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게임플레이
우선 게임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로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전체적인 게임플레이 경험에 있어 엘든링은 '오픈월드 다크소울'이고, 세키로나 블러드본보다 훨씬 더 소울스럽다.
전투 시스템은 소울 시리즈의 그것과 90%쯤 유사하며, 전투기술의 대미지와 판정이 훨씬 강화된 점, 점프공격과 영체가 추가된 점 정도를 제외하면 그냥 다크 소울 4라 해도 될 듯하다.
메인보스들은 기존 다크소울 시리즈에서 어려운 보스전에 들어가는 기믹을 꽉꽉 눌러담아(엇박, 칼타이밍 회피를 요구하는 난격기, 구르기캐치, 에스트캐치, 동작 후에도 바로 반격으로 이어지는 페인트 등)
확실히 영체 없이 도전할 때 기준으로의 난이도는 빡센, 그러나 그러면서도 또 도전적인 재미를 제공하는 케이스가 많다(나는 일대다 보스는 그냥 무조건 영체 불러서 깼다).
한편으로 보스들의 패턴이 지나치게 빡세서 스펙빨/딜찍누 없이는 스트레스가 심한 구간이 확실히 있고
이걸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이해가 가기는 하더라.
오픈월드(오픈필드?) 게임이긴 해도 각각의 맵을 진행하는 방식은 거의 다크소울과 같고, 다만 점프가 추가되어 Z축 이동에서의 자유도가 소울 시리즈보다는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낙사 판정으로 Z축 이동을 제한하는 구간이 자주 등장하고,
도저히 죽을 것 같지 않은 높이에서도 떨어져 죽는 등 소울 시리즈 특유의 '묘수풀이에 가까운 수동적인 맵기믹 파훼'는 계속 유지된 느낌이다.
즉 흔히 오픈월드 게임 하면 생각하는 '플레이어가 능동적이고 창발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게임'은 절대 아니고,
제시되어 있는 여러 정답/갈래길 중 하나를 지속적으로 선택해나가는 게임에 가깝다.
단순히 플레이 방식, 탐험, 육성 구조의 유사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테마에서 역시 소울 시리즈의 반복이라는 인상을 준다.
영원을 사는 종족인 고룡과 영원을 잃어버린 후예인 비룡,
고룡들이 지배하던 세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규율(불/황금률)을 세운 신적 존재(그윈/마리카),
빛(불/황금)과 어둠(다크소울/죽음)의 대조, 혼돈의 화염을 떠오르게 하는 악신의 불,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저가는 세계와 찬란했던 황금시대의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면모(작은 론도 유적/미친 불의 봉인) 등등.
또 컨셉 재활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셀프 오마주라고 해야 하나
그런 부분에서도 몹시 다크소울스러운 부분들이 보인다.
벼락을 다루고 대궁을 쏘는 수도의 기사(은기사/로데일 기사)
쥐가 박스를 부수면서 튀어나오고 이상하게 생긴 덩치 몹(최하층 덩치/흉조)이 있는 지하맵(최하층/흉조가 버려진 지하)
거대한 갑각류가 나오는 늪지대(산 제물의 길/리에니에와 림그레이브 늪)
또 데몬즈소울부터 전 시리즈에 걸쳐 개근중인 독늪(에오니아 늪 - 비주얼 면에서 데몬즈 소울의 부패계곡과 매우 닮은 느낌이다) 같은 것.
한편으로는 에셋을 전작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온 적들도 가끔 보이는데
거대 게, 늑대와 개, 황금 나무의 화신, 임프 같은 몹들은 소울 시리즈에 나오는 적과 거의 다를 게 없다. 또 비룡류 보스는 전반적으로 모조리 다크 소울 3의 미디르 보스전을 열화시켜놓은 느낌이다.(특히 비행 브레스 패턴이 미디르랑 똑같이 왼쪽으로 뛰면 피해지는 것.)
요컨대 엘든링은 평면적으로 확장된 소울 시리즈의 정신적 후속작인데,
이 확장된 넓이는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인 거 같다.
일단 풍족한 컨텐츠를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면서, 또 틈새의 땅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더 실감나게 경험하도록 해준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그 대신 필연적으로 서브던전의 재활용을 비롯한 컨셉의 반복은 일어나고(지하묘지, 갱도 등등...),
각각의 스테이지가 갖는 고유한 느낌은 상대적으로 퇴색되며,
배경처럼 지나쳐가는 지역에 실제로 도달했을 때 느끼는 경이감은 줄어든다(오픈월드 구성상 '배경으로 보이는 지역'은 당연히 '실제로 갈 수 있는 맵의 일부'기 때문에).
그래도 각각의 메인 지역들(림그레이브, 케일리드, 리에니에, 알터 고원.....) 및 지하맵은 확고한 테마와 고유성을 가져서 탐험의 재미는 있다.
컨텐츠를 위해서 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돌아다니는 맵이 그자체로 고유한 역사와 시간성을 갖는 공간이라는 것이 잘 전달되며,
아름다웠던 황금 시대의 모습과 무너져가는 시대의 모습, 그리고 시대의 몰락에 저항하는 존재들이 공존하는 모습은 어디서나 잘 표현된다.
공간이 서사의 일부로 기능하고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프롬 소프트웨어 특유의 이야기 문법은
'오픈월드 다크소울' 스타일에서 훨씬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엘든링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부분 역시 탐험인데
맵을 탐험해나가는 과정은 곧 틈새의 땅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경험을 제공하고,
몰락해가는 이 대지가 과거에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세계였는지,
그리고 그 영광의 이면에는 얼마나 거대한 폭력과 억압이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비탄과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 황금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 그리움이 노래되는 순간들은
(예컨대 인면박쥐가 부르는 노래: 오, 한때 아름다웠으나 오늘날 몰락한 땅이여... 우리는 어머니가 될 운명이었는데, 이젠 빛바래버렸네... 황금이시여, 누구에게 노하신 것입니까?)
틈새의 땅이 결코 완전한 가짜가 아니라, 비극적인 몰락과 재탄의 순간에 있는 세계라고 느끼도록 한다.
물론 이런 경험은 다크소울 시리즈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제공했던 것이지만
엘든링의 경우 훨씬 더 잘 다듬어져 있고 풍성하며,
무엇보다도 맵의 규모에서 오는 무게감이 그자체로 한 단계 더 높은 실감을 준다.
2. 테마/스토리
엘든링의 근본적인 테마는 야망,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규율을 세계 전체에 강요하고자 하는 야망이라 생각한다.
호라 루나 말레니아의 대사에서처럼, 틈새의 땅에서는 '힘이야말로 곧 왕의 증거'이다.
이 힘은 물론 직관적인 물리력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단순한 물리력을 넘어 세계 전체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힘을 뜻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힘'이라는 테마야말로 엘든링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만드는 것인데,
틈새의 땅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선악과 무관하거나 혹은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어느 세력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규율을 세계에 강요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금률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질서는 파괴되었으며,
이것은 원론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계' - 즉 현실의 '근대'가 틈새의 땅에 도래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어떤 것을 허용 불가능한 금기로 재지정하고
어떤 것을 권장할만한 미덕으로 설정할 것인가?'
이 질문에 엘든링의 등장 세력들은 나름의 답을 갖고 있으며
일부 예외(이를테면 모그의 이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를 제외하면 각자의 입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예컨대 완전률의 길은 현실의 보수적 자유주의를 떠오르게끔 한다.
즉 인간성이란 규율의 하자에 지나지 않으며, 합리적이고 공정한 규율로 인간을 통치해야만 한다는 발상은 명백히 자유주의적(동시에 '법치주의적')인 것이다.
대변 먹는자가 바라는 저주가 도래한 세상은 모든 문명의 아름다움과 황금이 더러움 아래에 파묻히도록 하는 원한과 종말의 규율이며,
수복의 룬 없이 왕이 되는 결말은 이제 거짓임이 명백하게 알려진 과거의 규율(황금률)을 그대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일종의 의고주의/반동주의다.
그나마 해피 엔딩에 가까운 별의 세기는 절대적인 규율을 모두 틈새의 땅으로부터 떼어 놓음으로써,
완전률의 시대와는 또 다른 의미로 자유주의적인 규율을 선택하는 길이다(나는 라니가 일종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군주-스스로의 힘으로 군주제 그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군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 문명의 모태가 기독교임을 생각해보면
완전률 엔딩(자유의 신이자 동시에 공의의 신으로서 여호와를 떠올리게 하는 엔딩)과 별의 세기 엔딩이 갖는 자유주의적인 공통점 역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심지어 명백하게 배드엔딩처럼 보이는 미친 불의 엔딩마저도 어느 정도의 공감은 느낄 수 있다.
흉조가 버려진 지하 아래 미친 불의 봉인에 도달하면,
플레이어는 생매장된 방랑민족 상인들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이 눈에서 미친 불을 내뿜는 것도 보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한 명의 방랑상인만이 희미한 제정신을 유지한 채,
절망과 위로가 미묘하게 공존하는 듯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엘든링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
마치 절멸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남긴 낙서를 발견하는 것,
혹은 굴라그에 갇힌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과 같은 충격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황금률의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족 전체가 지하 아래에 생매장되어,
죽는 것만도 못한 몰골로 천천히 썩어들어가도록 운명지어진다면
차라리 이 저주받을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 무로 돌아가길 바라게 되는 것 아닐까?
생명의 새로운 탄생이 (멜리나의 만류와는 달리) 도저히 축복이나 아름다움이라고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이처럼 이야기 전체에서 불길하고 꺼림칙하게 취급받는 미친 불이
그 결말의 직전 순간에서 갑작스럽게 설득력을 갖게 되는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을 인물들의 대사나 설득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친 불의 봉인이라는 맵과 음악이라는 장치로 전달하는 것은
게임이라는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예술적 가능성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또 비록 엔딩으로 선택할 수는 없지만
황금률 아래에서 차별받은 민족들을 모두 포용하길 원했던,
묵가적인 이상을 품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비정함과 결단력(케일리드를 침공하고 끝내 부패를 개방한 것 등)을 보여준 미켈라-말레니아 남매
황금률의 앞잡이이며 비열한 고문자였으나, 그 죄를 증오한 끝에 황금률까지 증오하게 된 라이커드
라다곤과 레날라의 자식이었으나 아버지를 존경하여 카리아의 운명을 별과 함께 봉인한 라단
자신을 버린 황금률의 규율마저 사랑한 모르고트 등은 모두 흥미로운 인물이며
특히 그들의 선택과 운명이 틈새의 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결과 지금의 세계가 어떻게 그들의 이상과는 정반대로 뒤틀려버리고 말았는지를
플레이어가 '맵 탐험'의 형태로 직접 경험하며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엘든링이 단순히 오픈월드 다크소울일 뿐만 아니라,
오픈월드이기에 가능한 다크소울식 스토리텔링의 완성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위에서 말한 미켈라-말레니아의 경우,
에오니드 늪의 썩어들어가는 모습을 초중반부에 목격한 뒤,
게임의 결말 직전에 가서야 본거지인 에브레펠에 도달하게 되는데
성수의 기묘하게 뒤틀린 모습과 케일리드의 부패해가는 풍경,
그리고 성수 입구에서 외롭게 침입자를 저지중인 말레리나의 모습이
미켈라가 품었던 고귀한 이상과 대조되며 씁쓸함을 환기한다.
엘든링의 세계를 정말로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세계 그자체가 몰락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두가 비탄에 어린 노래를 부르는 지금 틈새의 땅의 모습이
실은 데미갓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규율이 각자의 방식으로 파탄나버린 결과란 사실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런 와중에 정말 동정의 여지가 거의 없는
찌질한 삼류 악당인 고드릭 같은 케이스도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와 별개로 또 사적으로 나름 정감이 가는 캐릭터가 고드릭이기도 하다.
3. 오픈월드 게임의 새로운 형태
게임의 장르라는 측면에 있어서, 나는 엘든링이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오픈월드 게임으로 제시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새로움은 단지 오픈월드 게임의 문법에 다크 소울 시리즈의 문법이 접목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엘든링은 베데스다의 폴아웃/스카이림처럼 창발적 플레이가 두드러지는 게임도
CDPR의 위쳐3/사이버펑크 2077처럼 중심 서사가 강조되는 게임도 아니다.
하지만 디아블로 4처럼 '어째서 오픈월드 게임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오픈월드 구성이 오히려 단점으로만 느껴지는 게임은 또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롬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공간이 곧 서사가 되는' 스타일,
그리고 그 공간의 서사에 가장 어울리는 적들이 각자 다른 전술로 플레이어를 압박하고,
일종의 묘수풀이에 가깝게 그러한 압박을 파훼해내야만 하는 전투 설계,
즉 게임플레이-서사-공간의 유기적 연결이 오픈월드 구성에서 제대로 빛을 발한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아쉬운 점은
틈새의 땅이 몰락해가는 세계기는 해도 완전히 망가진 세계는 아니기에,
마을에 가까운, 소수의 '정상적인 문명'의 거점들이
마치 황폐화된 세계에 존재하는 마지막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면
플레이어가 세계를 구해야만 하는 동기에 대해서도
또 틈새의 땅이 진짜 세계라는 실감에 있어서도 훨씬 더 전달력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건데
프롬 소프트웨어가 일반적인 RPG와 같은 마을 시스템을 만들 노하우는 없는 거 같고
단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에 집중한 설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아마 '마을/도시/거점이 띄엄띄엄 있는 엘든링'이 출시된다면 정말로 재밌지 않을까.
4. 총평
엘든링은 확실히 야생의 숨결처럼 '혁신적인' 게임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픈월드 스타일과 다크소울 스타일 양 측을 훌륭하게 조화시킨
정말로 '프롬이 만든 오픈월드 게임'답게 만들어진 게임이라 생각한다.
아마 프롬 소프트웨어의 팬들이 오픈월드 다크소울에 기대하는 바는 모두 충족시켰지만
한편으로는 소울 시리즈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낯설게 느껴지는 게임 아닐까 싶다.
엘든링이 이정도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다크 소울 시리즈를 통해 축적된 네임밸류가 아니라면 어렵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정말 재밌게 플레이하긴 했는데 또 계속 하려면 피곤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회차가 넘어갈 때마다 축복이 다 리셋되는 것
스꼴라 최고의 시스템인 화톳불의 탐구자가 없는 것 등등이....
DLC에는 탐구자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막줄 보고 개추함
괜히 오픈필드라고 불러달라한게 아니넹
그래도 그럴듯한 마을이 하나 있긴했지 항아리마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