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빛 바랜 자가 피로한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수 많은 적을 죽여온 그였지만 이곳. 미켈라의 성수는 유독 그에게 있어서 상대하기 힘든 곳이었다. 각종 거대한 덩굴로 엮인 길은 내려가는 것부터 까다로웠고 자칫 잘못하면 낙사할 위기도 찾아오곤 했다.
힘겹게 덩굴 중간에 위치한 곳까지 오자 드디어 성 비슷한 것의 입구가 보였기에 덩굴이 끝나고 제대로 된 길이 나오나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온갖 괴물들이 가득했다. 아니, 괴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아닌 종족들.
날개 달린 생명체부터 사자 혼종, 결정인.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수의 기사 로레타까지 나와서 빛 바랜 자의 목숨줄을 위협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1대1로 상대했던 이들이 이제는 여럿이 함께 덤비니 더욱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간신히 그들을 처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귀부기사를 비롯한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련된 귀부기사와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도 어려웠고 중간에 있는 부패한 황금 나무의 화신은 그야말로 빛 바랜 자를 식겁하게 했다. 화신과 싸워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1대1로 싸웠었기에 온전히 화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병사들까지 함께 덤비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마지막 남은 병사의 목을 칼로 벤 뒤 허공에서 빛 바랜 자를 향해 내려찍는 화신을 몸을 굴려 피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흘렀고 화신과 대치했다. 화신은 천천히 다가왔지만 빛 바랜 자는 속도를 높여 화신에게 달렸다.
화신 바로 앞까지 빛 바랜 자가 왔고 화신은 손에 든 둔기를 크게 휘둘렀지만 빛 바랜 자는 기다렸다는 듯 방패를 들어 막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빛 바랜 자는 왼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미간을 찌푸렸고 뒤로 구르며 일어났다. 화신이 그런 빛 바랜 자를 향해 둔기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으나 재빨리 몸을 굴린 빛 바랜 자가 옆으로 피했고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쉬익-
화신은 그런 빛 바랜 자를 보며 둔기를 꽉 쥐었지만 빛 바랜 자가 한 박자 더 빨랐다. 빛 바랜 자의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화신에게 직격했다. 푹- 칼날이 화신의 몸 안을 제대로 쑤시고 들어갔고 화신은 고통에 겨운 몸부림을 보였다. 그러나 빛 바랜 자는 화신에게 박아넣은 칼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칼을 두 손으로 잡고 더 깊게 박아넣었다.
푸확-
화신의 몸에서 초록색 피가 튀어나왔고 간신히 빛 바랜 자를 떼어낸 화신이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화신에게 떨어지며 바닥에 처박힌 빛 바랜 자가 화신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일어섰다. 빛 바랜 자는 이미 상당히 상처를 입은 화신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빛 바랜 자가 든 사냥개의 긴 이빨이 화신의 몸 전체를 가로로 갈랐다.
칼의 방향을 따라 녹색의 피가 튀어나왔고 아까보다 훨씬 더 꿈틀대던 화신이 그 거대한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빛 바랜 자가 목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숨을 골랐다.
절그럭-
빛 바랜 자가 무거운 갑옷을 고쳐 입으며 화신의 시체를 지나쳐 에프레펠 내벽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반갑게도 축복이 보였기에 바로 축복 앞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마친 빛 바랜 자가 에프리펠 내벽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나무줄기로 이어진 길이 보였고 나무줄기에 올라타 이어진 길을 걸어나갔다.
그러자 빛 바랜 자의 눈에 독 늪으로 된 붉은 폭포가 들어왔고 빛 바랜 자는 한 번 인상을 찡그린 뒤 독 늪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벌레들을 피해 독 늪을 건너 바위 위로 올라왔고 바위 사이에 있는 독 늪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한 불길한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뺏고 독 늪에서 부패한 나무령이 튀어나왔다.
그 징그러운 생김새에 눈쌀을 찌푸린 빛 바랜 자는 바위 위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나무령은 그 거대한 몸을 끌고 빛 바랜 자를 쫓아왔고 머리를 들이밀며 빛 바랜자를 들이받으려 했다.
팟-
빛 바랜 자가 점프하며 나무령을 피했고 칼을 번쩍 들더니 허공에서 나무령의 머리를 내리쳤다.
촤아악!
나무령의 머리가 갈라지며 녹색의 피가 흘러나왔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무령을 보며 빛 바랜 자는 착지했다. 나무령이 반격 삼아 불을 내뿜었지만 그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빛 바랜 자는 재빨리 바위 위쪽으로 더 올라가 불을 피했다. 그리고 그는 투척검을 꺼내 나무령에게 던졌고 투척검을 연달아 맞고 주춤하는 나무령에게
빛 바랜 자는 빠르게 접근해 칼로 나무령을 찔렀다. 살벌한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령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빛 바랜 자는 갑옷에 튀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칼을 뽑아냈고 한 번 더 칼을 휘둘렀다. 대각선으로 휘두른 칼이 나무령을 베자 결국 나무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커다란 몸뚱아리가 동작을 멈추며 축 늘어졌다.
싸움을 마친 빛 바랜 자가 아까 보았던 문으로 향했고 문 안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배수로에 위치한 축복이 보였다. 축복을 거친 빛 바랜 자가 배수로를 나와 나무줄기와 길다란 기둥을 지나 구멍 난 지붕에 도착했고 구멍 밑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빛 바랜 자의 시야에 벌레 무리가 들어왔고 그들을 칼로 베어 처단한 후 뒤를 보자 이동 장치가 보였다. 이동 장치를 타고 성수 최하층으로 내려가자 축복이 눈에 들어왔고 축복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빛 바랜 자가 축복 앞에 있던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본능적으로 그는 직감했다. 이 앞에 적이 있다고. 그것도 아주 강력한 적이. 이미 림그레이브, 리에니에, 시프라 강, 케일리드와 알터 고원, 화산관, 거인들의 산령을 거치며
수도 없이 많은 강한 적을 쓰러트려온 그였다. 트리가드는 틈 새의 땅에 온지 얼마되지도 않아 죽였고 모르고트와 고드릭, 레날라와 라단, 라이커드 등 데미갓들을 처단하고 용의 트리가드, 노장 니아르, 썩어가는 엑디키스, 선조령 등도 죽였다. 중간에 데미갓 라니를 만나 여러 일을 겪고 그녀와 반려의 연도 맺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끝에 이미 베테랑 용사가 된 빛 바랜 자는
우연히 들어오게 된 이곳 미켈라의 성수에서 꽤나 곤란을 겪었고 마침내 지금 이곳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이의 바로 앞까지 온 듯 했다. 부패한 나무령과 독늪, 미켈라.... 앞선 단서들로 인해 대충 예상이 되었다.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쩌면 라단 이상으로 강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각오를 하며 빛 바랜 자가 앞으로 걸어갔다. 앞에 있던 입구 안으로 들어간 빛 바랜 자가 마주한 것은 의자에 앉아있는 한 여인.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썩어 있었다. 아니, 썩어가고 있었다. 이미 몸의 반 이상이 썩은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뽑내며
신성한 성수, 그것도 최하층에 침입한 빛 바랜 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대한 나무줄기를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황금 의수와 투구가 놓여져 있었다.
"긴 꿈을 꾸었다."
여인은 혼잣말인지, 빛 바랜 자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금빛을 잃고, 피는 부패하니"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의수를 들어 오른어깨에 끼웠고
"수만의 시체를 쌓아올리며"
"단 한 명을 기다린다."
투구를 집었다. 여인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빛 바랜 자의 귀를 간지럽혔다.
"...귀공도 알도록 하라."
"미켈라의 칼날, 말레니아를."
그녀가 오른손에 든 의수도를 한 번 들어올리며 빛 바랜 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미켈라의 남매이자 가장 강했던 데미갓 라단과 호각을 다퉜던 반신. 말레니아였다. 빛 바랜 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고드릭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압감이 빛 바랜 자를 강하게 짓눌렀다. 이런 중압감은 레날라와 라이커드, 모르고트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다.
..과연 라단과도 결판을 내지 못했던 반신인가.
"패배를 모르는 싸움을."
말레니아가 오른팔꿈치를 확 피며 그녀의 의수도를 자신의 오른쪽으로 쭉 뻗었다. 강한 결의가 담긴 목소리가 빛 바랜 자의 귀에 톡톡히 들려왔다. 빛 바랜 자가 자기도 모르게 검을 꽈악 쥐며 방패를 앞으로 들었다. 말레니아가 천천히 빛 바랜자를 향해 걸어왔다. 거대한 물 웅덩이를 철퍽이며 지나친 그녀가 의수도를 천천히 들었다.
이윽고 빛 바랜 자의 앞까지 온 그녀는 위로 치켜든 의수도를 빛 바랜 자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아한 동작이었다. 캉! 빛 바랜 자가 용 발톱의 방패를 위로 들어 방어했다. 생각보다 위력이 약했기에 막을 만 했다. 그렇게 생각한 빛 바랜 자는 용 발톱의 방패로 말레니아의 의수도를 쳐냈다. 말레니아의 몸이 잠시 열렸고 빛 바랜 자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촤아악!
빛 바랜 자가 사냥개의 긴 이빨로 말레니아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었다. 붉은, 정확히는 썩은 피가 빛 바랜 자의 눈 앞에 흩날렸다. 비틀대며 뒤로 물러난 말레니아.
'..생각보다 허술하군. 너무 긴장했나.'
그렇게 생각한 빛 바랜 자였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
자세를 고쳐 잡은 말레니아가, 물웅덩이를 박차고 튀어오르더니 의수도를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일순.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의수도를 휘두르며 빛 바랜 자에게 맹공을 퍼부어 댔다. 물새난격이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빛 바랜 자가 용 발톱의 방패로 가드하려 했지만 공격을 쳐내긴 커녕, 정신 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더군다나 공격이 쉼 없이 계속 날라왔기에 계속 방어할 수도 없었다. 카앙! 말레니아의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방패를 쳐내며 빛 바랜 자의 몸을 열었다.
'젠장..!'
빛 바랜 자가 급하게 뒤로 몸을 굴렀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말레니아의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몸 곳곳을 지나쳤고 빛 바랜 자의 갑옷이 찢겨나가며 피부에 상처가 생겼다. 동작을 멈춘 말레니아. 빛 바랜 자는 이제야 공격이 끝났나 싶었지만 안심할 수 없어 방패를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상태에서 의수도를 마구 휘둘렀고 빛 바랜 자는 다행히 방패로 막을 수 있었다.
빛 바랜 자가 피부에 난 상처의 통증을 느끼며 눈썹을 찡그렸다. 깊게 베인 상처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한 두 개가 아닌데다 이번 공격은 갑옷이 어느 정도 막아줬기에 이 정도였지 또 맞는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의 이마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지를. 빛 바랜 자와 싸웠던 라단은 이미 전성기가 아닌 죽어가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생사를 오가는 싸움이었고 겨우 승리한 빛 바랜 자였다.
헌데 말레니아는 그런 라단보다도 훨씬 강했다. 하긴 죽어가는 라단보다 강한 거야 당연하겠지.
말레니아가 의수도를 고쳐 쥐며 자세를 잡았고 빛 바랜 자에게 공격을 가했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인 그녀가 찌르기 공격을 시도했다. 빛 바랜 자가 대각선으로 구르며 피했고 칼을 휘둘렀다.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기 전에 공격을 해야 했고 빛 바랜 자의 칼날이 말레니아의 왼팔을 베었다.
왼팔 소매 쪽이 찢어지며 부패된 피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말레니아가 의수도를 가로로 크게 내둘렀다. 등을 바짝 숙여 피한 빛 바랜 자가 방패로 말레니아의 몸통을 때렸고 밸런스가 무너진 말레니아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빛 바랜 자의 날카로운 찌르기가 그녀의 복부를 찔렀다. 푹- 말레니아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신음했다.
"큭...."
마무리를 하려는 빛 바랜 자. 생각보다 강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라단보다 강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수도 없이 생사의 줄타기를 해온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빛 바랜 자가 사냥개의 긴 이빨을 말레니아의 배에서 뽑으려 했다. 뽑은 뒤에 그녀의 목을 찌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
말레니아가 왼손으로 사냥개의 긴 이빨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오른손에 든 의수도를 들었다.
'설마..'
촤아악!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왼어깨를 베었다. 사냥개의 긴 이빨을 잡은 체로 몸만 뒤틀어 피하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의수도의 사거리가 너무 길었다. 말레니아는 빛 바랜 자의 목을 노린 것이었지만 실패한 듯 했다. 빛 바랜 자가 어깨에 느껴지는 격통에 하마터면 방패를 손에서 놓칠 뻔 했다.
그의 어깨에서 적색의 혈흔이 튀어나왔다. 빛 바랜 자가 이를 악물며 참았고 말레니아의 가슴에 발을 올렸다. 퍼억- 그는 말레니아의 가슴을 차며 자신의 칼을 잡아당겼고 사냥개의 긴 이빨이 말레니아의 배에서 뽑혀 나갔다. 그러면서 칼날이 말레니아의 왼손을 베고 지나갔기에 그녀의 왼손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복부에서 나오는 출혈 때문에 말레니아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빛 바랜 자는 더 이상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가 흰 꽃밭을 박차고 점프하였다.
빛 바랜 자가 공중에서 내려오며 검으로 말레니아를 베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말레니아도 튀어올랐다. 꽃밭을 받침대 삼아 튀어오른 그녀는 다시 한 번 의수도를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빛 바랜 자가 바닥으로 착지하기 전에 칼을 최대한 앞으로, 그리고 위로 뻗었다. 허공에서 떠서 준비 자세를 하고 있던 말레니아를 향한 일격이었다. 촤악! 다행히 칼날이 말레니아의 왼손목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물새난격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도하며 착지한 빛 바랜 자와 엉거주춤하게 착지한 말레니아.
당연히 제대로 착지한 빛 바랜 자가 먼저 공격할 수 있었고 앞으로 달려나간 그가 칼날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촤아악- 말레니아의 상체에 칼의 방향을 따라 그대로 상처가 생겼고 그녀의 황금색 상의가 찢어졌다. 길다랗게 난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말레니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상처난 가슴을 메만지며 일어나려 했지만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철퍽 엎어졌다.
'..끝난 건가.'
쓰러진 말레니아에게 다가간 빛 바랜 자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그가 시선을 돌려 말레니아가 만지던 나무줄기를 보았다. 나무줄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커다란 꽃봉오리가 말레니아가 엎어진 자리에서 생겨나더니 이내 꽃봉오리가 활짝 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말레니아. 커다란 날개가 달린 체 웅크리고 있던 그녀가 날개를 활짝 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날개는 가지각색의 나비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완전히 맨몸을 드러낸 말레니아의 피부 곳곳은 부패해 있었다.
"붉은 꽃은, 다시 핀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읊조렸고 오른의수를 고쳐 끼우며 천천히 일어섰다. 말레니아는 양 날개가 위로 올라가며 날아올랐다.
"귀공은 끔찍한 것을 보게 되리라."
천천히 솟아오른 그녀가 빛 바랜 자를 내려다 보며 오른의수에서 왼손을 뗐다. 빛 바랜 자에게 경고한 말레니아는 의수도를 아래쪽 사선으로 활짝 폈다.
"썩어라!"
그렇게 선언한 말레니아. 그녀의 맨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양 무릎 아래가 의족이었고 왼다리는 아예 전부 의족이었다. 그녀의 왼팔과 상체도 썩어 있었다. 부패의 여신으로 각성한 말레니아. 그녀의 아름다우면서도 혐오스러운 모습에서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붉은 꽃잎이 몸 주위에 생겨나더니 그 상태에서 빛 바랜 자를 향해 공중에서 내려찍듯이 내려온 말레니아. 빛 바랜 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굴러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뒤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말레니아는 그런 그를 쫓아 바닥으로 내려왔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녀가 땅에 처박혔다. 다행히 열심히 달려 몸을 피한 빛 바랜 자였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그녀가 처박은 자리에 붉은 부패의 봉오리가 생겨나더니 이내 펑하며 봉오리가 터졌다.
빛 바랜 자가 손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며 뒷걸음질쳤다. 저 붉은 부패의 꽃잎에 다으면 필시 그의 몸도 썩어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꽃잎이 잦아들자 빛 바랜 자는 말레니아에게 접근했다. 달려든 그가 느리게 일어나는 그녀의 왼팔에 칼을 찔러박았다. 푹! 말레니아가 얕은 신음을 내며 빛 바랜 자에게서 떨어졌다. 칼날이 그녀의 왼팔에서 피와 함께 빠져나왔다. 말레니아가 몸을 회전하며 왼발차기를 날렸다. 그녀의 의족이 빛 바랜 자의 오른팔을 가격했고 빛 바랜 자가 그 충격으로 옆으로 튕겨 나갔다.
쿠당탕 꽃밭을 나뒹근 빛 바랜 자. 그는 빨리 몸을 일으켜야 했다. 말레니아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빛 바랜 자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빛 바랜 자를 향해 의수도를 내려찍었고 빛 바랜 자는 빠르게 뒤로 굴렀다. 그는 연신 구른 덕분에 말레니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의수도를 바닥에 내려찍은 말레니아.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의수도를 중심으로 회오리 같은 바람이 일었다. 등을 피며 일어나는 말레니아와 다시금 달려드는 빛 바랜 자.
일어서던 말레니아가 공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 마냥 자신이 먼저 의수도를 휘둘렀으나 이는 빛 바랜 자도 예상한 일이었다. 빛 바랜 자가 방패로 의수도를 막았고 곧바로 칼을 앞으로 쭉 뻗어 말레니아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왼팔을 계속 공략 당한 말레니아였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입술을 문 그녀는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고 그녀의 왼어깨에서 칼이 빠졌다.말레니아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던 빛 바랜 자. 그 순간. 그녀가 무릎을 굽혔고 그녀의 주위에 붉은색의 바람이 일더니 말레니아가 위로 날아올랐다. 허공에 뜬 체로 주위에 나비가 가득한 그녀.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생기더니 그 무언가가 빛 바랜 자를 공격했다. 그녀의 분신. 즉 나비 분신이었다. 붉은 색을 띈 나비 분신이 먼저 빛 바랜 자의 시야 기준
오른쪽으로 날라와 칼을 휘둘렀고 이를 왼쪽으로 굴러서 피한 빛 바랜 자. 그런데 이번엔 다른 분신이 왼쪽으로 날라와 칼을 휘둘렀고 빛 바랜 자는 완전히 일어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급하게 방패를 들었다. 캉! 빛 바랜 자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탓에 그의 몸이 열렸고 뒤이어 날라온 세 번째 분신이 빛 바랜 자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촤아악!
"커헉!"
그 분신의 칼에 오른어깨를 베인 빛 바랜 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오른어깨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그는 몸을 떨었고 어깨에선 핏줄기가 튀어나왔다.
이어지는 다른 나비 분신의 공격. 사선으로 날라온 나비 분신이 날린 칼을 빛 바랜 자는 막고 싶었다. 아니, 막아야 했다. 이대로 연타를 허용하면 죽을 게 분명했기에 그의 생존 본능이 빛 바랜 자의 몸을 강제로 움직였다. 오른 어깨의 통증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옆으로 급히 몸을 굴린 빛 바랜 자. 그는 그대로 몸을 계속 굴렀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방패로 막아봐야 소용 없을 게 뻔하기에 본능적으로 구르기를 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사선으로 날아온 나비 분신의 칼날과 이어진 두 분신의 찌르기 모두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아온 말레니아의 찌르기. 그 찌르기가 빛 바랜 자의 허벅지를 스쳤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나름대로 회피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빛 바랜 자가 오른어깨의 짜릿한 통증과 허벅지의 약간의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확실히 적지 않은 부상이었지만 아직 싸울 힘은 있었다. 빛 바랜 자가 용 발톱의 방패와 사냥개의 긴 이빨을 힘겹게 든 체 말레니아를 마주했다.
물웅덩이를 박차고 접근해 오는 말레니아. 그녀가 의수도를 대각선 방향으로 휘둘렀지만 빛 바랜 자는 그녀가 의수도를 휘두른 방향을 제대로 읽어냈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반격을 했다. 사냥개의 긴 이빨이 말레니아의 왼옆구리를 깊숙히 찔렀다.
푸욱!
이에 말레니아가 각혈하며 피를 토했고 빛 바랜 자는 칼을 뽑아냈다. 그때, 말레니아가 발악적으로 내두른 의수도를 빛 바랜 자는 본능적으로 방패로 막았다. 말레니아가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왼옆구리에선 꽤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간 검은 빛을 띈 그녀의 피는 누가 봐도 부패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빛 바랜 자 역시 그녀를 쫓아 후속타를 날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상당한 상처를 입은 그의 몸은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 앞의 말레니아 역시 부상이 꽤 심했기에 아마 다음 일격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결판을 낼 생각인 건지 말레니아가 점프를 하였다. 그녀가 의수도를 머리 위로, 가로로 들었다. 물새난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빛 바랜 자는 알 수 있었다. 저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면 자신은 죽는 다는 것을. 더 이상 갑옷도 멀쩡하지 않았기에 얕은 상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격이겠지.
빛 바랜 자가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저 미친 공격을 방패로 모두 막을 자신이 없었다. 말레니아가 그런 빛 바랜 자를 쫓으며 미친 듯이 의수도를 휘둘렀다. 계속 도망치는 빛 바랜 자였지만 도주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말레니아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빛 바랜 자는 도주를 포기하고 옆으로 굴렀다. 그러나 말레니아의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등을 스쳐 지나갔고
빛 바랜 자는 애써 고통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굴렀다. 그러나 그런 빛 바랜 자의 저항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레니아의 물새난격이 그의 몸을 가격하였다. 물새난격 중 세 번째 연격. 그 연격이 빛 바랜 자의 등을 갈가리 찢었고 빛 바랜 자가 입에서 피를 뿜었다. 이미 찢어져 있던 갑옷을 완전히 걸레짝으로 만든 세 번째 연격.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연격이 이어졌다. 멈춰 선 상태에서 의수도를 휘두르는 연격. 그 연격이 세 번째 연격을 맞느라
강제로 멈춘 빛 바랜 자를 더욱 더 갈가리 찢어놓았다. 걸레짝인 된 그의 갑옷은 이미 방어구로써 기능을 상실했고 빛 바랜 자는 네 번째 일격을 그대로 모두 등에 맞고 말았다.
"커윽...."
각혈하며 스르륵 몸이 내려간 빛 바랜 자. 그가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 전체가 덜덜 떨렸고 칼로 바닥을 짚고 있었지만 칼을 쥔 손도 극심히 떨렸다. 왼손에 들려 있던 방패마저 바닥에 떨어졌다. 등은 마치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상처투성이였고 주르륵 주륵 흐른 피가 꽃밭에 떨어졌다. 말레니아가 그런 그를 내려다 보며 의수도를 자기 머리 위로 들었다. 이제 끝낼 생각인 것이었다. 이미 방금 전 물새난격으로 상당한 양의 체력을 회복한 말레니아. 즉 흡혈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피도 제법 채웠고 빛 바랜 자도 만신창이가 됬으니 이제 그를 끝내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의수도를 쥔 손에 힘을 주는 말레니아. 그녀가 의수도를 내리치려던 그 순간.
말레니아는 보지 못했다. 빛 바랜 자의 왼손에 들려 있던 작고 뾰족한 물건을. 마력이 담긴 그것. 빛 바랜 자는 그것을 왼손의 스냅만으로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보라빛 마력다발이, 펑하고 터지며 말레니아의 시선을 잠깐이지만 가렸다.
'..속지 않는다. 빛 바랜 자.'
말레니아는 왼손을 자신의 눈 쪽에 갖다대며 사방을 경계했다. 분명 빛 바랜 자는 이 틈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겠지. 하지만 이런 잔재주가 자신에게 통할 것이라 생각하다니. 마지막 비장의 수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었다. 연기에 숨어 뒤에서 공격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연기에 숨어 뒤에서 공격하는 척, 앞에서 공격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말레니아. 그런 그녀의 눈에 앞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허술하군.'
말레니아가 의수도로 그것을 쳐냈다. 투척 단검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도 무언가 날라오는 소리가 들려 의수도로 그것도 튕겨냈다. 이번에도 투척 단검이었다.
'빛 바랜 자. 이런 허접한 수를...'
연기가 잦아들고 있었고 곧 빛 바랜 자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제 빛 바랜자의 숨통을 끊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때였다.
파지직-
"!?"
말레니아의 눈 앞에 무언가가 번쩍였다. 엄청난 양의 전기가 그녀 바로 앞에 내려 꽂혔다. 전회 중 하나인 낙뢰였다.
'이게 무슨...'
순간 눈이 부셔서 시야가 차단된 그녀가 왼손을 자신의 눈 쪽에 갖다 댔다. 그리고 말레니아의 시야가 차단된 순간. 그녀의 뒤에서 빛 바랜 자의 일격이 이어졌다.
"!"
인기척을 느낀 말레니아가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남은 힘을 쥐어짜내 사냥개의 긴 이빨을 앞으로 곧게 내뻗은 빛 바랜 자. 그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이 말레니아의 목을 지나갔다.
촤아아악---!
감에 의존해 피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노려진 부위가 목이었기에 꼭 찔리지 않는다고 치명상이 아닌 건 아니었다. 빛 바랜 자의 검이 말레니아의 목을 베며 지나갔고 그녀의 목에 가로로 길게 선이 생겼다. 이내 말레니아의 목에서 적색의 분수가 튀어나왔다. 물새난격으로 흡혈을 해서 체력을 회복했다 한들 목을 공격당하는 치명상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적인 부상이라는 뜻이었다.
"커어억....."
생명을 잃어가는 고통.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레니아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전신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가 의수도를 떨어트리며 무릎을 꿇었고 날개가 빛을 잃어가며 색이 옅어졌다.
"...귀공, 그 힘은..."
힘없고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는
"왕의, 그릇인가..."
스르륵... 쓰러져 갔다.
"...아아, 오라버니."
말레니아가 쓰러져 가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소중한 남매이자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미켈라를 말이다.
"...아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애절한 목소리로 미켈라를 부르는 말레니아. 그녀의 음성에서 미켈라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말레니아는 졌습니다..."
그렇게 말한 말레니아는 완전히 바닥에 엎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룬. 빛 바랜 자는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칼과 방패 모두 떨군 그는 온 몸이 만신창이였다. 다른 상처도 상처지만 무엇보다 등에 입은 상처가 컸다. 오른어깨도 그렇고 몸 곳곳에 난 상처가 욱씬욱씬거리고 쓰라렸다. 대자로 누운 빛 바랜 자가 투구를 벗어던지며 가뿐 숨을 내쉬었다. 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미켈라의 성수의 반신마저 쓰러트렸으니 이제 엘데의 왕이 될 날도 머지 않았으리라. 다음 목적지를 떠올리는 빛 바랜 자. 멜리나가 말했던 바에 의하면 이제 불의 거인을 찾아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빛 바랜 자였다.
빛 바랜 자가 피로한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수 많은 적을 죽여온 그였지만 이곳. 미켈라의 성수는 유독 그에게 있어서 상대하기 힘든 곳이었다. 각종 거대한 덩굴로 엮인 길은 내려가는 것부터 까다로웠고 자칫 잘못하면 낙사할 위기도 찾아오곤 했다.
힘겹게 덩굴 중간에 위치한 곳까지 오자 드디어 성 비슷한 것의 입구가 보였기에 덩굴이 끝나고 제대로 된 길이 나오나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온갖 괴물들이 가득했다. 아니, 괴물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아닌 종족들.
날개 달린 생명체부터 사자 혼종, 결정인.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수의 기사 로레타까지 나와서 빛 바랜 자의 목숨줄을 위협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1대1로 상대했던 이들이 이제는 여럿이 함께 덤비니 더욱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간신히 그들을 처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귀부기사를 비롯한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련된 귀부기사와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도 어려웠고 중간에 있는 부패한 황금 나무의 화신은 그야말로 빛 바랜 자를 식겁하게 했다. 화신과 싸워본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1대1로 싸웠었기에 온전히 화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병사들까지 함께 덤비니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마지막 남은 병사의 목을 칼로 벤 뒤 허공에서 빛 바랜 자를 향해 내려찍는 화신을 몸을 굴려 피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흘렀고 화신과 대치했다. 화신은 천천히 다가왔지만 빛 바랜 자는 속도를 높여 화신에게 달렸다.
화신 바로 앞까지 빛 바랜 자가 왔고 화신은 손에 든 둔기를 크게 휘둘렀지만 빛 바랜 자는 기다렸다는 듯 방패를 들어 막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빛 바랜 자는 왼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미간을 찌푸렸고 뒤로 구르며 일어났다. 화신이 그런 빛 바랜 자를 향해 둔기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으나 재빨리 몸을 굴린 빛 바랜 자가 옆으로 피했고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쉬익-
화신은 그런 빛 바랜 자를 보며 둔기를 꽉 쥐었지만 빛 바랜 자가 한 박자 더 빨랐다. 빛 바랜 자의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화신에게 직격했다. 푹- 칼날이 화신의 몸 안을 제대로 쑤시고 들어갔고 화신은 고통에 겨운 몸부림을 보였다. 그러나 빛 바랜 자는 화신에게 박아넣은 칼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칼을 두 손으로 잡고 더 깊게 박아넣었다.
푸확-
화신의 몸에서 초록색 피가 튀어나왔고 간신히 빛 바랜 자를 떼어낸 화신이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화신에게 떨어지며 바닥에 처박힌 빛 바랜 자가 화신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일어섰다. 빛 바랜 자는 이미 상당히 상처를 입은 화신에게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빛 바랜 자가 든 사냥개의 긴 이빨이 화신의 몸 전체를 가로로 갈랐다.
칼의 방향을 따라 녹색의 피가 튀어나왔고 아까보다 훨씬 더 꿈틀대던 화신이 그 거대한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빛 바랜 자가 목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숨을 골랐다.
절그럭-
빛 바랜 자가 무거운 갑옷을 고쳐 입으며 화신의 시체를 지나쳐 에프레펠 내벽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반갑게도 축복이 보였기에 바로 축복 앞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마친 빛 바랜 자가 에프리펠 내벽 안쪽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나무줄기로 이어진 길이 보였고 나무줄기에 올라타 이어진 길을 걸어나갔다.
그러자 빛 바랜 자의 눈에 독 늪으로 된 붉은 폭포가 들어왔고 빛 바랜 자는 한 번 인상을 찡그린 뒤 독 늪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벌레들을 피해 독 늪을 건너 바위 위로 올라왔고 바위 사이에 있는 독 늪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한 불길한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뺏고 독 늪에서 부패한 나무령이 튀어나왔다.
그 징그러운 생김새에 눈쌀을 찌푸린 빛 바랜 자는 바위 위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나무령은 그 거대한 몸을 끌고 빛 바랜 자를 쫓아왔고 머리를 들이밀며 빛 바랜자를 들이받으려 했다.
팟-
빛 바랜 자가 점프하며 나무령을 피했고 칼을 번쩍 들더니 허공에서 나무령의 머리를 내리쳤다.
촤아악!
나무령의 머리가 갈라지며 녹색의 피가 흘러나왔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무령을 보며 빛 바랜 자는 착지했다. 나무령이 반격 삼아 불을 내뿜었지만 그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빛 바랜 자는 재빨리 바위 위쪽으로 더 올라가 불을 피했다. 그리고 그는 투척검을 꺼내 나무령에게 던졌고 투척검을 연달아 맞고 주춤하는 나무령에게
빛 바랜 자는 빠르게 접근해 칼로 나무령을 찔렀다. 살벌한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령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빛 바랜 자는 갑옷에 튀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칼을 뽑아냈고 한 번 더 칼을 휘둘렀다. 대각선으로 휘두른 칼이 나무령을 베자 결국 나무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커다란 몸뚱아리가 동작을 멈추며 축 늘어졌다.
싸움을 마친 빛 바랜 자가 아까 보았던 문으로 향했고 문 안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배수로에 위치한 축복이 보였다. 축복을 거친 빛 바랜 자가 배수로를 나와 나무줄기와 길다란 기둥을 지나 구멍 난 지붕에 도착했고 구멍 밑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빛 바랜 자의 시야에 벌레 무리가 들어왔고 그들을 칼로 베어 처단한 후 뒤를 보자 이동 장치가 보였다. 이동 장치를 타고 성수 최하층으로 내려가자 축복이 눈에 들어왔고 축복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한 빛 바랜 자가 축복 앞에 있던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본능적으로 그는 직감했다. 이 앞에 적이 있다고. 그것도 아주 강력한 적이. 이미 림그레이브, 리에니에, 시프라 강, 케일리드와 알터 고원, 화산관, 거인들의 산령을 거치며
수도 없이 많은 강한 적을 쓰러트려온 그였다. 트리가드는 틈 새의 땅에 온지 얼마되지도 않아 죽였고 모르고트와 고드릭, 레날라와 라단, 라이커드 등 데미갓들을 처단하고 용의 트리가드, 노장 니아르, 썩어가는 엑디키스, 선조령 등도 죽였다. 중간에 데미갓 라니를 만나 여러 일을 겪고 그녀와 반려의 연도 맺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끝에 이미 베테랑 용사가 된 빛 바랜 자는
우연히 들어오게 된 이곳 미켈라의 성수에서 꽤나 곤란을 겪었고 마침내 지금 이곳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이의 바로 앞까지 온 듯 했다. 부패한 나무령과 독늪, 미켈라.... 앞선 단서들로 인해 대충 예상이 되었다.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쩌면 라단 이상으로 강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각오를 하며 빛 바랜 자가 앞으로 걸어갔다. 앞에 있던 입구 안으로 들어간 빛 바랜 자가 마주한 것은 의자에 앉아있는 한 여인.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썩어 있었다. 아니, 썩어가고 있었다. 이미 몸의 반 이상이 썩은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뽑내며
신성한 성수, 그것도 최하층에 침입한 빛 바랜 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대한 나무줄기를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황금 의수와 투구가 놓여져 있었다.
"긴 꿈을 꾸었다."
여인은 혼잣말인지, 빛 바랜 자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금빛을 잃고, 피는 부패하니"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의수를 들어 오른어깨에 끼웠고
"수만의 시체를 쌓아올리며"
"단 한 명을 기다린다."
투구를 집었다. 여인의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빛 바랜 자의 귀를 간지럽혔다.
"...귀공도 알도록 하라."
"미켈라의 칼날, 말레니아를."
그녀가 오른손에 든 의수도를 한 번 들어올리며 빛 바랜 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미켈라의 남매이자 가장 강했던 데미갓 라단과 호각을 다퉜던 반신. 말레니아였다. 빛 바랜 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고드릭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압감이 빛 바랜 자를 강하게 짓눌렀다. 이런 중압감은 레날라와 라이커드, 모르고트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다.
..과연 라단과도 결판을 내지 못했던 반신인가.
"패배를 모르는 싸움을."
말레니아가 오른팔꿈치를 확 피며 그녀의 의수도를 자신의 오른쪽으로 쭉 뻗었다. 강한 결의가 담긴 목소리가 빛 바랜 자의 귀에 톡톡히 들려왔다. 빛 바랜 자가 자기도 모르게 검을 꽈악 쥐며 방패를 앞으로 들었다. 말레니아가 천천히 빛 바랜자를 향해 걸어왔다. 거대한 물 웅덩이를 철퍽이며 지나친 그녀가 의수도를 천천히 들었다.
이윽고 빛 바랜 자의 앞까지 온 그녀는 위로 치켜든 의수도를 빛 바랜 자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아한 동작이었다. 캉! 빛 바랜 자가 용 발톱의 방패를 위로 들어 방어했다. 생각보다 위력이 약했기에 막을 만 했다. 그렇게 생각한 빛 바랜 자는 용 발톱의 방패로 말레니아의 의수도를 쳐냈다. 말레니아의 몸이 잠시 열렸고 빛 바랜 자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촤아악!
빛 바랜 자가 사냥개의 긴 이빨로 말레니아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었다. 붉은, 정확히는 썩은 피가 빛 바랜 자의 눈 앞에 흩날렸다. 비틀대며 뒤로 물러난 말레니아.
'..생각보다 허술하군. 너무 긴장했나.'
그렇게 생각한 빛 바랜 자였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
자세를 고쳐 잡은 말레니아가, 물웅덩이를 박차고 튀어오르더니 의수도를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일순.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의수도를 휘두르며 빛 바랜 자에게 맹공을 퍼부어 댔다. 물새난격이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빛 바랜 자가 용 발톱의 방패로 가드하려 했지만 공격을 쳐내긴 커녕, 정신 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더군다나 공격이 쉼 없이 계속 날라왔기에 계속 방어할 수도 없었다. 카앙! 말레니아의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방패를 쳐내며 빛 바랜 자의 몸을 열었다.
'젠장..!'
빛 바랜 자가 급하게 뒤로 몸을 굴렀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말레니아의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몸 곳곳을 지나쳤고 빛 바랜 자의 갑옷이 찢겨나가며 피부에 상처가 생겼다. 동작을 멈춘 말레니아. 빛 바랜 자는 이제야 공격이 끝났나 싶었지만 안심할 수 없어 방패를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상태에서 의수도를 마구 휘둘렀고 빛 바랜 자는 다행히 방패로 막을 수 있었다.
빛 바랜 자가 피부에 난 상처의 통증을 느끼며 눈썹을 찡그렸다. 깊게 베인 상처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한 두 개가 아닌데다 이번 공격은 갑옷이 어느 정도 막아줬기에 이 정도였지 또 맞는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의 이마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지를. 빛 바랜 자와 싸웠던 라단은 이미 전성기가 아닌 죽어가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생사를 오가는 싸움이었고 겨우 승리한 빛 바랜 자였다.
헌데 말레니아는 그런 라단보다도 훨씬 강했다. 하긴 죽어가는 라단보다 강한 거야 당연하겠지.
말레니아가 의수도를 고쳐 쥐며 자세를 잡았고 빛 바랜 자에게 공격을 가했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인 그녀가 찌르기 공격을 시도했다. 빛 바랜 자가 대각선으로 구르며 피했고 칼을 휘둘렀다.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기 전에 공격을 해야 했고 빛 바랜 자의 칼날이 말레니아의 왼팔을 베었다.
왼팔 소매 쪽이 찢어지며 부패된 피가 흘러나왔고 그녀는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말레니아가 의수도를 가로로 크게 내둘렀다. 등을 바짝 숙여 피한 빛 바랜 자가 방패로 말레니아의 몸통을 때렸고 밸런스가 무너진 말레니아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빛 바랜 자의 날카로운 찌르기가 그녀의 복부를 찔렀다. 푹- 말레니아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신음했다.
"큭...."
마무리를 하려는 빛 바랜 자. 생각보다 강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라단보다 강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수도 없이 생사의 줄타기를 해온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빛 바랜 자가 사냥개의 긴 이빨을 말레니아의 배에서 뽑으려 했다. 뽑은 뒤에 그녀의 목을 찌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
말레니아가 왼손으로 사냥개의 긴 이빨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오른손에 든 의수도를 들었다.
'설마..'
촤아악!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왼어깨를 베었다. 사냥개의 긴 이빨을 잡은 체로 몸만 뒤틀어 피하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의수도의 사거리가 너무 길었다. 말레니아는 빛 바랜 자의 목을 노린 것이었지만 실패한 듯 했다. 빛 바랜 자가 어깨에 느껴지는 격통에 하마터면 방패를 손에서 놓칠 뻔 했다.
그의 어깨에서 적색의 혈흔이 튀어나왔다. 빛 바랜 자가 이를 악물며 참았고 말레니아의 가슴에 발을 올렸다. 퍼억- 그는 말레니아의 가슴을 차며 자신의 칼을 잡아당겼고 사냥개의 긴 이빨이 말레니아의 배에서 뽑혀 나갔다. 그러면서 칼날이 말레니아의 왼손을 베고 지나갔기에 그녀의 왼손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복부에서 나오는 출혈 때문에 말레니아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빛 바랜 자는 더 이상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가 흰 꽃밭을 박차고 점프하였다.
빛 바랜 자가 공중에서 내려오며 검으로 말레니아를 베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말레니아도 튀어올랐다. 꽃밭을 받침대 삼아 튀어오른 그녀는 다시 한 번 의수도를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빛 바랜 자가 바닥으로 착지하기 전에 칼을 최대한 앞으로, 그리고 위로 뻗었다. 허공에서 떠서 준비 자세를 하고 있던 말레니아를 향한 일격이었다. 촤악! 다행히 칼날이 말레니아의 왼손목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물새난격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도하며 착지한 빛 바랜 자와 엉거주춤하게 착지한 말레니아.
당연히 제대로 착지한 빛 바랜 자가 먼저 공격할 수 있었고 앞으로 달려나간 그가 칼날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촤아악- 말레니아의 상체에 칼의 방향을 따라 그대로 상처가 생겼고 그녀의 황금색 상의가 찢어졌다. 길다랗게 난 상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말레니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상처난 가슴을 메만지며 일어나려 했지만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철퍽 엎어졌다.
'..끝난 건가.'
쓰러진 말레니아에게 다가간 빛 바랜 자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그가 시선을 돌려 말레니아가 만지던 나무줄기를 보았다. 나무줄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커다란 꽃봉오리가 말레니아가 엎어진 자리에서 생겨나더니 이내 꽃봉오리가 활짝 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말레니아. 커다란 날개가 달린 체 웅크리고 있던 그녀가 날개를 활짝 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날개는 가지각색의 나비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완전히 맨몸을 드러낸 말레니아의 피부 곳곳은 부패해 있었다.
"붉은 꽃은, 다시 핀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읊조렸고 오른의수를 고쳐 끼우며 천천히 일어섰다. 말레니아는 양 날개가 위로 올라가며 날아올랐다.
"귀공은 끔찍한 것을 보게 되리라."
천천히 솟아오른 그녀가 빛 바랜 자를 내려다 보며 오른의수에서 왼손을 뗐다. 빛 바랜 자에게 경고한 말레니아는 의수도를 아래쪽 사선으로 활짝 폈다.
"썩어라!"
그렇게 선언한 말레니아. 그녀의 맨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양 무릎 아래가 의족이었고 왼다리는 아예 전부 의족이었다. 그녀의 왼팔과 상체도 썩어 있었다. 부패의 여신으로 각성한 말레니아. 그녀의 아름다우면서도 혐오스러운 모습에서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붉은 꽃잎이 몸 주위에 생겨나더니 그 상태에서 빛 바랜 자를 향해 공중에서 내려찍듯이 내려온 말레니아. 빛 바랜 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굴러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뒤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말레니아는 그런 그를 쫓아 바닥으로 내려왔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녀가 땅에 처박혔다. 다행히 열심히 달려 몸을 피한 빛 바랜 자였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그녀가 처박은 자리에 붉은 부패의 봉오리가 생겨나더니 이내 펑하며 봉오리가 터졌다.
빛 바랜 자가 손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며 뒷걸음질쳤다. 저 붉은 부패의 꽃잎에 다으면 필시 그의 몸도 썩어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꽃잎이 잦아들자 빛 바랜 자는 말레니아에게 접근했다. 달려든 그가 느리게 일어나는 그녀의 왼팔에 칼을 찔러박았다. 푹! 말레니아가 얕은 신음을 내며 빛 바랜 자에게서 떨어졌다. 칼날이 그녀의 왼팔에서 피와 함께 빠져나왔다. 말레니아가 몸을 회전하며 왼발차기를 날렸다. 그녀의 의족이 빛 바랜 자의 오른팔을 가격했고 빛 바랜 자가 그 충격으로 옆으로 튕겨 나갔다.
쿠당탕 꽃밭을 나뒹근 빛 바랜 자. 그는 빨리 몸을 일으켜야 했다. 말레니아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빛 바랜 자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빛 바랜 자를 향해 의수도를 내려찍었고 빛 바랜 자는 빠르게 뒤로 굴렀다. 그는 연신 구른 덕분에 말레니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의수도를 바닥에 내려찍은 말레니아.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의수도를 중심으로 회오리 같은 바람이 일었다. 등을 피며 일어나는 말레니아와 다시금 달려드는 빛 바랜 자.
일어서던 말레니아가 공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 마냥 자신이 먼저 의수도를 휘둘렀으나 이는 빛 바랜 자도 예상한 일이었다. 빛 바랜 자가 방패로 의수도를 막았고 곧바로 칼을 앞으로 쭉 뻗어 말레니아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왼팔을 계속 공략 당한 말레니아였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입술을 문 그녀는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고 그녀의 왼어깨에서 칼이 빠졌다.말레니아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던 빛 바랜 자. 그 순간. 그녀가 무릎을 굽혔고 그녀의 주위에 붉은색의 바람이 일더니 말레니아가 위로 날아올랐다. 허공에 뜬 체로 주위에 나비가 가득한 그녀.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생기더니 그 무언가가 빛 바랜 자를 공격했다. 그녀의 분신. 즉 나비 분신이었다. 붉은 색을 띈 나비 분신이 먼저 빛 바랜 자의 시야 기준
오른쪽으로 날라와 칼을 휘둘렀고 이를 왼쪽으로 굴러서 피한 빛 바랜 자. 그런데 이번엔 다른 분신이 왼쪽으로 날라와 칼을 휘둘렀고 빛 바랜 자는 완전히 일어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급하게 방패를 들었다. 캉! 빛 바랜 자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탓에 그의 몸이 열렸고 뒤이어 날라온 세 번째 분신이 빛 바랜 자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촤아악!
"커헉!"
그 분신의 칼에 오른어깨를 베인 빛 바랜 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오른어깨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그는 몸을 떨었고 어깨에선 핏줄기가 튀어나왔다.
이어지는 다른 나비 분신의 공격. 사선으로 날라온 나비 분신이 날린 칼을 빛 바랜 자는 막고 싶었다. 아니, 막아야 했다. 이대로 연타를 허용하면 죽을 게 분명했기에 그의 생존 본능이 빛 바랜 자의 몸을 강제로 움직였다. 오른 어깨의 통증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옆으로 급히 몸을 굴린 빛 바랜 자. 그는 그대로 몸을 계속 굴렀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방패로 막아봐야 소용 없을 게 뻔하기에 본능적으로 구르기를 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사선으로 날아온 나비 분신의 칼날과 이어진 두 분신의 찌르기 모두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아온 말레니아의 찌르기. 그 찌르기가 빛 바랜 자의 허벅지를 스쳤지만 어쨌든 이 정도면 나름대로 회피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빛 바랜 자가 오른어깨의 짜릿한 통증과 허벅지의 약간의 고통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확실히 적지 않은 부상이었지만 아직 싸울 힘은 있었다. 빛 바랜 자가 용 발톱의 방패와 사냥개의 긴 이빨을 힘겹게 든 체 말레니아를 마주했다.
물웅덩이를 박차고 접근해 오는 말레니아. 그녀가 의수도를 대각선 방향으로 휘둘렀지만 빛 바랜 자는 그녀가 의수도를 휘두른 방향을 제대로 읽어냈고 반대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반격을 했다. 사냥개의 긴 이빨이 말레니아의 왼옆구리를 깊숙히 찔렀다.
푸욱!
이에 말레니아가 각혈하며 피를 토했고 빛 바랜 자는 칼을 뽑아냈다. 그때, 말레니아가 발악적으로 내두른 의수도를 빛 바랜 자는 본능적으로 방패로 막았다. 말레니아가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왼옆구리에선 꽤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간 검은 빛을 띈 그녀의 피는 누가 봐도 부패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빛 바랜 자 역시 그녀를 쫓아 후속타를 날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상당한 상처를 입은 그의 몸은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 앞의 말레니아 역시 부상이 꽤 심했기에 아마 다음 일격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결판을 낼 생각인 건지 말레니아가 점프를 하였다. 그녀가 의수도를 머리 위로, 가로로 들었다. 물새난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빛 바랜 자는 알 수 있었다. 저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면 자신은 죽는 다는 것을. 더 이상 갑옷도 멀쩡하지 않았기에 얕은 상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격이겠지.
빛 바랜 자가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저 미친 공격을 방패로 모두 막을 자신이 없었다. 말레니아가 그런 빛 바랜 자를 쫓으며 미친 듯이 의수도를 휘둘렀다. 계속 도망치는 빛 바랜 자였지만 도주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말레니아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빛 바랜 자는 도주를 포기하고 옆으로 굴렀다. 그러나 말레니아의 의수도가 빛 바랜 자의 등을 스쳐 지나갔고
빛 바랜 자는 애써 고통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굴렀다. 그러나 그런 빛 바랜 자의 저항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레니아의 물새난격이 그의 몸을 가격하였다. 물새난격 중 세 번째 연격. 그 연격이 빛 바랜 자의 등을 갈가리 찢었고 빛 바랜 자가 입에서 피를 뿜었다. 이미 찢어져 있던 갑옷을 완전히 걸레짝으로 만든 세 번째 연격.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연격이 이어졌다. 멈춰 선 상태에서 의수도를 휘두르는 연격. 그 연격이 세 번째 연격을 맞느라
강제로 멈춘 빛 바랜 자를 더욱 더 갈가리 찢어놓았다. 걸레짝인 된 그의 갑옷은 이미 방어구로써 기능을 상실했고 빛 바랜 자는 네 번째 일격을 그대로 모두 등에 맞고 말았다.
"커윽...."
각혈하며 스르륵 몸이 내려간 빛 바랜 자. 그가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 전체가 덜덜 떨렸고 칼로 바닥을 짚고 있었지만 칼을 쥔 손도 극심히 떨렸다. 왼손에 들려 있던 방패마저 바닥에 떨어졌다. 등은 마치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상처투성이였고 주르륵 주륵 흐른 피가 꽃밭에 떨어졌다. 말레니아가 그런 그를 내려다 보며 의수도를 자기 머리 위로 들었다. 이제 끝낼 생각인 것이었다. 이미 방금 전 물새난격으로 상당한 양의 체력을 회복한 말레니아. 즉 흡혈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피도 제법 채웠고 빛 바랜 자도 만신창이가 됬으니 이제 그를 끝내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의수도를 쥔 손에 힘을 주는 말레니아. 그녀가 의수도를 내리치려던 그 순간.
말레니아는 보지 못했다. 빛 바랜 자의 왼손에 들려 있던 작고 뾰족한 물건을. 마력이 담긴 그것. 빛 바랜 자는 그것을 왼손의 스냅만으로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보라빛 마력다발이, 펑하고 터지며 말레니아의 시선을 잠깐이지만 가렸다.
'..속지 않는다. 빛 바랜 자.'
말레니아는 왼손을 자신의 눈 쪽에 갖다대며 사방을 경계했다. 분명 빛 바랜 자는 이 틈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겠지. 하지만 이런 잔재주가 자신에게 통할 것이라 생각하다니. 마지막 비장의 수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었다. 연기에 숨어 뒤에서 공격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연기에 숨어 뒤에서 공격하는 척, 앞에서 공격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말레니아. 그런 그녀의 눈에 앞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허술하군.'
말레니아가 의수도로 그것을 쳐냈다. 투척 단검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도 무언가 날라오는 소리가 들려 의수도로 그것도 튕겨냈다. 이번에도 투척 단검이었다.
'빛 바랜 자. 이런 허접한 수를...'
연기가 잦아들고 있었고 곧 빛 바랜 자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제 빛 바랜자의 숨통을 끊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때였다.
파지직-
"!?"
말레니아의 눈 앞에 무언가가 번쩍였다. 엄청난 양의 전기가 그녀 바로 앞에 내려 꽂혔다. 전회 중 하나인 낙뢰였다.
'이게 무슨...'
순간 눈이 부셔서 시야가 차단된 그녀가 왼손을 자신의 눈 쪽에 갖다 댔다. 그리고 말레니아의 시야가 차단된 순간. 그녀의 뒤에서 빛 바랜 자의 일격이 이어졌다.
"!"
인기척을 느낀 말레니아가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미 한 발 늦었다. 남은 힘을 쥐어짜내 사냥개의 긴 이빨을 앞으로 곧게 내뻗은 빛 바랜 자. 그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이 말레니아의 목을 지나갔다.
촤아아악---!
감에 의존해 피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노려진 부위가 목이었기에 꼭 찔리지 않는다고 치명상이 아닌 건 아니었다. 빛 바랜 자의 검이 말레니아의 목을 베며 지나갔고 그녀의 목에 가로로 길게 선이 생겼다. 이내 말레니아의 목에서 적색의 분수가 튀어나왔다. 물새난격으로 흡혈을 해서 체력을 회복했다 한들 목을 공격당하는 치명상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치명적인 부상이라는 뜻이었다.
"커어억....."
생명을 잃어가는 고통.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레니아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전신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녀가 의수도를 떨어트리며 무릎을 꿇었고 날개가 빛을 잃어가며 색이 옅어졌다.
"...귀공, 그 힘은..."
힘없고 맥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는
"왕의, 그릇인가..."
스르륵... 쓰러져 갔다.
"...아아, 오라버니."
말레니아가 쓰러져 가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소중한 남매이자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미켈라를 말이다.
"...아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애절한 목소리로 미켈라를 부르는 말레니아. 그녀의 음성에서 미켈라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말레니아는 졌습니다..."
그렇게 말한 말레니아는 완전히 바닥에 엎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룬. 빛 바랜 자는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칼과 방패 모두 떨군 그는 온 몸이 만신창이였다. 다른 상처도 상처지만 무엇보다 등에 입은 상처가 컸다. 오른어깨도 그렇고 몸 곳곳에 난 상처가 욱씬욱씬거리고 쓰라렸다. 대자로 누운 빛 바랜 자가 투구를 벗어던지며 가뿐 숨을 내쉬었다. 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미켈라의 성수의 반신마저 쓰러트렸으니 이제 엘데의 왕이 될 날도 머지 않았으리라. 다음 목적지를 떠올리는 빛 바랜 자. 멜리나가 말했던 바에 의하면 이제 불의 거인을 찾아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빛 바랜 자였다.
3줄요약 1.삧여캐 2.말레니아 패배후 부패싸게 누드모드 화 3. 삧과 사이좋게 레즈보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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