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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게 펼쳐진 케일리드 황야의 한복판


거구의 사내와 장신의 여인이 대치하고 있었다. 적막감이 감돌며 석양으로 물드는 시산혈해의 전장 속에서 두 남녀는 서로를 말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용서못해....'


미켈라의 칼날 말레니아는 투구 속 얼굴이 일그러지며 온갖 검은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은 눈 앞을 가로막는 거구의 사내, 최강의 데미갓이라 불리우는 파쇄전쟁의 가장 거대한 산, 라단 장군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질.투... 라는 이름의 추악하디 추악한 감정이었다.


'오라버니.... 어째서 이 남자를...'


장검인 의수도를 고쳐쥐며 자세를 잡은 말레니아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것은 말레니아가 어릴 적, 자신의 오라비인 미켈라와 함께 참석했던 황금의 수도 로데일의 데미갓 회의였다. 자신의 의석에 앉은 미켈라는 명랑한 얼굴로 옆에 앉은 말레니아를 바라보며 그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로 속삭였다.


"말레니아, 기대되지 않느냐? 모든 데미갓이 로데일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 카리아의 데미갓들도 참석한다는구나."

"네, 오라버니. 로데일의 최전방에서 방위를 담당하던 라단 장군까지 로데일 회의에 참석하는 건 이례적이네요."

" 초대왕 고드프리 전하께서 폭풍의 왕을 토벌하셨으니까. 카리아 출신의 데미갓들이라도 초대왕의 공적을 기리는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을 순 없었을 테지. 하물며 라단장군은 고드프리 전하를 깊게 존경하는 장수라고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럼 드디어 엘데 최강의 무인이라 불리는 그를 볼 수 있겠군요. 가능하다면 대련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검술에만 몰두하는 구나. 하지만 그게 너의 좋은 점이기도 하지."

"오라버니..."


말레니아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에 미켈라는 사랑스럽게 미소지었다. 잠시 후, 카리아 출신의 데미갓들이 로데일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카리아의 라니공주, 이단심문관 라이커드가 회의장에 들어섰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라단 장군이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라단 장군의 모습은 수많은 호사가들이 묘사한 것 이상이었다. 적발영웅의 혈통, 별과 운명조차 깨부수는 대영웅... 그를 표현하는 문구는 수없이 많았지만 직접 눈에 담은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과 무공의 깊이를 표현해낼 문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석에 앉기 전, 주위의 데미갓들에게 목례를 했다. 말레니아와 라단의 두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무인으로써 그 눈에서 전해지는 강대한 야성, 그리고 그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있는 친절함... 그야말로 모든 무인들이 존경할 만한 인물됨이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단장군. 무구한 황금의 미켈라입니다. 옆은 제 동생인 말레니아입니다."

"로데일의 장수, 라단이라 합니다. 반신 미켈라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단은 은은히 느껴지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곤 자리에 착석했다. 말레니아 역시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그는 명상에 잠긴 듯 팔짱을 낀 체 눈을 감았다. 말레니아는 대련을 청하고 싶었으나 때를 놓친 아쉬움으로 입을 작게 앙다물었다. 그때, 말레니아는 오라비에 거동이 이상함을 느꼈다. 미켈라는 상기된 얼굴로 흘끔흘끔 옆에 앉은 라단장군을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었다. 무구한 황금빛으로 물든 그 눈동자는 라단의 거대한 풍채로 가득 차 있었고, 언제나 총명하고 차분했던 오라비의 눈동자는 처음 느낀 감정으로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다. 미켈라의 반려로 선택된 말레니아 자신에게조차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격정, 진심어린 애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파쇄전쟁의 막바지, 미켈라는 암살당한 고드윈 왕자의 부활을 위해선 라단 장군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적사자 기사들과 성수 기사들 사이의 격렬한 전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황혼으로 물드는 이 전장에서, 두 남녀는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그때보단 조금 더 강해진 모양이군."

"장군, 같은 무인으로써 당신을 존경했지만 장군을 치는 것이 나의 오라비의 뜻일지니. 오늘 그대를 베겠습니다."

"무인들의 싸움에 말이란 무의미. 그 검으로 보여보아라."


이윽고 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천지를 뒤흔들 검풍이 몰아치고, 하늘에서 보라빛 벼락과 운석이 케일리드 대지에 작렬했다. 천지개벽. 둘의 싸움은 케일리드 들판 전체를 요동치게 했다. 그러나 격렬한 전투 중, 말레니아의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검은 감정은 그녀를 점차 좀먹어갔다.


'오라비는... 왜 당신만을... 보는거지...?'


로데일의 첫 회의에서 라단과 미켈라가 만난 이후, 미켈라는 라단장군의 승전소식이 있을 때마다 개선문에 들어서는 그를 보기 위해 에브레펠의 격무를 떨쳐버리고 로데일 개선문으로 달려갔다. 그의 애마 위에 올라타 팔짱을 낀 체 황금의 일족들에 칭송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들어서는 라단의 모습을 그 황금빛 눈동자에 담을 때마다 미켈라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처럼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곤 했다. 라단장군이 자신을 조금도 보지 않음에도 개선문 위에서 그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흔드는 오라비의 모습을 그녀는 몇번이나 지켜봤을까... 검은 감정이 지워지지 않는다. 점점 차오르고 차올라, 몸을 좀먹는 부패처럼 그녀의 마음마저 좀먹어갔다. 이윽고 그 감정은 파쇄전쟁의 운명을 결정할 이 싸움에서조차 가득 차올라 흘러넘치고 말았다.


파캉!


감정에 정신이 팔린 일순, 그 짧은 순간에 승패가 갈렸다. 그녀의 의수도가 라단장군의 대검에 의해 박살나며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의수로 싸움에 임하는 말레니아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인으로써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녀는 질 수 없었다. 비록 무인으로써 라단에게 지고 있음에도, 오라비의 애정조차 그에게 빼앗겨 패배했음에도! 그녀는 추하게 발버둥쳤다. 아니, 추하게 발버둥쳐야만 했다.


"망가뜨려 주겠어...! 당신의 모든 걸!"


그것은 질투심이었을까 아니면 패배견의 분노였을까? 미켈라가 금했던 부패의 힘을 해방한 그녀는 절대 이길 수 없었던 라단장군의 몸 위로 올라타, 무인으로써 자존심마저 내던지는 추한 행동을 거리낌이 없이 저질렀다. 그녀의 몸에서 꽃처럼 화사하게 터져나온 부패의 기운은 라단장군의 몸을 뒤덮었고, 이윽고 케일리드 대지 전체를 붉은 빛 부패로 잠식시켰다. 부패의 기운에 직격당한 라단 장군의 자세가 천천히 무너졌다. 그는 온몸에 퍼져나가는 부패의 기운으로 몸을 웅크린 체 전신을 태우는 것 같은 격통을 이빨이 부서질 듯 깨무는 것으로 버텼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에겐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할 여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말레니아는 부패의 기운에 잠식되어 꿈틀대는 라단의 거체 위에 올라타, 광기와 희열이 감도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날아간 의수의 빈자리를 왼 손으로 부여잡은 체 그녀는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인 격정을 토하고 또 토했다. 무인으로써 절대 넘어설 수 없었던 사내, 최강의 데미갓, 무엇보다 사랑한 오라비의 사랑을 빼앗은 연적... 그가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말레니아는 희열에 잠기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차오르는 광기와 기쁨,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는 소리쳤다.


"오라버니, 보세요! 이 말레니아가 해냈습니다! 다름 아닌 오라비의 반려, 이 말레니아가 해냈단 말입니다! 오라버님이 사랑했던 이 사내를! 이 말레니아가! 해치웠단 말입니다아아아! 당신의 장군은 이토록 비참하게! 이 말레니아의 부패에 범해졌습니다! 아하하하하하!"


휘청


을씨년스럽게 변한 케일리드의 한 가운데에서 광소를 터트리던 말레니아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한 걸음이다. 조금만 더 하면 라단장군의 목을 치기 직전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몰려오는 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은 천천히 감겼고, 이내 라단장군과 마찬가지로 쓰러졌다.


"천한 것... 골육이라 할 지언정 기어코 쓰지 말라던 부패의 힘을 쓰다니..."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미켈라는 고운 눈가를 찌푸리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불만을 씹어뱉었다. 그의 옆엔 이형의 여인이 서 있었다. 미켈라의 수하 중 하나로 불리우는 잠의 성녀, 트리나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미켈라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으신지요, 미켈라 저하. 그녀가 조금만 더 했다면 라단장군의 목을 치는 게 가능했을 겁니다. 어째서 그녀를 멈추신 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 정도로 부패의 기운에 잠식된 이상, 장군의 몸은 이미 끝났다. 그는 서서히 무너지게 될 것이야... 하지만 내 반려가 될 장군을 어찌 천한 동생의 손에 죽게 만들 수 있겠나? 장군의 반려가 될 내가 그걸 허락할 순 없어. 그렇기에 널 이리로 부른 것이다. 트리나여."

"말레니아는 이대로 처분할 생각이신지요?"

"비록 부패의 기운을 품은 천한 것이라 할 지라도 저것은 내 동생이다. 하지만 내 낭군되실 장군을 천한 부패의 기운으로 범한 것은... 용서할 수 없겠지. 성수로 그녀를 옮겨 재우도록 해라. 자신의 부패에 잠든 체 천천히 썩어가도록 해. 그게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한때 누구보다도 말레니아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던 미켈라의 따스한 눈동자는, 차갑게 얼어붙은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자신의 반려를 더러운 부패의 기운으로 더럽힌 혈육을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이내, 고통에 신음하던 라단을 멀리서 지켜보는 미켈라는 홍조를 띄우며 말레니아와 대조되는 뜨거운 감정으로 그 황금빛 눈동자가 타올랐다.


"아아아.... 장군. 부패에 썩어떨어지는 그대의 비참한 모습조차도 나는 사랑할 수 있어요. 당신의 몸이 완전히 썩어떨어질 그 날, 우리의 운명도 함께 엮일 것입니다."


미켈라는 화사하게 번지는 미소와 함께 라단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덧 그림자 땅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