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땅에는 오랜 격언이 있다. 붉은 하늘이 다가오는 날에는 몸을 숨기고, 소리를 내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머지않아 불온한 사건이 다가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날은 유난히 붉은, 핏빛 석양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석양을 등지고 적색과 금색으로 치장한 군단이 평원을 가득 매우며 다가왔다. 커다란 장창과 칼로 무장하고, 붉은 망토를 두른 그들은 옛 전설에나 나오는 붉은 부패를 닮아 있었다. 그 부패는 사람을, 짐승을, 끝내는 세상을 좀먹어 썩어문드러지게 만든다고 했다.

옛 전설을 떠올리며 그들을 내려다볼 때, 그들 중에서 커다란 깃발을 든 전령이 먼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케일리드로 가려고 하니 길을 빌려달라.


이미 그들이 왜 케일리드로 가려하는지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라단 장군이 봉인한 별들을 풀어놓아, 황금의 고드윈을 되살리기 위해...

그럴 수는 없었다. 별에서 내려온 암흑의 부산물과 짐승들 때문에 지금껏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받았는가. 간신히 봉인한 그것들을 세상에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순리를 거슬러 죽은 자를 되살린다니, 그런 짓을 용납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죽음에 사는 자들이 세상에 독을 풀고 있었다. 그 탓에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었는가.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죽은 자를 죽은 채로 둬야한다는 섭리를 왜 모르는가. 그대들이 할 행동이 만 백성을 얼마나 도탄에 빠지게 할지 모르는가!"


"대의를 위해 사소한 희생쯤은 얼마든지 치룰 수 있다. 길을 열지 않겠다면 이 성을 부수고 백성은 모조리 죽여 억지로라도 지나가겠다."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처음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들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면 정말로 붉은 부패가 세상을 휩쓸 것 같아 두려웠다. 내 등 뒤에는 틈새의 땅에 사는 무고한 이들이, 순수한 생명들이,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를 믿고 따라와준 황금의 일족들이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싸우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나를 바라봤다. 한 명 한 명, 여러가지 감정들이 섞인 눈동자들과 마주한다. 모두의 눈에 어떤 결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주군."


바로 옆, 가장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꿇었다. 땅 잃은 기사, 잉바르. 과거 폭풍왕을 섬기던 강력한 기사이자, 휘하 기사들을 이끌고 내 휘하에 투신한 충신. 나에겐 과분한 존재였다.


"해야 하는 일을 하소서."


그 말과 동시에 성벽 위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숙였다. 마치 석양에 부서지는 해변의 파도처럼 물결이 퍼져나갔다. 저 모든 이들이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주군으로써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고맙다. 내 억지를 따라와다오."


다시 성벽 아래로 시선을 향한다. 군주의 위엄을 담아, 가슴에 찬 공기를 가득 담아 외친다. 파멸의 한 마디를.


"스톰빌은 길을 빌려주지 않겠다!"


"...후회할 것이오."


전령은 분에 찼는지 깃발을 부러뜨리고 군단으로 돌아갔다.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적들을 보며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을 떠올렸다.


"케일리드로 파발을 띄워라."


케일리드의 군주, 장군 라단. 그는 최강의 데미갓. 그러나 오랜 로데일 공방전으로 인해 지쳐있을 것이 분명하다. 스톰빌은... 아마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라단 장군이 태세를 정비할 시간 정도는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틈새의 땅을 위해, 우리는 시간을 번다! 방어 태세를 굳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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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별안간 쏟아진 찬 기운에 정신이 든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보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전투는...


"이제 좀 정신이 드나?"


째질듯한 고음. 분노, 경멸, 비웃음 등 복잡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그녀였다.

내가 맞섰던 군단의 수장, 미켈라의 칼날, 말레니아.

부패로 인해 썩어문드러진 오른팔을 대신해 놋쇠로 만들어진 의수를 차고 기다란 칼로 아군을 유린한 잔혹한 전사.


혼란스러웠다.

싸움 중이었을텐데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있고, 어째서 나는 그녀의 앞에 무릎 꿇려져 있단 말인가.


"내 병사들은...?"


"주구우우운!!!"


내 물음에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간신히 고개를 돌리니 주변에 포박되어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전투는 패배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이기리란 기대는 안 했지만 이 꼴이라니... 나약한 자신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말했지. 이 성에 생존자는 없을 것이라고."


그녀가 손을 들었다. 순간 불온한 생각이 바늘처럼 뒷통수를 찔렀다. 설마...


"크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가 어둠이 내린 연병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말레니아의 기사들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병사들을 차례로 처형하며 유린했다. 있어서는 안 될 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잠깐!"


황급하게 외치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눈 앞에 별이 도는가 싶었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믿고 따라와준 그들을 살려야 했다.


"내 목을, 내 목을 쳐라. 대신 병사들은 살려다오."


"주군, 아니됩니다!"


울분에 찬 병사들의 외침. 적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추하고 비굴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이 한 목으로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런 내 눈 앞에 발이 떨어졌다.


신고 있던 높은 굽의 장화를 벗어던진 맨 발. 하얀 백옥 같은 발 위로 붉고 푸른 부패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것은 분명 썪어들어가고 있었다.


"발을 핥아라."


"...?"


"핥는다면, 네 불쌍한 병사들의 목은 치지 않고 넘어가마. 개처럼 비굴하게 핥거라."


악취미였다.

개처럼 비굴하게 핥으라니. 이 몸에게 죽음보다도 더 한 치욕이다. 이 씨발련.


"주군, 절대 안 됩니다!"


병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그들의 비통에 찬 외침을 뒤로 하고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내민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부패의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지금껏 맡아본 그 어떤 냄새보다도 더한 악취에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간신히 혀를 내밀어 발가락에 닿아본다.


치이익-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혀가 썪어들어가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발을 핥는다.

개처럼.

비굴하게.


말레니아가 만족할 수 있도록 발고랑을 해집으며 위아래로 개처럼 침을 묻히며 열심히 핥았다.


"그만 되었다."


침범벅을 한 채로 말레니아는 발을 거두었다. 나는 통증과 고열에 시달리며 바닥을 길 수 밖에 없었다.


"약속대로 목숨은 살려주마. 너는 부패로 죽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말레니아와 귀부기사들은 스톰빌 성을 떠났다. 아마 케일리드로 가겠지.

하지만 이미 내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붉은 부패가 내 몸을 잠식해들어와, 온 몸을 문드러지게 만들었다.

끝이었다. 황금 나무 기슭으로 다 함께 돌아가고자 했던 희망이 무너져내렸다. 틈새의 땅의 운명은... 라단 장군이 맡아줄 것이다.


"모두들, 미안하다..."


"주군!"


시야가 흐려져왔으나 주변으로 내 군사들이 모이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곧 다가올 내 죽음을 직감하고 울고 있었다.

그때 눈 앞에 커다란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잘린 팔이었다.

한 쪽 팔이 잘려나간 기사가 자신의 잘린 팔을 나에게 내민 것이다.


"주군, 주군의 권능을 발휘해 목숨을 구하소서. 그리고 후일을 도모해 우리를 이끌어주소서."


"접목의 권능을... 그대들의 사지를 나에게 붙이라는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나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주군. 부디..."


그의 말을 끝으로 병사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팔다리를 내밀어왔다. 심지어는 자신의 멀쩡한 신체마저 즉석에서 잘라내는 자도 있었다.

...그들의 간절한 청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접목을 반복한다. 썪어가는 팔다리를 떼어내고, 새롭게 강인한 신체로 다시 태어난다.

새벽녘 동이 틀 때, 황금빛 태양 아래 나는 새로 태어났다.


나는 황금의 군주다.



-틈새의 땅 역사서, [나는 그렇게 황금의 군주가 되었다.](황금으로 된 모든 것들의 위대한 군주, 고드릭 저)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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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신 황금의 군주 고드릭님이 직접 쓰신 명필에 무슨 문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