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오랜만이야, 빛바랜 자... 이젠 미친 불의 왕인가.”

멜리나가 오른손에 단검을 쥔 채로 서있었다. 흉터에 덮여 감겨있던 그녀의 왼쪽 눈동자가 창백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왕은 로데일의 황금나무 앞, 엘데의 왕좌에 앉아있었다.

잿더미 세계의 왕이 된 기분이 어때?”

그녀는 관광지를 소개하는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손끝에 펼쳐진 로데일은 수십 번은 불에 탄 듯한 폐허의 모습이었다. 형체가 남아있는 구조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까맣게 타버린 숯덩이들만이 곳곳에 쌓여있었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은 탄내를 머금고 있었으며, 흩날리는 재 가루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꽤나 냉소적으로 변했네.”

왕의 목소리는 혼돈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혼탁하게 변해있었다. 왕좌 뒤에 한때 이 세계의 근간이었던 황금나무가 있었지만, 가지와 잎사귀는 모두 불타 없어지고 거대한 숯이 되어버린 줄기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틈새의 땅을 구하겠다던 누군가가 세상을 모조리 불태워서 말이야.”

멜리나가 왼손가락으로 단검의 칼날을 만지며 말했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하지만 나를 죽이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당신을 죽일 만한 무기를 찾느라 늦었어.”

그녀가 왕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또각또각, 신발의 굽이 돌바닥과 만나는 소리가 애잔하게 들렸다.

그 단검은 나에게 안 통할 것 같은데.”

멜리나가 왕의 앞에 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왕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이건... 크아아아악!”

왕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멜리나가 뒷걸음질 쳤다. 미친 불의 비명이 온 세상에 울려 퍼졌고, 아직 꺼지지 않았던 세상의 노란 잔불들이 주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덩달아 날뛰었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붙들었다.

미켈라의 침이야.”

그건... 그건... 내가 직접 불태웠을 텐데... 어째서...”

왕의 몸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불길을 쏟아내고 있었다. 왕좌 주변이 온천수를 뒤집어쓴 듯 열기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그윈 왕조에 잠든 미켈라를 깨워서 만든 거야. 꽤나 고생했지.”

...켈라... 그 되다 만... 신을... 진작 없앴어야...”

왕의 몸이 통제를 벗어나 더욱 날뛰었다. 왕좌는 이미 불길에 무너져 내렸고, 멜리나도 불타는 열기에 왕과의 거리를 벌렸다. 로데일 곳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이야. 제발 돌아와 줘, 내가 알던 당신으로.”

그녀의 손에는 단검 대신 그때의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꽃잎은 타버려 남아있지 않았고, 줄기는 곳곳이 그을려 부서지기 직전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육신도 없는... 반쪽짜리... 영혼이 감히... 감히... 크아아아아악!”

왕의 비명이 한층 격렬해졌다. 몸은 이미 본래의 형태를 잃었고, 주변을 집어삼킬 듯이 수많은 불길의 손아귀를 뻗어대고 있었다. 멜리나는 열기와 비명소리에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지만, 두 손을 모아 꽃다발을 꼭 쥔 채 간절히 기도했다.

...리나...”

어느새 불길과 비명이 사그라지고, 인간의 형체를 닮은 노란 불덩이가 엎드린 자세로 남아있었다. 멜리나가 왕의 앞으로 뛰어갔다.

돌아온 거야? 당신, 정말로 돌아온 거야?”

그녀는 타는 듯한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왕의 손으로 보이는 두 불덩어리를 붙잡았다. 그녀의 양쪽 뺨에 흐르는 눈물이 주변의 열기에 김을 뿜어내며 증발하고 있었다.

미안해...”

아니야! 제발, 제발, 돌아오기만 해줘!”

멜리나가 목 놓아 울며 왕의 손에 토렌트를 부르는 반지를 끼웠다. 하지만 이미 형체를 잃고 스러지는 손에서 반지가 끼워지지 못하고 떨어졌다. 세상을 태우던 불길은 촛불만큼 작아졌고 이내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틈새의 땅에는 수많은 재와 육체를 잃은 반쪽짜리 영혼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