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9년, E3 발표 트레일러가 나왔을 적의 풋풋했던 기억.

 아무런 정보 없이 순수하게 새로운 프롬겜을 기대하던 시절.

 아직 이름도 역할도 알 수 없는 신캐들의 향연 중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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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 봐도 장대한 기골이 돋보이는 푸짐한 신체, 새빨갛게 불타오르듯이 석양진 하늘에 지지 않을 만큼 붉은 머리카락, 전장의 메마른 바람에 나부끼는 망토자락, 땅에 박혀 굳건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대검.

 격렬한 전투를 암시하듯 주변에 즐비해있는 무수한 시체 한복판에서 황금빛 기운을 휘감은 채, 그 분은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울부짖고 계셨다.

 약 2분을 조금 넘기는 영상에서도 찰나의 순간에 나온 장면이었으나, 그 강렬한 위용은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2021년 말. 엘든 링의 스토리 트레일러에서 비로소 그 분의 존함을 들을 수가 있었다.



 "별 부수는 영웅, 라단 장군."



 파쇄 전쟁의 끝자락, 자신과 필적하는 힘을 가진 데미갓이자 반신, 미켈라의 칼날 말레니아를 앞에 두고 깊게 뿌리내려진 거대한 고목처럼 위풍당당하게 팔짱을 낀 채 위엄을 뽐내던 라단 장군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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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중력 마술을 통해 땅에 박아두었던 별 부수는 대검 두 자루를 뽑아 손에 쥐고, 그것들을 교차해 겹쳐 긁으면서 최후의 전투의 시작을 알리셨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연출에 치사량의 뽕을 주입받은 나에게 있어 엘든 링의 정식 출시일은 곧 라단 장군님을 영접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머리속 깊숙이 뿌리박혔고, 약 3달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넘쳐흐르는 기대감에 잠을 제때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2022년 2월 25일. 그토록 기다리던 엘든 링이 출시되었고, 나는 부푼 기대를 가슴에 품은 채 한 명의 빛바랜 자로서 틈새의 땅에 힘찬 첫 발을 내디뎠다.

 언뜻 전작 다크 소울과 비슷하지만 세세하게 따져보면 사뭇 다른 게임 시스템에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윽고 다크 소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친절해진 시스템의 진가를 알게 되어 어렵지만 나름 즐거운 틈땅 모험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당도한 케일리드의 적사자성. 성주 제렌의 우렁찬 전쟁축제 선언과 함께 입성하게 된 통곡 사구에서

 나는 마침내 그 분의 웅대하고 장엄한 자태를 영접할 수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1대 1로 임하게 되는 다른 보스전과는 달리 무수한 NPC들과 함께 레이드전을 펼친다는 나름 참신한 구성에 더해 훌륭한 퀄리티의 선율로 몰입감을 더해주는 웅장한 BGM, 그리고 역대 프롬겜을 통틀어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스케일로 무장한 라단 장군님의 보스전은 과장 좀 보태서 이것만으로도 엘든 링을 산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만족감을 드높여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을 밤새 엔딩까지 달리고 그대로 골아떨어진 나는, 다음 날 아침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프붕이들이 귀신같이 찾아낸 각종 배경 설정과 스토리, 특히 라단 장군님과 연관된 것들을 찾아보며 그 분의 서사에 빠져들었다.

 별 부수는 라단, 장군 라단, 별 부수는 영웅, 영웅의 아들, 전왕의 사자, 파쇄전쟁 최대의 데미갓 등의 온갖 무수한 이명들.

 공개 당시에는 비주얼상 웃음벨을 자극했던 마르고 볼품없는 애마와 함께 전장을 거닐기 위해 중력마법을 배웠다는 상남자 냄새 풀풀 나는 의리와 사리아에 떨어지는 별에 홀로 도전하여 끝내 그것을 부수는데 성공한 영웅적인 행보.

 어느 것 하나 멋지지 않은 설정이 없을 만큼 간지 그 자체로 떡칠된 라단 장군님의 배경 이야기는 나의 빠심에 더더욱 불을 지피는 연료로서 작용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 스토리에 대한 여러 해석이 나오면서 의외로 실책이 많았던 허당스러운 면모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어 '통찰력 부족한 근육뇌', '라붕이', '말박이' 등의 오명을 얻게 됨은 물론, 중반부 보스 치고는 지나치게 어려웠던 보스전 난이도 또한 1.03 패치를 통해 칼너프를 당하면서 ^파쇄전쟁 최대의 자동문^이라는 굴욕적인 멸칭으로 불리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있어 라단 장군님과 그 분을 기리는 전쟁축제는 엘든 링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요소로서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 까지는.



 엘든 링이 출시되고 어느덧 2년. 지난 6월 21일 날 DLC : 황금 나무의 그림자가 출시를 앞둔 불과 며칠 전부터 대량의 유출 자료, 특히 최종보스의 정체가 일찌감치 풀리는 대참사가 일어나면서 프롬겜 팬덤에는 한바탕 커다란 파란이 찾아왔다.

 대다수의 프붕이들이 예상하던 고드윈을 재치고 DLC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최종보스로서 낙점된 것은 다름 아닌 미켈라의 술수로 모그의 몸을 통해 재탄한 젊은 시절의 라단 장군님.

 이제 와서 양심고백을 좀 하자면,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내심 기뻤다. 파쇄전쟁 최대의 데미갓이라는 배경설정에 걸맞지 않게 대충 툭툭 쳐주기만 해도 비명횡사하는 본편의 칼너프된 라단 장군님의 추락한 위상이 전성기의 모습을 통해 다시금 바로세워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DLC가 정식출시되고, 본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악랄한 난이도에 고통받은 끝에 영접하게 된 전성기 시절 라단 장군님의 1페이즈는 비록 팬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을지언정 나에게 있어서는 나름의 벅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hhmUHLJP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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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편을 아득히 상회하는 강력한 스펙과 패턴으로 중무장한 1페이즈 장군님의 위용은 높은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여타 다른 DLC 보스들과 비교했을 때 의외로 합리적인 패턴으로 구성된 덕에 나름 파훼하는 맛이 있어 "그래, 이래야 비로소 최강의 데미갓이지!" 라는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거기에 더해 본편의 서사를 그대로 이어가는 듯한 웅장한 BGM의 조합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나에게 선사해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수많은 죽음과 리트라이를 겪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JPoasVt_U

 

 곧이어 시작된 2페이즈. 시작 컷신부터 라단 장군님의 등 뒤에 살포시 업힌 미켈라의 ^우리 결혼했어요^ 선언에 뒷통수를 오함마로 쳐맞은 듯한 크나큰 충격을 받은 나는 뒤이어 펼쳐지는 온갖 개초딩 패턴의 향연에 정신을 추스릴 새 없이 장장 8시간 동안 개쳐맞으며 호된 참교육을 당해야만 했고, 어찌저찌 겨우 미켈라단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지만 한계까지 쌓인 정신적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어제 보았던 그 광경이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막연한 현실도피성 생각에 잠시 동안 허우적댔다.



 '미켈라가 라단 장군을 재탄시켜 반려로 세웠다고? 왜? 어째서?'

 '분명 고드윈을 재탄시키려고 했던거 아니었나?'

 '재탄시킨 건 그렇다쳐도 왜 하필 반려지?'

 '반려라는 건 본편 라니 엔딩에서 봤던 그런 의미겠지?'

 '미켈라랑 라단 장군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아니 언제부터?'

 '본편에 그걸 암시하는 내용이 하나라도 있었나?'



 짧은 사색을 끝낸 나는 곧장 프롬갤에 들어와 며칠에 걸쳐 프붕이들이 정리해준 DLC의 설정과 스토리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몇번의 교차검증 끝에 비로소 나름의 해답을 얻는데 성공했다.



 첫번째는 내가 루트를 잘못 타서 DLC의 제대로 된 스토리를 보지 못했다는 것.


 두번째는 처음부터 미켈라의 진짜 목적이 라단 장군님이었다는 것.


 세번째는 전쟁축제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한 삽질이었고, 모든 이들이 미켈라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는 것.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게이 되기 싫다고 발악하는 라단 장군님과 최면 어플로 장군님을 세뇌해 약속♂된 반려로 만드려는 금발보추근친게이 미켈라, 붉은부패씹썅똥꾸릉내를 풍기며 장군님께 자신의 오빠와 결혼해달라고 부탁하는 말레니아와 한순간에 퀴어축제로 전락해버린 전쟁축제 등등..........프붕이들의 온갖 개드립의 향연에 나는 그만 정줄을 놓고 함께 웃어댈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가슴 웅장해지는 전쟁축제는 없다.



 서로의 신념을 걸고 1대 1로 승부를 보았던 미켈라의 칼날과 축제의 영웅의 신화의 실체는 그저 이복형을 따먹는데 혈안이 된 미친 반신의 계략이었을 뿐이다.



 가뜩이나 통찰력 없다고 욕먹던 장군님의 이미지는 더더욱 나락을 갔다.



 그나마 건질만했던 1페이즈 조차 애비애미없는 개초딩 패턴으로 떡칠된 2페이즈 때문에 재평가될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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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라..........정신나간 미친 금발보추근친게이 반신 주제에......



 돌려줘......



 라단 장군님을 돌려줘......



 상남자의 의리의 결정체였던 전쟁축제의 의미를 돌려줘......



 일평생 전장에서 단련된, 전사로서 완성된 그 옥체와 숭고한 장례의 의식이 너 따위의 좆물로 더럽혀져서 좋을 리 없다......



 앞으로 이 스토리가 다시금 뒤집힐 날이 올까?



 새로운 DLC가 나와서 지금의 개판난 서사를 보충하는 날이 올까?



 엘든 링 2가 나올까?



 설령 그것들이 전부 나오더라도, 라단 장군님의 서사는 다신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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