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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데문학] 군주로 가는 길 -프롤로그- m.dcinside.com/board/fromsoftware/3481632
"지랄맞은 상대였어. 지금껏 상대한 반푼이들과는 차원이 다르군."
짙은 흑색머리의 남자가 막 몸을 일으켰다. 방금전의 격전이 허언은 아니라는 듯,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럼에도 남자는 회한이 깊든 한숨과 성취감이 가득한 미소란 모순적인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암만 살아도 당최 적응이 안 되는군."
산산히 부서진 적금색의 갑옷. 한 가운데 뿔이 불쑥 돋아난 독특한 방패. 아니, 저 강대했던 기사가 쓰고 있던 투구조차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망할 중세랜드. 이 미개한 세계는 100년을 더 살으래도 적응이 안 되네. 그리고 중세 흉내를 내려면 좀 제대로 낼 것이지, 저건 보지도 못한 형체의 갑옷이잖아? 후생을 이런 지랄맞은 곳에서 태어난 것도 짜증나는데."
이젠 익숙해졌다고도 생각했건만. 여전히 남자는 이 세계가 낯설었다.
거지 같은 삶에 거지 같은 세상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별의별 이유로 욕을 쳐먹고 원치 않는 회식과 야근이 일상이던 시절. 되먹지도 않는 장기자랑에 끌려나가 어울리지도 않는 춤을 추며 상사들의 기쁨조나 했던 시절. 지하철은 항상 만원이었고, 심지어 빌어먹을 회사는 태풍으로 도시가 다 망가졌음에도 어떻게든 출근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리 번 돈을 제대로 쓰긴 했던가? 인간이 아닌 '기계'로서 살아갔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눈을 뜬 후, 아벨은 미친 듯이 바로 그 거지같던 삶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더러운 헛간. 이가 시리는 추위. 구멍이 송송 뚫린 거적데기. 그 아래서 살갗을 기어다니는 벌레들. 침대 따윈 존재치도 않는다. 항상 마굿간이나 창고에서 지푸라기를 깔고 잠을 청했으니까. 몰랐었지. 이게 '진짜 중세'일 줄은. 그저 사극이나 소설 따위로 보던 중세는, 말 그대로 존재치도 않던 판타지였던 것이다.
아벨은 이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적어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오래된 격언은, 이 망해도 마땅할 세계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지랄맞을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고, 그 과정에서 아벨은 상식을 파괴하는 무수한 사실을 인식하며 혼란에 빠지고, 또 그런 자신을 납득시키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분명 인간이란 종족일텐데, 여기의 수명 관념은 어딘가 이상했다. 이 망할 수준의 더러운 위생이라면, 당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부기지수였다. 노약자일수록, 아이일수록 더더욱.
허나, 그 고난을 딛고 겨우 살아남을 경우, 그리고 적어도 '인간다운' 생활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뭔가 이상했다.
아벨이 살았던 '옛 세계'에선 아무리 최신 의료기술이 뒷받침되어도 100살을 넘기지 못했다. 근데 이 세계는 많이 어긋나있었다. 전염병이나 상처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세계의 인간들은 훨씬 강인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지만, 어떻게든 악다구니를 치며 견뎌낸다. 저 더러운 똥통에 빠지면 당장 독이 올라 죽을텐데, 오래 견뎌낸다. 물론 제대로 된 조치를 못 받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지만.
정말 판타지 세계인 걸까?
물론 어디까지나 '옛 세계의 기준과 인간'을 잣대로 놓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대신 이 빌어먹을 중세랜드는 더럽고 인권 의식 따위는 엿보다도 낮은 취급이었으며, 장생조차도 결국 '누릴 자'들만 누리는 권한이었다. 적응하지 못하거나, 정확히는 '빼앗지 못하면', 10년도 못살고 죽어나가는 게 당연했다. 아이들조차도 옹알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살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아벨보차도 첫 살인을 다섯에 했다. 한 살 많은 형(이라고 해야할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살인을 이 세계는 '당연히' 받아들였다. 현대화된 사법구조? 사적제재의 불허? 그런 관념 따위는 사치였고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살기 위해 죽인다. 강해지기 위해 빼앗는다. 그리고 취한다. 이 모든 행위가 '당연한 기준'처럼 받아들여졌다. 덧붙여, 아벨본인조차 뒤늦게 깨달았지만, 아벨에겐 이 방면에서 재능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허나, 그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아벨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의 강을 건너야했다.
어느 세계건, 공짜 점심은 없었으니까. 더욱이 구걸하는 거지 신세로 시작한 아벨에겐 더더욱.
정신을 차려보니 아벨은 제법 이름난 용병왕이 되어있었다. 말이 좋아 용병이지, 온갖 잡다한 일과 더러운 심부름까지 다 하는 괴상한 직업이었다. 청부살인업은 기본에 암살, 도적질, 약탈까지. 그리고 아벨은 훌륭히 이 부조리한 세계에 적응해갔다. 본인이 받아들이는지 여부는 별개로.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일' 따위는, 저번 세계에서도 매우 익숙했으니까.
"틈새의 땅?"
"그래! 들었어? 최근 흉흉한 소문이 저잣거리에 도는 건 아벨 너도 알고 있지?"
"알지. 죽은 자들이 갑자기 일어났다매? 근데 언데드는 또 아니고 말이야."
"맞아! 그리고 하나같이, 저리 일어난 작자들은 아주 희미한 황금색 빛을 품고 있었지. 반딧불처럼 희미하지만 말이야. 그걸 축복의 인도라나 뭐라나 헛소리들을 일삼았지만."
"같잖은 소식들이지. 어딜가나 지랄맞은 세계인 건 똑같은데, 무슨 축복이고 황금이야? 황금 따윈 여기서도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에휴 아벨.. 모두가 너 같은 줄 알아? 넌 싸움질도 잘 하고, 제법 잘 생기기까지 했지. 술도 잘 마시고."
"내가 잘난 게 내 탓인가? 꼬우면 탄생신께 따지던가?"
"그래, 네놈 거시기 굵다 개새끼야. 암튼 그래서 저 '새로 일어난 자'들로 요즘 항구들이 제법 성황이란 모양이야."
"이봐, 에쉬튼. '성황'까진 아니지. 소문을 들어도 '제대로' 듣는 게 좋아. 그게 용병의 기본 아닌가? 그런 뜬소문에 혹하다 몰살당한 놈들은 세는 게 입아플 정도라고."
"하 그래 너 잘났다. 아무튼 알아두라고. 이상한 녀석들을 봐도, 왠만하면 시비는 걸지 마."
"응?"
허풍쟁이로 유명한 에쉬튼이지만, 이번엔 조금 어조가 달랐다. 그리고, 저 어조를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아벨의 유일한 실수이자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힘든 의뢰를 막 마치고 받은 넉넉한 보수이 눈을 멀게 했던 걸까? 힘껏 품고 안아주자 자지러지던 신음을 내던 여인의 향취에 마음이 녹아내렸던 걸까?
온통 하얀 수염과 산발에 가득한 백발로 덮은 노인이었다. 다만, 온몸이 근육과 상처로 가득했고,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하나, 아니 두 개는 더 컸던 거구의 남자. 무자비한 도끼를 휘두르는 주제에 지랄맞을 정도로 민첩했다. 용병왕으로 이름을 날리며, 저 시궁창 같은 밑바닥에서 바득바득 기어온 아벨이었지만, 두 번에 걸친 삶을 모두 회고해봐도 이렇게 강대한 남자는 보지 못했다.
끝내 저 거대한 도끼가 가슴팍을 가르던 순간까지도. 신음조차 내지 못했고, 그렇게 의식은 꺼져갔다. 정작 저 백발의 노전사도 어딘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헛소리를 반복하며 반쯤 나간 정신. 피칠갑이 되서 제대로 보이지조자 않는 얼굴. 아벨을 상대하기 한참 전부터 저 거구의 전사는 이미 혼자서 한 개 부대에 달하는 용병을 궤멸시킨 후였다. 그저 읊조릴 뿐. '가야 해. 부르고 있어. 마...카가 부르고 있어. 가야 해. 바다.. 건...'
"마...카? 바다...? 불...러...?"
노전사의 저 의문투성이의 어조를 곱씹을 순간조차 없이, 아벨은 그대로 두 번쨰 죽음을 마주했다.
그렇게 끝나리라 생각했었다.
"이런 씨발. 이 괴물들은 대체 뭐야?"
거미인지 사람인지 당최 모를 괴물 다섯이 있었다. 아니, 애초 이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얼추 보니 교회처럼 생기긴 했는데, 어둠이 가득했고 흔한 촛대와 재단조차 없었다. 온사방이 무너지거나 부서져있었고, 저 망할 괴물들의 끔찍한 괴성만이 가득했다.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싸움이었다.
"그나마 저놈들이 멍청해서 다행이지..."
등 뒤에 맨 클레이모어를 칼집에 납검하며 아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저 도끼의 노전사에게 당해 몸이 반토막이 났을텐데, 정작 눈을 뜨니 아주 멀쩡했다. 이름모를 장소였고, 왠 괴물들이 막 달려들던 건 이해불가였지만. 무슨 감자에 팔다리가 가득달려서 꼴같지도 않은 화려한 귀족망토를 걸친 과물들. 거미를 흉내낸 건지, 꼴에 또 얼굴은 아주 '곱상한' 아이였다. 그 그로테스크함이 더더욱 아벨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지만.
저 괴물들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빨랐고 강했다. 용병왕으로 활동하며 무수한 괴물과 인간을 토막쳐왔지만, 이 처음보는 괴물은 상상이상으로 민첩했다. 무슨 소용돌이를 돌듯, 저 기괴한 몸을 회전시켜며 사방팔방으로 칼을 휘두를 떈 거의 죽을 뻔했다. 괴물의 공격 방식이 너무 괴상해서, 아벨은 처음 얼마간은 수세로 일관하며 녀석을 분석하려 애쓰는 게 최선이었다.
"지랄맞았지만, 단순했고..."
그리고, 마침내 용병왕으로서 감각이 빛을 발했다. 대강 분석을 마친 아벨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 다행이었던 점은, 저 다섯 괴물이 한번에 달려들지 않고 교회 부지 사방에 흩어져있던 것이다. 당연히 한꺼번에 저들과 상대하는 '신종 자살'을 하고 싶지 않던 아벨은 철저히 교회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며 하나씩 녀석을 유인했다.
괴물은 정면에선 강했지만, 한번 검을 튕겨내니 틈이 생겼고, 그 찰나의 틈을 타서 아벨을 빠르게 클레이모어를 저 곱쌍한 얼굴에 박아넣었다. 그렇게 '귀공자' 하나를 일단 처치하니 다음부턴 쉬웠다. 놈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고, 두 번째 녀석은 언덕 위에서 빠르게 뛰어내리며 바로 얼굴에 검을 또 쑤셔박아 처리했다. 세 번째 놈은 절벽으로 유도해서, 투우하듯 가볍게 낙사를 유도했다. 지랄맞은 소용돌이 공격을 역으로 이용한 재치였다.
남은 두 녀석은 협공하듯 한꺼번에 달려들었고, 이때 아벨은 진짜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몸 곳곳에 상처가 났고, 조금만 더 깊었으면 심장동맥까지 잘릴 뻔했다. 허나 한 녀석이 검을 막 휘두를 때 아벨은 다짜고짜 정면으로 굴렸고, 우연히도 뒤에서 아벨의 등을 기습하던 또 다른 녀석의 얼굴에 괴물의 검이 박혔다. 같은 편이 같은 편을 공격한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랄까?
꼴에 고통은 느끼는지 괴성을 내지르는 기회를 아벨은 쉬이 넘기지 않았다. 구르던 그대로 괴물의 가랑이 사이로 미끌어져 그대로 검을 쑤셔넣자 폭포처럼 쏟아진 피가 그대로 아벨을 덮쳤다. 끔찍한 악취와 끈적거림에도 아벨은 반동을 이용해 빠르게 굴러 빠져나왔고, 바로 괴물이 무너져내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귀공자'는 아까 같은 편의 검에 베인 고통을 아직도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가랑이를 찔러 고자로 만들어준 괴물에게 클레이모어가 깔렸기에, 아벨은 바로 괴물이 들고 있던 황금색 직검을 들어올려 그대로 놈을 내리쳤다. 용병왕답게 아벨은 모든 무기술에 능통했고, 그대로 두 개의 직검을 쌍수로 교차하여 놈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다섯 '귀공자'와의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아벨은 처음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렸다. 모든 기력을 쏟아부었기에 뭔가를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일단 몸을 누이고 최소 머리를 굴려볼 여력은 만들어야 했다. 용병왕으로서 휴식의 중요성을 아벨은 잘 알았다.
그렇게 가진 짧은 휴식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조차도 의도된 운명인지, 혹은 아벨 자신의 의지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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