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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발버둥 치는 한은.

나날은 길었고 우리는 지쳤다.

나약한 정신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유지는 이어져야만 한다.

매달리는 자들처럼 지독하게.

그래매달리는 자같이.

 

이제는우리의 먼 고향이 어떤 꽃을 피웠고

우릴 기다렸을 아내와 아들딸들의 미소는 커녕

그들의 사랑스런 눈동자가 어떤 색으로 빛났는지

그들을 껴안았을 때의 온도는 어떠했는가,

팔뚝을 가만히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작은 솜털들의 보드라움은 어땠는지

흐리다.

 

망각이여우리에게 오라.

 

시뻘건 하늘처럼 불쾌하게 썩어들어가는 대지.

대체 무얼 위해 바람에 흔들리며 비에 젖는가.

저 멀리서 꿈틀대는 검은 짐승들은

부패가 피워낸 역겨운 곰팡이와

발효된 버섯이 피부를 뚫고 나온 악취나는 시체들을

게걸스레 파먹다가 알 수 없는 적의로 가득찬

두 눈을 부라리며 곧장 우릴 향해 달려온다.

 

아득히 먼 옛 전쟁의 먼지들,

이젠 더럽혀진 짐승들을 죽이기 위해 휘두른다.

자세를 한껏 숙여 발톱을 피한 후

온 힘을 다해 아래에서부터 위로

이 감옥같은 하늘을 뚫어버릴 기세로 찌른다.

짐승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몇 개의 대검이 기계적으로 뇟덩이에 꽂힌다.

수천만 번을 넘게 죽였다.

분명히 어디선가 다시 나타난다.

상관없다나타나는 만큼 베면 그만인 것 아닌가.

 

작은 소음에 큼지막한 귀를 펄럭대더니

몇 마리의 짐승이 우릴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뒤쪽에 하얀 녀석이 몇 마리 있는 걸 보니 느긋했던 상황은 변한다.

한참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졸병 하나가 나팔을 분다.

수천만 번을 넘게 들었다.

 

대방패를 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앞쪽으로 달려나가 전열을 잡는다.

대검을 쥔 병사들은 뒷주머니에서 화염탄을 꺼낸 채 대기하고

석궁병들은 재빨리 볼트를 장전해놓는다.

졸병들은 잘 보이지 않는 바위나 벽 틈 사이에 은밀히 숨어

짐승들의 발목을 베어 혈관을 끊어두기 위해 벼려둔 단검을 대충 슥슥 닦는다.

하얀 녀석이 포효하고 곧 십수 마리의 괴물들이 침을 흩뿌리며 미친 듯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난 가만히 서서미리 기름을 발라둔 창에 손가락을 튕겨

발화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다.

 

불꽃육신과 영혼을 산 제물로 태우며 그가 보인 유지.

먼 산령에서 온 불의 사제들을 대동한 채

뚱뚱한 철갑보다도 기괴한치렁거리는 주홍색 수염을 투구 아래로 휘날리던 거구의 주교가

적사자성을 드나들던 것이 기억난다.

장군은 분명 그들의 불꽃에서 번뜩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엄니 모양의 낡은 방패를 등에 메고타오르는 창을 양손으로 꽉 쥔 채 짐승들에게 돌격한다.

흥분한 짐승의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고 옆으로 피한다.

옆에서 눈을 가볍게 찔러둔 뒤 몇 발자국 물러난다.

성난 짐승은 머리를 돌려 아가리를 쩍 벌린다정면에서 기다리다 혀와 함께 턱을 통째로 찔러 땅에 박아둔다.

차례를 기다리던 병사가 대검을 휘둘러 목을 두동강 낸다.

그리고 달려드는 다른 짐승.

다시 피하고병사의 화염탄이 짐승의 시야를 돌린다.

창을 뽑고 다시 짐승에게 돌격한다..

 

벌건 먼지가 불어온 쾌쾌한 바람에 걷히고 비루한 극장같은 전장이 다시 드러난다.

수천만 번을 반복해온 이 싸움에 느껴지는 염증같은 것은 없어진지 오래다.

짜여진 극본처럼 모든 행동은 일정했고쓰러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른바적사자에 나약함은 없다..

하지만 없어진 것에 가깝다.

나약한 정신은 이미 죽었다.

 

춤추는 아가씨들뛰노는 아이들푸른 초목과

살결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포근히 안아주는 아늑한 창공.

타닥타닥작은 불이 일렁이는 난로가 환히 비추는 집.

갓 구운 노릇노릇한 빵 한 조각에 푸짐하게 바른 버터 한 움큼.

우유 한 잔과 천천히 씹어삼킨 후엔 사슴의 생가죽으로 깔아둔

양탄자에 편안히 앉아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동화.

모두 그을렸다.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썩은내가 가실 줄 모르는 짐승들의 사체에서 벌써 구더기들이 기어나온다.

노련한 병사들이 끈으로 몸뚱이를 묶어 하나 둘 옮긴다.

금새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를 멍하니 지켜보던 병사는 들고 있던 횃불을 무심히 던진다.

 

화르륵불이 짐승들을 순식간에 삼킨다.

기사부터 병사졸병까지 가만히 서서 미친 듯이 춤추는 불꽃을 쳐다본다.

무감정한 얼굴들닳고 바래버린 마음에서 더 이상의 표정 같은 게 나올 리 없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우리가 발버둥 치는 한은.

하지만우리가 발버둥 치기에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 아닌가.

 

이 따듯한 불꽃에 안기면 저 짐승들처럼 안식에 잠길까.

 

무거운 흑철 투구를 벗는다한 발자국씩 불꽃에 가까워진다.

병사들은 가만히 나를 지켜본다.

불씨가 들러붙어 나부끼며 타오르는 적발 장식을 쳐다본다.

 

불타는 적발.

 

새빨간 석양을 뒤로 그는 초연하게 최후를 받아들였다.

 

그는 단순무식했다하지만 강했다.

그는 전장에서 무서울 만큼 무자비했다하지만 마땅한 의리를 지켰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고지식했고 완고했다하지만 명예를 알았다.

 

수천만 번이 넘는 싸움.

사명과 책임감을 벗어버리고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목숨과 뜻을 바쳐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주군을 지키지 못한 패군의 역할이어야만 한다.

이 가엾은 인간들은 그렇게 명예에 묶였다.

 

누군가는 이름조차 흐릿해진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들의 땅에

이 역겹고 토악질 나는 붉은 부패가 퍼지지 않도록 지키고 서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모든 걸 불태울 때까지 결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화마처럼

그을려버린 추억과 마음을 품은 채로 이 검과 창과 방패를 꽉 쥐고 있어야 한다.

 

먼 고향이여이젠 돌아갈 일이 없겠구나.

우리는 이 땅에서 계속 부패를 억누르겠다.

 

멀리서 까악대는 소리가 들린다.

반쯤 그을린 흑철 투구를 도로 쓰고 가슴을 두드린다.

 

불이여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