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빛바랜 자... 이젠 미친 불의 왕인가.”
멜리나가 오른손에 단검을 쥔 채 빛바랜 자 앞에 서있었다. 미친 불과 하나가 되어버린 빛바랜 자의 얼굴에서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노란 불길의 형상만이 머리가 있던 자리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수개월 전
빛바랜 자가 엘레의 교회에 피워진 모닥불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덩달아 그의 갑옷에서 절그럭거리는 금속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는 땀에 젖은 투구를 벗어 내려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어때, 오늘은 진전이 있었어?”
모닥불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칼레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별 볼일 없는 방랑상인처럼 보였지만 나름 림그레이브에서 잔뼈가 굵은 터줏대감이었다. 그는 엘레의 교회 앞을 순찰하는 트리가드를 이겨보겠다고 며칠째 덤비는 빛바랜 자가 웃길 따름이었다.
“저놈 멀쩡하게 다니는 거 안 보여?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빛바랜 자가 엄지로 등 뒤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엘레의 교회의 부서진 벽 너머로 트리가드의 황금빛 갑옷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판금갑옷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다른 곳에서 실력을 기르고 오는 건 어때? 주변의 동굴이나 묘지 같은 곳에도 괴물들이 득실거린다고.”
“그건 됐고, 저 놈 약점 같은 건 없어?”
“저 무식한 갑옷에 약점이 어디 있겠어. 마법도 방패로 튕겨내는 놈인데. 그나저나 손님이 온 것 같네.”
칼레가 손가락으로 빛바랜 자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의 뒤에 망토를 두른 한 여인이 서있었다. 기척 없이 뒤에서 나타난 사람에 놀란 빛바랜 자는 황급히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그녀는 그의 경계태세에 아랑곳 않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 안개 너머에서 온 자.”
분홍 빛깔의 단발머리와 흉터로 덮인 왼쪽 눈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내 이름은 멜리나.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어.”
“거래?”
빛바랜 자가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되물었다.
“당신은 손가락의 무녀에 대해 알고 있어?”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손가락을 섬기며 빛바랜 자를 돕고 이끄는 존재.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빛바랜 자임에도 무녀가 없어. 그러니 내가 당신의 무녀가 되어줄게. 나는 룬을 당신의 힘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 엘든 링으로 향하는 여정에 도움이 될 거야.”
“거래라면,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나를 황금나무 기슭까지 데려다 줘.”
“다른 조건은?”
“나를 황금나무까지만 데려다 주면 돼. 그게 전부야.”
데미갓들의 거대한 룬을 모아 엘든 링을 수복하는 것이 빛바랜 자의 목표였고 엘든 링은 황금나무에 있었기에, 멜리나의 제안은 빛바랜 자가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좋아, 거래를 받아들이지.”
그제야 빛바랜 자는 검을 집어넣고 멜리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토렌트가 당신을 선택했어. 스스로 빛바랜 자를 선택한다는 신비한 준마야. 부디 소중하게 대해 줘.”
그녀가 악수 대신 금빛 반지를 건넸다.
“반지를 낀 손으로 휘파람을 불면 토렌트가 나타날 거야. 용맹한 아이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빛바랜 자는 왼손 검지에 반지를 끼고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이내 두 사람은 축복에 앉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명을 받아 황금나무로 가야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며, 그녀의 육신은 불타 없어져 영혼만이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대화를 하면서 빛바랜 자의 마음속에서 멜리나에 대한 호감이 피어났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와 어딘가 모르게 아련해 보이는 눈동자가 자아내는 신비함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사로잡았다. 빛바랜 자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지만 멜리나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변함없는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룬을 힘으로 바꾸고 싶으면 축복에서 나를 불러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멜리나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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