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빛바랜 자는 아직도 남아있는 고통에 말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글쎄... 너무 오랫동안 앉아만 있었더니 몸이 굳어버린 걸지도 모르지.”
바이크는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다는 듯, 손에서 창을 내려놓았다.
“미친 불의 손가락은 로데일 우물 아래 숨겨진 지하에 있다. 흉조들을 지나 최하층에 도달하면 만날 수 있지.”
어느새 바이크의 투구 속에서 타오르던 노란 불꽃이 사라져있었다.
“이제 끝내라.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
“처음부터 죽음을 원한 겁니까.”
“네게서 느껴지는 룬의 힘만으로도 알 수 있다.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빛바랜 자가 바이크에게서 이질적인 힘을 느꼈듯이, 바이크도 빛바랜 자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언 하나만 들어줘.”
빛바랜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삭스라는 고룡을 만나면 미안하다고 전해줘. 고룡과 인간이 친구라니, 미친 소리 같겠지만 사실이니까 말만 전하면 돼."
바이크가 누운 채로 자신의 투구를 벗어던졌다. 죽음을 앞둔 바이크는 두려움도, 고통도 없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빛바랜 자는 바이크를 깔고 앉은 몸을 일으켜 그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름의 예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부디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빛바랜 자의 단검이 눈을 감은 바이크의 목을 수직으로 관통했다. 틈새의 땅 역사상 처음으로 엘데의 왕좌에 도전한 자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빛바랜 자는 바이크의 투구와 창을 챙겨 봉인감옥을 빠져나왔다. 그는 봉인감옥 근처에 투구를 묻고 창을 꽂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묵념했다. 부디 저편에서 바이크와 하미라가 만나 서로를 용서하기를, 또한 자신에게 바이크와 같은 비극이 찾아오지 않기를 빌면서.
......
“처음부터 찬찬히 살펴나가자.”
빛바랜 자가 로데일 성벽 외곽 축복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로데일의 숨겨진 지하로 가는 우물을 찾기 위해 성벽부터 전부 둘러볼 생각이었다. 축복의 왕이 쓰러졌음에도 성벽에는 여전히 신탁의 사자와 병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왕이 떠난 도읍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빛바랜 자는 기억을 떠올리며 혹여나 놓친 곳이 있지는 않을까, 이전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도읍을 탐색해나갔다. 그러던 와중에 도읍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 폐인들이 배회하는 거리 구석에서 한 우물이 그의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우물에 사다리가 달려있었다. 물이 없는 우물에 사다리라니, 지하로 가는 길이 분명해 보였다. 빛바랜 자는 망설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우물은 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 바닥에 도착하자 물은 별로 없었지만 악취가 가득한 하수도가 펼쳐졌다. 빛바랜 자는 횃불을 들고 길을 따라 더욱 더 아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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