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스바흐의 랜턴이 희미하게 깜박이며 로데일 지하수로의 차가운 돌벽에 춤추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심장은 두려움과 피로로 쿵쿵 뛰었다. 각자의 용맹함과 호승심을 증명하기 위해 시작된 친구들과의 모험은 고립과 위험의 악몽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목을 죄어오며 강하게 욱신거리는 다리의 격통에 그는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려 했다.
어둠 속에 도사리며 그가 허점을 보이기만을 고대하던 지하세계의 잔인한 괴물들은 그의 살갗을 찢어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무겁게 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 지하수로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중간에 찢어지고 만 친구들의 소리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미로 같은 터널에 삼켜졌다. 절망이 그를 집어삼킬 듯 위협했다.
고통의 안개 속에서, 저 멀리 물방울이 불규칙적으로 똑똑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렸다. 물방울 소리와 대비되는 규칙적인 리듬, 온 몸의 피를 사지로 전달하는 심장의 강렬한 박동처럼. 어느새 안스바흐가 기대어 쉬고 있던 지하수로의 벽면으로까지 드리운 그 소리는 정체불명의 그림자와 함께 점점 더 커져가며 그를 압박했다.
"씨발..."
통로의 깊은 곳에서 그림자의 주인이 나타났다. 거대하고 검붉은 빛에 감싸인 모습의 거한. 안스바흐의 숨이 턱 막혔다. 기괴하다는 표현만으론 미처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 다리를 다쳐 신음하는 안스바흐의 앞까지 당도하였다. 랜턴의 불빛으로 비춰본 그의 모습은 도저히 사람이라 불릴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머리의 뿔은 제각기 다른 곡률을 자랑하였고 그 중 하나는 그 존재의 눈두덩이까지 뚫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흉터로 뒤덮인, 그나마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 다른 한 쪽 눈조차도 전설 속에서나 들어본 미친 불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흉조였다. 존재만으로도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로데일의 그림자.
두려움이 안스바흐의 마음을 죄었다. 딱히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흉조는 모두가 두려워하고 경멸해야 하는 존재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와 무용담들은 하나같이 그들을 괴물로, 불행의 전조로 묘사했다. 안스바흐는 술이 들어갔으면 얌전히 마리카의 석상이나 등반할 것이지 왜 이런 지하수로를 탐방하러 들어왔냐는 식으로 따져 묻듯이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다 이내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흉조를 체념하며 바라보았고 마지막을 직감한 듯 질끈 눈을 감았다.
생각했던 일이 곧바로 일어나지 않자 안스바흐는 감았던 눈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떠 앞을 바라보았다.
흉조가 안스바흐 옆에 무릎을 꿇고 거대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안스바흐는 움찔했지만 무심코 잡은 그의 손길은 겉보기에 매우 크고 흉악한 외양과 달리 놀랍도록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흉조의 사나이는 그를 마치 부상을 입은 한 마리의 새처럼 조심스럽게 안고 움직였다. 지하수로를 둘러싼 차가운 추위와 어둠과는 대조되는 무수한 황금과도 같은 위로가 그의 주변을 감쌌다.
그들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광대한 동굴에 도착했다. 벽과 천장엔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가득한 버섯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하수로에 이런 공간이 있단 것만으로도 안스바흐는 이미 충분히 놀라워했지만 이윽고 펼쳐진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리카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인간, 백금인, 그리고 흉조가 한 데 어울려 각자의 방식으로 동굴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이 동굴은 숨겨진 피난처, 혹은 길 잃은 이들과 버려진 존재들 위해 누군가 안배해둔 성소와도 같았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자랑하던 그들이었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은 안스바흐와 함께 돌아온 흉조의 사내가 곁을 지나갈 때마다 경외와 감사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스바흐의 두려움은 점차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구해준 이 자가 피난처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부터 시작해, 그의 무서운 외모와 대비되는 깊은 연민과 배려심이 어떻게 이 공간을 변화시켜 나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비록 그의 외모는 빈말로도 잘생겼다고 하긴 힘들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이빨이 빼곡히 들어찬 입이 열릴 때마다 낮고 명확히 울려 퍼졌고, 단어 한마디 한마디에선 지성와 친절이 묻어나왔다.
“왜?” 어느 날 안스바흐가 물었다. 그곳의 거주민들이 그의 부상당한 다리를 돌봐주는 동안, 그들로부터 군주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흉조의 사나이 역시 틈 날 때마다 그를 방문해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으로 그의 고통을 달래주었다. “왜 그들을 도와주죠? 왜 저를 도와주셨나요?”
사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붉은 눈으로 안스바흐를 주시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길을 잃지.” 그는 이어서 답했다. “운명의 장난에 방황하고 바보 같은 실수에 헤맬지언정 그것이 우리들의 정의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매 순간 우리가 내리는 선택, 그리고 똑같이 피가 흐르고 있는 서로 간에 보여줄 수 있는 유대와 친절이겠지.”
몇 주가 몇 달로 변했다. 안스바흐의 다리는 진즉 치유되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도 치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흐트리던 편견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흉조의 사나이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과 감사가 그 빈자리를 메웠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안스바흐는 그의 친절과 비전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지를 곁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백금인, 흉조,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외된 존재들이 피의 군주의 비호 아래 이곳에서 처음으로 소속감이란 걸 가지는 과정을.
그 과정 속에서 안스바흐는 모두가 편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는 저 흉조의 이상에 자신이 깊히 빠지고 말았음을 깨닫고 말았다. 로데일의 기사가 되기만을 꿈꾸며 치기 어린 일상만을 반복하던 몇 달 전의 그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그는 흉조의 사나이에게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맡길 것을,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그에 따른 여정을 옆에서 보좌해 나갈 것을 결심하였다.
"안스바흐, 피의 순환이 생명을 허락하는 순간까지 모그 님의 뜻을 이 틈새의 땅에 실현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흉조의 사내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본, 그렇기에 결코 쉽지는 않을 길을 택한 로데일 출신 견습 기사의 머리 위로 혈염의 가호를 띄우며 그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안스바흐는 성소를 나와 로데일 곳곳에 그가 섬기기로 한 데미갓의 통합과 연민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본능대로만 살아가던 과거 생활은 이제 그에게 있어선 멀게만 느껴지는 지난 날이 되어 있었고, 이제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엔 지하수로를 밝히는 랜턴보다 더 밝게 타오르는 피의 축복이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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