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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에이곤이라고 부르라.

아프다.
언어로 형언할 수 있는 아픔이 아니다.
박살 나고 으스러진 뼛조각 하나하나가 근육을 찢어발기고 혈관을 끊어내고 신경을 긁어댄다.

멈출 수 없는 비명이 야수처럼 목구멍을 뛰쳐나가 흙먼지를 날린다.
아프다. 너무나도 아프다.
넝마가 된 바지 구멍 사이로 똑같이 넝마가 된 다리가 보인다. 강인하게 대지를 박찼던 다리는 이제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더 이상 뛸 수도, 걸을 수도 없으리라.

놈이, 증오스러운 그놈이 이렇게 만들었다.
용암처럼 뜨겁고 칼처럼 날카로운 벼락을 다루는 폭룡.
에이곤의 마지막 기억은 커다랗게 벌어진 녀석의 아가리였다.
그 송곳니는 단검보다도 날카롭고 심연 같은 목구멍은 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광기 어린 붉은 눈동자.
폭력 말고는 무엇도 눈에 담지 않는 그 눈동자가 에이곤을 바라본 순간, 그는 죽었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는 에이곤의 다리를 물어뜯어 되돌릴 수 없는 부상을 입혔지만, 그의 영혼은 그때 죽어버렸다.

전설의 폭룡을 사냥하겠다는 포부, 용을 먹는 사냥꾼으로서 쌓아온 경험과 힘.
폭룡은 그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이제 에이곤은 부러진 작살과도 같았다.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존재.
그저 자비를 구걸하고 삶을 애원할 뿐인, 파괴된 생명체.

망가진 에이곤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폭룡은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 도망쳤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조차 에이곤은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뒤로 길게 이어진 핏자국과 돌조각이 무수히 박힌 손바닥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영혼마저 태우는 듯한 격통에 에이곤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대체 얼마나 찢어질 듯 소리를 질렀을까.
검은 그림자가 그의 위로 드리울 때까지도 에이곤은 다른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낯선 이는 에이곤의 상처를 잠시 살펴보았다.
넝마처럼 박살 난 다리. 이리저리 뒤틀려 부러진 팔. 피눈물이 흐르는 눈. 고통을 호소하는 괴성.
무엇보다도 영혼이 부서진 듯한 그의 상태.
대강 알겠다는 듯 일어난 낯선 이에게서 황금의 빛이 퍼져 나왔다.
완전히 회복할 순 없지만 최소한 통증 정도는 줄여줄 수 있는 치료 효과.
기도가 힘을 발휘했는지 고통스러운 괴성이 점차 신음으로, 그리고 앓는 소리로 줄어들었다.
마침내 고통에서 해방된 에이곤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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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윽…"

고통이 담긴 신음소리와 함께 에이곤은 눈을 떴다. 간신히 떠진 눈동자를 별빛이 비춘다.
어느새 잠에 든 것일까.
인기척을 느꼈는지 모닥불을 쐬고 있던 낯선 이가 말을 걸어왔다.

"깨어났나."

"너는… 아니, 실례했군. 용의 전사인가."

"그러는 당신도 눈동자를 보니 어지간히도 먹었나 보군."

"아아, 먹었지. 이제 마지막이었는데…"

오싹-
순간 뱀눈처럼 세로로 찢어진 에이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폭룡에게 덤볐던 이유. 용찬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것은 가장 거대한 힘. 더욱 힘을 원했던 대가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이곤은 자기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허벅지 살이 뜯겨나갈 정도로 강하게 쥐어진 손은 그가 느끼는 공포를 대신하는 듯했다.

그런 에이곤을 보며 용의 전사, 빛 바랜 자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당신 같은 용의 전사가 뭘 두려워하는 거지?"

'용'은 말하자면 자연재해와도 같은 존재들. 작은 산과 같은 몸집에 폭풍와 용암을 휘두르는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용을 사냥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미치광이처럼 위험에 달려들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 전부가 만용을 부리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에이곤 정도 되는 용의 전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에이곤은 입술을 떨며 천천히 '공포'를 발음했다.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힘들어하며 그는 씹듯이 단어를 내뱉었다.

"…폭룡 베일…"

"폭룡이라, 놈은 강했나?

"놈은… 놈은 괴물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몸의 활도, 지금껏 쌓아 올린 용찬의 기도도 녀석에겐 닿지 않았다."

"엄청나게 강한가 보군! 그렇다는 건…"

"…?"

"엄청나게 맛있겠군."

에이곤은 깜짝 놀라 빛 바랜 자를 바라보았다. 저 용의 전사는 지금 자기 모습을 보면서도 저런 말을 하는가.
아무리 용의 전사들이 어딘가 한군데씩 머리가 돈 무리라도 저렇게 자신감을 표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다.

"알려줘서 고맙군. 내일 점심엔 폭룡의 심장을 씹어야겠어. 지독하게 감미롭겠군."

"그대가 얼마나 강한진 모르겠지만 만용을 부리다간 후회하게 될 걸세. 놈은 강해."

"나도 강해."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에 에이곤은 입을 다물었다. 사냥감과 사냥꾼. 둘이 만나면 자연스레 결판이 날 터였다.
에이곤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용의 전사여, 날 따라가게 해다오. 방해하지 않겠다. 그저, 먼발치에서 그대의 싸움을 지켜보게 해다오."

"마음대로 해."

에이곤은 먼저 잠에 든 빛 바랜 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얼마나 강한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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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폭풍이 휘몰아치는 톱니산의 공터에 두 괴수가 서로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바위 같은 비늘을 가지고, 그 커다란 아가리에서 지옥불 같은 화염을 뱉는 비룡. 어쩐 일인지 동족끼리 사생결단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두 비룡에 비하면 개미 같은 크기의 빛 바랜 자가 끼어들었다.
둘의 싸움이 끝나면 남은 한쪽을 처리하는 게 좋겠다는 에이곤의 충고도 무시한 채, 빛 바랜 자는 영마를 몰아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파괴된 용의 심장이 아닌, 온전한 심장 2개를 원한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나타난 빛 바랜 자에게 두 비룡의 시선이 쏠린 순간, 그는 말을 박차고 날듯이 도약했다.
그리고 허공에 용찬의 문장을 새겼다.

갓 뽑아낸 신선한 용의 심장, 그것이 불타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장은 비룡들의 공포이며 용의 전사들의 탐욕이다.
두 비룡의 눈에 두려움과 동시에 증오가 타오를 때, 공간이 일그러졌다.

공간을 찢듯이 튀어나온 그것은 거대한 용의 형상이었다.
비룡의 모습도, 고룡의 모습도 아니다. 오직 용의 심장을 탐하는 용의 전사만이 취하는 거대한 용인의 모습.
칙칙한 검은색의 비늘을 두르고 오직 힘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는 검은색 눈동자.
길게 찢어진 파충류의 입에는 갑옷마저 찢어발길 수 있는 단검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박혀있다.
그 거대한 머리통 뒤로 날개 대신 돋아난 두꺼운 팔이 드러났다.
기형적으로 긴 손가락 끝에 화성암을 닮은 두껍고 포학한 발톱이 돋아나 있다.

원시적이고도 야만적이며, 동시에 순수하고 압도적인 힘.

거대한 팔이 비룡의 머리통을 내려찍어 바닥에 처박는다.
곧이어 정신을 못 차리는 비룡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크게 휘두른다.

우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비늘이 박살나며 파편이 튄다.
거체에서 뿜어지는 대량의 피가 하늘로 솟아 비처럼 내린다.

순식간에 비룡 한 마리를 처리한 빛 바랜 자의 피 묻은 아가리가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한껏 모았던 힘을 한 번에 내뱉는다.

용의 대모, 그레이오르의 포효.
폭발하듯 퍼져나간 음파는 그 자체가 폭탄이 되어 주변을 쓸어버린다.
주변의 바위산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에 남은 비룡도 몸을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빛 바랜 자는 비룡을 향해 튀어나갔다.
이미 용의 형상은 튀어나올 때처럼 급작스럽게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빛 바랜 자는 등에 멘 칼집에서 거대한 칼을 꺼내들었다.

휘어진 도신에 조약돌의 가시가 빼곡하게 박힌 거대한 도.
높게 도약한 빛 바랜 자는 양손으로 잡은 대도를 머리 뒤까지 크게 넘겼다.
마치 죄인을 참수하는 듯한 그 자세는 분명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불길한 붉은 빛을 발하는 그것은 분명 용의 천적이었으며 용을 사냥하기 위한 도구였다.

기합과 함께 내려쳐진 대도에서 붉은 기운이 거대한 칼날처럼 뿜어졌다.
그리고 마치 미끄러지듯 비룡의 머리통을 지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 지나간 궤적을 따라, 거대한 상흔이 새겨지며 피가 흐른다.
고통에 괴성을 지른 비룡은 그 거대한 머리통을 땅에 처박았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한 모습.
녀석의 눈을, 빛 바랜 자는 자비 없이 대도로 뭉갰다.
전력으로 박아 넣어 분명 뇌까지 닿았을 그것을 뽑자, 비룡은 잠깐 꿈틀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한 싸움 방식.
그러나 지독하게 효율적이면서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에이곤… 에이곤…!'

에이곤은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같은 용의 전사로써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이냐.
어찌하여 자신은 겁쟁이처럼 비룡들이 싸우는 틈을 타 이득을 취하려고 했는가.
어찌하여 고통을 못 이기고 스스로 구차한 삶을 이어 나가려고 했는가.
격정 속에서 에이곤은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봤느냐! 이게 바로 전사다! 용의 전사다!"

그는 아직 멀쩡한 오른손으로 돌바닥을 내리치며 씁쓸한 패배의 감정을 몰아냈다.

"에이곤, 너도 과거에는 저렇지 않았나! 떠올려라! 떠올려! 공포 따위는 알지도 못했잖나!"

시원하게 토해내니 폭룡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에이곤은 비겁자가 아니었다.
자신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물러섬을 모르는 용의 전사가 아니었던가!
결심을 굳힌 에이곤은 빛 바랜 자를 보았다.

빛 바랜 자는 벌써 비룡 한 마리의 가슴팍을 해체하고 심장을 뽑아냈다.
자기 머리통만 한 크기의 심장을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던 그는 이내 못 참겠다는 듯 머리를 처박고 심장을 먹어 치웠다.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탐식한다. 그의 모습은 인간보다도 야만인에 가까워보였다.
용의 심장이 품고 있던 용의 모든 것이, 그 거대한 마력이, 그 압도적인 힘이 모두 빛 바랜 자에게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심장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먹어 치우자, 격정을 못 이긴 빛 바랜 자는 크게 포효했다.
그 외침은 용살자의 도래를 알리는 소리이며, 또한 폭룡에게 내미는 도전장이기도 했다.

에이곤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빛 바랜 자에게 다가갔다.
용찬의 힘 때문인지 그의 몸에서는 갈무리되지 않은 열기가 태양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고양된 감정 탓에 숨을 몰아쉬는 빛 바랜 자가 에이곤을 바라보았다.
얼굴이고 손이고 피 칠갑을 한 꼴, 거기에 타는 듯 빛나는 세로 꼴 동공을 마주하자 에이곤도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빛 바랜 자의 드러난 피부에서 돋아나고 있는 비늘… 어쩌면 그는 용찬의 말로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뭔가? 심장은 양보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 용의 전사여, 먼저 내 두려움을 몰아낸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네."

"감사는 받아두도록 하지."

"염치없지만 부탁을 들어 주게. 내 손가락을… 가지고 가주게."

신음소리와 함께 망가진 손에서 손가락을 끊어낸 에이곤은 그것을 빛 바랜 자에게 들이밀었다.
괴사하여 푸르게 변하기 시작한 더러운 손가락. 이 땅의 주민들에게 손가락을 주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이미 망가진 육체. 하지만 육체의 제약을 벗어나 영체가 된다면 에이곤도 싸울 수 있다.
에이곤도 다시 한번 폭룡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톱니산에 올라 폭룡 베일을 마주했을 때, 나의 영혼을 불러주게. 나는 용의 전사, 이미 영혼은 그곳에 두고 왔다."

"그래도 폭룡의 심장은 내가 먹겠다."

"당연한 말을."

또 다른 비룡의 심장을 취하러 가는 빛 바랜 자를 보며 에이곤은 생각했다.
복수의 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의 준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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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곤은 눈을 떴다.
익숙한 장소다.

빛 바랜 자는 약속을 지켰다. 전투 직전의 고양감으로 몸에서 증기를 뿜어내는 빛 바랜 자의 앞으로 붉은 벼락꽃밭이 펼쳐졌다.
이곳은 가장자리에 높게 솟은 발톱 같은 구조물이 있는 거대한 콜로세움 같은 장소. 땅에서 용암이 솟구쳐 오르고, 휘몰아치는 폭풍과 벼락이 넓은 원형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사라진다.
폐부를 태울 정도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바닥에는 해골들이 널브러져 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용의 전사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어쩌면 에이곤도 저 새까맣게 탄 해골들 사이에서 썩어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나 에이곤은 살아남았다. 비루하게 살아남아서, 다시 한번 이곳에 섰다.
죽음 이상의 공포를 딛고 망가진 신체를 버리고 영체로써 도전한다.

에이곤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공기를 한껏 머금은 폐로부터 용의 포효와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 글자, 한 글자, 모든 증오와 분노를 담아, 원수의 심장을 씹듯이 내뱉는다.

"베에에에에일이여!!!"

그에 화답하듯 하늘로부터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나 싶더니,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붉은 벼락과 함께 베일이 내려앉았다.
그 압도적인 크기. 광기에 물든 붉은 눈. 악마의 그것처럼 불길하게 굽은 뿔. 창칼조차 베지 못하는 칠흑의 비늘. 채찍처럼 유연하면서도 두텁기 짝이 없는 꼬리.
그 형상이야말로 공포이며, 폭력의 화신이었다.

허나 폭룡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양 날개의 피막이 몽땅 뜯겨나가 넝마처럼 너덜거리고, 심지어 오른쪽 날개는 앞의 반절이 뜯겨나가 날카로운 날개뼈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가 잘려나가 두꺼운 꼬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두꺼운 목덜미와 등에는 정체불명의 용머리가 덫처럼 물려있다.
놈은 약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저 광기 넘치는 눈을 마주하면 그 누구라도 자비를 구걸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공포, 죽음보다도 더 한 공포.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고양감이 에이곤을 이끌었다.

"이번에야말로! 똑똑히 알게 해주겠다!"

에이곤은 등에 메고 있던 대궁을 빼어 잡았다.
그것은 활이라 하기엔 너무도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거우며, 그리고 조잡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투석기였다.
용의 날개뼈를 꺾어 활대로 삼고, 용의 힘줄을 잘라 시위로 만들었다.
양 날개뼈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굵고 거친 밧줄로 칭칭 동여맨 그 모습은 용에 대한 증오를 그대로 드러낸 듯했다.

에이곤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거대한 활의 크기에 걸맞게, 그 화살의 크기도 범상치 않다.
화살보다도 작살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법한 크기인 그것의 화살촉은 불길한 핏빛을 머금고 있었다.

활대와 시위를 잡은 팔에 핏줄이 섰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핏줄과 부풀어 오른 근육이 이 대궁을 한 번 당기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지 알려주었다.
당기는 일조차 아득하다.

끼기기기긱-
활대인 날개뼈가 휘어지며 밧줄이 비명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한계에 다다르자 에이곤은 포효했다.

"용의 전사가! 에이곤이! 네놈의 공포다!"

파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며 그것은 쏘아졌다.
폭룡조차 반응하지 못한 화살은 그대로 검은 비늘을 파고들었다. 평범한 화살 따위가 폭룡의 비늘에 통할 리가 없다.
비룡을 죽이는 힘, 고룡의 바위 비늘. 날카로운 조약돌을 덕지덕지 붙인 화살촉이 훌륭하게 그 소임을 다했다.

'통했다! 나의 일격이!'

놈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고작해야 비룡. 압도적인 공포였던 폭룡은 이제 죽일 수 있는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에이곤은 그렇게 생각했다.

투캉!
굉음과 함께 에이곤이 튕겨 나갔다.
충분한 거리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비웃듯 폭룡은 대지를 박차고 돌진해 왔다.
그리고 그 거대한 꼬리를 철퇴처럼 휘둘러 에이곤을 벽에 처박아버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피해 빗겨맞았기에 망정이지, 단숨에 절명할 뻔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폭룡의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며 그 안의 넘실대는 염뢰를 드러냈다.
위기의 상황,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에이곤의 앞으로 빛 바랜 자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품은 용의 형상을 드러냈다.
공간이 비틀리며 드러난 비룡 아길의 칙칙한 회색빛 머리통. 그 거대한 아가리에서 초고열의 화염 숨결이 쏟아졌다.

순수한 화력 대결.
황적색의 염뢰와 붉은색의 화염이 어지럽게 섞였다. 그 충돌에서 튀어 나간 파편 하나하나가 땅을 지지고 해골을 불태웠다.
잠깐의 호각지세. 그러나 폭룡의 위명에 걸맞게 염뢰의 파도가 화염을 집어삼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염뢰가 빛 바랜 자를 덮치며 그의 세포 하나하나를 튀기려 들었다.

"크오오오오-!"

그냥 당해줄 빛 바랜 자가 아니었다. 염뢰를 가르고 용인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기다란 팔이 나타나 베일의 뿔을 잡아채고는 반대쪽 주먹으로 놈의 아가리를 강타한다.

강렬한 충격에 폭룡의 몸이 흔들린다. 하지만 그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망가진 오른쪽 날개뼈가 붉게 물들며 염뢰를 휘감았다. 그리고 마치 단검을 박아 넣듯이, 눈앞의 용인을 향해 찔렀다.
고통의 비명과 함께 물러나는 용인 뒤로 또다시 붉은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 화살은 베일의 비늘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각도가 안 좋아 빗겨맞은 탓일까.
에이곤은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 단단한가, 이 지긋지긋한 폭룡 자식."

비룡의 천적인 조약돌을 잔뜩 박았건만. 그러나 포기할 에이곤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화살을 메기며 그는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몇 번이든! 몇 번이든! 네놈의 썩은 가죽을 작살로 뚫어주마!"

붉은 작살이 그의 증오를 담고 던져졌다.

"내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을 걸고서라도!"

푸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박혀들어갔다. 계속해서 상처를 쌓아가는 화살이 거슬렸는지 베일이 에이곤에게 다가갈 기미를 보이자, 다시 한 번 용인이 그 앞으로 가로막았다.
분노한 폭룡과 용인의 거체가 엉킨다. 두 괴수의 거친 몸싸움이 지진을 일으켰다.
용인의 입에선 푸른 휘석의 불꽃과 얼음의 숨결이 쏟아져 내렸고, 폭룡의 입에선 뿜어진 염뢰가 하늘로 솟구쳤다.
날카로운 용인의 발톱이 폭룡의 몸을 할퀼 때마다 비늘이 쪼개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게다가 틈날 때마다 눈을 노리고 날아오는 조약돌 화살이 폭룡의 행동을 제한했다.

-크오오오!

괴성과 함께 폭룡이 거대한 뿔로 용인을 들이받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난 용인이 다시 맞붙을 기세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곧장 달려들지는 않았다. 본능이 그의 발걸음에 제동을 걸었다.
빛 바랜 자와 에이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용의 전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어떤 생명체라도 알 수 있으리라.
대적할 수 없는 재해, 비룡들의 왕의 재림을.
모든 것을 불태우고, 하늘을 갈라 신마저 죽일 흉룡을!

웅크리고 선 폭룡, 베일의 거체.
그 검은 몸뚱이에서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번개 줄기가 뿜어져나왔다.
그가 힘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톱니산의 지맥이 반응하며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끓어올랐다.

마침내 폭룡이 고개를 든 순간, 화산이 분화하듯 용암이 솟구치며 벼락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압도적인 열량은 빛 바랜 자와 에이곤이 바라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날개가 펼쳐졌다.
찢어지고 부러진 양 날개 뒤로,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생겨났다. 그것은 스스로의 영혼으로 자아낸 듯 반투명한 붉은 빛을 띄었다.
마치 불사조의 부활을 알리는 듯한 모습과 함께 베일이 날아올랐다.
그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비행하며 끊임없이 염뢰를 내리치고 불덩어리를 비처럼 쏟아붓는다.
정확하게 빛 바랜 자와 에이곤을 내리고 쏟아지는 공격에 둘은 반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피했다.

혼비백산한 둘 사이로 재앙처럼 폭룡이 그림자가 떨어졌다.
놈이 강습하며 내뿜은 염뢰만으로도 땅이 증발하면서 용암을 토해냈다. 착지점에 거대한 분화구를 만들어낸 폭룡이 움직일 때마다 그 길을 따라 지맥이 신음하며 용암이 솟구쳤다. 간신히 피했지만 그 열기 때문에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하다.

"톱니산을 지맥 채로 부술 작정인가!"

대체 이 폭룡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경악하는 에이곤 옆으로 염뢰줄기가 지나갔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도 두르고 있던 천이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이런 염뢰를 온몸에서 뿜어내니 접근하기조차 힘들다.
분명 그럴 터인데, 빛 바랜 자는 두려움도 없는지 대도를 빼 들고 폭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 저 대도.
분명 용굴의 고룡인이 사용하던 그것이었다.
폭룡을 먹어 치울 전사를 선별하던 고룡인에게서 저 무기를 빼앗았다면, 빛 바랜 자야말로 폭룡을 죽일 용의 전사이리라.
그 선별이 정확했는지 빛 바랜 자는 신묘한 움직임으로 염뢰를 피해냈다.
그리고 충분히 가까워지자 도약하며 예의 그 붉은 검기를 쏘아냈다.

-크아아악!!

괴성과 함께 베일의 뿔 중 하나가 툭 베여나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베일이 첨골을 찔렀지만 애꿎은 바닥만이 폭발했다.
빛 바랜 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놈의 몸 가까이, 더욱 가까이 붙으며 끊임없이 맹공을 가한다.
자신의 몸 아래에서 깔짝거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베일이 염뢰를 토해냈다.
그 불길을 가르고 나타난 붉은 칼날이 베일의 왼쪽 허벅다리, 뜯겨나간 바로 그곳을 정확하게 갈랐다.
오래된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빛 바랜 자는 거대한 적과 싸우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가장 불편해하는 곳에서 가장 약한 곳을 공략한다.
그 폭룡조차 이 거리에서는 빛 바랜 자의 날쌘 움직임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래서 폭룡은 다시 한번 도약했다. 붉은 재앙의 날개를 펼치고선.
하늘 높이 솟구친 폭룡이 고개를 높게 쳐들었다. 놈의 벌려진 아가리에서 염뢰가 끓듯이 튀어나온다.
용이 숨결. 하지만 이전의 그 무엇과도 다르다.
놈이 지상을 내려다보며 숨결을 쏨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숨결이 품고 있는 압도적인 열량 때문에 주변에 공기가 급격하게 팽창하며 충격파를 발했다. 그 충격만으로도 에이곤이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쏘아진 숨결은 퍼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가 지면을 강타했다. 숨결이 땅을 긁으며 깊은 상처를 새겼다.
마치 공간 채로 지우려는 듯 그 숨결이 닿는 모든 것이 뒤틀리고 녹으며 증발했다.
숨결은 그 압도적인 광경에 몸이 굳은 빛 바랜 자의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며 끝났다.
톡 쏘는 비릿한 금속 냄새가 빛 바랜 자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두 번째 폭룡의 숨결이 쏘아졌다.
첫 번째는 폭룡마저 힘을 제어하지 못했는지 빗나갔지만 이번에는 정확하게 빛 바랜 자를 향해 숨결의 폭류가 쏟아졌다.
폭발과 함께 대량의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들끓는 용암을 토해내며 완전히 파괴된 지면을 먼지의 장막이 잠시 가려주었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폭격에 에이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공포에 떨었다.
놈은 괴물이었다.
자신의 사지를 산산이 찢어놓았던 그 힘마저 편린일 뿐이었다.
그저 최대한 빠르고 고통 없는 방법으로 죽길 바랄 뿐이었다.
공황 속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에이곤의 목덜미를 빛 바랜 자가 낚아채 일으켰다.
아직 먼지가 둘을 숨겨줄 때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 빛 바랜 자의 거친 주먹이 에이곤의 안면을 치고 지나갔다.

"정신 차려!"

"하지만 폭룡이… 화염이…"

"나는 폭룡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 네 녀석의 도움이 필요해. 지금 당장!"

빛 바랜 자의 세로 동공은 아직까지도 흉흉한 붉은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이 남자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폭거를, 그 경이적인 파괴를 보고서도.
에이곤의 생기 잃은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그래, 죽는다면 끝까지 발버둥 쳐봐야지. 그것이 용의 전사 아니던가.

"크오오오오!"

먼지의 장막을 찢고 용인이 튀어나왔다. 그 강인한 팔과 아가리로 다시 한번 폭룡과 맞붙을 작정인가.
몸을 가리고 가한 기습이지만 폭룡에게는 용인과 몸싸움을 할 이유가 없었다. 거리를 좁히기도 전에 첨골을 찔러 박는다.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첨골이 용인의 몸통을 꿰뚫었다. 치명적인 일격을 입힌 폭룡은 첨골을 빼냈다.

빠지지 않는다.
용인의 검고 두꺼운 양 팔이 첨골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첨골에 흐르는 염뢰 때문에 그 내장이, 양손이 타들어 가면서도 용인은 첨골을 놓지 않았다.

당황한 폭룡의 바로 아래에서, 붉은 검기가 모여들었다.
용을 죽이는 대도, 그것의 칼날 하나하나가 살벌하게 빛나며 살의를 내뿜었다.
흉흉한 기운을 두른 빛 바랜 자를 보며 폭룡은 생각했다.

'그러면 이 용인은 누구지?'

용인이 고통 섞인 포효를 내뿜었다.

"크와아아아아!"

거친 분노와 증오를 담아낸 포효는, 용의 언어로써 명확하게 폭룡에게 전해졌다.

'이 에이곤이! 네 놈의 공포다!'

저 붉은 조약돌 검은 위험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폭룡이 발버둥 치며 억지로 첨골을 비틀어 뽑았다.
그리고 곧장 붉은 날개를 펼쳐 도약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 발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붉은 검기가 스쳐 지나갔다.
위기를 피한 폭룡이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저 두 벌레는 이제 자신에게 닿을 방법이 없다.
남은 건 이제 압도적인 힘으로 지면과 함께 둘을 파괴할 뿐. 아니, 아예 톱니산 전체를 무너뜨려 저 벌레들을 뭉개버릴 생각이었다.

또다시 폭룡의 아가리가 벌어지며 염뢰가 끓어올랐다.
예의 그 재앙 같은 폭룡의 숨결이 쏟아지기 직전, 지상에서는 빛 바랜 자가 포효했다.

용의 모습.
그 용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고룡이 공간을 찢어발기고 나타났다.
용왕, 플라키두삭스의 형상.
그저 나타난 것만으로도 주변을 파괴하는 충격파를 발한다.
그 경이적이고 압도적인 힘의 출현에 폭룡마저도 그를 주시했다.

폭룡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그 저주스러운 붉은 눈에 증오의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자신의 사지를 자르고 날개를 찢은 용왕! 용찬조차 비룡에게 모독이나 다름없는데, 그 증오스러운 형상을 취하다니! 저 벌레를 찢어 죽여야만 한다.
압축된 폭룡의 숨결이 닿는 모든 것을 지우며 용왕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에 맞서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숨결이 솟구쳤다.
용왕의 절대적인 힘, 플라키두삭스의 멸망.
그 무엇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황금빛의 섬광 한 줄기가 하늘을 뚫었다.

황적색과 황금색이 허공을 수놓았다.
두 숨결이 서로를 파괴하며 주변으로 튀는 힘의 편린 하나하나가 공간을 지워버릴 힘을 품고 있었다.
그 힘은 호각… 아니, 점차 염뢰가 멸망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용의 전사라고는 하나 결국은 인간. 용왕의 힘마저 빌렸음에도 인간의 그릇에는 그것을 전부 담아낼 수 없었던 탓일까.

하지만 인간의 그릇만이 가능한 일도 있으리라.

에이곤이 대궁을 들고 섰다.
첨골에 당한 상처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왼손으로 활대를 힘껏 밀고, 오른손으로는 시위를 강하게 당겼다. 그의 두 팔과 등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용의 뼈를 엮어놓은 밧줄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뚫린 구멍에서 내장이 흘러내린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버텨라! 빌어먹을 몸뚱이여!'

격통과 피로에 손이 부들거려 조준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해내야 한다. 오직 에이곤,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폭룡이라는 대적에 맞서는, 공포 따위 모르는 진정한 용의 전사만이!

"베에에에에에에일!!!!!"

콰작-
용뼈를 엮은 밧줄이 터지며 활대가 박살났다. 양 끝에 메인 힘줄이 튕기며 에이곤의 얼굴을 채찍처럼 후려쳤다.
맞은 부분이 가죽이 벗겨지며 피가 튀었다.
끔찍하게도 아플 터인데, 에이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허공의 한 점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이곤의 작살을.
대궁이 부서지며 쏘아보낸 그의 마지막 영혼 한 조각을!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 작살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숨결을 뿜어내는 화력 대결에 정신이 팔려있는 폭룡의 붉은 눈동자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용은 하늘에 있고 사람이 이길 수 있다.

괴성과 함께 폭룡이 추락했다. 머리부터 땅에 처박으며 그 충격이 폭룡의 두개골 안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곧장 빛 바랜 자가 달려들었다. 거대한 검은색 용인의 모습으로.

굳게 쥐어진 주먹이 망치처럼 내려쳐졌다.
폭룡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덜미를 문 용왕의 잘린 머리통을 향해서였다.

쾅! 쾅! 쾅!
한 번, 두 번, 내려칠 때마다 용왕의 아가리가 다물어지며 으깨진 검은 비늘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과연 시간의 틈새에서 사는 용왕인가. 그 날카로운 이빨은 세월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고 마치 톱날처럼 베일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뇌가 흔들거리면서도 베일은 몸부림쳤다. 채찍 같은 꼬리가 용인을 후려쳐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쓰러진 용인을 베일이 멀쩡한 오른발로 짓밟았다.
그를 내리깔아보며 폭룡이 첨골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폭룡이라 불리는 그를 이토록 몰아붙인 것을 치하하듯, 최대한의 예우를 담아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용이 발버둥 쳐보지만 가슴팍을 짓누르는 무게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귀를 찢는 천둥과 함께 첨골에 황적색 염뢰가 휘감긴 순간…
폭룡의 거체가 멈췄다.
폭룡을 상징했던 염뢰가 쏟아지는 순간, 그의 숨이 끊어졌다.
증오로 불타올랐던 눈동자는 생기를 잃었고, 달아올랐던 첨골은 잔불처럼 천천히 식어갔다.

전설의 종말.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폭룡을 보며 에이곤은 승리를 실감했다.
공포를, 절망을 넘어섰다.

"우오오오오오! 베에에에에이일이여!"

피를 토하면서도 그의 포효는 멈출 줄을 몰랐다.

"네놈은 더 이상, 내 공포가 아니다! 으하하하하!!"

격정을 못 이기고 계속해서 소리지르는 에이곤을 뒤로하고 빛 바랜 자는 폭룡의 시신 밑에서 기어 나왔다.
진절머리 날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분명 용왕에도 뒤지지 않는 비룡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폭룡마저도 이제 용의 전사의 만찬이 될 뿐.

안간힘을 쓰며 빛 바랜 자는 폭룡의 심장을 뽑아냈다. 심장을 뽑아낼 길을 만드는 것조차 고역이었지만 심장은 마치 주인의 몸에서 나오길 거부하듯 질기게도 붙어있었다.
그럼에도 힘에 대한 갈망을 원동력으로 빛 바랜 자는 심장을 뽑아내고야 말았다.

뽑혀 나온 심장에는 검은색 조약돌이 마치 뿔처럼 솟아있었다. 게다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새빨갛게 끓어오르기까지 했다.
이전의 그 어떤 비룡의 심장과도 다른 모습. 과연 주인의 격이 다르니 이렇게까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을 먹어 치우면,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가.
빛 바랜 자는 최고로 감미로운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군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 정도도 귀한 물건을 아무렇게나 먹을 수는 없는 법. 빛 바랜 자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심장을 등짐에 넣었다.

"베일, 베일, 베이이이일!!!"

"이제 슬슬 귀가 아픈데…"

"오오, 진정한 용의 전사여! 그대 덕에 흉포한 폭룡이 쓰러졌네!"

"혼자서라면 불가능했겠지. 그런데 그 상처는 괜찮은 건가?"

피를 입에서 줄줄 흘리며 몸에 난 구멍에서는 불 탄 내장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나는 이미 늦었네. 하지만 나의 공포를, 그 폭룡을 쓰러뜨렸으니… 한 점 후회 따위… 없다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이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제는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낀 에이곤이 최후의 말을 건넸다.

"부탁이 있네."

"뭔가."

"나를 용의 전사, 에이곤이라고 불러주게."

빛 바랜 자가 한 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에이곤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왼손에서 용찬의 표식을 나타내 보였다.
용의 심장을 본뜬 용혈의 환영.
용의 전사라면 모두가 가진 표식이었다.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빛 바랜 자는 낯선 동료를 떠나보냈다.

"공포의 폭룡을 쓰러뜨린 진정한 용의 전사, 에이곤."

빛 바랜 자의 격찬 속에서 에이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영체가 바람에 재가 날리듯 천천히 부서졌다.

톱니산 중턱, 두 비룡이 격렬히 싸우던 그곳에는
용열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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