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자성서라는 제목과 달리 전부 건전한 내용입니다.

** 개인의 프롬뇌와 병신뇌와 망상이 치사량으로 함유되어있습니다.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용찬의 땅이자 부패의 땅 케일리드의 상부, 흐르는 물이 언제나 있는 용총에서 「파름」 대교 너머에 자리한 곳, 짐승 신전. 그 곳에는 사제가 살았다.

두건과 로브로 온 몸을 꽁꽁 감싼 그 짐승은 분명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죄책감을 품고서 속죄하는 그림자는 굶주리며 「죽음」을 먹어치워갔다.

그랭이라는 이름의 사제가 언제부터 그 신전에 살았는지, 애초에 그 신전은 언제 만들어졌고 그랭은 언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황금 나무보다 이전에 세워지고 태어난 것들을, 황금 나무의 치세 아래 사는 자들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비는 온 사방을 뒤덮은 채 처절하게도 내렸다.

평소와는 달리 그랭은 신전 바깥에 있었다. 밤의 장막이 내려오자 황금 나무는 그 어둠 속에서 더 찬란히 빛났다. 내리치는 빗발을 맞으면서 그랭은 금빛의 광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 달린 손을 꽉 쥐었다. 손등에 달린 기묘한 아뮬렛은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들 만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온갖 더러운 일을 행하고 시체들의 산을 쌓으며 피와 살점과 뼛조각을 묻힌 그 손과 달리, 그랭의 눈은 항상 황금 나무의 찬란함과 따뜻함을 바라보았다.

황금 나무, 엘든 링의 상징이자 황금률의 표상. 그리고 저 안에 그랭의 주인이 있다. 그랭이 태어난 목적이자 이유가 있다.

뒤집힌 홍예 모양의 룬에 꿰인 채 매달린 여신, 영원한 여왕 마리카. 그랭은 한때 그 찬란함에게서 말리케스라는 새 이름을 하사받고 그 그림자 속에서 달리고 뛰고 싸웠다. 마리카와 말리케스는 마치 누이 같았다. 둘은 황금의 광채 속에서 찬란히 빛나며 영광의 세월을 누렸다. 그 풍양의 나날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음모의 밤이 있던 날. 말리케스는 잠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절대로 뺏겨서는 안되는 것을, 자신에게 깃든 「죽음」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그것은 황금 나무가 약속한 영원의 삶이자 환수의 규율이 깨졌음을 의미했고, 마리카의 치세가 끝나버렸음을 의미했다. 정신을 차린 말리케스는 곧 있어서는 안될 파멸과 잿더미를 마주했고, 절망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미 죽음과 하나 되어있던 말리케스는 죽음을 빼앗기며 기억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어찌할 수 없고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는 죄책감에 짓눌린 채, 그림자는 속죄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 짐을 다 덜 수 있기를 바라며 자신의 자색 눈을 뽑아낸 말리케스는 그렇게 신의 전사에서 짐승 사제로 돌아갔다. 초조함이 정신을 좀먹고 굶주림이 몸을 갉아먹어갔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까마득한 저 옛날 절벽 위에 세워진, 고향의 신전으로 한 마리 권속과 함께 돌아온 그랭은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사제는 바랐다.




비는 그칠 기미 없이 내렸다. 벼락이 내리치고 맹풍이 불었지만 그랭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사제는 생각했다. 다음 여명이 머지 않았지만 해가 보기 싫었다. 빛을 받기가 싫었고 따뜻함을 쬐기 싫었다. 그랭은 그것들이 너무나도 과분하다 생각했다. 자신 때문에 부숴진 영광을 떠올리기란 괴로웠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다 해도 결국 사제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랭의 충심은 그 대상을 바꾸지 않았다. 인도에 대한 믿음이 꺾이는 법도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자신이 책임을 지고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적들이 죽음 앞에 전부 바스라지고 그 날의 죄를 전부 갚게 될 때까지, 쓰러질 수는 없다. 죽음을 전부 되찾는 순간이 오면...

그랭은 황금 나무를 향해 울부짖었다. 과거를 향해 외쳤다. 외치고 또 외쳤다. 야속하게도 목은 쉬는 법이 없었고, 그 소리는 황금 나무에 닿을 일이 없었다. 결코 들리지 않을 절박함은 소명을 다하지 못한 채 허공에서 빗속에 녹아 사라져갔다. 대답은 없었고 메아리도 들리지 않았다. 빛바랜 자는 이 소리를, 이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




황금의 고드윈이 죽음의 왕자가 되어 뒤틀린 이래로 틈새의 땅에는 죽음이 퍼져나갔다. 그랭이 지은 죄의 생생한 증거는 온 사방에 그 모습을 보였다.

수치, 죄책감, 분노, 회한. 그랭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오랜 분투와 노력과 기다림 끝에 한 전사를 만났다.

어딘가 쓸쓸함을 간직한 빛바랜 자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가지고 있었고, 마치 모든 것에 대해 오래 전에 질려버린 듯 항상 허공을 보는 듯했지만, 그 성정 속에 언제나 있던 상냥함은 그랭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사제가 먼 옛날 뽑아낸 자색 눈은 죽음이 깃들어있었기에 다른 죽음에 이끌렸다. 그 눈을 인도 삼아 지하의 대묘지를 파헤치고 온갖 기묘한 곳들을 누비며 틈새의 땅에 퍼진 죽음을 하나둘 회수해왔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과 죄의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랭은 하나둘 사근을 먹어치워갔다.

머리가 깨져나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빛바랜 자를 공격한 적도 있었지만, 짐승은 이내 지성을 되찾고 공격을 멈추었다. 그 때 빛바랜 자의 얼굴에서 보이는 감정은 놀라움이라기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죽음에 잠식되어 뒤틀린 나무뿌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마다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과거도 한 조각씩 맞춰져갔다. 이대로라면 정말 수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랭은 희망을 가졌다.




그 처절한 외침이 정말 들리기라도 한 듯, 빗속에서부터 빛바랜 자는 나타났다. 평소와 달리 벗은 투구를 품에 안은 전사의 걸음걸이는 많이 지쳐있었고, 맨얼굴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가의 주름과 내려간 입꼬리가 합쳐져 상당히 늙어보였다.

"...신전 안에 아무도 없길래 놀랐는데, 여기 있었나."

그랭은 눌러쓴 두건 밑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약간의 과거마저 오래는 허락될 수 없단 말인가. "그래. 무슨 일로 왔지?"

빛바랜 자는 아무 말 없이 사근을 한 조각 꺼냈다.

죽음의 마지막 조각. 기억의 마지막 파편. 운명적인 해후가 있던지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그랭의 사명이 그 끝을 보게 되었다.

그랭이 아무 말 없이 내민 손 위로 사근이 얹혔다. 그랭은 사근을 입 안에 넣고 이빨로 자르고 으깼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기억은 강렬했다. 음모의 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그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랭은 기억해냈다. 기억은 물이 밀려들듯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곧 줄기는 개울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그것은 황금의 귀공자가 처음으로 죽은 데미갓이 되던 날이었고, 영원의 여왕이 엘든 링을 파쇄한 날이었다. 말리케스의 충정이 더럽혀지고 배신당하던 날이었다.



이것이 죄인가. 두 번 다시 그 아름다웠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가. 황금률은 돌이킬 수 없으리만치 부숴졌다. 그 주도자는 자신이 섬기던 여신이었다. 대체 왜인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도 알 수 없었다.

빛바랜 자는 말이 없었지만, 내리깐 시선과 앙다문 입에서는 연민과 고통이 내비쳤다. 그리고 묘한 공감도 내비쳤다. 전사의 과거에도 비슷한 아픔이 있었던 것일까.

머리가 깨질 듯했다. 죽음을 전부 되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건만, 밝혀진 사실은 그 반대를 속삭였다. 그 무슨 수를 써도 이제 과거는 되찾을 수 없다.

"수고해준 것 고맙다, 빛바랜 자. 허나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이제 허기를 유일한 동반자 삼으리라. 잘 있어라."

그랭은 포효했다. 셀 수도 없이 무수한 감정이 담긴 그 소리와 함께 사제의 몸은 푸른 연무가 되어 사라졌다.




그랭은 눈을 떴다. 익숙한 바위의 냄새와 바람이 반가웠다.

몰아치는 폭풍, 떠다니는 돌 그리고 나는 용들과 함께 폭풍에 휩싸인 옛 도읍.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곳. 모든 것의 근원 되는 땅. 황금 나무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엘데의 옛 왕과 다섯 손가락의 짐승들과 지성의 첫 편린이 깃든 곳. 파름 아즈라.

그랭은 그 차디찬 옛 고향의 신전에 있었다. 세 늑대와 어린아이와 엘데의 호가 조각된 태초의 규율이 깃든 성지. 시간이 얼어붙은 성지에서, 그랭은 필요하다면 영원히라도 속죄할 것이라 다짐했다. 비척비척 걸으며 주변을 살핀 그랭은 이내 한 구석에 앉았다. 그리고 쓰디쓴숨을 내쉬었다. 과거가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그랭 혼자만은 그 옛날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 곳에 시간을 멈춘 채 떠나간 이들을 위해 죄를 삼키고 고통을 마실 것이다.




황금률이 이 땅에 처음 떨어지고 황금 나무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틈새의 땅의 모든 것은 황금 나무의 적이었다. 금빛 별의 편에 선 자들은 싸웠다. 뱀과 싸웠고 죄과 싸웠고 용과 싸웠다. 불꽃과 싸웠고 가시와 싸웠고 짐승과 싸웠다.

그리고 죽음과도 싸웠다.

거대한 의지가 선택한, 새 시대의 주역이 될 후보는 둘. 영원의 여왕 마리카, 그리고 밤빛 눈의 여왕. 그 중 자색 눈을 빛내며 운명의 죽음을 휘두르던 자는 마리카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엘데의 죽을 일 없는 전령마저 죽이고 반기를 들었다. 그런 무모한 결정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거대한 의지는 분노하여 마리카를 하나의 진정한 신으로 삼고 힘을 내렸다. 그리고 그림자 짐승 말리케스는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날, 밤빛 눈의 여왕의 본거지를 토벌하는 작전을 맡았다. 그 사명은 더 이상 차출할 병력이 없기에 단신으로 쳐들어간다는 점에서 무모했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그림자라 할지언정 운명의 죽음을 휘두르는 적을 상대하도록 보낸다는 점에서 무정했다.

그러나 말리케스는 성공했다.

돌과 불꽃. 발톱과 꼬리. 피와 죽음. 어떤 문명이 살아남을지 결정하는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야만스러웠다. 짐승은 흑염에 그슬리고 살갗을 벗기며 바느질하는 날에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기민한 몸놀림과 압도적인 무력으로 여왕의 사도와 귀인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갔다.

그리고, 밤빛 눈의 여왕. 운명의 죽음을 다루고 수많은 데미갓들을 죽여 그 살갗을 성포와 의복 삼은 영원의 종결자. 하지만 그녀조차 말리케스를 꺾을 수 없었다. 기나긴 전투의 끝에 승자로서 선 쪽은 말리케스였고 밤빛 눈의 여왕은 갈기갈기 찢긴 채 바닥에 던져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 섞인 가래를 겨우 뱉어낸 여왕은 쥐어짜내듯 말했다.



"...가여운 것. 네가 믿는 엘데는 「엘데」가 아닌 것을... 거짓 신을 섬기고 있으니 언젠가 그 눈이 머는 날이 올 것이야..."

"무슨 말이지?" 말리케스의 친퀘디아가 여왕을 겨누고 있었다. 다섯 손가락 달린 지혜의 상징은 지금이라도 반신의 목을 꿰뚫고 또 잘라낼 것만 같았다.

밤빛 눈의 여왕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말해봤자 그 우둔한 눈이 뜨일 일은 없을 터. 그냥 죽여라. 이젠 피곤하다. 각오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짐승."

말리케스의 투구 밑 눈이 조금 흔들리다 멈췄다. "...잘 가라." 단검이 목 안을 딛자 피가 뛰어오르며 춤을 추었다. 자색 눈은 빛을 잃었고 머지 않아 생기도 잃었다. 말리케스의 동작은 굳은 각오를 대신 보이는 듯했다. 곧, 짐승의 눈은 자색으로 물들었다.

운명의 죽음의 규율은 마리카의 그림자에 깃들었고, 그렇게 봉인되었다. 말리케스는 영원한 삶과 죽음 없는 환수의 법칙, 황금률의 치세 하에서 유일한 공포이자 유일한 죽음이 되었다. 신의 아이들을 진정 영웅으로 만드는 하나의 쐐기가 되었다.

말리케스는 각오되어있었다. 그랭은 준비되어있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댔다. 숨이 가빠왔다. 이제는 여왕이 남긴 유언의 의미를 알 것만도 같았다. 거대한 의지는 이 땅을 버렸고 엘데를 버렸고 황금 나무를 버렸다. 신도 왕도 모두 저버리고 전령에게도 답하지 않고 있다는 그 무언가는, 분명 진정한 신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후회가 있다면 음모의 날에 있을 뿐이었다. 말리케스는 황금 나무와 그 규율을 믿었고 마리카를 믿었다. 풍양을 믿었고 은혜를 믿었으며 행복과 온기와 약속을 믿었다. 그렇기에 그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그 움직임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한때 말리케스가 보았던 눈부신 광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짐승을 이끄는 인도였다.




마리카가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았다. 짧고도 얇은 머리칼은 벌써부터 찬란한 금색을 띠고 빛났으며 그 눈도 축복으로 충만했다. 황금의 싸라기와 나뭇잎은 고귀한 탄생을 축복하듯 내리고 또 내렸다.

아기는 마리카의 적법한 후계자, 왕자 고드윈이었다.

마리카는 미소를 지으며 말리케스에게 고드윈을 보였다. 아기를 내미는 손길은 상냥했지만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기도 했다. 말리케스는 미소지었다.

"...이 아기가, 언젠가 우리 모두를 이끄게 될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군, 마리카."

"그래. 하지만 우리의 풍양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야. 적들이 있다면 물리치고 장애물이 있다면 치워버릴 뿐. 너를 믿는다, 말리케스."

말리케스는 왼손을 움켜쥐었다. 손등의 아뮬렛이 다섯 손가락을 조였다. 짐승들이 처음으로 얻은 지성을 상징하는 사제의 단검과 하나 되어 마리카의 적들을 쓰러뜨릴 만전의 준비가 되어있는 그 봉인은, 말리케스가 어디에서 온 존재이건 간에 지금 그 충절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수많은 암살자들이 찾아왔다. 귀공자의 목숨을 노렸던 그 무리는 그러나 여왕의 그림자에게 모두가 잘려나가고 조각나고 난자되어 스러져갔다. 말리케스는 고드윈을 수호했고 찬란한 미래를 수호했다.




그랭은 이내 한 명의 기사를 만났다. 한때 고룡의 힘을 빌어서라도 로데일을 수호하고자 했던 신자는 자신보다도 더 경건한 믿음 앞에 경의를 표하고 그 방패가 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사태를 타개할 방도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랭 스스로도 마음 한켠으로는 모든 것이 영원히 끝장나버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회개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전부 그랭이 납득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적어도, 죽음의 룬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봉인되었다. 이제 지키기만 하면 된다. 비록 자신을 저버리고 엘든 링을 부쉈을지언정, 마리카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상냥했던 빛바랜 자도 왕이 되어 이 세상을 수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며 싸우고 또 싸우고 있다. 나만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랭은 생각했다.

사제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태초의 규율의 문양은 황금의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분명, 저것이 시작의 순간 이 땅에 있었던 진정한 신의 잔재이리라.

그러나 그랭은 개의치 않았다. 진짜건 거짓이건, 적어도 그랭에게 있어 황금 나무는, 황금률과 마리카는, 진정한 이유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고드윈은 곧 흠잡을 데 없는 왕자로 자라났다. 출중한 외모는 군중의 지지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총명한 판단에는 차기 군주의 자질이 충분했다. 갈고닦은 황금률 원리주의의 기도는 곧 그 누구의 것보다도 압도적인 금색을 내뿜으며 황금의 귀공자의 상징이 되었다.


"말리케스 삼촌!" 소년 왕자가 말했다.

"음?" 보통은 로데일의 어두운 곳에 기거하기를 좋아하던 말리케스는 고드윈을 보고서 조금 놀라 답했다. "무슨 일이냐?"

"이것 봐요!" 소년은 환히 미소지으며 손에 든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스카라베였다. 무얼 굴리고 있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겠지만.

"어떻게 잡은 것이냐? 어여쁘구나!" 말리케스는 마주 미소지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온갖 전흔으로 갈라지고 굳어버린 손은 황금의 왕자의 윤기 흐르는 머리칼과 그닥 어울려보이지 않았지만, 둘의 표정은 마냥 행복했다. 황금에 축복받은 나날들은 그렇게 이어져갔다.



그러나 축복은 영원하지 못했다.

흐느낌의 반도에서 비가 내리듯 황금 나무에서 항상 내리던 풍양의 물방울도 결국 그치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풍요와 은혜는 서서히 고난과 역경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말리케스의 충심은 변하지 않았고, 자색의 죽음 깃든 눈은 언제까지고 누이 마리카를 바라보았다.



변경에서 반란의 치세를 치켜올린 한 데미갓을 주살하고 돌아온 날, 말리케스와 마리카는 같이 로데일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눴다.

"...고드윈은? 괜찮나? 처음부터 고드윈이 오는 순간을 노렸다고 하던데."

"보고에 따르면 반란이 발발한 순간부터 현장에서 병력을 지휘하며 계속 싸웠다는군. 사후처리도 도맡아서 진행 중이고. 이제 예전의 그 책벌레 소년이 아니니 걱정은 덜어도 돼. 무력도 지성도 모두 출중한, 황금 나무의 백성들이 기대하는 군주에 걸맞는 왕자로 잘 자라주었으니." 마리카의 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말리케스는 희소식에 안도했고 또 기뻐했다. 두려움과 불안은 씻은 듯 사라졌다. 실로 오랜만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분명히 무너져가는 시대와 약해지는 치세. 그러나 빛나는 왕자만큼은 굳건히 서서 황금 나무의 영광이 끝나려면 멀었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마리카가 말리케스의 갑옷 틈을 찌르고 도망친 것은 그 때였다.

"크아악! 또 거기인가! 마리카!" 평소에도 조금 예민한 부위였다. 찌릿한 감각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말리케스가 겨우 고개를 돌렸을 때 마리카는 이미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표정은 분명 그림자 짐승을 놀리고 있었다.

"매번 똑같이 당하는 것 같군그래..." 말리케스는 투덜거리며 모퉁이를 돌았다. 잡으려면 이번에도 몇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번엔 어떻게 복수해줄까, 말리케스는 상상해보며 혼자 큭큭댔다.

저녁노을 내리는 로데일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채 저무는 하루의 황혼 속에 추억을 담고 있었다.




폭풍이 얼굴을 때렸다. 시간 속에 멈춰버린 도읍에는 해가 지는 일이 없었고 때문에 말리케스에게 익숙했던 어둠도 이제는 얻기가 어려웠다. 그랭은 숨고 싶었다. 이 무너져가는 도읍의 시간은 멈춰있었지만, 야속하게도 뒤로 돌지는 않았다.

그랭은 친퀘디아의 날을 훑고 아뮬렛을 긁고 벽에 몸을 기댔다. 너무나도 졸렸고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허기 탓일까, 아니면 정신이 그런 걸 누릴 자격조차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짐승은 벽에 기대어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나마 시간을 되감아 보았다.




대고룡 그랑삭스의 로데일 외벽 함락과 함께 시작된 고룡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희생을 막기 위해 고드윈은 고룡 포르삭스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승리하여 그 굳건한 바위를 벗 삼았다. 말리케스는 옛 고향에서 온 생명들이 지금의 고향에서 스러져가는 것을 보고 괴로워했지만, 고드윈이 승리자로서 개선의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 괴로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말리케스의 자색 눈에 비친, 마리카의 후계자는 틈새의 땅을 이끌 완벽한 재목이었다.

"...포르삭스라. 이제 싸우면 내가 지겠는걸." 연회장 바깥에서 잠시 바람을 쐬던 말리케스는 따라나온 고드윈을 보고 지나가듯 읊조렸다.

"황금 나무가 세워진 이래로 나온 농담 중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고드윈은 웃음기 빠진 얼굴로 말했다. "당신한테 누가 이길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일단 마리카부터 포함시키고 생각해볼까."

고드윈은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건 맞겠네요."

흑철에 황금 섞인 갑옷을 잠시나마 벗어던진 검은 짐승과, 고풍스러우면서도 편한 예복을 입은 황금의 왕자는 서로의 등을 쳐주었다. 오랜 우정과 믿음과 친근함이 내비치는 모습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그 누구보다 고생하시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항상 감사드림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딱히 필요는 없다만 그래도 고맙군. 너도 수고했다. 물론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계속 수고할 일만 있겠지만 일단 오늘 밤은 푹 쉬면서 이 승리를 즐기자."

둘은 나란히 앉았다. 금빛 풀은 부드러웠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조금 따뜻한 공기와 황금 나무에서 내리는 금빛 나뭇잎과 금싸라기. 안에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축배를 드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빛나는 듯한 미소를 짓는 마리카.

행복했다. 이 행복의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드윈은 음모의 밤이 있던 날 제일 처음으로 죽은 데미갓이 되었다. 고드윈을 죽인 무기는 말리케스에게 봉인되어있던 운명의 죽음이었다. 말리케스의 잘못 때문에 고드윈이 죽었다.

내가 고드윈을 죽였어.








그랭은 다시 울부짖었다. 눈알이 파여나간 구멍이 쓰라려왔다. 빛살은 어김없이 비추어 내려왔건만 그랭만이 이 땅에서 홀로 버려진 듯했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이미 그럴 눈이 없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그랭의 눈은 이미 파여나가버렸다. 이것이 운명인가, 라고 그랭은 생각했다. 다만 가만히 기대어 반추하고 또 반추할 뿐이었다.

저 드높은 거인들의 불가마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랭은 오래 전에 잊은 무수한 감정을 다시금 느꼈다. 공포, 불안, 절망.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었다.

거인들의 붉은 화염, 악신의 태양. 그 규율이 다시 힘을 보였음은 곧 누군가 이 시간의 틈새로 오고 있다는 뜻. 그럴 이유는 하나 뿐이다.

운명의 죽음이, 또다시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끔찍한 과거가 뇌리를 타고 올랐다. 두 번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빼앗길 수 없다. 더욱이, 그 불길에는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듯한 감각, 어째서인지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듯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 모든 것에 질려버린 사람이 모든 것을 영원히 끝장내고자 하는, 포기하고자 하는 의지.

그랭은 포효했다. 누가 되었건, 이제 빼앗기지 않는다. 다시 되찾은 죽음을, 사명을 지킬 것이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용총의 짐승 신전에서는 태양이 해무를 뚫고 올라왔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어둠은 이내 피처럼 붉은 색채에 그 자리를 내주고서 사라졌다. 전사가 미치고 병사들은 죽은 채로 싸우며 동물도 식물도 온전히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단지 썩어갈 뿐인 고통의 땅이 바로 밑에, 가까이 있었지만, 신전만은 오롯이 그 높은 절벽에 서서 엄숙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신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제 텅 빈 신전을 외로이 지키는, 검은 시랍의 한 마리 가고일만은 여전히 그 앞에 남아 여기 어떤 존재가 있었는지, 어떤 희망과 슬픔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