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시작은 끝을 가질 수 없다.
황금의 역가시가 박힌 몸으로 비루한 고통을 이어나갈 뿐이던 나날들, 그 증오하는 고문 노인들에게 붙잡혔던 그 잊을 수 없던 날, 나나야와 만났던 계곡.
혹은 내가 태어난 날,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미력한 나의 한계이어라. 아아, 나의 이 나약함을 증오한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광기를 저주한다.
돌이켜보면 나나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기이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생성하는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니 차라리 처음부터 없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둥, 기이하고 섬뜩하면서도 어딘가 끌리는 말들을 내 귀에 속삭였다. 원래는 학도들의 스승이었다지만 진정 학자가 아니기에 교단에는 오를 수 없다. 나나야의 그 말도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아마도 고문자들이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일 터. 무엇이 약자고 무엇이 희생자냐, 가증스러운 뿔인간들아. 너희들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가장 나약한 족속이다. 너희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광기에 갇혀 이 숲을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참으로 증오스런 것들아...
증오한다. 나를, 너를, 모두를.
버텨주세요.
나나야는 그리 말했다. 그래, 광기와 혼돈의 무녀가 한 말이라면 그것은 저주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것을 부정한다. 저항한다. 나의 나나야, 사랑하는 나나야, 나의 아내. 그녀가 어떤 존재이건 나는 나나야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나나야의 말은 분명 사랑일 거야. 나는 믿는다. 믿는다.
그리고 부정한다. 저항한다. 이 고통에. 이 시간과 나날에.
그러니, 도망가라. 되돌아가라. 닿을 수 없는 노인들, 멋대로 나를 왕 삼은 그 역겨운 피조물들마저 뚫고 이곳까지 도달한 그대여. 물러가라. 나에게 다가오지 마. 제발. 이 고통은, 오롯이 나만이 짊어지고 영원히 뒤채며 가겠-
칼날이 살갗을 찢어발긴다. 아파. 고통스러워.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역가시와는 전혀 다른, 그렇기에 이 나에게도 다시금 깊숙이 닿는 감각이다.
...아아, 이제, 그만...
더는, 이제는, 이제는...
...나나야, 사랑하는 나나야. 아무래도, 이곳이 절벽인 것 같구려.
용서해 주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이제 됐어.
고통에 익숙해졌음에 감사한다. 역가시. 나를 꿰뚫어 이제는 한 몸처럼 느껴지던 이 고통을 뽑아낸다. 해방된다.
해방된다.
모두 태워 없애자. 모두 없애자. 두 번 다시 생겨나지 않도록. 내가 느꼈던 이 고통을 안겨주마.
아아, 상쾌하다. 몸도 머리도 마음도, 모두 녹아 하나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구원, 나의 불.
...그러니, 방해하지 마라. 어째서냐. 너라면, 이해할 텐데...
...나는, 결국 닿지 못하는가.
왕의 경지에, 이 세상을 정화할 자의 높이에.
원통하다. 분하다. 이 모든 증오와 고통과 저주를 가지고서도 나는 약하다는 것인가.
...
...너, 그 눈은...
...하하.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은가.
나는 약하다. 세상을 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을 죽이고 온 세계를 뒤덮어 불의 대해에 세상을 빠뜨려 죽이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나는 네 안대 밑에서 보았다.
그 눈, 짓무른 노란 포도. 혼돈의 사도에게 안긴 자의 표식.
그래, 너라면, 너라면, 강하고 그렇기에 원망에 시달리고 또 시련을 뚫고 나아가며 저주하고 저주받고 고통받고 고통 주며 비탄에 잠겨 울음 터뜨리는 너라면.
분명, 세상을 녹일 수 있겠지. 모든 것을 하나로 되돌리고, 그렇게, 이 시간에 종언을 고할 수 있겠지.
끝을, 고할 수 있겠지. 어영부영 여기까지 밀쳐지고 이끌려온 나와는 달리 너에게는 시작이 있고 그렇기에 끝도 있을 터.
내 이름은 미드라. 나약하고 비통한 존재.
그리고 그렇기에, 불은 죽음을 바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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