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기분좋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들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지평선을 가득 메우는 황금의 물결로 화답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젠 바람과 들판의 물결 중 누가 나그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눈앞의 풍경은 서로 발맞추어 넘실거리기 바쁘다

"풍요롭다"라는 말로조차 못다할 만큼의 번영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과거 황금나무가 이 땅에 드리우던 빛을 연상케하는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온 생명이 마땅히 누려야 할 저 황금을 빼앗아 신목을 세웠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래 이것이 올바른 세계의 모습이다

신들이 거닐며 다스리는 땅이 아닌 뭇 생명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긴 여정이었다


이 땅에 와서 처음 만났던 백면의 종군의사,

내내 함께 여행하며 수없이 동고동락했음에도 작별조차 전하지 못했던 불씨의 소녀,

늘 호탕하게 웃으며 적들에게 철권을 휘두르던 전사항아리, 

긍지높은 바람을 두른 채 싸우던 여전사,

조령의 재능이 있던 마음이 꺾인 소녀,

무뚝뚝하지만 친절하던 원탁의 대장장이,

자신의 출생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행을 떠난 화산관의 딸, 

늘 맛있는 게를 삶아주던 착한 불량배,

은혜를 갚기 위해 남부끄럽지 않은 재봉사가 되겠다며 나를 따라다니던 "아름다운" 아인,

얄밉지만 왠지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던 대머리 녀석,

그리고 끝내 구하지 못했던 외팔의 여검사까지


나는 정말이지 많은 만남과 그보다 더 많은 싸움을 겪으며 이 왕좌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내가 알던 이들은 이제 이 땅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홀로 로데일의 왕좌에 앉아 그들이 남겨준 이야기들을 언제고 곱씹고 있노라면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빛바랜자들이여

가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도와주던 당신들은 나와 같은 적을 이겨내고, 같은 동료와 웃으며, 같은 길을 걸었는가?

물론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당신의 여정이 어떤 끝을 맞이하든 

이 틈새의 땅에서 당신이 걸어온 그 모든 길과 당신이 느꼈던 모든 감정들은 전부 그 자체로 가치있었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기억과 경험들이 지금 내게 그러하듯 부디 당신에게도 소중하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를 바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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