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무녀의 마을, 뿔인간들의 목장. 산 제물들이 싱그럽게 영글어가는 곳이다.
오늘, 이달의 희생양을 정하기 위해 모두가 광장에 모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반신 노파가 작은 항아리를 들고 서 있다.
“무녀들은 앞으로 나와 제비를 뽑아라.” 목소리가 준엄하게 울러펴진다.
모두들 말이 없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땅을 보면 꽃들은 야속하게도 아름답게 피어 있다.
쾅쾅! 노파가 지팡이를 세게 내려찍는다.
“너희는 무녀가 아니라 장승인 게냐?“ 호통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그래도 무녀들은 대답이 없다.
”좋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냐? 허면, 그리 되리라.“
노파가 눈짓하자 뿔전사들이 뒤에서 걸어 나온다.
뿔전사가 등장하자 무녀들은 더욱 다급해진다. 겁먹은 체로 몰려 있는 무녀들 사이에서는 서로 눈짓이 오간다.
네가 가, 싫어, 네가 가. 무녀들은 작게 속삭이다가 서로 떠민다. 아우성 끝에 무리 밖으로 한 금발의 무녀가 뱉어지듯 떠밀려 나왔다.
쿵-노파가 지팡이를 치자 뿔전사들이 우뚝 멈춰선다.
”이 자가 첫 번째이더냐?“ 무녀들을 향해 노파가 물었다.
무녀는 간청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떠민 다른 무녀들을 바라보지만, 누구도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네, 맞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제비를 뽑을 것입니다.“ 목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무녀들 사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나와 잽싸게 노파에게 답했다.
네가 어떻게?
목소리의 주인은 금발의 무녀와 눈이 잠시 마주치지만, 급하게 고개를 내리깔아 버린다.
무녀는 앞으로 나와 제비를 뽑으라. 노파는 금발의 무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금발의 무녀는 네, 하고 답하고 앞으로 나온다.
흡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온몸이 벌벌 떨리고, 등판에는 식은땀이 벌벌 난다. 얼굴빛은 사색이 된 것이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 하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넣어 제비를 뽑는다.
접힌 종이를 아주 천천히, 피는 듯 접는 듯 시간을 질질 끌며 만지작거리다 문득 고개를 드니 노파의 얼굴이 보인다. 있어야 할 눈 자리에 기이하게 돋아난 뿔이 그녀를 아무 말 없이 깊게 응시한다.
그녀는 이재는 하는 수 없이 종이를 개봉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눈을 질끈 감고 확 종이를 폈다-좌중이 조용하다. 살짝 실눈을 뜨고 종이를 바라본다. 흰색이다. 제비는 아무 표시 없이 흰색이였다,
노파는 잠시 제비와 무녀의 얼굴을 대강 흝어보고 손을 휘 젓는다.
”다음.“ 노파가 건조하게 호명한다.
금발의 무녀는 노파에게 깊게 절하고 물러난다.
엎드려 절을 하는 바로 그 동안에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와 안도가 퍼져나간다.
다시 무녀들 무리 속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걸음새는 아까와는 영 딴판으로 당당하기까지 하다.
나는 살았다! 나는 살았다! 다시 꽃을 볼 수 있어. 내일 아침에 향기롭게 피어날 꽃을. . .
악, 아악, 이거 놔! 악을 쓰는 소리가 행복한 잡념에 빠진 그녀를 현실로 돌려놓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익숙한 목소리의 무녀가 뿔전사에게 팔을 잡혀 끌려나가구 있다.
온갖 악다구니를 쏟아내며 팔과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지만 뿔전사의 억센 손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다.
아까 노파에게 그녀를 팔아넘겼던 바로 그 목소리다. 이제는 그녀가 다음 차례가 되어 노파 앞으로 끌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리로 돌아가는 금발의 무녀와 뿔인간에게 끌려나가는 무녀는 잠시 교차한다.
금발의 무녀는 옆에서 이제는 발을 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는 무녀를 무시하고 지나친다.
턱. 발목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금발의 무녀는 고개를 돌린다.
도와줘, 끌려가는 무녀는 금발 무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옷은 넝마조각처럼 더러워졌다. 그녀는 피폐한 눈으로 금발의 무녀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인 양 올려다보고 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금발의 무녀의 입에는 샐쭉한 미소가 지어진다. 과시하는 듯 내려다보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이 얄밉게 귀엽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을 움직여 손을 털어버린다. 돌아서 걸어들어가는 그녀의 등 뒤로 뿔전사가 배를 한 대 때리는 소리, 꺽꺽대며 숨 넘어가는 소리,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발버둥에 흙이 채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모두 그녀와는 상관 없는 소리다.
어쨌건 오늘 그녀는 제물이 아니고, 내일 아침 꽃잎에 맺힌 이슬을 쓰다듬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그래, 이슬 젖은 아침의 꽃향기가 벌써 코에 선하다. 그녀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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