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가...”
하수도의 끝에서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흉조들이 무기를 든 채 배회하고 있었다. 빛바랜 자는 이따금씩 지하묘지나 성에서 흉조를 본적이 있지만, 이렇게 많은 흉조는 처음이었다. 거기에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빛바랜 자는 그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었음에도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통로 벽의 닫힌 문을 열자 자그마한 축복이 보였다.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저주받은 자들이 버려진 곳에 축복이라니, 참으로 잔인한 세계라는 생각에 잠시 슬픔에 잠겼다. 빛바랜 자는 그를 보자마자 죽일 듯이 덤벼오는 흉조들을 베어나가며 좁아지는 하수도관을 지나, 작은 승강기에 도달했다. 승강기를 타고 또 다시 아래로 내려가자 거대한 방이 나타났다. 촛대가 놓인 식탁들과 많은 의자들이 방안에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마치 연회장 같은 분위기의 방이었다. 벽을 따라 천천히 방을 살피던 중, 입구와 마주보고 있는 벽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벽의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가 주먹으로 벽을 두드리자, 벽이 아래로 내려가며 숨겨진 길이 나왔다. 그곳엔 수없이 많은 병자들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미친 불의 병으로 고통 받다 영혼마저 불타버린 사람들이었다. 일일이 애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체들을 뒤로 한 채, 빛바랜 자는 위험천만한 구조물을 타고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그곳엔 수상하게 닫힌 석문(石門)만이 존재했다. 벽 너머에서 강력한 존재가 느껴졌다.
“제발 멈춰줘.”
떨리는 목소리가 빛바랜 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게 이 세계를 바로잡고, 네가 사는 유일한 길이야.”
“그 길은... 이 세계의 모든 삶을 지워내는 길이야. 틈새의 땅이 아무리 저주와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삶의 소중함을 이 세계로부터 앗아가지는 말아줘.”
“...나에겐 네 삶이 가장 소중해.”
멜리나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뭔가 서운하네. 처음으로 눈물이 맺힌 그녀의 표정을 본 빛바랜 자의 생각이었다.
“네가 언젠가 이해하기를 바랄게.”
빛바랜 자가 돌아서서 석문의 양쪽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미친 불의 왕이 된다면, 나는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어.”
문을 밀려던 그가 멈칫했다.
“그 말, 진심이 아니라고 믿어.”
빛바랜 자가 무거운 석문을 있는 힘껏 밀어서 열자, 방 안에는 세 손가락이 있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리에니에에서 그가 멜리나에게 주었던 꽃다발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축복 덕분일까, 꺾인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꽃들은 싱그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빛바랜 자는 꽃다발을 놔둔 채로 세 손가락에게 다가갔다. 원탁의 두 손가락과는 다르게, 미친 불의 세 손가락은 날카롭고 강렬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 손가락의 주변은 불에 그을린 듯 검댕으로 가득했고, 세 손가락의 피부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 군데군데 물집과 추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친 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세계를 무로 돌려놓기 위해.”
빛바랜 자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하지만 세 손가락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손으로 세 손가락을 두드려도 요지부동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바이크의 갑옷이 떠올랐다. 세 개의 손가락 자국, 바이크도 이곳에 왔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실패했다.
“바이크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라는 겁니까.”
빛바랜 자가 투구를 벗어 내려놓더니 자신의 갑옷 전부를 벗기 시작했다. 절그럭 절그럭, 갑옷을 벗는 소리가 고요함을 방해했다. 속옷만을 걸친 빛바랜 자가 세 손가락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러자 세 손가락이 움직이며 그를 움켜쥐었다. 치이익,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빛바랜 자의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세 손가락이 주는 힘은 바이크의 미친 불과는 다른 느낌의 고통을 수반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의 뼈와 내장이 불타는 듯했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같던 몇 초가 지나고, 세 손가락이 움켜쥔 손가락을 폈다. 빛바랜 자의 몸, 세 손가락이 움켜쥔 자리에는 지문 자국이 벌겋게 남아있었다. 빛바랜 자는 자신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통해 미친 불을 받았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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