) 별 내리는 밤(라단전)
· (엘든문학) 밤하늘에 빛나는 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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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빛의 하늘을 뒤로 하고 남자는 지친 몸을 욺기고 있었다. 그의 몸에 내리는 어두운 빛은 황혼의 시간에 내리는 노을인가, 아니면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불타고 있는 황금나무의 빛인 것인가.

"젠장... 귀 많은 녀석..."

빛바랜 자가 계단을 따라 힘겨운 걸음을 욺겼다. 아직 가시지 않은 붉은 부패의 내음, 모독의 시체 냄새, 갑옷 여기저기 눌러붙은 검붉은 피의 흔적. 거기에 불로 지져지고 얼어붙었다 녹은 흔적까지. 마치 지옥을 홀로 헤쳐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험한 꼴이 되어 있는 것일까.

짐승 사제 그랭, 아니 흑검 말레키스에게서 죽음의 룬을 찬탈한 빛바랜 자는 자신이 불태운 도읍 로데일로 돌아왔다. 거인의 불에 의해 타기 시작한 황금나무는 이제 그 기둥을 넘어 나뭇잎 하나하나까지 탐욕스러운 화염에 파먹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황금나무에서 쏟아져내린 회색의 재가 로데일을 화염과 잿가루에 묻어버렸다. 처참하게 파괴된 로데일을 보며 빛바랜 자도 말을 잃었다. 황혼의 태양빛 아래 드러난 로데일의 풍경은 세상의 끝과 다름 없었다. 아마 이곳에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도 모두 잿더미 속에 파묻혀버렸을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결말이 과연 이런거였던가? 이제는 그를 떠나버린 멜리나가 바라던 결말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러나 고뇌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의 곁에서 마음을 다잡아줄 멜리나도 이제는 없다. 남겨진 것은 멜리나가 남긴 사명... '엘데의 왕이 되어줘.', 그리고 빛바랜 자 스스로의 의지 뿐. 그래서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황금나무를 향해 잿더미의 언덕을 올랐다. 멜리나가 말했던 것이 옳다면 분명 왕좌를 막은 거절의 가시가 없어졌으리라.

그런데 친숙한 얼굴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온 지혜의 기드온 오프닐. 지금까지 원탁에서 빛바랜 자를 보조해주던 그가 배신했다. '여왕 마리카는 우리가 계속 발버둥 치는 것을 원한다.' 따위의 말을 하며. 이제와서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을 뿐더러, 빛바랜 자도 멈출 생각 따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기를 들고 기드온에게 맞섰다.
붉은 부패의 꽃이 만개하여 대지를 더럽히고
모독의 영혼이 날아올라 검붉은 원한을 흩뿌렸으며
흘러내린 더러운 피가 불타올랐으며
황금률의 성스러운 섬광이 태양처럼 떠오르고
하늘에서 만들어진 별빛이 떨어져내렸으며
검은 불꽃이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드온이 펼쳐내는 수없이 많은 마술과 기적은 현세에 지옥도를 강림시켰다. 전설적인 영웅으로 이름을 떨쳤던 전성기의 레날라라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주문의 폭격 속에서 빛바랜 자는 간신히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결판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마술과 기적이 피어올린 먼지 속에서 시야를 가린 빛바랜 자가 소환한 뼛가루... 기드온 오프닐에게 끝없는 증오와 복수심을 품고 있는 백금의 라티나가 신들린 듯한 활솜씨로 기드온에게 화살을 박아넣었다. 기드온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방벽 때문에 치명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 라티나에게 시선이 돌아간 그 사이에 빛바랜 자는 자신의 거대한 석제 망치를 내리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납작해져버린 기드온이 납작해진 투구 사이로 뭐라 짓껄였지만 무슨 말이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으리라.

마침내 일족의 숙원을 완수하고 복수까지 성공한 라티나는 빛바랜 자에게 엄지를 척 올리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지금, 빛바랜 자는 왕의 옥좌로 향하는 계단을 터벅터벅 올랐다. 대부분 주문은 피했지만 몇몇 주문은 그 자체로도 주변에 여파를 남긴다. 예컨데 썪은내를 풍기는 말레니아의 붉은 부패처럼...

"......"

빛바랜 자는 투덜거림을 멈추고 계단 끝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느껴졌다. 거대한 무언가가 왕좌에 있다고.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축복의 모르고트는 빛바랜 자의 손에 의해 무릎을 꿇었다. 흉조의 힘을 폭주시키면서까지 빛바랜 자에게 맞섰던 그가 다시 살아났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위압감은 무엇일까?
최강의 데미갓, 파쇄 전쟁 최강의 영웅이었던 별 부수는 라단 같은?
죽음의 룬을 품고, 한때 데미갓의 죽음이라 불렸던 흑검 말레키스 같은?
아니... 이 정도의 위압감은 용왕, 플라키두삭스에 버금가는 무게였다. 한 시대를 지배하고 만 백성을 호령했던 자가 품을 법한 패기. 단순한 강함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걸음 걸음마다 무거운 압박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석제 망치를 거머쥔 빛바랜 자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저곳에 있다. 신에게 다가가기 직전, 분명 그를 막아설 마지막 장벽이.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 계단을 올라간다.

불타는 황금나무와 흩날리는 회색빛 잿가루를 배경으로 백발 거구의 노인이 꿇어앉아 있었다. 몸통에 비해 극히 거대해보이는 머리의 크기. 아니, 그것은 노인의 머리가 아니었다. 거구의 노인 위에 또다른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딛고 올라타있었다. 그 아래의 백발 노인처럼 빛바랜 회백색 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 놀랍게도 반투명한 채 상체만 달랑 남아 있는 놈은 수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위에 버티고 서서 그 무시무시한 발톱과 송곳니를 과시했다.
노인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을 안고 있었다. 비쩍마른 그것을 안고 있는 노인의 눈에 슬픔과 후회, 한탄 등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품에 안겨있는 그것... 그것은 모르고트의 시신이었다. 한참을 꿇어앉아 있던 노인은 홀로 조용히 뇌까렸다.

-너무 늦었구나, 모르고트여.

많은 감정이 담긴 속삭임이 죽어버린 모르고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모든 것을 불사른 장작이 흩어지는 것처럼, 모르고트의 시신은 먼지처럼 부스러져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그를 왕좌에 옭아메고 있던 주박이 풀린 것일까. 모르고트를 떠나보낸 노인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 광경이 빛바랜 자의 눈에는 태산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거대했다. 그 불의 거인조차, 그 고룡들조차 그의 눈 앞에 있는 노인이 내뿜는 터무니없는 존재감에 비하면 작은 존재였다.

그 순간 노인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빛바랜 자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스톰빌의 연회장에 걸려있던 거대한 크기의 초상화. 그 초상화에는 백발 노인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든 거목 같은 양팔, 갑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강철 같은 근육, 자신의 완력으로 세상을 호령하겠다는 포부가 담긴 눈빛. 그 강렬한 모습이 빛바랜 자의 기억에 강렬하게 새겨졌다.
아니, 본 것 뿐만이 아니다.
그는 싸워봤다.
황금률의 축복으로 금빛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던 그의 환영과 싸웠다. 그때는 빛무리 때문에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노인의 환영임이 분명했다. 분명 강한 상대였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진짜'는 환영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

"잘 싸워냈다, 빛바랜 자여. 황금에 축복받지 못한 전사여."

"...!"

뜻밖의 치하에 빛바랜 자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간 알아주는 이 없었던 그의 투쟁을 인정해주는 자를 이곳에서야 만나다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노인은 빛바랜 자를 알고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하지만 적대감을 담아 불렀다.

"빛바랜 자여, 그대는 엘든 링을 찬탈하려 하는가. 분명, 그것은 여기에 있다."

"엘든 링을 수복하기 위한 거대한 룬을 가져왔다. 여왕 마리카의 유지에 따라 엘든 링을 수복하고 그것을 치켜드는 것이 나의 사명... 그렇기에 나는 엘든 링을 찬탈하리라."

"하지만 내가 돌아왔노라. 다시 그것과 대면하기 위해. 그대의 사명을 이루게 둘 수는 없는 바... 나의 이름은..."

빛바랜 자는 노인의 이름을 그제서야 기억해낸다. 과거, 분명 가장 강했던 인간이자 세상을 무릎 꿇린 최강의 전사. 그의 이름은...

"...고드프리, 첫 엘데의 왕이니라! 싸울 채비를 갖추거라, 빛바랜 자여!"

빛바랜 자가 자신의 거대한 석제 망치를 고쳐잡는 순간 고드프리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도끼를 투석기처럼 발사했다. 한쪽 날이 부서진 양날도끼가 서슬퍼린 빛을 반사하며 회전해 날아갔다.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도끼가 옥좌의 단단한 바닥을 박살냈다.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빛바랜 자의 거대한 망치가 도끼를 옆으로 쳐내 튕겨낸 것이다다. 그리고 도끼가 던져진 궤적을 따라온 고드프리가 순식간에 도끼를 잡아채고는 거세게 휘둘렀다.
거칠기 짝이 없는 공격에 대기가 갈갈이 찢기고 휘두르는 도끼날에 폭풍이 몰아친다. 기교 따위없이 오직 힘으로 공간을 지배한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공격. 스치는 순간 방패조차 토막낼 기세에 빛바랜 자는 급하게 몸을 숙였다.

"흐아압-!"

도끼가 허공을 가르자마자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고드프리가 다리를 들어올렸다. 척 보기에도 다리에 집중되고 있는 힘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이 빛바랜 자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며, 본능처럼 그는 위로 뛰어올랐다.

쿵-!
포탄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잿가루와 먼지가 구형으로 터져나간다. 충격파만으로도 피부가 울릴 정도의 위력. 거센 충격에 공명한 빛바랜 자의 심장이 터질듯이 뛴다.
그리고 곧바로 날아드는 착지 순간을 노린 내려찍기. 한 끝 차이로 도끼를 피한 빛바랜 자에게 한바퀴를 회전해 돌아온 도끼가 쇄도한다.
피하지 않는다.
거스르지 않는다.
양 팔로 굳게 잡은 석제 망치와 도끼가 충돌하는 순간, 빛바랜 자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는 오른발을 뒤로 한 발자국, 그리고 다시 왼발을 뒤로 한 발자국 이동하며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몸을 돌렸다.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에너지가 그의 몸을 통과하며 피해를 새긴다. 하지만 그가 회전하며 컨트롤하는 힘은 훌륭하게 양 팔과 그 망치에 응축되었다. 파괴적인 에너지를 담은 망치 머리가 빛바랜 자의 어깨를 타넘어, 공중으로 치솟는다.
고드프리의 힘을 흘리지 않고 자신의 힘까지 더해 내려찍는다.
훌륭한 가드 카운터 기술. 일반적인 공격보다 반 박자는 빠른 불의의 일격이지만, 고드프리도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힘과 힘이, 철과 바위가 부딪히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뿌려댄다. 무기끼리 격돌한 충격의 잔재가 사방으로 퍼지며 서로의 몸을 저릿하게 울린다. 그대로 떼지 않고 무기를 맞대어 힘을 겨룬다. 단순한 완력으로는 고드프리가 우세. 뒷발로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빛바랜 자의 팔이 부들거리며 힘의 차이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균형이 고드프리에게 넘어가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거인 부수기라, 훌륭하군! 그것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걸 막을 줄은 몰랐는데... 과연 엘데의 왕이라는건가."

대답과 동시에 살짝 힘을 빼 균형을 무너뜨린다. 고드프리의 괴력에 정면으로 맞선다면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기술로 승부를 본다.
손잡이를 짧게 바꿔잡고, 망치 머리를 앞세워 빠르게 창처럼 찌른다. 동작은 가볍지만 망치의 무게 때문에 충격은 무겁다. 망치에 밀린 고드프리가 잠깐 물러나는 틈을 타, 주머니에서 작고 뾰족한 물건을 꺼내 마력을 담아 바닥에 뿌린다.
흡사 구름을 달리는 번개처럼, 보랏빛 마력다발이 잿가루가 가득한 왕좌의 바닥을 잔뜩 뒤집어놓는다.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폭발해, 공간에 뒤틀림을 만들더니 고드프리의 균형을 흔들었다. 그러나 조잡한 간이 마술 도구 정도로는 암벽 같은 고드프리의 두 다리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대신 폭발과 함께 발생한 대량의 먼지와 잿가루가 두꺼운 먼지처럼 그의 주변을 채워 시야를 가린다.

"쯧, 잔재주를..."

고드프리는 자세를 약간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시야를 가리고 습격이라, 하찮은 암살자들이나 쓸 법한 방법 아닌가. 그러나 이 정도의 위기야 그의 재위 기간에 수도 없이 발생했던 일, 그는 당황하지 않고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바스락.
돌조각을 밟는 미세한 소리.
그것도 상당히 인위적인, 숨길 생각 따위 없는, 들으라는 듯 내는 발소리.
뻔했다. 너무나도 뻔하고 뻔하다.
일부러 소리를 내고 그쪽으로 경계라 쏠린 틈을 타 빈틈을 노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백전노장인 고드프리에게 그런 얕은 수가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예상대로, 먼지구름 속에서 뭔가 튀어나온다. 필시 저것은 속이기 위한 가짜 공격.
진짜는 바로 그의 뒤에...!

떠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고드프리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불의의 일격. 속임수가 아닌 정면서 갑자기 튀어나와 고드프리의 몸통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크허억!"

생각 이상의 충격. 빛바랜 자가 양손으로 굳게 잡은 '거인 부수기'에 빛무리가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고드프리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빛바랜 자의 실력은 소문 이상이었다. 수많은 병사를, 데미갓을, 고룡을 물리친 전사다웠다.
그런 고드프리를 보며 지금까지 그의 어깨에 영체 상태로 메달려있던 세로시가 앞으로 나섰다. 자신의 섬기는 왕을 위해, 그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짐승 제상, 세로시가 전면에 나선다!

백발이 되어버린 갈기털, 상처로 가득한 가죽, 앞이 보이는지 의심스러운 빛을 잃은 눈동자. 하지만 한때 짐승들의 왕이었던 자답게 무시무시하게 뻗어나온 발톱과 송곳니는 적을 찢어발기기에 충분했다. 고드프리와는 또 다른 살기를 풀어놓으면서 세로시는 앞발을 땅에 딛었다. 내딛는 발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중압감이 뻗어져나와 공기를 지배한다.

'이번엔 짐승인가.'

빛바랜 자가 거대 망치를 내려놓자 쿵-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그리고는 방패를 앞세우고 전투 태세를 다잡았다. 틈새의 땅 곳곳을 누비며 거대한 짐승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잡아왔다. 그들 모두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거대한 체구와 그 몸에서 비롯되는 강력한 힘, 끝이 보이지 않는 체력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 하지만 그 모든 짐승도 빛바랜 자에게 사냥당했다. 어려운 상대일터였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또 다시 쓰러뜨릴 뿐.

앞으로 나서는 세로시를 쓰다듬으려는듯 고드프리가 왼손을 올렸다.
크르릉-
왜 그러냐는듯한 목울림. 다음 순간 피분수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른팔로는 세로시의 앞발을 붙잡고, 왼팔로는 세로시의 턱을 비틀어 뽑아낸다. 가죽이 찢어지고 근육이 끊어지며 피가 강처럼 흐른다.

"지금까지 고마웠다, 세로시."

맨손으로 생물을, 그것도 자신의 최측근을 찢어죽인다는 극히 잔혹한 장면에 빛바랜 자도 오금이 저려왔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도 잠시, 세로시의 눈동자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지며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의 피를 잔뜩 뒤집어 쓴 고드프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칠갑된 얼굴에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 불타고 있는 황금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래, 황금 나무였다.

어느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너무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여신의 부군이라는 역할, 엘데의 왕이라는 직책, 왕가의 수장으로써의 이름...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명예, 그리움, 복수심, 책임감...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거대한 도끼를 내려놓는다.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던진다. 오랜 친구이자 신하를 떠나보낸다.
왕의 이름을 버린다.

"으어어어어어-!!!"

억눌린 감정을, 짐을 포효와 함께 토해낸다. 그 거대한 포효에 공기마저 요동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 그에게 남은 것은 '긍지'였다.
그 옛날, 황무지의 전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 단 하나였다.

전사 '호라 루'가 다른 전사를 바라본다.
이거면 충분했다.

"나는 호라 루! 전사이니라!"

엘데의 왕, 고드프리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전사, 호라 루였다.
외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기 위한 전투? 아니다.
아들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한 싸움? 아니다.
전사끼리 서로의 힘을 비교해보는 결투다.

호라 루는 양팔을 넓게 펼친 채 자세를 낮췄다. 바닥에 닿을 듯, 점점 더 내려간 그 모습은 흡사 사족보행의 짐승에 가깝다.
누가 보아도 돌격하겠다는 의도. 빛바랜 자는 방패를 들었다. 돌진해오는 순간 방패로 쳐낸다, 혹은 흘린다.
잔뜩 굽혀진 호라 루의 허벅지가 터질듯 수축하며 바닥을 찼다. 튼튼하기 그지없는 돌바닥이 부서지며 호라 루의 발자국이 새겨진다. 소리를 놓고 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빛바랜 자의 코앞까지 들이닥친다. 하지만 빛바랜 자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덮쳐오는 두 손아귀에 방패를 들이민다.

"?!"

분명 방패로 후려쳐 튕겨낼 의도였건만 방패가 움직이질 않았다. 호라 루의 커다란 손아귀가 방패의 양 끝을 붙잡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가 빛바랜 자의 귀를 때렸다.

우지지직-
강철로 만든 방패가 호라 루의 손에 의해 찢어지고 있었다. 방패를 고정하는 나사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비틀리고 있었다. 방패를 이루고 있는 강철판과 가죽이 늘어지더니 힘을 버티지 못하고 쭉 찢어진다.

'방패라는 건 찢어질 수 있는 물건이었나?'

예를 들면 도끼로 찍어 부순다.
예를 들면 창으로 찔러 가른다.
예를 들면 탄으로 쏘아 뚫는다.

...같은 상황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방패를 종이마냥 손으로 잡아 찢는다는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벌써 절반 가까이 찢어지고 있는 방패를 급히 벗고 뒤로 물러난다. 곧바로 호라 루가 달려들어 손을 휘두른다. 주먹이 아니었다. 마치 사자의 발톱처럼 손가락을 굽힌 채 할퀴듯이 내려친다.

으지직-
급하게 가드한 팔목 보호대가 파내진다. 마치 버터를 숟가락으로 퍼내듯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금속이 떨어져나간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를 때도 무시무시했지만, 지금은 순수한 힘 그 자체. 경이적인 힘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빛바랜 자도 수없이 많은 역경을 거쳐온 역전의 용사다. 영거리에 가까울 정도로 맞붙은 상황. 날카롭게 가다듬은 찌르기가 공간을 찢고 호라 루에게 쇄도한다.

"흐으읍!"

힘차게 숨을 들이마시는 기합소리. 호라 루의 팔근육에 굵은 혈관이 꿈틀거리더니 근육이 부풀어오른다. 그리고 날아드는 검을 잡아챘다.
...거목 같은 전완근과, 바위 같은 이두로. 근육과 근육 사이로 검을 붙잡는다는 어이없는 발상.
빛바랜 자는 당황하며 검을 빼내려 했지만 마치 압착기에 끼인듯, 그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잠깐의 틈에 호라 루가 빛바랜 자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챙그랑-
그 충격에 검이 바닥에 떨어진다. 목을 조르고 있는 손을 풀어보려 저항해보지만 무시무시한 손아귀 힘이 풀리지 않는다. 다음 순간, 빛바랜 자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호라 루가 한 팔만으로 그를 던져버린 것이다. '던진다'보다도 '발사했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광경.

'착지... 낙법을...!'

엘데의 왕좌가 저 멀리 작게 보인다. 얼마나 높이까지 날려보내진걸까. 어떻게 착지해야할지 고민하는 그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호라 루. 야만전사의 왕은 빛바랜 자를 하늘로 던지고선 도약해 그를 따라잡은 것이다.
공중에서 어설프게 방어자세를 취해보는 빛바랜 자의 허리를 양손으로 낚아채곤 땅을 향해 매치듯이 내리꽂는다. 지면이 다가오는 광경에 몸부림치는 빛바랜 자의 고막을 호라 루의 고함소리가 때린다.

"파워-밤-!!!"

콰아아앙-!
인간의 몸을 지면에 내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렬한 소리. 마치 투석기로 쏘아낸 바위가 꽂힌듯 왕좌의 바닥이 깊게 파이며 먼지가 일었다. 낙하의 충격에 빛바랜 자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구덩이에 처박혀있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강렬한 충격. 쪼그라든 폐는 공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르는 핏물이 입 속에서 끓어오른다. 충격이 뇌를 흔든 것인지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충실한 본능은 스스로를 일으켜낸다.
투쟁 본능보다도 더 기저에 존재하는 생존 본능. 바로 그것이,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직감에 그의 몸을 세웠다.

혼이 반쯤 빠져나갔지만 빛바랜 자는 허리를 깊게 숙이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다. 여전히 시야가 일렁이며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감각으로 호라 루의 움직임을 쫒는다.

피부에 닿아 부서지는 공기의 흐름...
그의 몸이 짙게 베어있는 세로시의 피냄새...
황금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 속에서 들리는 파공음...
마지막으로, 죽음을 넘으며 단련된 그의 날카로운직감...

'지금이다...!'

호라 루의 오른쪽 주먹이 빛바랜 자의 투구를 깨부술 기세로 내질러진다.
맞붙지 않는다. 거스르지 않고 주먹이 오는 속도에 맞춰 고개를 돌린다.
앞으로 쏠려있는 호라 루의 무게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양손으로 그의 손목과 팔꿈치를 붙잡고 당긴다.
자기 힘을 못 이기고 균형이 무너지는 그의 다리를 걷어올린다.

마술처럼 호라 루의 커다란 덩치가 하늘을 한 바퀴 돌아 등으로 낙하한다.
넘치는 괴력을 역이용한 그림같은 매치기에 호라 루조차 대응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멈추지 않고 그의 팔을 축으로 삼아 회전해 팔꿈치 관절에 다리를 끼우고 몸쪽로 당긴다.
이대로 비틀어 꺾는...

쾅!
충격음과 함께 빛바랜 자가 바닥을 굴렀다. 그대로 부러뜨릴 요량이었는데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빛바랜 자가 붙들고 있던 바로 그 팔을 내젓는 것만으로 튕겨나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공방으로 시간을 끈 덕에 시야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 번 상체를 낮추고 손에 힘을 뺀다. 방패는 망가졌고 그의 장검은 멀리 떨어졌다.
무기는 잃었으나 무술은 잃을 수 없다. 빛바랜 자가 선택한 수는 '격투'였다.

몸을 일으킨 호라 루가 달려들기 직전, 조금 더 빠르게 빛바랜 자의 왼손 주먹이 날아든다.
가볍게 던지는 잽. 둘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체격 차. 위력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화살처럼 쏘아진 잽은 공간을 잡아먹고 호흡을 죽인다.

...그럼에도 호라 루는 멈추지 않았다. 내질러진 잽의 공격력은 이미 읽히고 있었다. 가벼운 타격이야 수천 번을 맞아도 끄떡조차 하지 않는다. 호라 루는 거인과 맞붙던 전사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을 맞잡고 해머를 찍듯 내려친다.

여기까지가 빛바랜 자가 읽은 수 싸움.
해머의 간격 안으로 들어간 빛바랜 자가 오른팔꿈치로 호라 루의 턱을 후려친다.
온 몸의 체중을 실은 카운터 엘보. 팔꿈치의 타격 면적은 주먹보다도 좁다. 따라서 충격은 배증.
호라 루조차 급소에 정확하게 꽂힌 타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고개가 확 돌아가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수염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당긴다. 이대로 바닥에 꽂을 것인가?
아니다, 그것으론 한참 부족할 터.
빛바랜 자는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팔꿈치를 내리꽂았다.
목표는 호라 루의 뒷목 경추.
의식을 끊어놓기에 충분한 일격!

우득-
감각이 있었다. 빛바랜 자의 체중까지 더해, 호라 루는 얼굴로 지면에 격돌했다.

'해치웠나?'

움찔.
아닌듯 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는 호라 루의 머리통에 스탬핑을 갈긴다.

"...!"

"얕보였나보구나, 빛바랜 자여."

거대한 손이 발을 받아냈다. 발을 밀어내는 힘에 빛바랜 자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바닥에 안착한다. 호라 루는 그를 쫓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듯, 또는 원시의 신에게 기도하는 듯 크게 팔을 벌리고 위를 바라보았다.
대기가 떨리고 땅이 흔들린다. 그럴 리 없겠지만 공간 자체가 호라 루에게 빨려들어가는 듯 보인다. 순수하고 강대한 힘이 그의 두 팔에 압축되고 또 압축된다.
이윽고 그의 두 팔이 벼락처럼 지면을 강타한 순간-

"쿨럭!"

빛바랜 자가 갑작스레 각혈하며 무릎을 꿇었다. 검붉은 혈액이 쏟아지며 핏줄기가 옆으로 흘러나갔다. 땅이 기울어진 것처럼.
아니, 땅이 기울었다. 엘데의 왕좌는 황금나무의 가장 튼튼한 가지를 반석삼아 건설된 성소.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황금나무의 가지가 내려앉고 왕좌까지 무너지고 있었다. 그 강인한 완력으로 만들어낸 충격은 진동만으로 빛바랜 자에게 내상을 입히기 충분했다.

다시 한 번 호라 루의 팔이 치켜올라간다.
죽음의 직감. 간신히 바닥을 차고 뛰어오른 직후 아까와 같은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 충격에 왕좌가 더욱 기운다.

여러번 충격이 가해진 황금나무의 가지가 이제는 왕좌의 무게를 못 이기고 짓눌려 분쇄되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팔을 거두고 천천히 일어나는 호라 루의 몸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기세는 분화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낮은 돌격 자세를 취하고 땅을 박찬다.

'아까보다 더 빨라졌다?'

빛바랜 자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들어오는 공격에 타이밍을 놓친다. 내질러오는 주먹을 급하게 가드해본다.

으직-
팔로 막았는대도 불구하고 심대한 충격이 빛바랜 자의 온 몸을 뒤흔든다. 뼈에 금이 간듯 저릿한 통증이 신경을 찌른다. 충격과 고통에 휘청하는 사이 빛바랜 자의 오른쪽에서 커다란 손바닥이 들어온다. 그 위력은 강철조차 파내는 수준.
간신히 몸을 날려보지만 흉갑을 찢고 들어온 손가락이 가슴에 긴 상처를 파놓는다. 거기에 후속타로 들어오는 공격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근육이 갈라져 피가 날린다.

빛바랜 자는 뒤로 한 바퀴 굴러 거리를 벌렸다. 곧바로 호라 루의 피범벅이 된 손가락이 추격해들어온다.
막으려 들지 않고 한 발자국 더 깊이 내딛는다. 팔의 간격 안에서 오른팔꿈치로 호라 루의 손목을 옆으로 찍어 막아낸다. 곧바로 공세로 전환, 왼손 중지의 마디를 세워 주먹을 쥔다.

타당!
한 번인듯 들리는 두 번의 파공음이 공기를 찢는다. 고속으로 내질러진 타격이 호라 루의 미간과 인중에 정확히 명중, 강렬한 충격이 뼈를 관통해 전해진다. 호라 루의 체구와 그 무지막지한 근육량은 그야말로 근육의 성채. 하지만 급소에 때려박는 공격은 체급을 분문하고 통한다.

그럼에도 호라 루는 멈출 생각이 없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전사로써의 긍지가 그의 몸을 움직인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 빛바랜 자의 손을 움켜줬다. 초근접 거리에서 깍지를 낀듯한 모습. 발을 묶어놓고 영거리에서 육체의 힘으로 쓰러뜨린다.
빛바랜 자가 손을 풀어보려 했지만 그의 악력으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당황한 빛바랜 자의 눈 앞에 커다란 주먹이 날아든다.

뻐억-!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커다란 둔기로 가죽 포대를 치는듯한, 혹은 도끼로 장작을 패는듯한 소리. 공중에 피와 함께 깨진 어금니가 날렸다. 순간 빛바랜 자의 몸이 크게 휘청이지만 잡혀있는 팔 때문에 쓰러지지 못한다. 덕분에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 균형을 회복하고 다시 굳건히 선다. 그리고 다시 한 발 앞으로, 주먹을 쥐고, 온 몸의 힘을 짜내, 휘두른다.

빠악-!
호라 루의 고개가 높이 쳐들어진다. 빛바랜 자가 온 몸을 던져 꽂아낸, 턱에 가해진 어퍼컷.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를 쓰러뜨리기엔 부족하다.
벼락처럼 내던진 주먹이 빛바랜 자의 정수리를 강타한다.
다리가 풀려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휘청이는 틈을 호라 루는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목덜미를 잡아 채 억지로 일으켜세운다.

"이렇게 즐거운 투쟁은 왕이 된 이후 처음이구나. 감사를 담아, 단숨에 쳐부숴주마."

그러면서 팔을 높게 들어올린다.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뻗어올려진 주먹. 그것에는 분명 황금나무의 가지를 뭉개고, 왕좌를 가라앉혔던 힘이 깃들어있었다.
커다란 주먹이 한계까지 응축된 힘을 품고 운석처럼 빛바랜 자의 얼굴을 향한다.

"크핫!"

간신히 정신이 돌아온 빛바랜 자를 맞이해준 것은 그의 눈 앞까지 다가온 바위 같은 주먹. 맞으면 골통이 부서질 것이 확실하다. 직면한 죽음에 빛바랜 자는 순간 초인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자신의 목덜미를 붙들고 있던 호라 루의 손가락을, 양손으로 붙잡아 꺾는다. 순간 손아귀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몸을 숙인다. 머리 위로 폭풍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빛바랜 자가 급하게 뒤로 물러나자 호라 루는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더니,
오독-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 손으로 손가락을 잡아굽혀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 정도 부상은 부상 축에도 못 드는 것일까.

'체력에 끝이 없는건가.'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때리기도 많이 때렸다. 그럼에도 큰 피해가 없어 보이는 것은 빛바랜 자의 착각일까.

'...!'

아니, 분명 호라 루도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거친 육탄전 끝에 그의 강철 같은 육체도 지쳐가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둘 모두 끝임을 예감했다.
누가 되었든 마지막에 서있는 것은 단 한 명임을.
그리고 그 한 명은 바로 자신이 될 것임을.

빛바랜 자는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갑옷을 벗어던져버렸다. 갑옷은 제기능을 잃어 거추장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럴 바에야 맨 몸으로 맞서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었다. 호라 루와의 격전에 피와 땀에 절은 상반신이 드러난다. 치밀하게 뭉쳐 만들어낸 조각 같은 근육. 그리고 그 위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전투의 상흔. 불타오르는 심장의 박동에 온 몸의 근육이 맥동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거리를 재려는 낌새도 없이 서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주먹이 닿는 사거리에 둔 순간...
돌바닥에 발자국을 새기며 땅을 박찬 둘은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무시무시한 타격음과 함께 둘의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간다.
그리고 돌아간 고개가 채 제자리에 돌아오기도 전에, 두번째 주먹이 다시 한 번 서로의 틈을 매꾼다.
피와 함께 부러진 이빨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간다.

막고 때리면 늦는다.
피하고 치면 늦는다.
공격을 위해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둘은 서로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박아넣었다.

으직-
단단한 뼈에 부딪히며 빛바랜 자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끔찍한 통증이 신경을 내달리다 아드레날린의 품에 안겨 사라진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조차 모르고 빛바랜 자의 공격은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전에 없던 날카로움으로
전에 없던 무거움으로
전에 없던 빠름으로

주먹을 맞교환하던 것이
어느새 두 대에서 세 대로, 세 대에서 네 대로...
주먹을 날릴 때마다 가속하고 또 가속하며 이윽고 본인이 의식하기조차 전에 그의 주먹은 이미 호라 루에게 도달하기 시작했다.

싸우는 이유를 잊고,
싸움의 기술을 잊고,
마침내 싸우는 자신을 잊는다.
그 종국에 이르러 남는 것은 순수한 투.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적지만 착실하게 강철의 신체를 깎아내고 무너뜨린다.
빛바랜 자의 움직임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휘몰아치는 격류가, 노도의 폭풍이 되었다.

"으아아아아!!!"

엘데의 왕좌 위에 빛바랜 자의 고함성이 뻗어나간다.
내딛은 발끝에서 무릎으로, 골반으로, 등줄기를 지나 어깨로, 팔꿈치로, 손목으로, 마침내 주먹까지.
마지막 힘을 끌어모은 전력 정권 지르기.

...허공을 갈랐다.

맞추지 못했다...?

아니, 맞출 수 없었다!

허공을 가른 주먹 아래로 호라 루의 거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힘을 잃은 다리는 더 이상 그 육신을 지탱하지 못했고, 표적을 잃은 팔은 허공을 휘저었다.

방어 없는 난타전 끝에 마지막까지 대지에 다리를 붙이고 선 유일한 전사는,
빛바랜 자가 되었다.

스러지는 와중 호라 루의 시야에는 불타는 황금나무가 걸린다.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맞붙었음에도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1대1의 정면 싸움에서 패배해본 적이 얼마만일까.
하지만 후회 따위는 남지 않았다. 아니, 마지막으로 단 하나...

'마리카여...'

그의 여신을 마지막으로 보지 못한다는 점만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것이, 이것이 그의 잔혹하고 거칠었던 운명의 끝이라면... 마리카가 내린 시련이라면 이도 어쩔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길었던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호라 루는 빛바랜 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철저하게 때려부순 운명의 숙적.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부서지지 않은 강인한 전사. 호라 루도 인정할 수 있었다. 그가 힘으로 왕좌를 차지한 것처럼, 고드프리의 치세가 끝난 지금, 왕의 자격은 분명 빛바랜 자에게 있었다.

"강인한 빛바랜 자여... 그 힘이야말로, 왕에 걸맞구나."

마지막 숨을 토하고, 그의 몸은 식어가기 시작했다.

야만 전사로써 태어나, 그 힘으로 왕이 되어, 수없이 많은 투쟁에서 승리하고, 여신의 반려가 되어, 또다시 수없이 많은 투쟁을 벌였다.
평생을 투쟁 속에서 살아간 전사의 이름,
그 이름은 '호라 루'였다.

홀로 남은 빛바랜 자는 승리의 포효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승리했지만, 자신의 몸도 진작에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두워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마지막 하나...'























MMA로 싸우는 빛바랜 자를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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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다 써놓고 결말만 한참 고민하다 이제 완성해서 올림
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