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님? 군주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거한은 눈을 꿈뻑이며 자신을 찾아온 전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거대한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자리 잡았다.
어둠 속에서 외롭지만 고고히 빛나며 자신을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에 자기도 모르게 압도당한 전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숙면을 방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안이 워낙 급박해 경황이..."
군주는 괘념치 말라는 듯 그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전령이 잘 볼 수 있게 손을 펼친 뒤 가벼운 손짓으로 보고를 종용했다.
"예 그럼... 마저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데미갓 연합이 로데일 일대를 완전히 떠났다고 합니다."
군주는 전령을 한 번 스윽 바라보곤 나지막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드디어..."
"그뿐만이 아닙니다. 축복왕께선 로데일의 전열을 가다듬은 뒤 곧바로 이번 반란의 주모자들을 하나하나 숙청하여 황금률의 치세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온 틈새의 땅에 널리 알릴 거라 공표하셨습니다. 군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전쟁은 결국 저희들의..."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들뜬 전령의 목소리로 활기를 더해가던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예...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흠..."
군주는 깊히 신음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수성전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건... 수성이라는 압도적인 지리 상의 이점, 여러 이해 관계를 수반하는 연합의 태생적인 속성, 그리고 배후에서 활약하던 우리들의 존재가 한 데 뭉친 결과임을 형님이 모르시진 않을 터..."
"무엇이 그리 형님을 조급하게 하는지 모르겠군."
잠시 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팔을 뻗어 침대 가에다 세워뒀던 거대한 삼지창을 움켜쥐었다.
"...결국 황금률인가."
창의 자루 끝을 나무로 된 바닥에 세차게 꽂으며 거한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이 형님의 뜻이라면..."
그 소리에 각양각색의 외모를 한 시중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의복을 대령하는 사이, 전령은 미리 안배된 자리로 안내를 받아 그곳에서 접대용으로 준비된 포도를 집어 먹으며 상관을 제대로 알현하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형님께서 특별히 더 하신 말씀은 없었나?"
위엄이 넘치는 복식으로 환복한 그가 전령의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금껏 수고해주었다고 지나가듯 말씀해주신 것 외엔 별다른 언질을 따로 해주시거나 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래..."
군주는 사람 눈알 만한 포도을 집어 자신의 눈 앞으로 가져갔다.
"형제라고 해서..."
이윽고 손가락 사이에 놓인 포도는 그의 눈동자처럼 검붉은 화염에 휩쌓이기 시작했다.
"반드시 같은 길을 가라는 법은 없지."
알맞게 익은 포도는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한 그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식성 하나는 여전하시군요."
"원한다면 자네 것도 만들어주지."
"저는 그냥 먹는 게 좋더라구요."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포도를 삼키며 잠깐의 침묵을 즐겼다.
"혈염의 마법은..."
처음과 달리 이번에 먼저 침묵을 깬 건 맞은 편에 앉은 군주였다. 군주는 손가락 사이로 포도를 굴리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틈새의 땅에 내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큰 힘을 주었어. 덕분에 오늘날 흉조에 불과했던 내가 틈새의 땅의 주민이자 황금률의 치세 아래 살아가던 자네와도 이렇게 마주보며 앉을 기회도 얻을 수 있었지."
익숙함에 속아 쉽사리 넘겨왔던 사실과 당면하게 된 전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황금의 일족의 피를 타고났지만 그들과 동격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지하 수로에 버려져야만 했던 가여운 존재. 오래 전, 마을에 잠깐 들린 흉조 사냥꾼을 보곤 흥분에 겨워 소리치고 했던 치기 어린 젊은이.
누가 됐든 처음과 끝을 잇는 과정을 속히 다 알지 못한다면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지금 이 순간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섬기기로 한 데미갓께서 일구어 냈다는 사실에 전령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난 이 힘이 비단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무언가로 나아갈 수 있길 매일 기도한다네."
"더러운 흉조의 피조차 위대하신 황금률을 수호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지금, 이 땅에 불가능한 일이란 더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피가 흐르는 모든 이들을 관통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군주의 취향에 맞춰 부분적으로 일렁이던 혈염은 고조되는 그의 감정에 맞춰 점차 세차게 불타오르기 시작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전령은 포도를 내려놓는 것조차 잊은 채 그곳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말았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
모든 걸 불사를 기세로 타오르던 혈염은 전령의 손이 든 포도에게로까지 전이되었다.
"이 모습은 마치... '엘든 링'과 같군요."
혈염의 매혹적인 자태에 잠시 넋이 나갔던 전령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것의 빈 자리를 빈말로도 잘생겼다곤 하긴 힘든 군주님의 얼굴이 대체한 뒤에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네를 위해 걸세."
군주는 전령의 손바닥에 놓인 혈염에 익혀진 포도를 가리켰다.
잠시 동안 뚫어져라 그것을 쳐다보던 전령은 군주가 그랬듯 천천히 포도를 입가로 가져갔다.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시도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잠시 망설이던 전령은 이내 눈을 꼭 감곤 포도를 입에 쑥 집어넣었다.
몇 차례 꾹꾹 씹어대던 전령은 겨우 그것을 삼켜낸 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직 제 취향은 아니네요."
"하하하~ 자네도 좋아하게 될 걸세, 안스바흐."
부러진 창 자루에 의지해 힘겹게 일어난 데미갓이 사방으로 피를 토해냈다.
"이건..."
고개를 든 데미갓의 고고하지만 외롭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천천히 자신의 숨통을 끊으러 오는 빛 바랜 자, 그리고 그 자의 등 뒤 편에 놓인 거대한 고치에게로 향했다.
"꿈이었나..."
긴 꿈에서 마침내 해방된 듯한 해방감에 데미갓은 하늘을 향해 씨익 웃어대곤 마지막 힘을 다해 두 쪽으로 쪼개진 자신의 삼지창을 혈염으로 복구해냈다.
"와라, 빛 바랜 자!"
이내 자세를 가가듬은 데미갓은 혈염으로 이뤄진 거대한 피의 날개를 펼치며 마지막 일격을 가할 준비를 마쳤다. 서로가 서로의 간극으로 들어온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무기가 서로를 갈랐고 늘 그렇듯 한쪽은 쓰러지고 말았다.
[군주님, 그런데 군주님이 꿈꾸시는 그 지하 왕국의 이름은 혹시정해두셨습니까?]
생명을 구성하는 피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 무렵, 무릎을 꿇은 데미갓은 당시 미처 답하지 못했던 옛 부하의 질문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최후의 순간에 당도한 답이 나름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며 미뤄둔 숙제를 청산하듯 말했다.
"아아, 보인다, 보인다..."
"우리의 훌륭한 왕조..."
"모그윈이!"
필력 고트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