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프롬문학 점자성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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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자성서) 검은 달의 검
· (점자성서) 바위와 강철
· (점자성서) 그을린 호수 아래에서
· (블본문학) 이 앞 강적 있음, 그러므로 모으기 공격이 유효
· (아시나 비전서) 그 땅에는 먼 훗날까지 오니가 살았다고 한다
· (점자성서)별의 세기의 밤은 길고도 길다
· (점사성서) "네펠리 루가 거대한 코코넛을 흔들며 유혹해왔다."
· (점자성서) 불의 거인이 청동 거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 (점자성서) 흐트러진 붉은 에오니아 꽃
[시리즈] 프롬문학 진지문학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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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3/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4/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5/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6/7)
· (프롬문학) 원망의 불꽃 - (7/7) 完
· [세키로 문학] 아시나를 위하여 (1/3)
· [세키로 문학] 아시나를 위하여 (2/3)
· [세키로 문학] 아시나를 위하여 (3/3 完)
· (프롬문학) 잔야에 늑대는 수라가 되었다
· (엘든문학) 별 내리는 밤(라단전)
· (엘든문학) 밤하늘에 빛나는 둔석
· (엘든문학) 힘이야말로 왕인 까닭이니(호라 루)
무겁다.
들이쉬는 공기가 무겁다.
내리쬐는 달빛이 무겁다.
들러붙은 핏내가 무겁다.
무엇보다 그를 내려다보는 저 시선이 무겁다.
중년의 남성, 검성 아시나 잇신은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늑대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딛는 순간 돌이킬 수 없으리란 확신과 불안이 그의 발을 묶었다.
이전에 만났던 노년의 잇신은 잘 다듬어진 한 자루의 검과 같은 심상을 떠올리게 했다. 세련되고, 매끄러우며, 유연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반면 지금, 중년의 잇신은 군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거칠고, 탐욕스러우며, 강인하면서 다함이 없었다.
저 몸에 얼마나 많은 수가 숨어있는지, 저 손이 얼마나 많은 무기를 다룰 수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오너라... 세키로."
중후한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갈대밭을 가로질러왔다.
동시에 공기가 변했다. 무겁게 가라앉아 늑대의 어깨를 짓누르던 공기가 이제는 칼날처럼 그의 전신을 찌르기 시작했다.
도원의 주인이자 대자연의 번개를 수족처럼 다루던 앵룡마저도
원망을 머금고 증오의 불길을 뿜어내던 오니조차도
이렇게까지 늑대를 움츠리게 만들었던 적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다.
'이길 수... 있을까...'
순간 두려움이 늑대의 마음을 좀먹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치뤘던 수많은 싸움 중, 단 한 번이라도 승산이 있어서 뛰어들었던 싸움이 있었는가?
아니, 그는 언제나 열세였고 약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검을 들었고 역경을 넘어섰다. 그렇기에 늑대는 이번에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서벅-
잘린 갈대를 즈려밟자 미세한 풀소리가 고요하게 퍼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극도의 긴장감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검성의 앞에 마주선다는 것은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필요로 했다.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늑대를 보며 잇신은 검은 불사베기, '개문'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자세는 기존 아시나류의 발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에게 등을 보일 정도로 크게 돌아간 허리. 잡은 듯, 안 잡은 듯 가볍게 손잡이에 걸친 손. 다음 동작을 선명하게 예고했다.
'검을 뽑는 순간 치고 들어간다.'
아시나류의 발도술, 십문자베기는 최속의 검술. 일단 자세를 완성한 상태에선 언제든지 검을 뽑아 베어낼 수 있기에 지금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발도 직후를 노려 송곳니를 박아넣는다.
발도 직전의 동작이 생략된듯한 빠르기. 날카롭게 단련된 닌자의 눈은 검성의 발도 순간을 정확하게 보았다.
죽음이 내달리는 모습을.
희고 검은 독기의 불꽃이 땅의 생명과 하늘의 별을 지워냈다. 불사베기가 발하는 독기의 크기는 곧 사용자의 염(念). 잇신이 뽑은 개문에서 흑백의 독기가 둥글게 폭발하며 하늘을 덮고 땅을 침식해 죽음으로 물들였다.
일렁이는 죽음의 불꽃이 사그라들자 잇신이 베어낸 자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잇신을 중심으로 수십 걸음에 달하는 거리에 있던 갈대가 모두 깔끔하게 사라졌다. 늑대가 그 무시무시한 참격의 위력과 범위를 직감하고 순간 몸을 뒤로 날리지 않았더라면...
꿀꺽.
늑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불사베기는 불사마저도 죽이는 신기이자 마검. 불사의 몸인 늑대도 불사베기 앞에서는 보통의 인간과 다름없었다. 지금 이 전장에서 늑대에게 다음 기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달빛이 내리는 언덕 위, 깔끔하게 정리된 언덕 위에서 잇신은 여전히 늑대를 내려다보며 고고히 서있었다. 늑대의 발이 굳은 것을 본 잇신이 소리쳤다.
"망설이지 마라, 세키로!"
"...!"
"네가 멈추면 가없은 손주를 욕보이는 꼴이 된다. 망설임을 버려라. 검을 들어라. 네 주군을 지켜라!"
주군, 쿠로.
불사인 쿠로는 겐이치로가 검은 불사베기로 베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될 심대한 부상. 시간을 끌 여유가 없음을 늑대도 깨달았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노라.
닌자의 철칙, 두 번째. 주군은 절대적. 목숨을 걸어 지킨다.
늑대는 바람처럼 달려나가 검을 내질렀다. 쿠사비마루의 은빛 칼날과 개문의 검은 칼날이 불꽃을 튀기며 달빛을 산산조각냈다.
바위를 때린듯 늑대의 검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아시나류의 창시자답게 늑대의 검을 막아선 잇신은 미묘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버티고 섰다. 결코 가볍지 않은 검격이었을텐데 잇신의 표정엔 아직 여력이 충분히 남은 듯 여유가 흘렀다.
잠시 검을 누르는 압력을 느끼던 잇신의 팔에 핏줄이 돋았다. 다음 순간 폭발적인 힘이 늑대의 검을 하늘 높이 올려쳐 빈틈을 만들어냈다. 열린 품에 개문을 찔러넣는다.
캉!
위기의 순간 늑대가 역수로 바꿔잡은 검에 불꽃이 튄다. 일반적인 무사였다면 확실하게 베였을 공격. 임기응변으로 막아낸 늑대의 움직임은 기민하고도 창의적이었다.
하지만 일격으로 끝낼 잇신이 아니었다. 튕겨나오는 힘을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다시 검에 담는다. 튕겨낼 때마다 더 빠르고 더 무거워지는 검이 연신 늑대의 방어를 두들겨댔다. 주춤주춤, 늑대의 체간이 무너질 듯 뒤로 밀려나간다.
늑대가 자세를 회복하려 앞으로 몸을 기울이는 순간,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크게 튕겨나갔다. 왼손 장타. 피해는 크지 않지만 그 공격은 적의 자세를 크게 뒤흔든다. 아직 균형을 잡지 못한 늑대에게 강렬한 찌르기가 날아든다.
아시나류, 물방울 꿰기.
이전에 겐이치로가 보여줬듯 그 찌르기는 폭발적인 가속과 이어지는 급정지로 타격하듯 눌러 찍는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꿰뚫는 것처럼 적을 방어째로 분쇄하는 필살의 찌르기. 잇신의 그것은 분명 겐이치로의 것보다 배는 빠르고 매섭게 찔러들어왔다.
그러나 늑대는 사선을 수없이 넘어온 닌자. 아시나의 무수한 사무라이들과 싸우고, 겐이치로와 대적하며 벌써 여러번 경험한 기술에 맥없이 당할 기량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있지 못했다. 기술의 결이 같다면 대응할수 있다.
무너진 자세에서조차 늑대의 다리가 가슴팍까지 올라오더니 잇신의 칼끝이 지나는 순간 발날로 도신을 정확하게 받아낸다. 원을 그리듯 칼날을 밀어내자 잇신의 칼도 미끄러지듯 땅으로 향했다.
인법, 간파하기.
죽음을 코앞까지 끌어들여 반격의 틈을 비집어만드는 닌자의 기술. 늑대의 의도대로 잇신의 검은 땅을 꿰뚫고 검신 위에선 발이 내리누르고 있다. 완전히 균형이 무너져 앞으로 쏠린 잇신은 빈틈 투성이. 그 빈틈에 검격을 꽂는다!
순간 땅이 거꾸로 솟으며 늑대의 머리로 떨어졌다. 천지가 뒤엎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늑대의 눈이 크게 떠진다.
'유술인가...!'
늑대의 검이 몸에 닿기 직전, 잇신이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놓고 늑대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대응할 틈조차 주지 않고 세키로를 땅으로 던져버렸다.
무지개 같은 곡선을 그리며 땅에 격돌하기 직전, 늑대는 몸을 말아 낙법을 취했다. 전신으로 충격을 흘리고 숨을 돌리기도 전에 눈앞에 검은 칼끝이 떨어진다.
푸욱-
개문의 칼끝이 흙을 꿰뚫고 들어갔다. 간신히 땅을 굴러 공격을 피한 늑대가 벌떡 일어나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한 호흡만에 몇 번의 공방을 나눈걸까.
"훌륭하구나, 세키로."
별안간의 칭찬. 검을 맞대고 있는 적이 아닌, 스승으로써 제자의 성장을 치하하는 듯한 태도. 그 말투엔 애틋함이 서려있었다.
"잇신님..."
"허면, 이것도 받아낼 수 있겠느냐."
잇신은 다시금 개문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종전의 발도 자세보다도 더 몸을 돌린 자세. 전투 중의 적에게 완전히 등을 보여주는 상식 밖의 행동. 그가 쥔 검집엔 거침을 넘어서 흉포하기 짝이 없는 힘이 응축되고 또 응축됐다.
그것을 보는 늑대의 머리 속에 거대한 심상이 드리워졌다. 기원의 궁의 주인, 앵룡. 기이하게도 잇신이 내뿜는 기운은 그 앵룡과 몹시 닮아있었다. 늑대는 직감했다. 저것을 튕겨내지 못하면 단숨에 일도양단 당할 것임을.
정확한 순간에 쳐내지 못하면 죽는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발도를 대비한다. 밤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달빛을 가리는 순간... 검집에서 개문이 뛰쳐나왔다.
흉포한 용의 아가리가 늑대를 덮친다.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충격.
검을 놓칠 정도의 떨림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검격을 받으며 밀려난 두 다리가 대지에 선명하게 두 줄의 자국을 남겼다. 지금껏 수많은 격전을 치르면서도 버텨낸 쿠사비마루가 부러질듯 떨렸다. 늑대조차 충격을 채 받아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늑대가 간신히 튕겨낸 검격의 진공파는 위로 그 방향을 꺾어 승천하듯 하늘로 뻗어나갔다. 어두운 밤하늘, 검격의 여파에 갈라진 구름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내린다.
수많은 사투 속, 늑대의 검술도 어느덧 절정에 이르러 맞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검성, 잇신 앞에서는 태산에 맞서는 개미와도 같았다. 아직도 검성의 경지는 까마득하기만 했다. 검으로는 승산이 없는 듯 했다.
...그렇다면 몸에 새겨온, 손에 익혀온 모든 것을 사용한다.
다시금 구름이 달빛을 가리는 순간 가늘고 날카로운 침이 둘의 간격을 가르고 날아갔다. 잘못 던진 것일까, 잇신의 발치에 박힌 그것에서 미미한 금속음이 울린다.
잇신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어디선가 본듯한 금속침. 나비가 쓰던 쿠나이가 분명했다. 그의 예감처럼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환영의 나비가 날아든다. 쿠나이를 쫒는 환영의 나비. 실체가 없기에 방어는 불가. 그 잇신조차 굳건히 지키던 자리를 버리고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빈틈을 만들어낸 늑대는 칼끝을 앞으로 향한 채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왼팔은 적을 조준하듯이 앞으로, 두 다리는 용수철을 압축하듯 굽힌다. 한계까지 힘을 응축한 닌자의 두 다리는 스스로를 쏘아보냈다. 소리를 뒤에 두고 올 정도의 초고속 찌르기.
의부, 올빼미의 '대닌자 찌르기'.
잇신의 상체 중심을 조준한 강렬한 찌르기 공격은 잇신의 검에 가로막히며 위로 튕겨나갔다. 대닌자 찌르기의 여세와 튕겨나간 반동을 이용해, 늑대는 올빼미처럼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날아오른듯 뛰어오른 늑대가 달을 등졌다. 짙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그의 의수가 은밀하게 회전했다. 어둠과 그림자를 뚫고, 화염의 파도가 들이닥친다.
코앞까지 닥쳐온 불꽃을 보고도 잇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단숨에 일도양단. 압도적인 검압에 바다를 가르듯 화염이 갈라졌다.
화염이 갈라진 사이로, 불꽃이 역류하며 늑대의 검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탐욕스레 공기를 먹어치운 불은 원망의 화염처럼 초고온의 칼날을 연마해낸다.
불상 조각가로부터 이어진 오의, 휘감아 베기.
신화 속 영웅처럼 늑대는 불의 검을 휘두르며 잇신에게 달려들었다. 뜨거운 불기운이 잇신의 옷을 그슬린다.
'아직이다.'
잇신의 견고한 방어를 부수려면 더 빠르고 강렬하게 몰아쳐야했다. 늑대의 가슴이 크게 부풀며 공기를 잔뜩 머금었다. 단 한 호흡만에 쏟아내야하는 비전의 기술.
소용돌이 구름 건너기.
순간 늑대의 검이 부풀어올랐다.
불길을 담은 검이 소리를 죽이고 공간을 잡아먹으며 춤을 췄다. 검이 지나는 길마다 수십 갈래 진공파를 사방으로 날려 밤의 어둠을 찢어발겼다. 보름달보다도 화려하게 빛나는 불의 소용돌이에 잇신조차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잇신은 검성. 혼신의 힘을 다한 연격에도 아직 그의 피부에 생채기조차 하나 허용하지 않았다. 착실하게 진공파를 깨부수던 잇신의 눈에 큰 빈틈이 포착되었다.
'끝인가, 세키로!'
그리운 기술들의 향연이었다. 나비, 올빼미, 성성이... 심지어는 토모에까지. 늑대가 얼마나 많은 사투를 겪으며 성장했는지, 겐이치로가 어째서 패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역경을 넘어서며 늑대는 그 모든 기술들을 두 손에 담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전성기의 잇신, 검성과 맞서기엔 아직 여물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것으로 끝인듯 했다.
촤악-
개문이 공간을 잘라냈다. 늑대가 보인 틈,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잇신의 검, 개문은 무자비하게 늑대를 양단했다.
"...?"
분명 베였을 터인 늑대의 형체가 흐릿해진다. 그러더니 곧 물에 푼 먹물처럼 어둠 속으로 녹듯이 스며들었다. 사라진 늑대 대신 회색의 깃털들만이 나풀거리며 땅에 떨어졌다.
순간 찌르는 듯한 살기가 잇신의 목덜미를 자극한다. 사악함과 불길함을 듬뿍 머금은 무시무시한 살의에 잇신조차 깜짝 놀라며 급히 돌아본다.
피처럼 붉은 독기가 넘쳐흐른다.
늑대가 손에 넣은 붉은 불사베기. 그것의 이름은 배루. 앵룡의 눈물을 받아내 소명을 다한 대태도에 염을 불어담는다. 주군을 살려야한다는 절박한 마음, 검성과 검을 맞대고 느낀 경외심, 그리고 절망 끝에서조차 피어나는 호승심. 배루는 탐욕스럽게 염을 먹어치우며 붉은 독기의 몸집을 불려나갔다. 한계까지 부풀어오른 죽음의 불꽃이 마침내 흉포한 독니를 드러낸다.
염을 담아내는 시간은 잇신에게는 대응하기에 충분한 틈. 독기를 막기 위해 몸을 돌린 잇신의 발이 순간 바닥으로 푹 꺼진다.
잿더미.
눈치채지 못한 사이 잇신의 주변에 잔불이 서린 잿더미가 쌓여있었다. 그제야 늑대의 노림수를 깨닫는다. 불을 휘감은 소용돌이 구름 건너기가 주변의 잘린 갈대를 잔뜩 끌어모으고 불살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어둠 속에서 발을 딛은 순간 잿더미가 푹 내려앉으며 순간 잇신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실로 훌륭한 함정.
자세를 바로잡을 시간은... 없었다.
붉은 독사의 송곳니가 잇신에게 달려든다.
흑색의 비단에 피를 뿌리듯 밤하늘에 붉은 선이 아로새겨진다.
잔상을 남기며 잦아든 붉은 독기 대신 폭발하듯 비산한 잿가루가 휘날리며 짙은 장막을 만들어냈다. 닌자의 눈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을만큼 두꺼운 장막을.
'해치웠나?'
밤공기의 차가움에 놀란 잿가루가 서서히 땅으로 가라앉았다. 늑대의 바람과 달리, 장막 속에서 남자는 서있었다.
푸른 하오리가 그을음과 잿가루로 더렵혀진 것 외에는 거의 멀쩡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뺨을 사선으로 지나는 한 줄기 붉은 선에서 피가 스며나왔다.
"너의 송곳니, 분명 이 몸에 닿았노라."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은 결과,
겨우 베인 상처 하나.
잇신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느끼며 조용히 늑대를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상처입었을 때가 대체 언제였던가. 검성으로 칭송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검으로써 그에게 대적할 자, 그의 몸에 상처입힐 자는 존재치 않았다. 고작 생채기였으나 치하하기에 마땅했다.
그러나 늑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수많은 노림수 끝에 회심의 일격으로 이루어낸 과실이 생채기에 불과함에도 마음이 꺾이지 않을 것일까.
시선을 마주한다.
눈동자에서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잇신이 보내는 시선은 놀라움과 대견함, 그리고 즐거움.
늑대의 눈동자 속에는 경외심... 그리고 희망과 투쟁심이 불타올랐다.
역시 잇신이 인정한 남자다웠다.
그러나 늑대는 지쳐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자세는 불안정하며 검을 든 손이 떨릴 정도로 심력을 소모했다.
누가봐도 늑대에게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닌자의 기술도, 무사의 기술도, 금단의 기술조차 모두 막혔구나. 그토록 지쳐서 이제 어떻게 싸울 생각이더냐."
늑대는 대답 대신 기묘하게 생긴 단검을 뽑아들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 기묘한 은빛을 발하는 굽은 칼날. 손잡이조차 순백색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으로 자신의 목을 쨌다.
상처도 피도 나지 않았다. 대신 회백색의 기묘한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나오다가 늑대의 몸으로 돌아갔다.
과연 무엇을 한 것일까. 다만 늑대의 안색이 아까보다도 창백해졌다. 혼백을 뽑힌듯한 낯빛.
기력을 회복해도 모자랄 판에 자해를 하다니. 피로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늑대의 얼굴이 뭔가 결심을 한듯 굳어졌다.
까드득.
늑대의 입 안에서 뭔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낯빛이 흑색으로 변하며 눈알이 위로 치켜올라간다. 슬며시 벌어진 입에서 푸른색 연기가 숨에 섞여 피어오른다.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휘청이며 땅으로 쓰러지려던 찰나...
은은한 벚꽃색 광채와 함께 닌자의 다리는 다시 땅을 딛었다. 성스러우면서도 불길한 기운을 동시에 담은 힘. 용윤이 그 주인을 죽음에서 끌고 돌아온다. 죽음에서 돌아오며 상처도 기력도 회복된다.
용윤을 통한 부활은 용해를 세상에 풀어놓는 방아쇠. 그렇기에 쿠로는 이를 굉장히 혐오하여 없애려들었다. 그럼에도 쿠로를 섬기는 늑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져서는 안 되는 싸움. 남의 생명을 담보로 잡아서라도 뛰어넘어야 할 남자가 그의 앞에 있었다.
늑대의 각오를 알아챘는가, 잇신은 호탕하게 웃었다.
"좋다, 세키로여. 나도 피가 끓어오르는구나!"
쿵-
잇신이 힘을 담아 진각을 밟자 별안간 거대한 창이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저만한 크기의 장창이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의문도 잠시, 순간 잇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도처에 깔린 갈대보다도 낮게, 몸이 바닥과 평행이 될 정도로 극단적인 하단세. 공간을 접은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검으로 종아리치기를 갈긴다.
늑대가 살짝 몸을 띄워 개문을 피한 순간 이번에는 창으로 올려치며 같이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창날을 막은 쿠사비마루가 부러질 것처럼 떨렸다. 공중에 뜬 채로 막은 탓에 충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검을 땅에 박으며 뒤로 밀려난 늑대. 급하게 균형을 잡는 그의 목에 소름이 돋았다.
달을 등진 잇신의 왼팔이 용수철처럼 힘을 모았다. 그 손에 굳게 잡힌 장창의 살벌한 날이 늑대를 조준했다. 압축된 힘을 해방한 순간, 창끝이 공간을 꿰뚫는다.
간신히 박자를 맞춘다.
창날을 발로 눌러밟으며 잇신의 품 속으로 달려들어 간격을 줄인다. 칼을 찔러넣기 직전...
탕!
파열음과 함께 늑대가 땅에 나뒹굴었다. 급하게 바닥을 집고 일어서는 그의 가슴팍이 찢겨 있었다. 간신히 칼로 받아냈지만 몸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피를 떨쳐낸 늑대의 눈에 회색 연기가 피어나는 잇신의 손이 보였다.
잇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몸통이 두꺼운 총기. 화포에 가까운 생김새를 가진 그것에서는 아직까지도 연기가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었다.
'검성이라면서?'
검뿐만 아니라 창에 총까지. 늑대는 뭔가 사기를 당한듯한 기분을 느꼈다.
멋들어진 동작으로 총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잇신이 왜 그러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싸움에 수단을 가리는 것은 그에게 자기기만이나 마찬가지였다.
늑대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총과 개문을 바꿔쥔 잇신이 짓쳐들어왔다.
검에서 창으로, 그리고 다시 창에서 검으로. 검과 창을 자유로이 오가는 잇신의 연격은 태풍과도 같았다.
중거리에서는 묵직한 창이 그의 목덜미를 노렸고 다가가면 창보다 배는 빠른 검이 빈틈을 매웠다. 숨이라도 돌리려 거리를 벌리면 이번엔 화포가 불을 뿜었다. 공격과 방어, 그 어디에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큿...!"
굳게 다문 늑대의 입 사이로 신음성이 비집고 나왔다. 속절없이 밀리고만 있는 상황. 지금이야 외줄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텨내고 있지만 버티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잔상처가 쌓이고 피로가 쌓이면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끝. 뒤는 없었다.
'잠깐, 뭔가... 위화감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기묘한 느낌이 늑대의 신경을 거슬렀다.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무결해야할 검성의 공격에 미세한 결함이 느껴졌다. 늑대 정도로 숙련된 검사가 아니라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틈. 그리고 늑대 정도로 숙련된 닌자라면 충분히 파고들 수 있을 정도의 틈.
검성에게 그런 흠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혹여 잇신의 늑대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노출한 빈틈은 아닌가? 그럼에도 시험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 틈을 찌르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늑대는 기척을 '날렸다'.
이는 흔히 말하는 허초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허나 닌자가 날리는 기척은 허초에 살기를 섞어서 쏘아낸다. 따라서 적은 반드시 반응한다.
움찔.
아주 잠깐, 잇신의 몸이 살기에 반응하며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허초에 속지는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그 작은 동작에서 늑대는 알아챌 수 있었다.
위화감의 정체.
일전에 늑대는 노년의 잇신이 검을 뽑은 모습을 단 한 번 볼 수 있었다. 검성이라는 이름답게 한 자루 검 외에는 떨쳐낸 그는 잘 정련된 검과 같았다. 부드러우면서 세련되고 빈틈이 없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한가?
늑대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모습은 황천에서 취한다는 망자의 전성기일 것이다. 신체에 가장 활력이 넘치고 탐욕스레 모든 것을 몸에 익힌 시절의 모습이리라.
정련된 노년의 정신에 전성기의 육신을 더한다. 언뜻 들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 지금의 잇신은 그렇지 않았다. 육신의 혈기에 정신이 휘둘린다. 늑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조차 적응하겠지만 잇신은 분명 고양감에 흥분하고 있었다.
오랜시간 병마에 시달리며 천천히 쇠락해왔다. 갑작스레 되찾은 전성기의 육체. 수십년만에 찾은 검을 맞댈만한 적수. 아끼던 손자의 죽음과 그 목숨을 짊어져야하는 사명. 어찌 고양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이 상황이 늑대의 활로가 될 터였다. 그리고 짐작하고 있는 한 가지 더... 성급해서는 안된다. 잇신이라면 같은 방법에 2번 당하지 않을 터. 간신히 알아차린 틈조차 순식간에 닫혀버리리라. 구름낀 하늘 아래, 어둠을 틈타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호흡을 맞춰간다.
창대를 어깨에 걸친 잇신이 하오리를 휘날리며 한 바퀴 회전해 들어왔다. 깨끗한 곡선을 그려 언뜻 우아해 보이지만 소매자락에 가려 다음 동작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닌자의 눈은 잇신을 읽어냈다.
카창!
사선으로 떨어지는 쾌검이 공간을 가위자로 베어낸다. 초고속의 2연격을 막아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밑 사각으로부터 창날이 솟구친다.
튕겨낸 순간, 하늘로 향하던 창날이 방향을 바꿔 폭포수처럼 내려찍힌다. 간신히 흘려내지만 그 충격은 심대. 순간 풀려버린 다리를 수습하고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이미 늑대의 옆구리를 향해 창날이 들이닥쳐온다. 지척에 달한 순간에조차 반응해낸다.
늑대의 머리 위로 슬쩍 빗겨나간 창날을 회수한 잇신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변칙적인 궤도로 돌아들어온 창날은 방금과 같은 궤적을 그렸다. 그 위력은 아까의 배가 되어 쏘아진다.
으드득-
이를 악물고 버티자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늑대의 입안을 비집고 새나왔다. 그 인고의 끝에 늑대가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창의 4연격 후에 이어질 찌르기. 그 틈을 파고든다.
'...지금!'
바닥에 깔린 갈대가 터지듯 비산하며 늑대가 돌진했다. 그런데...
'찌르기가 아니다?'
찌르기라면 지금쯤 그의 코앞에 보여야 할 창날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반쯤 돌린 잇신의 옆으로, 창날이 갈대를 파해치며 돌아들어오는 것이 그제야 보인다. 갈대밭을 뿌리채 갈아버릴 기세로 낮게 깔린 창격.
아슬아슬하게 뛰어오른 늑대의 짚신 밑창이 뭉텅 파여나갔다. 공중에 낮게 뜬 상태로 내려오는 늑대는 보았다.
이미 발도 직전 힘을 응축한 개문과 그것에서 흘러넘치는 흑백색 불온한 기운을.
이윽고 검은 용이 검집에서 뛰쳐나오며 그 흉포한 아가리를 벌려 늑대와 달을, 구름을 집어삼켰다.
분명 삼켰을 터였다.
하지만 잇신의 본능은 '그럴 리 없다.'라고 외쳤다. 불사베기의 여파가 잦아들고 산산이 흩어지는 까마귀 날개깃을 보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왼손의 창을 찔러넣는다.
피싯-
창을 쥔 손에 잡히는 감각이 있다. 스치듯이 베어낸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자 이미 안개처럼 흩어지는 잔영만이 자리했다.
'다음은 어디냐, 뒤? 옆? 위?'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기척을 기다린다. 매서운 눈매로 어둠을 꿰뚫어보고, 밤 공기 가운데 피 냄새를 쫒는다. 그리하여 알아차린 늑대의 위치는...
"아래!"
외침과 동시에 잇신의 개문이 벼락처럼 떨어져내렸다. 검의 궤적 아래 위치한 늑대와 눈을 마주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늑대의 의수장치가 작동할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이번 공격도 분명 환영처럼 흘려내리라 예상하며 다음을 준비한다.
촤악-
아니었다. 개문을 몸으로 받아내고는 늑대는 잇신의 품 속으로 들어왔다. 그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돌진을 오판한 탓에 잇신의 반응도 한 박자 늦어진다. 핏방울을 뒤로하며 은색의 송곳니를 잇신의 가슴팍에 꽂아넣는다.
퓨슉-
쿠사비마루가 마른 가죽을 찢고 질긴 근육을 가르며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간다. 심장에 그 칼끝이 닿기 직전,
순간적으로 잇신이 몸을 비틀며 칼날을 손으로 잡아챘다. 방향을 잃어버린 쿠사비마루가 가슴팍에 긴 상처를 남기고는 빠져나왔다.
이 몸에 칼자국을 새긴 때가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을지.
이리도 즐거운 칼부림을 나누는 것이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을지.
이리도 혈기가 들끓는 것이 과연 언제가 마지막이었을지.
잇신은 크게 웃었다. 광포한 웃음소리에 차가운 밤공기가 요동치고 하늘의 구름마저 술렁였다. 샛노란 섬광이 번뜩이고 뇌명성이 공기를 찢어놓았다.
잇신으로써도 처음 시도해보는 기술. 살아생전에는 그저 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던 신기. 흙바닥에 발자국을 깊게 남기며 그는 뛰어올랐다. 공기를 머금은 하오리가 넓게 부풀며 마치 날개인 양 펼쳐졌다. 하늘로 비스듬히 치켜든 창날에 벼락이 떨어진다. 벼락은 잇신의 몸을 태우지 않고 창대를 따라 길게 늘어뜨려졌다.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번개의 창과 하오리 날개를 펼친 잇신의 모습은 흡사 신화 속 천신과도 같았다.
...겐이치로를 제물로써 황천에서 돌아온 잇신은 어렴풋이 느꼈다. 오카미 무사들의 비전 기술인 뇌격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는 새로이 기술을 습득한 흥분과 동시에 가여운 손자에게 바치는 추모이기도 했다. 또한 그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늑대에게 표하는 경의이기도 했다. 마침내 잇신의 손을 따라 벼락의 파도가 밤하늘을 내달렸다.
그 초월적인 광경 앞에서도 늑대는 태연자약했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왔다. 겐이치로의 뇌격을 보고 뇌반으로 그를 격퇴했다. 문헌을 보며 겐이치로의 스승, 토모에의 검술을 먼 발치에서나마 느꼈다. 기원의 궁에서 앵룡에게 다가가며 수많은 오카미 무사들과 싸워 그들의 기술을 보았다. 그렇게 늑대는 본 적 없는 토모에의 검술을 상상 속에서 재연해보길 거듭했다. 그리고 지금, 머리로만 어렴풋이 생각했던 그것이 현실에 체현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라면 이렇게...'
빙글.
늑대의 몸이 제자리에서 돌았다.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회전. 시냇물이 바위를 만나 돌아흐르듯 그는 물줄기가 되었다.
늑대가 땅을 차고 올랐다. 그가 내딛는 곳이 그가 걸어가는 길이었다. 원한다면 바위 틈으로, 구름 사이로도 드나들 수 있으리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유로운 바람이 되었다.
손 끝에 걸치듯 잡은 쿠사비마루의 검끝이 회전하는 궤도를 따라 나선을 그렸다. 이미 늑대와 하나가 된듯 검은 자연스레 그로부터 뻗어나왔다. 늑대는 한 그루 나무가 되었다.
늑대는 흐르는 물줄기가, 자유로운 바람이, 장대한 나무가 되었다. 무(武)이면서 동시에 무(舞). 그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름다운 춤이었다.
그 춤에 미혹되기라도 한 것일까. 늑대의 코앞까지 들이닥치던 벼락이 그의 칼끝을 홀리듯 따라갔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 이름 없는 나무였던 늑대는 마침내 뇌광으로 만개했다. 벼락이라는 꽃잎을 흐드러지게 날리는 거대한 벚꽃나무가 되어 어두운 밤하늘을 눈부시게 수놓았다.
하여, 이 춤의 이름은 앵무(櫻舞)였다.
'토모에...!'
잇신은 꽃잎을 피할 수 없었다. 늑대의 춤이 불러일으킨 향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애수 때문이었을까.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류가 흐르며 피부를 터뜨리고 근육을 경직시켰다. 뇌격을 고스란히 맞았음에도 의식을 잃지 않고 버텨냈지만 눈 앞에 다가오는 늑대의 검만은 피할 길이 없다.
챙!
검과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힌다. 단순한 힘싸움. 그러나 뇌격이 훑고 지나간 팔다리는 아직 주인의 통제를 따르지 못했다. 거기에 왼손에 창을 들고 있기에 한 손만으로 늑대의 검을 받아내야 했다. 결정적인 힘차이에 잇신의 팔이 안으로 비틀린다.
늑대는 한 걸음 더 힘껏 내딛으며 검을 올려쳤다. 순식간에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잇신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이미 늑대가 한 번 칼침을 놓았던 곳. 정확히 같은 자리에 다시금 칼이 관통해들어간다. 단숨에 심장을 관통한 쿠사비마루가 주인의 인도에 따라 갈비뼈 사이를 가르며 뛰쳐나왔다. 반응할 틈조차 없는 깔끔한 동작. 잇신의 심장조차 베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듯 잠시 후에 피분수가 쏟아져나왔다.
검성의 몸이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무릎이 꺾이고 힘을 잃은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향했다.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쓰러지기 직전,
"하압-!!!"
기함성에서 뻗어나간 충격파가 갈대밭을 울렸다. 숨통을 끊었다고 확신한 늑대마저 반사적으로 검을 다시 들어올릴 정도의 기백.
귀신 같은 기백을 토해낸 잇신은 당당하게 가슴과 허리를 펴고 정좌해 앉아 있었다. 불사의 몸일지라도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심장이 파열된 몸을 정신력만으로 이끌어 그는 몸을 바로세웠다.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장군의 모습처럼.
"쳐라!"
당찬 한 마디가 늑대의 가슴을 울렸다. 쿠사비마루가 심장을 관통했음에도 불사자에겐 치명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잇신은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그는 이 세상, 이 자리에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망자는 망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법. 산 자들의 세상은 산 자의 손에 맡겨야 하는 법이었다. 가없은 손자의 부탁에 결국 이 자리까지 오고야 말았지만 끝맺음을 할 순간이었다.
잇신의 마음을 짐작한 듯 늑대가 조용히 붉은 불사베기, 배루를 뽑아들었다. 본디 피를 탐하는 것처럼 붉은 사기를 흘려대던 배루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갈하게 칼날만을 핏빛으로 물들일 뿐이었다. 늑대는 배루를 바로잡고 마음속으로 조문을 읊조렸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잇신 님...'
신중하게 검이 향할 곳을 조준한다. 고통없이 단번에 끊어내는 것이 잇신에게 바칠 수 있는 마지막 경의였다. 늑대의 몸이 과장되게 젖혀지며 배루가 하늘 높이 쳐들어졌다.
샥-
깔끔한, 더없이 깔끔한 마무리.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의식이 멀어져가는 가운데, 잇신도 늑대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마지막까지 즐거운 사투를 벌일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훌륭...하다...세키로..."
"......안녕히."
검 한 자루로 세상을 호령했던 검성의 몸이 차가운 갈대밭 위로 스러졌다. 노환과 병환에 시달리다 그가 절대 원치 않는 형태로 한 번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겐이치로의 이끔을 받아 결국 사투 속에서 눈을 감은 그의 표정은 더없이 편안해보였다.
그의 이름, 잇신이었다.
"쿨럭-"
쓸쓸한 표정으로 잇신을 바라보던 늑대가 별안간 피를 토해냈다. 잇신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맞았던 개문이 만든 상처. 생각보다 깊숙히 몸 안으로 들어온 칼날이 내장을 잔뜩 해집어놓은 탓이었다. 늑대 또한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정신력으로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쿠로님... 어디에...'
피를 너무 흘렸는가, 시야가 흐렸다. 사투의 고양감이 끝나자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 듯 했다.
"어디에... 있느냐... 늑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힘 없이 떨리는 쿠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늑대는 땅을 기다시피하며 갈대밭을 가로질렀다.
쿠로의 곁으로.
백옥처럼 차게 식은 쿠로의 얼굴이 보였다. 늑대는 조심스레 쿠로의 머리를 받쳐들었다. 숨소리가 너무나도 미약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늦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쿠로와의 작별 인사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
"...곁에 있습니다."
늑대의 손에는 어느새 분홍빛으로 빛나는 구슬과 벚꽃이 핀 가지가 들려있었다. 기원의 궁에서 앵룡을 베고 받아낸 '용의 눈물', 그리고 자신의 의부를 처단하고 얻은 '상앵의 꽃'이었다. 쿠로가 짊어진 저주받은 윤회를 끊어내고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쿠로조차 모르게 준비한 물건이었다.
늑대가 그것들을 쿠로의 입가에 내밀자, 흐르듯이 쿠로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늑대와 눈을 마주친 쿠로는 고통이 심한 것인지 외마디 신음성과 함께 고개가 모로 넘어갔다.
용윤의 피를 이어받은 불사는 그 주인을 옭아맨다. 늑대가 살아숨쉬는 한, 용윤의 저주는 언제까지고 쿠로를 놓아주지 않으리라. 늑대와 쿠로, 닌자와 주군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스릉-
불사베기의 붉은 날이 늑대 스스로의 목에 드리워졌다. 어느덧 동쪽에서 새벽녘이 밝아와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아침 노을을 보며 늑대는 생각했다. 불사를 죽이고 쿠로의 마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살겠노라고. 죽음으로써 불사를 이루고 쿠로와 함께 다시금 죽겠노라고. 그림자는 주군과 함께하는 것이니-
"마지막 불사, 처단하겠습니다."
늑대는 마지막으로 쿠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으로서 살아가 주십시오."
...하얀 갈대밭에 붉은 벚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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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태양은 아침 노을을 몰고 떠올랐다. 이제는 전쟁이 남긴 상처도 대자연에 묻힐 때쯤, 순백의 갈대가 흐드러지게 핀 갈대밭 사이로 새로 생긴 작은 비석이 하나 있었다. 비석 앞에는 먼지가 드러앉은 칼이 하나, 그리고 조촐하게 피워진 향과 그것을 피운 여인 한 명이 조용히 양손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떠나보낸 그녀의 이름은 에마였다.
눈을 감고 넋을 달래던 에마의 옆으로, 슬며시 사람 그림자가 다가왔다. 작은 체구에 짚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은 슬쩍 에마를 보더니 그 옆에 꿇어앉아 똑같이 손을 모았다.
"가시는군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에마였다. 두꺼운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작은 괴나리 봇짐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칼까지. 아시나 땅을 떠나기 위해 단단히 채비를 갖춘 모양이었다.
소년, 쿠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마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 강하지만은 않았던 소년의 눈동자는 이제 화염과 강철처럼 굳센 의지가 깃들어 있는 듯 했다.
"예."
쿠로는 말을 이었다.
"저도 인간으로서 열심히 살다가... 그렇게, 죽으려고 합니다."
그날 밤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서야 쿠로는 에마에게서 늑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전해들을 수 있었다. 몇날 며칠을 비탄에 빠졌지만 쿠로 또한 늑대의 마지막 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늑대의 의지를 이어나가고자 했다. 늑대가 바랬듯이,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아파하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살 것이다.
"제 닌자가 그러했듯이."
쿠로는 묘비 앞에 놓여진 검, 쿠사비마루를 바라보았다. 쿠사비마루란, 쐐기. 쿠로가 늑대에게 검을 하사하며 붙여준 이름. 그 이름처럼 늑대는 인간으로서 죽었다. 쿠로 또한 늑대를 쐐기 삼아 삶을 이어나가리라.
"에마 공께도 신세 많이 졌습니다."
마지막 인사와 남기고 쿠로는 천천히 갈대밭을 넘어 걸어갔다.
그는 살아갈 것이다. 인간으로서. 그의 그림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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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것도 아니고 웃긴 것도 아니고 그냥 진지빨고 쓴 글이네. 언제 반전나올까 생각하며 읽었는데 시간만 날렸네... 비추
이런게 문학이다 새끼야 책좀 읽어라
문학은 씨발 민음사 전집이 문학이고 이딴게 문학? 씨발 얼탱이가 없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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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낮과 밤조차 그 경계가 모호한데 넌 어찌도 그리 나누려하는가
진짜 항상 글 잘보고 있음 ㄳㄳ
이거보고 세키로 깔았다 - dc App
문학 시리즈로 다 정리 가능하네?
글 진짜 맛잇게쓴다 - dc App
중간에 잇신 올빼미 떡씬 뭐냐
이 갤은 완장이
잇신이랑 늑대 전우애 ㅇ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