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또한 그런 생각을 품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괜찮으시다면, 제 얘기를 들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부푼 꿈을 안고, 엘데의 왕이 되고자 했으나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더군요.

부끄럽지만 저는 백면의 꼬드김에 넘어가 스톰빌 성에서 스러진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 정문 앞에서 끔찍한 흉조를 맞이하고 마음이 꺾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람 좋은 척하며 도와주던 마술검사도, 계속된 실패에는 결국 절 버리지 뭡니까?

정말이지, 저는 무슨 자신감으로 멜리나라는 이름의 소녀의 거래 제안을 거절했던걸까요.
그렇게 저는 끝없는 증오와 복수심에 물들어 있었으나, 졸병 하나 처리할 힘도 없었기에..
관문 앞의 폐허에 숨어 그저 이 세상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긴걸까요, 아니면 제 증오를 이용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거라 생각한걸까요.
며칠이 지나자 멜리나라는 소녀는 다시금 제게 찾아와, 제안을 했습니다.
무녀가 되어줄테니, 황금나무 기슭으로 향해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분명히 묘한 비웃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같은 자가, 왕이 되는건 기대 따위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제가 아니어도 빛바랜 자는 많다는듯이.

저는 그 소녀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폭군이 되려면 힘이 필요했기에.

저는 그녀와 계약을 맺고, 길가의 동물들부터 하나씩 죽이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힘을 쌓았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그저 힘을 길렀습니다.
멜리나 또한 조금씩 모은 룬을 힘으로 삼고자 부를 때, 의외라는 듯이 처다보곤 했고요.

어느정도 힘을 쌓아, 스스로 고드릭의 기사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다시 그 문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흉조는 없더군요.
흉조마저도 마음이 꺾인 저 따위는 무시하는 것이였을까요.

다만 제가 힘을 쌓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저는 증오를 품은 채,
그 흉조를 죽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스톰빌 성 안으로 향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 흉조를 마주할 때 더는 도망치지 않으려면, 룬이 더 필요했기에.

얼마나 시간이 흐른걸까요.

스톰빌 성의 주인, 황금의 고드릭.
마술학원 레아 루카리아 최고의 지성, 만월의 여왕 레날라.
두 존재를 쓰러트리고 거대한 룬을 얻었음에도 저는, 아직도 그 흉조에 대한 증오를 잊지 않았습니다.

케일리드 들판에서, 라단의 거대한 룬을 얻기 위한 전쟁 축제가 준비중이란 소식을 들었기에,
그 근처 마술도시 사리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땅에서, 우연한 만남을 얻었습니다.
도시의 비밀을 알아내, 도움이 된다면 그를 이용하기 위해 그의 요구를 들어주던 중,
붉은 머리와 외팔의, 부패를 품에 안은 밀리센트라는 이름의 아이와 만났습니다.

저는 그저 현자의 부탁으로 그 금침을 전해줬을 뿐이었으나 그녀는 제게 감사를 표하며 그녀가 가지고 있던 탈리스만을 주었습니다.
그후로 그녀도 여행을 떠났고, 저 또한 전쟁축제에 참가하고 라단을 쓰러트리려 했으니 다시 볼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라단을 무너트리고 거대한 룬을 얻은 후, 고원으로 향하기 위해 
그늘성에서 우연히 얻은 의수를 전해주자 마치 아이처럼 기뻐하며, 이제 제게 도움이 될 수 있을거라며 좋아하더군요.
의수를 얻은 그녀는, 저를 도와 두 번이나 전투를 해줬습니다.

도읍으로 향하는 중에 그 흉조와 만나 그를 쓰러트렸으나, 분명히 그것은 본체가 아님이 분명했습니다.
거대한 룬의 힘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저는, 화산관에 합류해 라이커드의 룬 또한 찬탈하였죠.

이윽고 도읍에 입성하자, 멜리나와의 계약도, 저의 증오의 향방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깊은 분노와 증오로 쌓은 룬의 힘을 흉조에게 쏟아붓자, 너무나도 간단히 그 흉조를 쓰러트렸습니다만..
제게는 그저 허무만이 제게 남았습니다.

그토록 쌓은 증오와 분노는 갈 곳을 잃고, 세상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멜리나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다시금 계약을 부탁했지만

저는 그녀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어딘가에서 들은 미친 불의 봉인을 향해 도읍의 지하로 향했습니다.


비웃던 모습은 어디가고, 그녀는 애원하며 미친 불을 받지 말라했으나

저는 역으로 그녀를 비웃고, 미친 불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만 세례를 받았다해도 저의 거대한 룬에 대한 집착은 여전했기에, 저는 성수에 잠든 말레니아의 힘을 찬탈하고자 성수로 향했고

거기서 밀리센트와 다시 마주했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저를 반가워 했습니다.


...미친 불을 받은 흔적을 다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멜리나와 달리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했습니다.


그녀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했을 때

마찬가지로 성수의 깊은 곳으로 향하던 밀리센트는

부패의 늪에서 자신의 자매들과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발견한 밀리센트는 조금은 희망에 찬 눈동자로 제 도움을 구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저 세상을 증오하고, 힘을 찬탈하기 위해 온 제게 의지하는,

가열한 의지를 돌려주고자 하는 숭고한 전쟁처녀.


그녀에게 가세해 자매들을 물리치고, 밀리센트에게 다가가자 갑자기 그녀가 다가오지 말라는게 아니겠습니까.

무슨 일인가하니, 그녀는 침을 뽑았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부패가 옮으니 다가오지 말라는 말을 그녀는 하고자 했던겁니다.

그리고 그 침을 제게 넘기며, 말레니아를 쓰러트리면 이 침을 그녀에게 돌려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남겼습니다.

죽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니 미안하지만 가달라는 말에, 저는 제 자신의 한심함에 눈물 흘렸습니다.


그녀는, 제 증오를 잠재우는 침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윽고 성수의 심부에서 마주한 말레니아에게, 저는 멀기트 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그 증오를 다시 기억해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도읍 지하에서 발견한 미켈라의 침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말레니아에게 침을 돌려준 후 얻은 금빛의 침의 이야기임이 분명했기에

황금나무를 불태운 저는 파름 아즈라의 용왕이 잠든 시간의 틈새로 향해, 미친 불을 잠재웠습니다.


...다만, 이제 밀리센트가 없는 세상에서, 그녀를 추억하기 위한 물건이 제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제게, 부디 그녀의 의수를 복지해 주십시오.

그 탈리스만만이, 저의 증오를 억눌러준 그녀를 기억할 유일한 수단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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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센트를 기리며.
미친 불을 받았던, 한심한 한 빛바랜 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