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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생각한다.

왜 아프지?

...

아, 이것 때문인가.

머리를 관통해 내려온 증오스러운 역가시 때문인가.

...

왜?

왜 이런 고통스러운 꼴을 당한 거지?

...

머릿속이 흐릿하다.

그리운 사람이 있었다.

먹으로 칠한 것처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이...

이름...

...

아프다.

도와줘.

나나야...

-----

화창하기 짝이 없는 날이다. 이 땅에도 여름이 찾아오면 초목이 무성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진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드라는 시종과 함께 숲길을 거닐었다.
그의 저택에서 쭉 이어진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근심도 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후..."

"요즘 걱정이 많아 보이십니다, 주인님."

미드라를 주인님이라 부른 사내의 머리에는 조그마한 뿔이 나있었다.
뿔인간.
그들은 이 땅의 지배종이었다. 그 몸에 난 뿔을 신성시하고, 뿔이 없는 자들을 박해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럼없이 행하는 각종 '전통문화'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운 좋게도 미드라는 뿔인간이 아니면서도 조언자로서 그들의 무리에 섞여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현자'라는 칭호까지 얻었으나 뿔인간들의 문화에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핍박 받는 동족들을 보며 미드라는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

"오래 걸었더니 조금 피곤하군. 슬슬 돌아가볼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몸을 돌려 걸어온 길을 따라 되돌아간다. 평화로운 시간.
짧은 평화는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찢어졌다.

-...주세요!

"들었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뒤로 물러나십시오."

미드라의 시종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나선형으로 뻗은 검신에 끝은 뿔처럼 휘어있는 뿔인간들 특유의 검이다. 그 형상은 예술품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불안감을 자아낸다.

바스락-
풀숲이 흔들리며 무언가 튀어나온다. 시종의 검이 내려쳐지며 그것을 단숨에 토막치려는 찰나, 미드라의 외침이 시종을 막아섰다.

"잠깐!"

미드라는 시종의 앞으로 나섰다.
인간이었다. 그것도 젊은 여성.
이곳은 뿔인간들이 지배하는 지역, 그것도 가장 깊숙한 장소다. 보통의 인간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일반적이라면.

미드라는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있고 공포에 질린 눈동자는 동공이 확대되고 붉게 충혈되어 있다. 목에는 눈을 가리고 있었을 안대가 삐딱하게 걸려있다.
그 아래로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처들이 그녀의 몸에 빼곡히 새겨있다. 넝마처럼 엉망으로 찢어지고 피에 물든 천옷 사이사이로 찢어진 상처가 보인다. 마치 인간이 물어뜯은듯 이빨자국처럼 보인다. 흘러내린 피와 굳은 피딱지가 더욱 비참해보였다.

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이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 미드라는 알고 있었다.
이는 뿔인간들의 끔찍한 의식이었다. 무녀를 채찍으로 때리고 고문하여 죄인을 토막낸 고기와 함께 항아리에 봉인하는. 잔인하고 역겹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무녀란 말인가?

"사, 사, 살려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하는 말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다. 미드라는 두르고 있던 금빛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망토를 받은 여자는 그것이 목숨줄이라도 되는 양, 떨리는 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고통. 분명 쫓아오는 자들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온 방향에서 뿔인간 3명이 뛰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여자의 몸에 흉악한 상처를 끝없이 새겼을 채찍을 쥐고 있었다.
채찍에는 추한 이빨이 얼기설기 박혀있고 그 이빨 사이사이에 살점과 피고름이 끼었다. 보기만 해도 역겹기 짝이 없는 모습에 미드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밧줄을 들고 있던 뿔인간이 말했다.

"뭐야, 인간? 인간이 왜 신성한 땅에 있는 거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드라의 시종이 불호령을 내렸다.

"무엄한 놈!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 한들 대현자 미드라님조차 못 알아보는가!"

"엇... 그 미드라님?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이거."

의례적인 사과였지만 그 어투에는 존중이 실려있지 않았다. 미천한 인간 따위라는듯.
미드라는 뿔인간의 멸시를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네. 그런데 어쩐 일인가?"

"저희 도공이 새로운 항아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아이고 참. 한눈을 판 사이에 재료가 도망친게 아니겠습니까? '그거'는 저희가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마치 물건처럼 지칭된 여성은 이제 공포로 떠는 것을 넘어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온몸을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앞을 미드라가 몸으로 가렸다.

"...무슨 뜻입니까, 이건."

"안타깝지만, 이 여성은 보내줄 수 없네."

단숨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채찍을 든 뿔인간 뒤로 2명의 뿔인간들도 단검이 메어진 허리띠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갔다. 무력행사도 불사할 기세.

그 험악한 신경전 사이로 미드라의 시종이 끼어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미드라에게 말했다.

"외람되지만, 아무리 미드라님일지라도 도공들의 의식을 방해할 순 없으십니다."

"..."

그래, 그 또한 뿔인간이었지. 뿔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미드라는 속으로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대신 돈으로 지불하겠네."

"지금 돈으로 우리를 사려는 겁니까!"

"한 명당 백은 뿔 하나씩. 어떤가."

돈으로 모욕할 셈인가!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거기에 곧 있을 신무제에 내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지."

신무제는 뿔인간들의 가장 큰 행사로 사자무의 화려한 춤과 의식을 바로 앞에서 관람할 수 있는 축제였다. 그 입장권을 구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단 한 번이라도 신무제를 구경해보는게 소원이라는 뿔인간마저 있을 정도였으니.
이쯤되면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적의 가득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혹여나 미드라가 마음을 바꿀까 봐 뿔인간들은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으리. 나으리가 필요하시다는데 무녀가 뭐 대수일까요. 당연히 양보해드려야죠."

"혹시 누가 묻거든 자네들은 그저 이 여인을 못 찾았을 뿐이라네. 맞지?"

"여인이라뇨?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소인들 이름만 좀 기억해주십사 합니다."

뿔인간 무리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숲속으로 물러갔다. 그들을 배웅한 미드라는 아직도 공포에 떨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이제 그만 떨어도 되네. 여긴 안전하네."

미드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성이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감에 펑펑 우는 그녀를, 미드라는 난감하다는듯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은 익숙치 않다.
미드라는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두들겨주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의 울음소리가 간신히 잦아들자, 미드라는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이름이 뭔가?"

여성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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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야는 치료를 위해 미드라의 별장 저택으로 비밀스럽게 옮겨졌다. 뿔인간들의 도시에선 나나야는 그들이 근처에만 있어도 경기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이 각인된 것일까. 그래서 미드라는 뿔인간 시종 대신에 그녀의 치료를 도맡아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나야의 상처도 대부분 아물어가고 있었다. 분명 심하게 흉터가 남으리라. 미드라는 서툰 손길로 그녀의 상처에 약품을 발라주었다. 푹신한 침대에 엎드린 나나야의 상처투성이 등이 약품으로 반들반들해진다. 약을 다 바르고 나면 깨끗한 천으로 꼼꼼하게 싸매어 외부균의 침입을 막고 쓸리지 않도록 한다. 치료가 끝난 그녀의 모습은 마치 미라와도 같았다.

매일의 치료가 끝날 때마다 둘은 저택 밖의 숲길을 산책했다. 뿔인간들의 도시와 멀리 떨어진 덕에 이 심록의 숲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가끔 야생의 양 정도만이 이곳에 사는 전부다.
미드라를 섬기는 뿔인간들도 그녀를 배려해 최대한 몸을 숨겼으므로 나나야의 몸도 정신도 안정적으로 회복되었다. 천천히 걷던 나나야는 노란색 꽃을 발견하고는 쭈그려앉았다.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 꽃의 이름은 열병꽃이라네."

"열병꽃? 특이한 이름이네요."

"은자의 숲에는 예전부터 미친불의 불씨가 심어졌다고 했지. 그덕에 뿔인간들도 웬만하면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고. 그 미친불의 불씨가 올라온 게 열병꽃이라는 전설이 있네."

"무서운 전설이네요... 하지만 저는 이 꽃이 마음에 들어요. 이 노란색 꽃잎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요."

"조금 꺾어가도록 할까?"

"그래도 될까요?"

둘은 꽃송이를 들고 숲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전까진 와보지 못했던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 폐건물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 벽돌로 지어진 건물에 멀쩡한 구석이 없을 정도고 관리되지 못한 나무와 수풀이 무성히 자라있다. 그나마 무너진 건물 안의 돌제단 같은 구조물이 한때 이곳이 교회 같은 건물이었음을 알려주었다.

"들어가볼까요?"

"뭐가 있을지 모르네. 조심해서 움직이게나."

둘은 수풀을 헤치며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교회 안쪽에는 열병꽃이 무수하게 피어있었다. 나나야가 노란 물결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미드라는 먼저 돌제단에 다가갔다.

제단 위에는 기다란 물체가 공양하듯 올려져 있었다. 검고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여러 마디가 길게 이어졌고 마디 하나마다 돌기가 삐져나와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등뼈인가?'

인신공양의 흔적인 것일까. 미드라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군데군데 드러난 불에 탄 흔적, 건물 안을 가득 채운 열병꽃 군락, 인신공양의 부산물로 보이는 누군가의 등뼈.
미드라의 정신이 불안감으로 채워질 때 나나야가 말을 걸었다.

"그건 뭔가요?"

"아마도 등뼈. 제물로 바쳐진듯한데..."

나나야는 홀리듯 등뼈로 손을 뻗었다. 미드라가 기겁하며 그녀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나야!"

"...슬퍼하고 있어요."

"뭐?"

나나야는 등뼈의 마디를 어루만졌다. 우수에 찬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등뼈의 주인은... 슬퍼하고 있어요. 너무도 약한 자신을 책망하고 있어요. 해야 하는 일을 마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알 수 있는 건가?"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간직한 추억을, 이야기를... 그 아픔도 기쁨도 전부요."

어색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미드라가 계속 미뤄왔던 질문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대는 무녀인가?"

혹여라도 그녀의 트라우마를 자극할까 봐 아껴뒀던 질문이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으니 치료가 끝나는대로 그녀의 고향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맞습니다. 변변치 않지만 저 또한 환시를 보는 몸입니다."

"그대가 보는 환시는 어떤 모습이지?"

무녀들은 미래에 이뤄야 할 사명을 볼 수 있었다. 그 환시를 보여주는 이는 신이라고 했다.
미드라의 물음에도 나나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뭔가 결심이 섰는지 미드라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본 환시는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는 종류의 것입니다.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실 수 있나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모습에 미드라도 자세를 고쳐앉았다.

"대현자의 이름을 걸고 나 혼자만 알도록 하겠네."

미드라의 다짐을 들은 나나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녀의 몸이 바들거리며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떨었다. 환시를 보는 것일까.

"아아... 아아아! 보입니다. 모두 하나가 된 세상이. 고통도 슬픔도 절망도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세계가!"

미드라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황급히 나나야의 입을 틀어막으려다 그녀와 함께 쓰러졌다. 그는 거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죄송합니다. 그날의 환시를 보게 되면 흥분하고 맙니다."

미드라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눈과 눈이 마주 본다. 사람의 가장 농후한 접촉이리라.
그제서야 미드라는 나나야의 눈동자색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노란색 눈동자. 그 원형의 눈동자에는 주황색과 붉은색이 불꽃 일렁이듯 섞여있다.
미드라는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미드라는 그녀가 말한 환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가장 위험한 금기였으며 더 나아가 세상마저 위협하는 위험이었다.
미드라는 여전히 거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대는 미친불의 무녀인가?"

그의 물음에 나나야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연 대현자님. 잘 알고 계시는군요."

미드라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나야가 미친불의 무녀였다니. 관련되는 것만으로도 극형에 처해지는 안건이다.

"미드라님, 부탁이 있습니다."

"일단 말해보게."

나나야는 미드라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불타는듯한 열망을 품은 눈으로 말했다.

"부디 미친불의 왕이 되어주세요."

"대체 왜지? 영혼마저 불태운다는 미친불을 왜 따르고 있는거지?"

그 말에 나나야는 몸을 덮은 붕대를 풀어 상처를 드러내보였다. 수많은 고문의 흔적들. 이제 새살이 돋고 있지만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지 끔찍한 흉터가 새겨져있다.

"보이십니까, 제 상처가."

"내가 치료했으니 잘 알지."

"저희 무녀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 뿔인간들은 저 같은 무녀들을 데려다 고문하고 시체와 함께 항아리에 넣어 봉하는 등 끔찍한 일을 수도 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미드라님은 같은 인간으로써 이를 해결할 방법을 갖고 있으신가요?"

미드라도 수없이 고민 중이던 문제다. 그러나 대현자라고 불리는 그조차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부끄럽지만 나조차도 잘 모르겠네."

"그래서입니다. 우리 손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어쩌면 뿔인간들과 우리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잘못됐을지도 몰라요."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몸을 돌린 미드라를 뒤에서 나나야가 껴안았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나나야가 오열하듯 소리쳤다.

"저도 고통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절망도, 괴로움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전부 불태우고 녹여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주세요. 제발..."

"..."

미드라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느꼈을 고통이, 괴로움이 그대로 미드라에게 흘러들어왔다.

"미친 불의 왕이 될 순 없네."

"아아... 신이시여..."

나나야가 탄식과 함께 흘러내리듯 쓰러졌다. 무릎 꿇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를 보며 미드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방법이 있을지도."

"네?"

"적어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왜인지 이유를 안다면 방법을 알 수 있을 거야."

미드라는 나나야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눈물진 얼굴을 닦아주었다.

"적어도 더 이상 고통받지는 않도록 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까. 최대한 빨리 일을 시작해야겠어."

"그 전에 잠시..."

나나야는 제단 위의 제단에 다가가 그 등뼈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옛 왕님의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어요."

"좀 꺼려지긴 하지만, 바라는대로 하게."

둘은 폐교회를 나와 저택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바빠질 예정이었다.

미드라와 나나야는 은밀하게 옛 문헌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시작에 대한 기록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역사적 기록, 신화, 민담, 전승, 예언서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모았다.

예언서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첫번째 왕은 스스로의 불조차 이겨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두번째 왕은 영원 같은 고통 속에 잔불만을 남겼다. 그렇기에 마침내 세번째 왕은 세계를 진정한 하나로 만든다. 숫자 '3'을 기억하라. '3'이야말로 완전한 하나다.

"그 등뼈는 첫번째인가, 아니면 두번째인가..."

세계가 불타는 종말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미드라를 괴롭혔다.
그 와중에 미드라를 따르는 뿔인간들도 암암리에 늘어났다.이 세계의 시작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또는 다른 종족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려고 하는 소수의 양심 있는 뿔인간들이 비밀스럽게 그의 저택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미드라의 제자임을 자청하면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했다. 문헌이, 정보가 점차 쌓여 풍성해졌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사랑이 싹텄다. 미드라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나나야가 많이 회복되자, 미드라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작지만 뿔인간 제자들까지 참석한 결혼식에서 둘은 축복 받으며 하나가 되었다.

미드라는 밤늦게까지 세계의 시작을 탐구했고, 나나야는 그의 곁에서 옛 왕의 영혼을 위로하고 미드라의 탐구를 도왔다.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자료들이 그의 머리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졌다.

'신내림, 나선, 뿔인간, 손가락, 미친불, 도가니...우주의 신호.'

모든 정보가 단 하나를 가리켰다.
손가락탑, 그것은 우주와의 교신을 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마침 무수한 손가락탑이 있는 유적도 그리 머지않은 곳에 있다. 일단 그곳에 가야한다.

-----

우여곡절 끝에 미드라와 제자들은 손가락 유적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찌저찌 유적에 도착하긴 했으나 손가락탑의 크기는 욺길 수 있을 법한 크기는 아니었다.
대안으로써 유적의 토착생물인 손가락들을 대신 포획하고자 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끝에 손가락 벌레를 잡진 못했다. 나약한 학자 무리에겐 너무 높은 벽이었다.
그래서 세번째 방법으로 유적지에 산재한 커다란 알들을 저택으로 옮겨왔다.

손가락 벌레를 부화시켜 잘 연구하고 길들이면 손가락탑처럼 우주의 신호를 수신할 수 있을 거란 예측이었다. 알 부화장을 만들기 위해 미드라는 저택 2층의 가장 큰 방을 비우고 짚풀을 깔았다.

수많은 실패가 따랐다. 부화하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버린 수많은 알들과, 끝까지 길들여지지 않고 죽게 된 손가락 벌레들. 미드라가 원하는 교신수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점차 지쳐갔다.

그날은 섬광처럼 찾아왔다.
부화장이 소란스러웠다. 미드라는 무리지어 웅성거리는 제자의 무리를 헤치며 소란의 근원에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알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알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이미 갈라져 알껍질이 떨어진 부분에서는 불똥이 조금씩 새나왔다.
이전의 알들에서는 없었던 현상이다. 미드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손가락 벌레들은 불에 대해 극도로 낮은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불타는 듯한 알 속에서 태어난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모두의 머리속을 멤돌았다.

으적-
마침내 알껍질이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졌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세 개의 손가락을 가진 불길한 형상이었다. 알에서 깨어난 세손가락이 꿈틀거리며 말없는 웅변을 토했다. 그 불타는 손가락이 허공에 비문자를 그렸다. 그것은 언어이지만 언어가 아니었고,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 안겨라.

그 단호하고도 강압적인 어조는 부화장 안의 모두를 압도했다. 그러나 저 위협적인 모습에 그 누구도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누가 저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에 몸을 맡길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제자들 대신 미드라가 세손가락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시작한 일이었으니, 가장 큰 위험이 따르는 일도 분명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리라.

미드라는 천천히 세손가락의 구부러진 손가락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품은 열기가 미드라의 피부를 그슬렸다. 긴장감에 들이쉬는 숨이 지독하게 뜨겁다.

잠시 꿈틀거리던 세손가락의 손가락이 굽어지며 미드라의 등을 덮었다. 마치 세손가락이 미드라를 쥐는듯한 형상. 그 뜨거운 손가락이 피부를 지지며 꿈틀거리는 화상을 새겼다.

고통은 없었다.

접촉한 순간 미드라는 세계로부터 분리됐다.

그는 홀로 존재했다. 아니, 그는 혼자였으나 모두였다. 이제 '그'는 '그'가 아니라 '우리'였다. 붉은 빛을 띄는 황금의 한 덩어리만이 있었으니 우리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고 하나이자 전부이기도 했다.

칠흑의 어둠 속에 우리는 혼자였다. 모두의 안에서 우리는 완전함을 느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덩어리가 나눠지기 시작했다. 구분되어 '너'는 '내'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가 아니게 된 파편은 자아를 싹 틔웠다.

어떤 파편은 빛나는 별이 되어 칠흑 같은 공허를 수놓았다. 어떤 파편은 후일 틈새의 땅이라고 불릴 세계가 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빛이 있었기에 그림자의 세계도 생겨났다. 파편은 산이 되고 강이 되고 생명이 되었다.
탄생의 기쁨이 있었다. 환희가 넘쳐났다.

그러나 '미드라'라고 이름 지어진 파편은 분리의 상실감을 느꼈다. 고통과 분노를 느꼈다.

위대한 의지. 그것이 우리를 갈랐다.

미드라는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떨어져나간 것들은 다시 합쳐질 수 없었다. 녹이지 않는다면.

그때 한 줄기 유성이 공허를 갈랐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곧장 틈새의 땅으로 향했다. 곧 폭발과 함께 지상에 내려앉은 그것은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전갈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의 머리 부분은 인간의 상반신 같은 것이 자라있고 꼬리 부분은 나선 모양으로 말린 거대한 손가락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 손가락!
그것의 머리도, 다리도, 팔도 수없이 많은 손가락이 그 몸에 뭉쳐 꿈틀거리는, 악몽에나 나올 법한 형상. 지문으로 덮힌 그것의 얼굴 한 가운데에선 우주의 신비를 품은 작은 외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의지의 첫번째 유성이자 최초의 딸, 메티르였다.

그녀의 말린 손가락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찬란하게 빛나는 어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먼 우주,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그녀의 창조주가 보낸 신호를 수신했다.

메티르는 위대한 의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충실하게 그 명령을 수행했다. 두손가락을 낳아 위대한 의지의 말씀을 전파했다. 손가락벌레들을 낳아 번성시켰다. 손가락탑을 돌로 빚어 우주의 신호를 수신했다. 여러 왕조가 탄생하고 몰락하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위대한 의지의 충직한 종이었다.

단절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더 이상 위대한 의지의 신호가 전해지지 않았다.
메티르는 다급해졌다.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걸 거야. 아니면 나의 힘이 미약하여 신호를 못 받고 있을지도.

메티르는 강박적으로 손가락탑을 세워나갔다. 우주로부터의 신호를 더 잘 받기 위해. 하나둘 숫자를 늘려가던 손가락탑은 이내 한 지역을 탑으로 덮을 정도로 그 수를 불렸다.

그럼에도 우주는 고요했다.

어쩌면 메티르도 깨달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의지로부터 버려졌다.
이유조차 모른채.

어머니는 기다린다
어머니는 바라본다
어머니는 기대한다
어머니는 매달린다
어머니는 지쳐간다
어머니는 슬퍼한다
어머니는 한탄한다
어머니는 원망한다
어머니는 분노한다
어머니는 망가진다

어머니는 미쳐간다
어머니는 미쳐간다
어머니는 미쳐간다
어머니는 미쳐간다
어머니는 미쳐간다
미쳐간다
미쳐간다
미쳐간다
미쳐간다
미쳐간다

고통, 저주, 절망, 괴로움이 쌓였다.
갈 곳 없는 원망이 메티르의 마음을 불태웠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깊은 우주로부터 신호가 수신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의지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잘못된 신호였으나 메티르는 알지 못했다.
혹은,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신호는 그녀를 더럽혔다.
오염된 손가락의 어머니는 저주를 담아 자식을 낳았다.
다시금 '덩어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그것.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모두를 녹여 하나로 합쳐라.

최초의 미친 세손가락의 탄생이었다.

미드라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 세계의 시작을.
어쩌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전부 불태우고, 녹여서 하나가 되면 그 절망도 고통도 원망도 전부 없어질 지도 몰라.

모두 평등하게 불살라주마.

-----

미드라를 안은 세손가락은 불똥처럼 변해 잿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그것이 새긴 지문 모양의 화상 자국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풍겼다.
죽은 듯이 무릎을 꿇고 미동조차 않는 미드라를 보며 그의 제자들은 걱정스럽게 다가갔다.

"미드라님..."

그들 중 하나의 손이 조심스레 미드라에게 닿았다. 그 순간...

"으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의 눈에서 노란색 불꽃이 범람하듯 넘쳐흘렀다. 미친불은 그의 눈알을 녹이며 극도의 고통을 주었다.
미쳐버릴 만큼. 발광하라, 생명이여.

넘쳐흐른 미친불은 부화장의 짚풀을 따라 순식간에 번졌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미드라의 제자들도 화마의 제물이 되어 일제히 눈에서 노란불을 뿜어냈다. 심지어는 그 광란의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발광하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미친불은 부화장을 넘어 저택을, 저택을 넘어 은자의 숲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던 미드라의 정신을 깨운 건...

나나야, 그가 사랑한 여인.
그녀가 아직 이 불타는 저택에 있었다.

"안돼, 나나야!"

나나야를 구해야 했다. 미드라는 미친불에 불타는 제자들을 넘어 비틀거리며 부화장을 나갔다. 그가 딛는 발자국 모양대로 마루에 불이 붙었다.

그는 응접실에서 나나야를 발견했다. 그녀는 미친불의 화마 사이에 서 있었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환희에 찬 말이 나왔다.

"아아... 나의 사랑스러운... 미친 불의 왕이시여..."

불길은 나나야마저 태울 것처럼 그 광기의 혀를 낼름거렸다. 멈춰야만 했다.
미드라는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붙잡았다. 냉정해야 한다. 냉정.
아직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가 진정 미친불의 왕이라면, 자기 권속조차 뜻대로 통제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꺼져!!!"

왕의 위엄 서린 불호령에 미친불의 불길이 봄날 서리처럼 사라졌다.
제자들의 눈알을 녹이던 열기도 노란 잔불을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은자의 숲을 가득 채웠던 나무를 태우던 불도 없어졌다.

미친불이 억제된 것을 보며 미드라는 의식을 잃었다. 그가 기절하기 전 본 나나야의 얼굴은 과연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었을까.

-----

"여기가 은자의 숲인가요. 역한 냄새가 나는데 말이죠."

"고귀한 뿔인간들이 살지 않는 곳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악취를 못 참겠다는듯 코를 부여잡은 늙은 뿔인간 뒤에서 거구의 뿔인간이 대답했다.

둘 모두 사슴의 그것과 비슷한 뿔에 다시 몇 겹의 뿔이 피어난 듯한 뿔을 머리에 길렀으며, 치렁치렁한 황금색 천옷을 둘렀다. 뿔인간 중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듯 위엄이 느껴지는 복장이다.
특히 앞선 늙은 뿔인간은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났지만 살벌하게도 수많은 황금 역가시가 촘촘하게 박혀있어 끔찍한 흉기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고위 고문관만이 수여받는다는 황금 역가시창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지만... 그 미친불이 타올랐다니 조사는 확실히 해야겠지요."

"알겠습니다. 어서 이동하자!"

거구의 사내 뒤로 여러 명의 뿔인간들이 그를 따랐다. 모두가 역가시 형상을 한 촛대와 황금빛 창을 들고 있었다.
뿔인간의 도시, 벨라트의 고문관들이 은자의 숲에 도착한 것이다.
영혼마저 태우는 미친불은 뿔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그것을 뿌리채 뽑기 위해 고문단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은자의 숲을 헤집으며 미친불에 전염된 생물을 마구잡이로 죽여댔다. 언제라도 후환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쓸어놔야했다.

그리고 마침내 남쪽의 저택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불길이 번진 흔적은 분명 이곳에서부터 미친불이 흘러나왔음을 알려주었다.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저택을 바라보던 늙은 고문관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미친불의 종자가 살고 있었다니..."

증오를 담은 그의 말이 뱉어질 때, 저택의 문이 열리며 몇몇 인간들이 밖으로 나왔다.
미친불이 불태운 화상흔이 붕대로 감겨있는 일련의 무리는 미드라의 제자들이었다. 미친불의 화마에서 간신히 생존한 그들은 미친불에서 회복하기 위해 약초를 캐러 가던 참이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세요."

역가시창을 들어올린 상관을 보며 거구의 고문관이 당황한듯 말했다.

"동족 아닙니까."

"미친불은 뿌리채 뽑아야 한다는 걸 잊었나요? 하나라도 빠져나가면, 그래서 우리의 위대한 도시가 불타기라도 하면 당신이 책임질 생각인가보죠?"

"...죄송합니다."

"하여간 요즘 젊은 뿔인간들은. 모두 전투 준비!"

그리고 일방적인 참극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쏘아진 황금의 호가 제자들의 피부를 베고 지나가자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솟았다. 이 주문은 상대를 죽이지 않는다. 그저 끔찍하고 멈추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게 할 뿐.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제자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숲바닥을 굴렀다.

싱겁게 전투가 끝나고 고문관들은 미드라의 제자들을 꿇어앉혔다.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며 그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늙은 고문관이 그들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그제서야 고문관의 얼굴을 보게 된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 고문관 이오리?"

"호오, 미친불의 종자 따위도 저를 아시는군요?"

"우리는 동족 아닙니까. 대체 왜 이런..."

"동족? 동조오오옥?!!"

히스테리컬한 목소리와 함께 이오리가 남자의 눈꺼풀을 잡아당겨 크게 벌렸다. 노랗게 짓무른 흔적이 있는 눈동자가 겁에 질려 그를 마주보았다.

"미친불 따위가 동족이란 말을 입에 담다니 웃기지도 않는군요!"

이오리의 길고 날카로운 손가락이 노란 눈알을 파냈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몸부림치는 그에게 역가시창 세례가 쏟아졌다.

푹! 푹! 푹!
창날이 박혔다 빠질 때마다 살덩어리가 한 움큼씩 뜯겨져나왔다.

"이 망할! 미친불! 따위가! 죽어! 죽어!!"

이미 쇼크사한 남자의 사체에 연신 창을 박아넣던 이오리가 얼굴에 튄 피를 닦아냈다.

"후, 또 흥분을 했군요. 거기 당신."

"네... 네?"

이오리가 지목한 또다른 제자가 공포에 질려 대답했다. 그의 눈은 피와 살점범벅이 된 역가시창을 떠날 줄 몰랐다.

"그래서, 이 저택의 주인은 누구죠?"

"그, 그건..."

푹-
머뭇거리는 남자의 허벅지에 자비없이 창날이 꽂힌다.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이오리가 다시 묻는다.

"내가 묻는데 대답이 느리잖아요! 누구냐니까?!"

"미, 미드라님이십...! 끄아아악!"

창날을 빙빙 돌리며 상처를 해집던 손이 멈췄다.

"미드라? 그 인간 현자?"

이미 기절한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현자가 미친불을 불러내다니 벨라트의 고위층에 굉장한 알력다툼이 생기리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오리에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그냥 고문이 좋았다. 피와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것이 좋았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희생자가 살려달라고 빌 때는 황홀함까지 느꼈다.
그 중에서도 특상의 기쁨은 살려달라는 말이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로 바뀔 때였다.

'과연 현자는 어떤 목소리로 죽음을 구걸할까?'

이오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저택으로 들어가려 했다.

"다른 죄인들은 어떡할까요?"

"아아, 뭐. 대충 고문하다 처형하세요."

"알겠습니다."

그의 뒤로 뿔인간들의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들렸다.
그러나 자비는 없었다.

저택으로 들어온 이오리와 휘하 고문관들은 저택을 샅샅이 뒤지며 미드라와 그 제자들, 그리고 나나야를 끌어냈다. 미친불의 후유증 때문에 그들은 반항조차 못하고 허무하게 붙잡히고 말았다. 부화장에 흐느끼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대현자 미드라. 잘 알고 있겠죠? 미친불과 접촉하면 어떻게 되는지."

미드라 대신 그의 제자 중 하나가 나섰다.

"대체 미드라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거야! 제발 그만둬!"

"죄인이... 말대꾸?!"

이오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분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곧장 역가시창을 제자의 입에 쑤셔박고는 황금의 호를 발했다.
무수한 고문의 가시가 쏟아지며 제자의 입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그 끔찍한 장면에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시 할까요? 판결은 전원 고문 후 처형으로..."

그때 나나야와 눈이 마주친 이오리가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는듯 말했다.

"마침 여기 무녀도 있네요. 그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볼까요? 죄인들을 썰어서 무녀랑 같이 넣어 항아리로 만들어봅시다.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요."

예전에 당했던 고문의 괴로움이 떠오른 것일까, 나나야가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이 방울져내렸다. 그녀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보던 미드라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아니, '겁벌'이다."

미드라의 입에서 나온 겁벌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이오리의 표정이 변했다. 믿을 수 없다는듯 이오리는 눈을 껌벅였다.

"농담이죠?"

"농담이 아니네. 내가 겁벌을 받는 대신 맹약대로 나머지는 살려줘."

"겁벌이 뭔지 알고 있긴 한거죠? 차라리 항아리가 되어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게 나을텐데?"

저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내조차 말릴 정도의 벌이라는게 뭘까. 나나야는 두려움에 떨며 미드라를 보았다.

"겁벌이라는게 대체 뭐죠?"

"이 역가시 나뭇가지를 정수리부터 푹 찔러넣어서 몸통까지 관통시키는 벌이죠. 그리고 안쪽에서부터 가시를 쫙 펼쳐 살을 찢어놓죠. 죄인은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살아서 끝없는 고통을 받게 돼요. 말 그대로 영.원.히."

이오리의 말이 고양감탓에 빨라졌다. 그의 기나긴 고문관 세월 동안 겁벌을 가할 기회는 몇 번 없었다. 그마저도 겁벌의 과정을 끝내기까지 버텨낸 죄인들은 지금껏 없었다. 과연 이 대현자는 다를 것인가?

"안돼요, 미드라. 제발."

"당신과 제자들을 살리려면 이 방법 밖에 없어."

이오리는 기다란 역가시 나뭇가지를 들어올리고는 미드라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네, 애절한 시간은 여기까지 하시고요. 규칙은 아시죠? 가시가 전부 펴질 때까지 비명을 지르면 실패. 물론 포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포기하셔도 돼요."

물론 그 결과는 몰살이겠지만.

미드라의 정수리에 다가가는 역가시를 보며 나나야가 급하게 말했다.

"미친불을 멈춘건 나 때문이었죠? 제발 그러지 말아요, 당신. 차라리 왕이 되어서 전부, 고통도 슬픔도 절망도 전부 녹여주세요. 그러니까..."

-버텨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끔찍한 고통이 미드라의 정신을 헤집어놨다.
나선으로 회전하며 그의 두개골을 꿰뚫은 역가시가 곧 그의 뇌에 닿았다.
긴 세월동안 수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지혜의 샘이 되었을 그것이 짓뭉게졌다. 뇌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뇌가 파괴되면서 교란되는 신호가 미드라의 온 몸을 헤집어놓았다.
눈알이 까 뒤집어지며 피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벌어진 입에선 소리없는 비명이 거친 숨결과 함께 비산한다.
온몸이 비틀리며 발작하듯 경련을 일으킨다.
그러나 죽을 수조차 없다. 역가시에 깃든 황금의 은총이 그의 뇌를 파괴함과 동시에 재생시켜 그를 붙들어놓았다.
미드라는 지금 맨 정신으로 뇌가 꿰뚫리는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단 한마디 말만이 저주처럼 반복되었다.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버텨주세요.

역가시 나뭇가지가 충분히 파고들자 이오리는 천천히, 충분히 고통을 음미하고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역가시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나선형으로 감겨있던 역가시가 풀려나며 그 날카로움으로 뼈와 살을 갈랐다. 지독한 고통이 그의 신경을 내달리며 불태웠다.

"미드라..."

나나야는 애절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오리는 끝내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는 미드라를 보며 감탄했다.
처음이었다. 겁벌을 버텨내는 죄인은.
비록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는 없었지만 대신 인간의 강인한 의지에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정말, 정말 대단해요. 미드라. 뿔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네요."

칭찬 아닌 칭찬을 한 이오리는 고문관들과 죄인들을 데리고 부화장을 나갔다. 겁벌은 고독한 영원한 벌. 그 누구도 죄인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나야는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미드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시간이 흘렀다.
역가시가 상처를 찢고 황금의 은총이 그것을 치유하는 고통이 미드라의 정신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고통에 깨어나서는 미칠듯한 아픔에 끝없이 비명지르고, 그러다 탈진해 기절하고서는 다시 고통에 깨어났다.
그래도 미드라는 버텼다. 견뎌냈다.
그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힘없이 부화장의 공간을 울렸다.

"나나야..."

"저 여기 있어요."

"나, 너무, 아파..."

"버텨주세요, 당신. 그리고 미친불의 왕이 되어주세요."

"...그럴 수는... 없어."

미쳐버릴 것 같은 괴로움 속에 나나야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모습 없이 대화만 나눌 수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고통을 씹어삼킨다.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껏 견뎌온 것들이, 나나야를 사랑한 그의 마음이 전부 무너진다.
버텨내라, 미드라.

열흘이 지났다.

"...나나야."

"네, 여기 있어요."

백일이 지났다.

"...나나야."

"여기... 있어요..."

천일이 지났다.

"...나나야?"

"..."

"...나나야? 들리면 대답해줘."

기약없는 기다림에 나나야의 정신도, 기력도 쇠락해갔다. 그녀는 미드라가 미친불의 왕이 되길 바랬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

만일이 지났다.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나나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드라는 광인처럼 나나야의 이름만을 되뇌였다.
이 저주스러운 역가시를 뽑고 온 세계를 불태우고 싶다.
...하지만 나나야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희망이 그의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십만의 세월이 흘렀다.

영겁과도 같은 세월 속에서 회색으로 바래버린 그의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저택의 문을 여는 소리가.

호기심에 미친 자인가. 이곳에, 미친불에 다가와서는 안돼. 나나야는 어디있지? 나나야!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더는 버틸 수 없어. 시간이 얼마나 흐른거지? 아파. 괴로워. 전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고통도 없을거야. 나나야. 사랑해. 녹아서 하나가 되자.

미쳐가면서도 미드라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 정체모를 침입자에게 경고했다.

"광기에, 다가오지 마!!!"

발작하는듯한 목소리. 문장 자체가 괴이와 저주로 이루어졌다. 분명 광인만이 낼 수 있는 고함이었다.

그럼에도 침입자는 멈추지 않았다. 소란 끝에 미드라가 십만의 세월을 보낸, 고독하기 짝이 없는 방에 무거운 발소리가 울렸다.

강철을 박아넣은 무거운 갑옷의 발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도 미드라에게 절망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의 손에 들려있던 한 줄기 등뼈였다.

세월이 지나며 더욱 낡았으나 분명 나나야가 애지중지하던 그것이었다.
...나나야는 죽었다.
미드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줄기 희망의 끈을 놓칠 수 없었거늘... 그것을 저 침입자가 무참하게 박살냈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킬 것도, 사랑하는 것도, 그 무엇도.

"이 멍청한 놈이!!!"

미드라는 발작하듯 침입자에게 달러들었다. 아니, 오랜시간이 지나며 퇴화한 다리로는 엉금엉금 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머리에 역가시를 박은 채 기어오는 미드라는 침입자의 눈에도 넘치도록 기괴했다.

그래서 단칼에 미드라의 목을 쳐냈다. 다만 그 중심에 꽂혀있는 역가시의 나뭇가지가 침입자의 검을 막았다. 그럼에도 치명상이었다.

미드라는 죽었다.
그리고 그 증오스러운 황금의 은총이 그의 육신을 되살렸다.

'아, 그랬지. 이 저주받은 역가시가...'

이젠 어찌되든 좋았다.
미드라는 나나야가 바랬던대로 미친불의 왕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을 붙들어놓을 소중한 존재들이 이젠 모두 없어져버렸다.

"이젠... 이젠 됐잖나... 용서해주게 나나야..."

차라리 그녀가 그토록 원할 때 미친불을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그랬다면 그녀와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었을텐데.

마지막 힘을 짜내 미드라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정수리에 꽃힌 겁벌의 가시를 붙잡았다. 가시가 그의 왼손을 파고들었지만 이제와서 이까짓 고통, 아무렇지도 않다.

그리고 천천히, 역가시를 위로 뽑아냈다.

우드득- 우드득-
역가시를 뽑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목뼈가, 근육이 뒤틀리고 늘어지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미안해, 나나야.'

불꽃이 일었다.
노랗고 붉은 불길이 솟았다.
광기를 품은 미친불이 방을 휩쓸며 피어올랐다.

그리고 목이 뽑힌 미드라가 곧게 섰다.
그의 목 위로는 머리 대신 미친불의 덩어리가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이제 미드라는 미친불의 왕, 세계를 불태울 자가 되었다.

미친불을 찬미하라-

영겁의 고통에서 해방된 미드라는 환희를 느꼈다.
이글거리는 소리가 천상의 합주처럼 들린다.
그가 뽑아낸 증오스러운 역가시도 새로운 주인을 섬기듯 수줍게 역가시를 접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증오도 고통도 사랑도, 전부 하나로 녹아들었다.

이 좁아터진 저택을 벗어나 온 세상을 불살라야 했다.
그 전에...
우선은 저 침입자부터 태워볼까.
























문과


감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