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무녀를 살리기 위해 이 세계를 잿더미로 만들어도 상관없나?”

바이크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빛바랜 자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투구 속 그림자에 가려져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빛바랜 자는 날카로운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멜리나를 살릴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멜리나라, 아름다운 이름이군. 그녀는 네가 미친 불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너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지. 어차피 나를 죽여서라도 알아낼 테니...”

바이크가 곁에 놓인 자신의 창을 짚고 일어섰다.

나를 이기면 미친 불의 손가락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

바이크가 전투태세를 갖춤과 동시에, 투구 속 두 눈에 노란 불길이 번져나갔다.

전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빛바랜 자가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미친 놈 치고는 물러 터졌어.”

바이크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깜짝 놀란 빛바랜 자가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바이크가 창을 내려찍은 곳에서 세 갈래 불길이 전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빛바랜 자가 불길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빛바랜 자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바이크가 불길을 밟으며 그를 향해 내달렸다. 거리를 내준 빛바랜 자는 맹렬한 기세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캉캉캉. 금속끼리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봉인감옥을 가득 메웠다. 이내 바이크가 뒤로 물러서더니 왼손으로 투구를 감싸 쥐었다.

으으아악!”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바이크의 두 눈에서 노란 불길의 광선이 순식간에 뻗어 나왔다. 빛바랜 자가 본능적으로 광선을 방패로 막아냈지만, 방패를 타고 번지는 열기에 왼손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그는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정신마저 불태우는 저주받은 힘이다. 쓰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고통에 시달리지.”

바이크의 투구 속 불길이 한층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이내 그는 바닥에 자신의 창을 꽂고, 양손으로 투구를 감싸 쥐었다.

크아아악!”

바이크의 격해진 비명과 함께 수많은 불길이 그의 두 눈에서 뻗어 나와 빛바랜 자를 덮쳤다. 불길에 전신이 집어삼켜진 빛바랜 자의 머리 안쪽에서부터 두 눈을 불태우는 끔찍한 고통이 터져 나왔다. 빛바랜 자는 검을 놓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찔한 고통에 신음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바이크도 괴로운 듯 비틀거렸다.

네가 받으려는 힘이 이런 것이다. 미친 불이 강해질수록 고통도 함께 커지지. 고통에 익숙해질 거라 생각하지 마라. 겪을수록 맹렬하게 파고드는 것이 고통이다.”

바이크가 다시 창을 뽑아들고 거리를 좁혀왔다. 바이크가 다가오는 소리에 빛바랜 자는 서둘러 방패를 들고 일어났다. 몸을 웅크려 피격 면적을 줄이고 양손으로 방패를 붙들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시야 속에서 상대의 창을 찾아내어 공격을 막아냈다. 방패를 타고 느껴지는 충격이 이전보다 약했다. 바이크의 힘이 약해진 탓이 아니라, 열기로 인한 고통에 감각이 둔해진 탓이었다. 조금 정신을 차린 그는 머리로 날아오는 내려치기 공격을 방패로 튕겨냈다. 이어서 즉시 방패를 던지고 치고나가며, 양손으로 바이크의 허리를 감싸 안아 상대를 밀어 넘어뜨리려 했다. 바이크는 넘어지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순간 주춤했다. 빛바랜 자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손으로 바이크의 오른 발목을 잡아당기고, 왼손으로는 여전히 그의 허리를 잡은 채로 밀어내며 그를 넘어뜨렸다. 빛바랜 자는 재빨리 바이크 위를 깔고 앉아,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그의 목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