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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의 마을.
리에니에 호수의 동쪽 어딘가, 비밀스러운 위치에 그곳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다. 결코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많은 전사 항아리와 꼬마 항아리가 마을에서 만들어지고, 틈새의 땅 곳곳으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때문에 항아리를 부수고 그 파편을 취하려는 밀렵꾼과 조향사들이 그 마을의 위치를 알기 위해 오늘도 틈새의 땅을 이 잡듯 뒤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전사 항아리, 알렉산더가 있다.
다른 항아리들을 압도하는 두께감, 마을에 잘못 들어온 산짐승들을 존재만으로 쫒아낼만큼 그 기백 남다르며, 비록 흙과 도자기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자평에 따르면-강철과도 같은 단단함을 가진 팔은 그에게 '철권'이라는 칭호를 내려주기에 충분했다.

알렉산더는 마을의 항아리들에게 고했다.
마을은 벌써 수십 년간 밀렵꾼들의 위협을 받고 있다. 몰래 들어온 밀렵꾼들을 처단하는 것에도 이제 한계가 오고 있는 상황, 마을에는 더 큰 무력이 필요했다. 고로 자신은 이제 마을을 떠나 무사 수행을 떠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수많은 항아리의 배웅과 환호를 받으며 알렉산더는 곧장 남쪽을 향했다. 그곳에 전설이 있음을 알기에. '별 부수는 라단'이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은 속세와 떨어진 항아리 마을에조차 퍼졌다.
전설을 마주한다. 전사로 태어나 이보다 더 큰 영광, 이보다 더 피 끓는 상황이 어디에 있으랴. 비록 그에게 심장은 없지만 알렉산더 속의 내용물이 고동치는 것을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맞다. 항아리 마을을 지키기 위한 무사 수행? 그런 건 핑계에 불과했다.
알렉산더가 계승한 내용물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리도 고동치는 것을 보면 호승심이 남다른 이였음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항아리 마을이라는 틀은 너무나도 작았다. 해소되지 못하는 답답함이 그를 짓누르던 차, 전설에 대한 소문은 그의 내용물을 충동질했다. 그 피 끓음을 이기지 못하고 알렉산더는 고향을 떠나고야 만 것이다.

알렉산더의 여정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애물이 없진 아니었다. 그는 룬 베어와 싸워 이기고, 무너진 다리를 그 둔중한 몸을 이끌고 넘어섰으며, 심지어는 청동 골렘과 힘을 겨루기까지 했다. 청동은 철을 이길 수 없었다. 몇 차례 길을 헤맬 때도 있었지만 그의 여로는 탄탄대로였으며 알렉산더에 맞설 자, 그 누구도 없어 보였다. 그는 두려움과 패배를 모르는 전사, 철권 알렉산더였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어~이, 아무도 없나?"

벌써 며칠째일까. 알렉산더의 힘 빠진 목소리가 림그레이브 평야에 울려 퍼졌다. 이 땅에 그의 적수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 자만하며 걷고 있던 차에 발 앞의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쏙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어찌나 꽉 끼었는지 그의 -강철 같은-양팔로 밀어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가련한 알렉산더여!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나고 마는 것일까.
물론 웬만한 들짐승이 와도 이 -강철 같은-든든한 주먹으로 물리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에 지체되는 사이 다른 이가 전설과 마주하는 영광을 빼앗아 간다면 어쩐단 말인가.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라단을 물리치는 영웅은 알렉산더, 그 자신이어야 했다. 조급함에 다시 땅을 밀어보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과연 대자연의 힘에는 대적할 수 없단 말인가. 역시 어머니이신 대지의 힘은 위대하다는 둥 헛생각할 때쯤, 그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 목소리를 듣고 왔는데, 이건 대체 무슨…?"

보아하니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 하기야 자신처럼 멋지고 우람한 항아리를 본다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오오, 귀공. 잘 와줬다! 나는 전사 항아리, 철권 알렉산더라고 하네만 보다시피 구명에 껴서 말이지. 탈출을 좀 도와줬으면 한다."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숨 쉴 틈도 없이 알렉산더의 말이 휘몰아쳤다.

"지금까지의 항아리들은 전부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미친놈들뿐이던데, 내가 뭘 믿고 널 도와주나? 탈출하자마자 날 공격할지도 모르잖아."

"잠깐잠깐, 귀공의 걱정도 이해하네. 그 녀석들은 분명 동족이긴 하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지 않은가. 전사의 명예와 어머니 대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합세. 날 도와준다면 귀공의 든든한 동료이자 조력자로서 그대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힘을 보태겠노라고."

"쓰으읍…"

고민하는 듯한 소리에 알렉산더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의 입-실재론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전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발…"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같은 가냘픈 음색이 낯선 이의 마음을 울린 것일까.

"한 번만 믿어보도록 하지. 내가 너를 어떻게 꺼내야 하지?"

"오오, 고맙네, 귀공. 그럼 내 엉덩이를, 뭔가 좀 큰 물건으로 쳐주게."

"방금 발언은 좀… 아니다, 됐다. 그것보다 대체 어디가 엉덩이지?"

알렉산더는 자신의 매끈한 후면 곡선 아래를 톡톡 두들겼다.

"나는 튼튼하니 걱정 말게. 단련했거든. 힘껏 쳐도 되네."

그의 뒤에서 스르릉-하고 무거운 것이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알렉산더는 곧 닥쳐올 충격에 대비해 몸을 굳혔다.

깡-!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알렉산더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동시에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충격이 그의 내용물 깊숙한 곳까지 퍼졌다.

"우오오오옷-!!!"

비명과 함께 땅에 떨어진 알렉산더가 땅바닥을 처량하게 굴렀다. 체면을 구긴 그가 황급히 일어나자, 낯선 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나?"

그렇게 말하는 낯선 이의 손에는 양손으로 휘두르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거대한 금속 망치가 들려있었다.

'날 죽일 생각이었나?'

큰 물건으로 치라고 한 것은 알렉산더 자신이었지만 기껏해야 나무 몽둥이 정도를 예상했던 그였다. 그런데 저런 무식한 물건으로 항아리를 두들길 줄이야. 낯선 이의 힘이 아주 약간만 더 셌더라면, 혹은 알렉산더의 단련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오늘로써 그의 항아리 생이 끝날 뻔했다.

"흠흠, 아무렇지도 않네. 이 정도쯤이야."

거짓말이었다. 정통으로 맞은 곳이 아직도 저릿한게 금이라도 간 듯했다. 이 자와 헤어지면 엉덩이를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훌륭한 일격이었네, 귀공. 이 알렉산더, 하마터면 깨질 뻔했어. 으하하하핫!"

이건 사실이었다. 괜히 너스레를 떨며 아무렇지도 않음을 어필해 본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전사 항아리, '철권' 알렉산더. 단련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고 있다."

림그레이브 땅의 동쪽에는 이제는 붉게 썩어버린 케일리드 지역이 있다. 그리고 케일리드의 적사자성에는 전쟁 축제 준비가 한창일 터였다. 전쟁 축제와 라단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이 뛰었다.

놀랍게도 낯선 이-빛 바랜 자- 또한 케일리드의 적사자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빛 바랜 자에게는 다른 일정이 있어 여정을 함께할 수는 없지만 최종 목표는 같다. 머지않은 시일에 같은 전장에서 함께할 동료를 만나다니. 알렉산더는 마치 영혼의 동지라도 찾은 기분을 느꼈다.

그날 밤, 알렉산더와 빛 바랜 자는 야영 중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빛 바랜 자가 마주했던 거대한 벽들, 림그레이브의 주인이자 접목의 군주 고드릭의 목을 친 일, 굳게 닫힌 마법 학원의 철벽을 단신으로 돌파한 일 등. 빛 바랜 자의 업적에 알렉산더 또한 크게 고무되었다. 이토록 거대한 모험의 이야기라니. 전사로써 스스로를 더욱 단련하리란 다짐과 함께 밤이 깊어져 갔다.

"산 항아리들은 죄다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너처럼 호쾌한 항아리도 있다니. 앞으로는 먼저 말을 걸어봐야겠네."

"허허, 고맙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귀공이 마음에 드는군. 전쟁 축제에는 늦지 않게 오도록 하게. 라단과 마주하는 영광을 내가 독차지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유쾌한 인사와 함께 알렉산더와 빛 바랜 자는 각자의 여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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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리드의 붉은 황야에 알렉산더가 섰다. 그의 도자기로 된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 감정을 모른다.

전사로써의 호승심?
영웅이 되려는 자의 기대감?
패배를 겪어보지 못한 자의 자만심?

알렉산더는 전쟁을 앞두고 흥분하고 있었는가.

아니, 이것은 공포다.
이것은 죽음의 그림자에 감싸진 자의 두려움이다.
상처 입은 사자의 송곳니가 목덜미에 드리워졌을 때의 절망이다.

'저것'은 달랐다.
별 부수는 라단은 그가 지금껏 마주했던 그 무엇과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그 무엇과도 달랐다.
알렉산더와 라단 사이, 수백 걸음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느껴진다.
그가 자랑으로 삼는 강철과도 같은 양팔이 마른 나뭇가지 같다.
그를 지켜주던 두터운 도자기 몸체가 깨지기 쉬운 살얼음 같다.

알렉산더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그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을 때 주변의 수많은 영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또한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 온 역전의 용사들. 이들과 함께라면 전설을 쓰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따위 생각은, 무리와 합치겠다는 생각 따위, 약자와 겁쟁이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란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라단의 손에 들려진 장창과도 같은 화살이 그의 주변 누군가를 분쇄하는 순간, 영웅들과 알렉산더는 라단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용기가 아닌 광기로, 당당한 영웅으로서가 아닌 군중에 섞인 약자로써.

이 순간 그들은 절벽을 앞둔 레밍이며, 개에 쫒기는 양 떼였다.
하늘을 수놓은 화살 무리를 간신히 통과해 라단 앞에 당도했을 무렵, 알렉산더도 깨닫고 말았다.

겁쟁이의 주먹 따위가 영웅에 닿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우오오옷-!"

자신을 부정하며 발악처럼 쏟아낸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대신 라단의 거대한 쌍대검이 알렉산더의 몸체를 부수고 지나갔다.

태어나 처음 보는 자신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커다란 금이 도자기 위로 번져나가며 번개처럼 퍼졌다.
알렉산더는 황급히 두 손으로 금을 틀어막았다. 내부에서 쏟아져나온 내용물과 붉은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죽음.
단 일격에 이 꼴이라니. 전의를 상실한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다리에 들러붙어 그의 걸음을 막았다.

한 손으로는 깨진 곳을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땅을 짚어 전장에서 벗어나려 기어간다.
비참하고 한심한 꼴에 눈물이 나려 했지만 항아리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

그렇게 한참을 기어가던 중 하늘이 어두워진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불덩이가 케일리드 사구 한복판에 돌진해 온다.

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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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신음을 흘리며 알렉산더는 눈을 떴다.
전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당연히 영웅들의 패배로 끝났는가? 신화에 대적할 자는 아직 틈새의 땅에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전쟁은,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가라앉은 모래 먼지 속, 라단의 거구에 맞서는 단 하나의 그림자가 여전히 존재했다.
빛 바랜 자였다.

강철의 폭풍이 그려낸 궤적 속에서 그는 자유로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격렬한 비상 속,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빛 바랜 자의 몸에 상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빛 바랜 자와 라단의 검이 서로를 마주한 순간, 전쟁은 끝났다.
불타오르는 룬의 표식이 빛 바랜 자의 손에 쥐어졌고, 오랜 신화는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축복하는 듯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져 내렸다.

저 영광, 저 담대함, 저 호승심.
알렉산더가 이상으로 삼을 전사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천천히 빛 바랜 자에게 다가갔다.

"알렉산더, 살아있었군."

붉은 피로 엉망이 된 얼굴, 피로에 전 목소리. 그러나 그 눈빛만은 밤하늘의 별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아, 귀공. 훌륭한 전투였네. 그대야말로 영웅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별말씀을. 다른 사람들의 조력이 없었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거야."

"겸손이 과하군. 자네에 비하면 나는… 글러 먹은 항아리였네. 일격에 금이 가서 내용물도 제법 흐른 데다 겁쟁이처럼 굴다니. 귀공을 볼 낯이 없군."

알렉산더의 말에 빛 바랜 자는 '넌 원래 얼굴이 없잖아.'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겠네. 나도 더 강해져서 다음번에야말로 그대의 곁에서 대등하게 싸우도록 하겠네."

"멀리서 응원하도록 하지."

짧게 회포를 풀고 빛 바랜 자는 그의 사명을 위해 먼저 자리를 떴다.

홀로 케일리드 사구에 남겨진 알렉산더는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비참한 꼴로 마을에 돌아간다면 꼬마 항아리들마저 그를 비웃을 것이다.
철권이라는 이름이 수치심에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알렉산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사 항아리에게는 항아리만의 방법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는 훌륭한 전사의 시체가 무궁무진하다.
그들의 유지를 잇는 것이야말로 전사 항아리의 방법.

알렉산더의 앞에는 붉은 머리 영웅의 사체가 있다.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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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선언한 지가 며칠이나 지났을까.
부서진 몸을 힘들게 이끌고 수행을 위해 틈새의 땅을 떠돌던 중, 강렬한 향수가 알렉산더를 사로잡았다.
그의 몸은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갈라진 틈 사이로 도자기의 부스러기와 붉고 흰 즙이 방울져 떨어졌다.
전사 항아리로써의 끝, 죽음은 여전히 끈덕지게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쩌면 오래 버틸 수 없을지도…'

그렇다면 최후의 여로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고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돌아갈 수는 없다. 다만 먼 발치에서나마 평화로운 안식의 땅을 보고 싶었다.

"거기 누구 없나~?"

알렉산더의 외침은 항아리 마을의 동족을 부르는 소리일까.
아니, 그는 또다시 구덩이에 끼어버렸다.
대체 누가 땅에 이따위 구멍을 파놓는 것인지. 이번에도 꽉 끼어버린 몸체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누군가 와서 도와주는 요행을 바라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기적이 두 번이나 일어날 리가…

"알렉산더인가?"

"오오, 귀공!"

기적이 일어났다.

"또 끼어버려서 말이네. 저번처럼 탈출을 도와줄 수 있겠나?"

"물론 도와주겠지만 금 간 곳은 좀 괜찮나?"

"아아,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이미 딱 붙었어. 그러니 힘껏 쳐도 돼."

빛 바랜 자는 등짐에서 예의 그 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전처럼 알렉산더의 엉덩이를 강타했다.

우드득-
뭔가 불길한 소리가 리에니에의 언덕에 울려 퍼졌다. 알렉산더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간신히 흙으로 메꿔놓은 금이 단번에 갈라졌다.
사색이 된 빛 바랜 자에게 알렉산더가 황급히 소리쳤다.

"귀공, 잠깐!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예감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갈라진 틈에서 붉은 내용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뭔가 좀 미끄덩하고 빠질 방법이 없을까?"

"기름을 좀 발라보면 어떨까."

"그거라면 될 것 같네. 부탁하겠네."

빛 바랜 자는 알렉산더의 몸에 기름을 듬뿍 붓고는 손으로 조심스레 밀어냈다. 이번에도 괜히 강타했다가 깨져버리기도 한다면 그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데굴데굴.
구덩이에서 구르듯 나온 알렉산더가 기지개를 켰다. 동작 하나하나마다 갈라진 틈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누가 봐도 안 좋은 상태지만 빛 바랜 자가 그것을 지적하는 것 또한 전사에 대한 예의는 아닐 터였다.

"이번에도 귀공 덕에 살았네. 감사를 표하지."

"이번에는 왜 또 구덩이에 빠진 거야?"

"음… 귀공한테라면 말해도 되겠지. 산 항아리들에게도 고향이 있다네."

알렉산더는 우수에 찬 눈길로-빛 바랜 자의 생각이다-절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절벽 위에서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괜히 어슬렁거렸다가 보기 좋게 구멍에 낀 거야."

알렉산더는 틈 사이로 스며 나온 붉은 즙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 안에 있는 전사들이 마음이 약해진 날 혼내준 거겠지. 영웅을 목표로 할 거라면 향수 따윈 버리라고 말이야."

"향수라… 내가 살던 고향은 먼 옛날에 불태워져서 잘 모르겠지만. 전사로써의 마음가짐만은 훌륭하네."

"그런가, 후후후. 아무튼 귀공 덕에 다시 한번 강해지기 위한 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네. 혹시 갤미어 화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전쟁 축제 이후 알렉산더도 앞으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갈라진 틈을 복원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 몸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뜨거운 불에 몸을 담금질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우선 갤미어 화산의 용암부터 시작이다.

"법무관 라이커드가 갤미어 화산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너의 목적지는 갤미어인가?"

"그렇다네. 갤미어의 용암으로 이 몸을 담금질할 생각이네."

"용암으로…? 역시 항아리들은 잘 모르겠어."

인간 기준으로는 꽤 정신 나간 소리를 내뱉는 알렉산더를 보며 빛 바랜 자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내 종족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며 납득했다.
빛 바랜 자의 다음 목적지는 왕도 로데일이었기에 여정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도, 빛 바랜 자도 알고 있었다. 숨이 붙어있는 한, 이 틈새의 땅에서 다시 만나 또 한 번 같은 전장에 설 수 있음을.

"다음에는 더욱 강인해져 있겠네!"

"그때쯤 나는 틈새의 땅의 왕이 되어 있겠군."

둘은 다시 만남을 약속하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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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는 팔짱을 낀 채 눈보라를 맞고 있었다. 그의 위로 수북이 쌓인 눈이 기다린 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갤미어의 용암을 이용한 담금질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용암이 너무 '미지근'했다.

인간이 이런 말을 한다면 미친 소리겠지만, 본디 산 항아리 종족은 불로부터 태어난다. 초고온의 불길로부터 탄생하는 만큼, 용암 정도의 미적지근한 온도로는 그의 심장에 불을 지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온천에 몸을 담근 수준에 가까웠다.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진 않았다. 용암에 포함된 광물이 식으면서 알렉산더의 몸에 있는 틈새를 좀 메꿔주었다. 더욱 뜨거운, 용암 따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매서운 불길이 필요했다.

'전설에나 나오는 거인의 불.'

실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마지막 희망은 그곳에 있었다. 전설에 따라 알렉산더는 금단의 땅, 만년설의 산을 향했다.
그러던 중 소문을 들었다.
빛 바랜 자에 대한 소문. 아직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뭔가를 위해 그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고. 눈과 얼음만이 존재하는 이곳에 오는 이유는 뻔했다. 그 또한 알렉산더와 같은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만날 수 있으리라.

아직은 알렉산더보다 먼저 누군가 올라간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거인의 불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향하는 문 앞에 터를 잡고 빛 바랜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드시 올 것이라 믿으며.
긴 시간이 지나고, 알렉산더가 얼음조각처럼 변했을 때쯤, 산등성이를 넘어 그림자가 올라왔다.

"…귀공."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씩 웃어-물론 빛 바랜 자가 확인할 방법은 없다.-보였다.
긴말은 필요없었다. 저 파수꾼, 붉은 털을 가진 거인 또한 전설 속 존재. 그저 최선을 다해 맞설 뿐이었다.

산이 일어섰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둘을 내려다보는 불의 거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했다. 기백은 그 라단과도 맞먹을 정도.

알렉산더의 마음을 공포가 좀먹었다. 압도적 강자 앞에 서자 또다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알렉산더의 위풍당당했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 사이, 그의 앞으로 빛 바랜 자가 뛰어들었다.

잘 벼려진 한 자루 대검만을 들고 그는 은빛 바람처럼 거인의 발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그 두터운 살갗이 갈라지며 피가 조금 스며 나왔다. 거인이 괴성과 함께 빛 바랜 자를 밟으려 했지만, 그는 눈밭을 뛰노는 여우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거대한 다리에 상처를 새겼다.

'귀공은 전보다도 훨씬 강해졌군…!'

'귀공은 어떻게 그리 용맹하게도 뛰어들 수 있는 거지?'

'나는… 왜 저렇게 못 하는 거지?'

강력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좋은 장비를 가지고 있다…
재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더에게 부족한 것은 전투의 기술이 아닌 그 마음가짐.
그리고 그 마음가짐은 당장 주먹을 쥐고 뛰어드는 것에서부터 조금씩 짜여나가는 것.

철권이 쥐어졌다.
온 몸을 던져 주먹을 내지른다.
설산을 울리는 그 위용, 실로 철권이라 부르기에 부족함 없었다.

설산의 고요한 대기를 산산조각 낼 정도로 강렬한 충격파를 동원한 일격은 전설의 존재에게조차 충분히 닿았다.
이미 빛 바랜 자가 충분히 깎아낸 거인의 다리는 철권을 견디지 못했다.

-끄워어어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거인의 다리가 모로 꺾였다. 제아무리 거인이라고 해봐야 생물인 이상 감당할 수 있는 공격에는 한계가 있다.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거인을 보며 알렉산더는 승리를 직감했다. 저 정도의 상처에서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은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피 분수가 흰 눈을 적셨다. 충격적이게도 거인은 부러진 다리를 비틀어 뜯어냈다. 잘린 다리의 단면으로부터 피 분수가 솟구쳤으나 거인은 개의치 않고 다리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극심한 통증에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잠깐, 알렉산더."

빛 바랜 자가 손을 들어 알렉산더를 제지했다.
동시에 설산을 둘러싼 분위기가 급변했다.

투쟁의 긴장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더욱 무거운, 괴이와 저주가 둘을 짓눌렀다.
그리고 본능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섬뜩함이 뇌리를 울렸다.

…누군가 보고 있다.
그 시선은 생물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무기질적이었다.
코끼리가 개미를 밟고 지나가며 그 시신을 볼 때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순간, 알렉산더와 빛 바랜 자는 개미였다.

높이 들어 올린 자기 다리를 산제물의 봉화로써 태우고 있는 거인에게서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격통과 경외로 가득한 그 두 눈 아래, 가슴팍에 외눈의 검붉은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깨달았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전설의 영역을 넘어, 신화의 영역에 들어갔음을.

"오오, 어머니 대지시여…"

"저게 바로 외눈박이의 악신… 거인의 몸을 빌어 강신한건가."

경악하는 둘을 앞두고 검붉은 눈동자 아래, 거인의 배가 천천히 벌어졌다.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벌어지는 배, 악신의 입 사이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피해!"

빛 바랜 자의 외침과 함께 극열의 불길이 쏟아져 내렸다.
몸을 날려 피한 빛 바랜 자 대신 땅과 눈이 통째로 증발해 소멸했다. 직격하면 잿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정도의 화력.

날렵한 빛 바랜 자를 맞추기는 쉽지 않음을 직감했는지 악신의 입이 알렉산더를 향했다.
상대적으로 둔중한 그는 피할 수 없으리라.

"알렉산더!"

"우오오옷?!!!"

불의 폭포가 알렉산더 위로 쏟아져 내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죽음을 직감한 빛 바랜 자가 황망한 표정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듯한 알렉산더가 가드를 올린 채 서 있었다.

"알렉산더, 괜찮나?"

"왜, 왜지?"

알렉산더, 빛 바랜 자, 그리고 심지어는 불의 거인조차 상정 외의 상황에 당황하여 행동을 멈췄다.
지금까지 알렉산더가 경험했던 그 무엇보다도 고열인 것은 맞지만, 그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생각보다 버틸 만하다?'

악신의 불조차 태생적으로 불에 강한 알렉산더에게는 뜨겁다 이상의 감상을 안겨주지 못했다.

모두가 당황하는 도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불의 거인이 팔을 휘둘렀다.
빛 바랜 자가 집채만 한 손바닥을 피하자마자 또다시 불길이 쏟아진다.

들이닥치는 불꽃을 보며 머릿속으로 죽음을 떠올린 그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듬직하고 둥그스름한 항아리가 보호막처럼 불길을 대신 받아내고는 붉게 달아올랐다.
쏟아지는 불 아래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질문을 던졌다.

"나를 믿나, 귀공?"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랴.
불길이 멈춤과 동시에 빛 바랜 자가 알렉산더의 그림자에서 뛰쳐나갔다.
악신의 불은 무한대로 쏟아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신한 육체, 불의 거인의 몸이 초고온의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그을리고 있다. 육신이 무너지기 전에 방열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틈을 노린다.

빛 바랜 자가 달려들자 당황한 거인이 팔을 휘둘러보지만 허공만을 쳐냈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거인의 몸에 올라탄 빛 바랜 자가 대검으로 살가죽을 베어냈다.

-우워어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불의 거인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위험을 감지한 빛 바랜 자가 뛰어내림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불기둥이 사방에서 솓구치며 땅을 불태웠다.
그러나 빛 바랜 자는 이미 알렉산더의 뒤에 숨은 상태.

알렉산더가 든든한 방패, 빛 바랜 자는 날카로운 창.
짜 맞춘 듯 완벽한 호흡 속에 불의 거인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만 늘어갔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을 반복하자 알렉산더의 몸에 막대한 열기가 축적되었다.
고열이 몸 안의 불순물을 녹이고 도자기의 결합을 굳혔다.
철권이라 칭하던 주먹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어 태세를 풀고 불의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거인의 얼굴을 향해 높이 도약-
활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크게 젖힌 주먹에는 어느덧 불꽃이 피어올랐다.

알렉산더는 설산이 떠나갈 기세로 소리 지르며 주먹을 내질렀다.

"파이어 펀치!!!!"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불의 거인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자 악신의 눈이 박힌 거인의 배가 땅에 닿을 듯 내려왔다.
빛 바랜 자의 사정권.
미끄러지듯 악신의 눈앞에 도착한 빛 바랜 자가 그 검붉은 불길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무기질적이었던 눈동자 안에 한줄기 아쉬움 같은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은빛 칼날이 검붉은 눈동자 속으로 박혀들었다.

그 거대한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한 줄기 단말마를 지르며 거인의 몸도 차가운 설원에 누웠다.

파스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로 주변의 눈을 증발시키며 알렉산더가 다가왔다.

"완전히 지쳐버렸네! 괜찮은가, 귀공?"

"덕분에 살았다. 정말 강해졌구나."

"으하핫, 이 철권 알렉산더. 악신의 힘마저 이 몸의 양식으로 삼았다네."

알렉산더가 호쾌하게 웃었다.

"귀공 또한 저 앞의 거인의 가마로 가고 있었지? 나는 이곳에서 조금 할 일이 있어서 말이네… 먼저 가시겠나?"

"또 그 시체 줍기인가. 소름이 돋는군."

"항아리에겐 항아리의 길이 있는 법일세."

빛 바랜 자는 알렉산더의 배웅을 받으며 먼저 거인의 가마로 향했다.
그의 뒤에서 알렉산더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도자기 조각이 툭-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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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는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세계의 끝이라는 것처럼 황혼의 하늘 아래로 끝없는 소용돌이가 무한한 시간 속에 돌고 있었다.
소용돌이 주변으로는 산산조각 난 신전의 잔해들이 죽은 것처럼 떠돌았다.

여기가 바로 시간의 끝, 파름 아즈라였다.

알렉산더가 느끼기에 저 모든 잔해가 자신의 파편 같았고, 저 소용돌이의 신음이 자신의 진혼곡 같았다.
몸을 수복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써봤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절망감이 그를 짓눌렀다.

알렉산더의 고향은 리에니에의 항아리 마을이지만, 산 항아리 종족은 어디로부터 기원했는가.
틈새의 땅에 처음 도자기가 출현한 것은 수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이 처음 도자기를 구웠다면 산 항아리 종족의 근원도 분명 파름 아즈라에 뿌리를 둘 것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파름 아즈라에 올라탄 알렉산더였지만…

없었다.
이미 모든 곳이 산산조각나고 쇠퇴하여 잔해밖에 남지 않은 이곳에는 도자기 기술도, 기록조차 소멸한 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파름 아즈라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과정에서 이어진 수많은 전투. 해골 병사나 수인, 심지어는 고룡과의 사투를 거치며 이미 한계에 가까웠던 몸은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도자기 파편이 후두득 떨어지고, 갈라진 틈 사이로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항아리로써의 끝에 도달한 그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더."

"역시, 귀공 또한 여기까지 도달했군."

등을 맞대고 사투를 이겨낸 동지로써 통하는 바가 있었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다시 마주치고, 그리고 헤어짐과 재회를 반복할 것이라고.

"귀공은 이제 왕이 되었는가?"

"이제 앞으로 한 걸음…인 것 같다. 그나저나 너의 몸이…"

멀리서 보기에도 알렉산더의 도자기 몸체 상태는 심상치가 않았다. 알렉산더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나는 더욱 강인해졌다네. 그러니 귀공에게 하나 부탁이 있다."

그리고 조용히 양팔을 앞으로 내밀어 전투태세를 갖췄다.

"내 시련이 되어주지 않겠나."

"알렉산더…"

"전투태세를 갖추게 귀공! 이 철권 알렉산더, 아무리 그대라 할지라도 결코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이야!"

빛 바랜 자가 주춤하는 사이, 알렉산더가 거리를 좁혀왔다.
빛 바랜 자가 몸을 숙이자 강렬한 주먹이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둔중한 몸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빠른 주먹 공세가 공간을 점유했다.
거기에 거대한 몸집이 벽처럼 다가오고 뒤는 절벽. 빛 바랜 자는 회피하지 않고 주먹을 받아냈다.
아무리 방어를 굳혀도 체급에서 오는 힘의 차이에 조금씩 발이 밀려난다.

마침내 빛 바랜 자의 발뒤꿈치가 절벽 끝까지 물러난 순간, 주먹이 멈췄다.

"뭐 하는 건가, 귀공."

"…하지만…"

"하지만, 뭔가! 나도, 나도 알고 있다! 이 몸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이게 나의 한계점이란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대처럼 강해질 수 없어!"

알렉산더가 빛 바랜 자를 몰아붙이며 달려온 길을 따라 어지럽게 붉은 즙과 도자기 파편이 떨어져 있었다.
이미 그의 몸은 스스로의 힘에 부서질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사로써 최후를 맞고 싶다. 귀공이 내 마지막을 장식해 주길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자가 귀공이니까…"

토하듯 감정을 뱉어낸 알렉산더의 말끝은 울음에 섞여 흐려졌다.
빛 바랜 자는 충격을 받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뭔가 결심을 굳힌 듯 주먹을 쥐었다.

"좋아. 그렇다면 결투다."

기울어진 파름 아즈라의 유적, 양 끝단에 알렉산더와 빛 바랜 자가 각각 섰다.
익숙하게 주먹을 내미는 알렉산더의 앞에, 빛 바랜 자도 양 주먹을 쥐었다.

"맨손인가, 귀공?"

"이걸로 충분해."

"자만감이 과하군, 그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알렉산더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거인에게 거두어들인 화염의 힘. 몸 전체가 화려하게 불타오르며 그의 두 주먹에 감겨들어왔다.

"내가 바로 항아리 전사, 철권 알렉산더! 내 안의 전사들이여, 힘을 내주어라! 함께 영웅이 되기 위해!"

"나는 이름 없는 빛 바랜 자. 장차 엘데의 왕이 될 자다."

선수는 놀랍게도 알렉산더가 잡았다. 불을 추진력으로 삼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양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폭발과 함께 불기둥이 솟구친다. 그러나 빛 바랜 자는 이미 알렉산더의 뒤를 잡았다.

빛 바랜 자의 주먹이 등을 치려던 순간.

"우오오옷!"

알렉산더가 팽이처럼 회전하며 전방위에 불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꽤나 위협적인 일격에 빛 바랜 자는 크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팔을 크게 위로 들었다. 힘이 모이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기백.
그 무거운 주먹이 땅을 강타하는 순간, 유적이 크게 흔들리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빛 바랜 자의 자세가 크게 무너졌다.

'이 정도면 고드릭 이상의 충격인가?'

산 항아리이면서도 데미갓에 버금가는 수준의 힘이라니. 알렉산더가 쌓아온 시련은 그를 시대의  맹자로 성장시켰음이 분명했다.
자세가 무너진 빛 바랜 자의 얼굴로 거대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자세. 정통으로 맞는다면 유적 밖으로 날아갈만큼 강렬한 기세.

불안정한 자세에서 빛 바랜 자는 몸을 날렸다.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의 몸은 부드럽게 알렉산더의 주먹을 타넘으며 회전했다.
온 몸의 탈력에서 시작하는 회피 동작. 그리고 회전의 마지막에 동반되는 반격의 주먹.

퍼석-
빛 바랜 자의 주먹이 알렉산더의 몸통을 뚫고 들어가며 파편과 즙을 튀겼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알렉산더의 공격이 어지러이 쏟아진다.
막고, 흘리고, 피하고. 철벽과도 같은 수비에 알렉산더의 공격은 번번이 무너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알렉산더의 몸은 조금씩 부서지며 내용물이 흘렀다.

격렬한 움직임에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조각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극심한 통증에 잠시 움찔하는 사이, 빛 바랜 자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겨우 이게 전부인가?"

명백히 깔보는듯한 도발에 알렉산더는 고통마저 잊고 다시 한번 투지를 불태웠다.
말 그대로, 온 몸으로부터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럴 리가! 이 철권 알렉산더, 일생 최대최강최속, 최후의 철권을 보여주겠네."

"받아주마."

"우오오오옷!"

기합과 함께 알렉산더의 주먹이 쏘아졌다.
선언한 대로 그야말로 철권.

이에 맞서는 것은 작고 살덩이로 이루어진 빛 바랜 자의 주먹.
피하지도, 숨지도 않는다.
오직 정면으로.

두 남자의 주먹이 교차했다.

"…역시 도저히 닿지 않는가."

알렉산더의 주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흙과 파편이 되어 흩어져버린 팔을 바라보며 알렉산더가 쓸쓸하게 읊조렸다.

"아니, 충분히 닿았다."

통증이 서린 빛 바랜 자의 대답에 알렉산더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러지기라도 한 것인지 빛 바랜 자는 자기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런가…"

알렉산더는 웃었다. 파름 아즈라의 폭풍 소리도 묻어버릴 만큼 후련하게 웃었다.
헛되지 않았다, 헛되지 않았어.
자신의 시련의 끝에, 그의 주먹은 분명 영웅에게조차 닿을 수 있었다.

돌연, 알렉산더가 자리에 쓰러졌다.
균열이 그의 팔에서부터 전신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금이 간 것과는 달랐다. 정말로 끝이 도래했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알렉산더가 작게 말했다.

"고맙네. 역시 내가 눈여겨본 영웅이다."

그러고는 자기 몸에 손을 넣더니 안에서 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부디 받아주게, 나의 내용물을."

"…"

빛 바랜 자가 내용물을 받았다. 이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항아리의 핵에 해당하는 물건인 건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남은 한 팔을 크게 들었다. 그리고 죽음을 이겨낸 것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항아리는 언젠가 망가지는 법! 이 알렉산더, 마지막까지 전사 항아리였노라! 하하하! 으하하하! 하하…"

빛 바랜 자도 웃어보였다. 눈물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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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니에의 항아리 마을, 본래 평화로웠던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아있는 담벼락 아래, 꼬마 항아리는 고향을 떠날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형아. 저번에는 고마웠어."

빛 바랜 자가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몇몇 밀수꾼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항아리를 파괴했다. 마을에 머물고 있던 디아로스가 필사의 항쟁 끝에 동귀어진으로 침입자를 처리했으나 몇몇 항아리 외에는 전부 죽고 말았다.

"떠나려고?"

"응, 나도 더 늦기 전에 강해지기 위한 모험을 떠날 거야."

"…그래. 그렇다면 이걸 받아주겠니?"

빛 바랜 자가 붉은 덩어리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꼬마 항아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설마, 내용물이야?"

"누구 것인지도 알아보겠니?"

"알렉산더 아저씨… 맞지?"

빛 바랜 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꼬마 항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용물에 걸맞을 만큼 강해지렴."

"고마워, 형아."

꼬마 항아리의 무운을 빌어준 빛 바랜 자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꼬마 항아리에게는 항아리만의 길이 있는 법.
살아만 있다면, 틈새의 땅에서 또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와 알렉산더가 그랬던 것처럼.

뒤돌아 걷는 빛 바랜 자에게 꼬마 항아리가 물었다.

"아 참, 알렉산더 아저씨는, 강했어?"

"…"

빛 바랜 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끝-





그래서 어제 올린건 왜 지워진거야

님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