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이번 몸은 이것인가...'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피식에 의한 죽음과 포식에 의한 재탄 끝에, 라이커드는 낯선 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화산관의 최심부.
신을 먹는 뱀으로서 똬리를 튼 그가 타니스의 꾐에 빠진 영웅들을 먹던 곳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잡아먹히고 말았지만.
-스륵
그는 주변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조금 허약하군. 뱀을 잡은 그 녀석이 아닌 건가?'
무심한 듯 새로운 몸에 대해 평가를 하는 그였어도, 사실 이번의 부활은 그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야 아인이 아니고서야 이긴 상대를 실제로 잡아먹는 미친 인간이 흔할 리는 없었다.
'녀석이 아니라면, 내 시체를 누군가 먹었나? 그럼 몸이 그녀석과 다른 것도, 내가 있는 곳이 여전히 여기인 것도 설명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가 자신의 새로운 몸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은 상당히 늦었다.
"...음?"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익숙한 손마디와 익숙한 옷가지,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그의 측비인 타니스였다.
"..."
잠시 멍하니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라이커드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흐, 흐하하하!"
옷의 안주머니 안에 그가 건넸던 망각의 약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역시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설마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실망스러운 것은 오히려 그녀를 얕보았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가 모독의 길을 걷는다 하여도, 심지어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추악한 왕으로서 패배한다고 하여도, 망각의 약 따위를 사용할 약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입가를 넘어 얼굴과 상체에 잔뜩 말라붙은 그의- 뱀의 피를 긁어내며 광소했다.
"흐, 그래. 너의 뜻이 그렇다면, 응하는 게 남편의 도리겠지."
데미갓으로서 가지고 있던 거대한 룬, 영생을 살 뿐더러 언젠가 신을 삼킬 뱀의 육체,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아낀 측비.
한번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라이커드는 낙심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에게 몸을 바친 타니스를 볼 면목이 없다.
그리고 그에겐 아직 피식과 포식의 권능,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한 힘이 아직 남아있었다.
모독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명예를 버린 몸.
그는 추하게라도 연명하여 길의 끝을 보기로 했다.
설령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 뱀의 몸을 잃었어도, 온갖 괴물과 기물이 넘쳐나는 틈새의 땅에서라면 그를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 우선 그 기사 녀석을 찾아서 힘부터 차근차근 다시 기르는 게 좋겠군."
타니스에게 감화된 여러 인물 중 가장 쓸모있던 그 도가니의 기사라면 그의 먹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그렇게 조금씩 힘을 기르고, 조금 더 강한 상대를 잡아먹으며 또 힘을 기른다면.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그는 언젠가, 저 황금나무를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저벅-저벅-
앞날을 다짐하는 그의 귀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본적 없는 대머리 사내가 심히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부인?! 드디어 정신을 차렸습니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박한 목소리.
-철퍽철퍽!
마찬가지로 경박한 발놀림으로 시체의 늪을 달려온 대머리 사내가 라이커드의 앞에 섰다.
터뮤니없이 약해진 몸, 쓸만한 수하 하나 없는 상황, 신원을 알 수 없는 침입자.
라이커드의 몸에 본능적인 긴장이 감돌았다.
그는 담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에 말한 그 자신조차 놀랐다.
산전수전을 겪어온 영웅들마저 떨게 하던 신을 먹는 뱀의 위엄은 이제 없다.
그저 불안에 휩싸여 새침하게 날을 세우는 여인이 있을 뿐.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태생부터 고귀한 데미갓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법무관으로서, 모독의 길을 걷는 뱀으로서 겪어본 적 없는 긴장.
라이커드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얇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반응을 살폈다.
이를 지켜보는 대머리 사내, 패치의 입장에서는 모독의 길에도 굴하지 않던 타니스가 드디어 무너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흐-음,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사기와 배신을 일삼던 그를 매료시켰던 고고한 귀부인, 타니스.
아직 마음에 픔고 있던 드높은 이상을 잃은 건 아닌지 그녀의 두 눈엔 심지가 세워져 있었지만...
남편을, 왕을 잃고 홀로 주저앉아 떨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그가 흠모하던 귀부인이 아니었다.
꺽이지 않는 귀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패치는 실망하지 않았다.
유물의 내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장물아비로서 자격이 없는 법.
흔하게 보이는 어리석은 빈민 여자와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귀족 여인은 같은 신분이어도 가치가 다르다.
그리고 패치가 보기에 타니스의 가치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상대가 변했다면 이쪽도 그에 맞춰 대응을 바꾸면 된다.
고고한 귀부인에겐 그에 걸맞는 기사의 도리를.
가련하게 떠는 여인에겐, 듬직한 사내의 도리를.
서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두 남녀는 그렇게 처음 아닌 첫만남을 가진 것이었다...
'으음... 이번 몸은 이것인가...'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피식에 의한 죽음과 포식에 의한 재탄 끝에, 라이커드는 낯선 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화산관의 최심부.
신을 먹는 뱀으로서 똬리를 튼 그가 타니스의 꾐에 빠진 영웅들을 먹던 곳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잡아먹히고 말았지만.
-스륵
그는 주변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조금 허약하군. 뱀을 잡은 그 녀석이 아닌 건가?'
무심한 듯 새로운 몸에 대해 평가를 하는 그였어도, 사실 이번의 부활은 그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야 아인이 아니고서야 이긴 상대를 실제로 잡아먹는 미친 인간이 흔할 리는 없었다.
'녀석이 아니라면, 내 시체를 누군가 먹었나? 그럼 몸이 그녀석과 다른 것도, 내가 있는 곳이 여전히 여기인 것도 설명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가 자신의 새로운 몸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은 상당히 늦었다.
"...음?"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익숙한 손마디와 익숙한 옷가지,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그의 측비인 타니스였다.
"..."
잠시 멍하니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라이커드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흐, 흐하하하!"
옷의 안주머니 안에 그가 건넸던 망각의 약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역시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설마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실망스러운 것은 오히려 그녀를 얕보았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가 모독의 길을 걷는다 하여도, 심지어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패배한다고 하여도 망각의 약 따위를 사용할 약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입가를 넘어 얼굴과 상체에 잔뜩 말라붙은 그의- 뱀의 피를 긁으며 광소했다.
"흐, 그래. 너의 뜻이 그렇다면, 응하는 게 남편의 도리겠지."
데미갓으로서 가지고 있던 거대한 룬, 영생을 살 뿐더러 언젠가 신을 삼킬 뱀의 육체,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아낀 측비.
한번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라이커드는 낙심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에게 몸을 바친 타니스를 볼 면목이 없다.
그리고 그에겐 아직 피식과 포식의 권능,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한 힘이 아직 남아있었다.
모독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명예를 버린 몸.
그는 추하게라도 연명하여 길의 끝을 보기로 했다.
설령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 뱀의 몸을 잃었어도, 온갖 괴물과 기물이 넘쳐나는 틈새의 땅에서라면 그를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 우선 그 기사 녀석을 찾아서 힘부터 차근차근 다시 기르는 게 좋겠군."
타니스에게 감화된 여러 인물 중 가장 쓸모있던 그 도가니의 기사라면 그의 먹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그렇게 조금씩 힘을 기르고, 조금 더 강한 상대를 잡아먹으며 또 힘을 기른다면.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그는 언젠가, 저 황금나무를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저벅-저벅-
앞날을 다짐하는 그의 귀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본적 없는 대머리 사내가 심히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부인?! 드디어 정신을 차렸습니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박한 목소리.
-철퍽철퍽!
마찬가지로 경박한 발놀림으로 시체의 늪을 달려온 대머리 사내가 라이커드의 앞에 섰다.
터뮤니없이 약해진 몸, 쓸만한 수하 하나 없는 상황, 신원을 알 수 없는 침입자.
라이커드의 몸에 본능적인 긴장이 감돌았다.
그는 담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에 말한 그 자신조차 놀랐다.
산전수전을 겪어온 영웅들마저 떨게 하던 신을 먹는 뱀의 위엄은 이제 없다.
그저 불안에 휩싸여 새침하게 날을 세우는 여인이 있을 뿐.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태생부터 고귀한 데미갓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법무관으로서, 모독의 길을 걷는 뱀으로서 겪어본 적 없는 긴장.
라이커드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얇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반응을 살폈다.
이를 지켜보는 대머리 사내, 패치의 입장에서는 모독의 길에도 굴하지 않던 타니스가 드디어 무너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흐-음,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사기와 배신을 일삼던 그를 매료시켰던 고고한 귀부인, 타니스.
아직 마음에 픔고 있던 드높은 이상을 잃은 건 아닌지 그녀의 두 눈엔 심지가 세워져 있었지만...
남편을, 왕을 잃고 홀로 주저앉아 떨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그가 흠모하던 귀부인이 아니었다.
꺽이지 않는 귀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패치는 실망하지 않았다.
유물의 내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장물아비로서 자격이 없는 법.
흔하게 보이는 어리석은 빈민 여자와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귀족 여인은 같은 신분이어도 가치가 다른 법.
그리고 패치가 보기에 타니스의 가치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상대가 변했다면 이쪽도 그에 맞춰 대응을 바꾸면 된다.
고고한 귀부인에겐 그에 걸맞는 기사의 도리를.
가련하게 떠는 여인에겐, 듬직한 사내의 도리를.
서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두 남녀는 그렇게 처음 아닌 첫만남을 가진 것이었다...
#TS #엘든링 #타니스 #암컷타락
###본 작품은 모그윈 왕조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피식에 의한 죽음과 포식에 의한 재탄 끝에, 라이커드는 낯선 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화산관의 최심부.
신을 먹는 뱀으로서 똬리를 튼 그가 타니스의 꾐에 빠진 영웅들을 먹던 곳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잡아먹히고 말았지만.
-스륵
그는 주변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조금 허약하군. 뱀을 잡은 그 녀석이 아닌 건가?'
무심한 듯 새로운 몸에 대해 평가를 하는 그였어도, 사실 이번의 부활은 그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야 아인이 아니고서야 이긴 상대를 실제로 잡아먹는 미친 인간이 흔할 리는 없었다.
'녀석이 아니라면, 내 시체를 누군가 먹었나? 그럼 몸이 그녀석과 다른 것도, 내가 있는 곳이 여전히 여기인 것도 설명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가 자신의 새로운 몸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은 상당히 늦었다.
"...음?"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익숙한 손마디와 익숙한 옷가지,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그의 측비인 타니스였다.
"..."
잠시 멍하니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라이커드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흐, 흐하하하!"
옷의 안주머니 안에 그가 건넸던 망각의 약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역시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설마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실망스러운 것은 오히려 그녀를 얕보았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가 모독의 길을 걷는다 하여도, 심지어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추악한 왕으로서 패배한다고 하여도, 망각의 약 따위를 사용할 약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입가를 넘어 얼굴과 상체에 잔뜩 말라붙은 그의- 뱀의 피를 긁어내며 광소했다.
"흐, 그래. 너의 뜻이 그렇다면, 응하는 게 남편의 도리겠지."
데미갓으로서 가지고 있던 거대한 룬, 영생을 살 뿐더러 언젠가 신을 삼킬 뱀의 육체,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아낀 측비.
한번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라이커드는 낙심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에게 몸을 바친 타니스를 볼 면목이 없다.
그리고 그에겐 아직 피식과 포식의 권능,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한 힘이 아직 남아있었다.
모독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명예를 버린 몸.
그는 추하게라도 연명하여 길의 끝을 보기로 했다.
설령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 뱀의 몸을 잃었어도, 온갖 괴물과 기물이 넘쳐나는 틈새의 땅에서라면 그를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 우선 그 기사 녀석을 찾아서 힘부터 차근차근 다시 기르는 게 좋겠군."
타니스에게 감화된 여러 인물 중 가장 쓸모있던 그 도가니의 기사라면 그의 먹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그렇게 조금씩 힘을 기르고, 조금 더 강한 상대를 잡아먹으며 또 힘을 기른다면.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그는 언젠가, 저 황금나무를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저벅-저벅-
앞날을 다짐하는 그의 귀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본적 없는 대머리 사내가 심히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부인?! 드디어 정신을 차렸습니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박한 목소리.
-철퍽철퍽!
마찬가지로 경박한 발놀림으로 시체의 늪을 달려온 대머리 사내가 라이커드의 앞에 섰다.
터뮤니없이 약해진 몸, 쓸만한 수하 하나 없는 상황, 신원을 알 수 없는 침입자.
라이커드의 몸에 본능적인 긴장이 감돌았다.
그는 담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에 말한 그 자신조차 놀랐다.
산전수전을 겪어온 영웅들마저 떨게 하던 신을 먹는 뱀의 위엄은 이제 없다.
그저 불안에 휩싸여 새침하게 날을 세우는 여인이 있을 뿐.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태생부터 고귀한 데미갓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법무관으로서, 모독의 길을 걷는 뱀으로서 겪어본 적 없는 긴장.
라이커드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얇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반응을 살폈다.
이를 지켜보는 대머리 사내, 패치의 입장에서는 모독의 길에도 굴하지 않던 타니스가 드디어 무너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흐-음,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사기와 배신을 일삼던 그를 매료시켰던 고고한 귀부인, 타니스.
아직 마음에 픔고 있던 드높은 이상을 잃은 건 아닌지 그녀의 두 눈엔 심지가 세워져 있었지만...
남편을, 왕을 잃고 홀로 주저앉아 떨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그가 흠모하던 귀부인이 아니었다.
꺽이지 않는 귀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패치는 실망하지 않았다.
유물의 내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장물아비로서 자격이 없는 법.
흔하게 보이는 어리석은 빈민 여자와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귀족 여인은 같은 신분이어도 가치가 다르다.
그리고 패치가 보기에 타니스의 가치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상대가 변했다면 이쪽도 그에 맞춰 대응을 바꾸면 된다.
고고한 귀부인에겐 그에 걸맞는 기사의 도리를.
가련하게 떠는 여인에겐, 듬직한 사내의 도리를.
서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두 남녀는 그렇게 처음 아닌 첫만남을 가진 것이었다...
'으음... 이번 몸은 이것인가...'
몇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피식에 의한 죽음과 포식에 의한 재탄 끝에, 라이커드는 낯선 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가 눈을 뜬 곳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화산관의 최심부.
신을 먹는 뱀으로서 똬리를 튼 그가 타니스의 꾐에 빠진 영웅들을 먹던 곳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잡아먹히고 말았지만.
-스륵
그는 주변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조금 허약하군. 뱀을 잡은 그 녀석이 아닌 건가?'
무심한 듯 새로운 몸에 대해 평가를 하는 그였어도, 사실 이번의 부활은 그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야 아인이 아니고서야 이긴 상대를 실제로 잡아먹는 미친 인간이 흔할 리는 없었다.
'녀석이 아니라면, 내 시체를 누군가 먹었나? 그럼 몸이 그녀석과 다른 것도, 내가 있는 곳이 여전히 여기인 것도 설명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서일까, 그가 자신의 새로운 몸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은 상당히 늦었다.
"...음?"
그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익숙한 손마디와 익숙한 옷가지,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그의 측비인 타니스였다.
"..."
잠시 멍하니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라이커드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흐, 흐하하하!"
옷의 안주머니 안에 그가 건넸던 망각의 약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역시 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설마 그런 선택을 할 줄이야!"
실망스러운 것은 오히려 그녀를 얕보았던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가 모독의 길을 걷는다 하여도, 심지어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패배한다고 하여도 망각의 약 따위를 사용할 약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입가를 넘어 얼굴과 상체에 잔뜩 말라붙은 그의- 뱀의 피를 긁으며 광소했다.
"흐, 그래. 너의 뜻이 그렇다면, 응하는 게 남편의 도리겠지."
데미갓으로서 가지고 있던 거대한 룬, 영생을 살 뿐더러 언젠가 신을 삼킬 뱀의 육체,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아낀 측비.
한번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라이커드는 낙심하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에게 몸을 바친 타니스를 볼 면목이 없다.
그리고 그에겐 아직 피식과 포식의 권능,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한 힘이 아직 남아있었다.
모독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명예를 버린 몸.
그는 추하게라도 연명하여 길의 끝을 보기로 했다.
설령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 뱀의 몸을 잃었어도, 온갖 괴물과 기물이 넘쳐나는 틈새의 땅에서라면 그를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 우선 그 기사 녀석을 찾아서 힘부터 차근차근 다시 기르는 게 좋겠군."
타니스에게 감화된 여러 인물 중 가장 쓸모있던 그 도가니의 기사라면 그의 먹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그렇게 조금씩 힘을 기르고, 조금 더 강한 상대를 잡아먹으며 또 힘을 기른다면.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그는 언젠가, 저 황금나무를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저벅-저벅-
앞날을 다짐하는 그의 귀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본적 없는 대머리 사내가 심히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부인?! 드디어 정신을 차렸습니까?"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박한 목소리.
-철퍽철퍽!
마찬가지로 경박한 발놀림으로 시체의 늪을 달려온 대머리 사내가 라이커드의 앞에 섰다.
터뮤니없이 약해진 몸, 쓸만한 수하 하나 없는 상황, 신원을 알 수 없는 침입자.
라이커드의 몸에 본능적인 긴장이 감돌았다.
그는 담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에 말한 그 자신조차 놀랐다.
산전수전을 겪어온 영웅들마저 떨게 하던 신을 먹는 뱀의 위엄은 이제 없다.
그저 불안에 휩싸여 새침하게 날을 세우는 여인이 있을 뿐.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태생부터 고귀한 데미갓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법무관으로서, 모독의 길을 걷는 뱀으로서 겪어본 적 없는 긴장.
라이커드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얇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반응을 살폈다.
이를 지켜보는 대머리 사내, 패치의 입장에서는 모독의 길에도 굴하지 않던 타니스가 드디어 무너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흐-음,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사기와 배신을 일삼던 그를 매료시켰던 고고한 귀부인, 타니스.
아직 마음에 픔고 있던 드높은 이상을 잃은 건 아닌지 그녀의 두 눈엔 심지가 세워져 있었지만...
남편을, 왕을 잃고 홀로 주저앉아 떨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아도 그가 흠모하던 귀부인이 아니었다.
꺽이지 않는 귀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패치는 실망하지 않았다.
유물의 내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장물아비로서 자격이 없는 법.
흔하게 보이는 어리석은 빈민 여자와 전쟁에 패해 포로가 된 귀족 여인은 같은 신분이어도 가치가 다른 법.
그리고 패치가 보기에 타니스의 가치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상대가 변했다면 이쪽도 그에 맞춰 대응을 바꾸면 된다.
고고한 귀부인에겐 그에 걸맞는 기사의 도리를.
가련하게 떠는 여인에겐, 듬직한 사내의 도리를.
서로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두 남녀는 그렇게 처음 아닌 첫만남을 가진 것이었다...
#TS #엘든링 #타니스 #암컷타락
###본 작품은 모그윈 왕조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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