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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 석상들이 천천히 다가오며 은기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별거 없지만 무리가 되면 성가셨다. 가까워지면 불을 내뿜는데 상당히 뜨겁다. 어중간한 기사라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타죽겠지만, 발릭은 은기사였다.
파지지직. 금빛 번개를 두른 창을 횡으로 크게 휘두르자 8마리의 데몬 석상들이 반으로 쪼개져 한꺼번에 무너졌다. 발릭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전장을 정리했다.


'혼돈이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불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 현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신과 인간들만이 아니었다. 데몬들 또한 '불'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족속들.
따라서 그들 또한 혼돈의 불꽃을 연명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간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끝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끝까지 추하게 발악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발릭은 이들을 동정하였다.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돌아갈까.'


그는 마지막까지 폐성당과 그곳의 신들을 지키며 죽기로 맹세한 기사. 이런 오지에서의 죽음은 있어선 안됐다.
발릭은 은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어스름의 공주'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서약기사였다. 신들 사이에서 가장 무구하며 순수하게 자라신 그분의 곁을 오래 비워두고 싶지 않았다.


"발릭 님!"


목소리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루실의 칙사로서 함께 온 알리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살아서오다니. 순수하게 기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옆에 있는 기사를 보자 웃을 수 없었다.

"......"
"......"

발릭은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지만, 반면 저 기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경계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싸울 의사를 보인다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 기세였다.
알리사는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에 당황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귀공은 누구인가."


먼저 물은 것은 흑기사였다.

발릭은 순간 당황했으나 가까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흑기사들은 모두 '대왕'과 함께 화로로 들어갔다가 이성이 불타 사라졌다.
따라서 망자처럼 소울을 탐해 생자를 공격하지는 않을지 언정,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터인데.

'이성을 회복한 걸까?'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흑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 갑옷은 은기사들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귀공 같은 은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끔 묻겠다. 귀공은 누구이길래, 감히 은기사를 사칭하는가."


자벨의 기억은 이미 안개가 가득 차 무엇 하나 선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단언할 수 있었다. 저 은기사는 절대 우리 중 하나가 아니었다.


"저의 이름은 발릭, 폐성당을 지키는 은기사 중 하나입니다. 최초의 은기사이시여."
"폐성당?"


일반인이라면 단박에 이해해야 하는 부분일텐데 흑기사가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이자, 발릭은 그가 '혼돈'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떠돌았는지 감히 유추할 수 없었다.


"폐성당은 신들께서 거주하시는 거성입니다. 한때 아노르 론도라 불리던 신들의 도시의 중심이었던 성소이지요. 그곳을 수호하는 것이 저희 은기사들의—"

"한 때? 한때라니?"


자벨의 머릿속 안개가 맑아지면서 떠오르는 기억들은 지금 듣는 설명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 말은 위대한 신들의 도시, 아노르 론도가 없어졌다는 것인가? 누가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멸망한 고룡들이 전부 돌아오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었다.


"도시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로드란이란 왕국의 이름과 함께."

"거짓말이다. 귀공은 지금 내게 거짓을 고하고 있다. 로드란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부정하는 흑기사에게 발릭은 잔인한 진실을 고했다. 자신의 말이 말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릴지 예상했으나, 이것이 진실이었고 해야만 하는 진언이었다.


"대왕께서 태초의 화로로 들어가신지 무려 만 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은 가혹하게 흘러갔고, 한때 만 명이 넘어갔던 은기사들도 이젠 고작 반 백명을 유지하기 벅찬 상황입니다. 로드란은 사라졌고,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왕국들이 번영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포로사, 올라피스, 카서스, 그리고 드랭글레이그... 세계의 주인은 인간들이 되었고, 저희 종족은 그 사이에 숫자가 매우 줄었습니다."


"헛소리 하지 마라!!!"


자벨은 격분하며 외쳤다. 자신이 없던 사이에 은기사들이 이렇게까지 몰락하다니. 고국이 사라지다니. 종족이 없어지고 있다니.

"그딴 게 진실일 리가 없다! 신들은 영원하고, 세계는 우리의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만든 시대였다! '그분'께서, 우리의 주군께서 그 고귀하신 목숨을 불살라가면서까지 지켜낸 왕국이란 말이다! 세계의 뱀들은 우리의 번영을 약속했다!"

"그것은 달콤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죽었고, 그들의 유산만이 이 땅을 떠돌고 있을 뿐입니다. 고룡 전쟁을 경험한 은기사들은 모두 사라졌고, 저희는 더 이상 예전처럼 드높은 존재가 아닙니다."


발릭은 담담하게 지난 역사를 늘어놓았을 뿐이었지만, 흑기사는 위해머로 얻어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아니... 믿지 못하겠다. 믿지 않겠다! 온슈타인 님과 다른 기사분들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으셨을 리가 없다!"

"더 이상 4기사 또한 없습니다. 전설 속의 아르토리우스는 '우라실의 심연'과 싸워 이겼으나 상처로 인해 쓰러졌고, 고와 키아란은 끝끝내 돌아오지 않은 채 떠돌이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온슈타인은..."


발린은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그는 찬란한 황금빛을 두른 그 '사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붉은 술을 휘날리며 벼락을 휘두르는 그 용맹함도.

비룡들을 날벌레 잡듯이 가볍게 도륙하며 은기사들을 지휘하는 카리스마도.

자신들로부터 등을 돌리며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저희를 져버렸습니다. 자신의 의무와 사명을 내팽겨치고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더 이상 4기사도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4기사마저 모두 사라졌다는 소리에 자벨은 마침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마치 뚝 치면 쓰러져버릴 것 같은 힘빠진 모습.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절망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리사는 어떻게든 위로해야 겠다는 생각에 외쳤다.


"그, 그래도 신들께서 모두 사라지신 건 아니에요. 이루실에는 아직 신들이 남아계시죠. 그것도 두 분이나!"


자벨의 옛 주군 되는 그윈의 자녀들.

아직 그들이 남아있었다. '암월'과 '어스름'이 남아있는 한 신들은 완전히 멸망한 건 아니다. 알리사는 그렇게 호소했지만 이미 뼛속까지 좌절한 자벨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그러자 발릭 또한 그녀의 말에 거들었다.

"맞습니다. 아직 저희에게는 그윈돌린 님과 요르시카 님이 계십니다. 이루실로 와주십시오. 저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

자벨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왕의 차남과 차녀. 만약 남아계신 분이 장녀이신 '태양의 왕녀'셨다면, 아니 하다못해 추방당하신 '그분'이 돌아오신 거였다면... 자신은 갔을 것이다.

그러나 유약했던 차남과 세상물정 모르던 차녀에게서 그는 어떤 미래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그러나 그때였다.


끼요오오오옷!!!



=/=/=/=



방심하고 있었다. 만 년 만에 본 이 시대의 은기사가 말한 소리에 신경이 쏠린 나머지 현 상황을 잊고 있었다. 감히 전장에서 여유를 부리고 만 것이다. 대왕 그윈을 섬기는 기사로서 있어서는 안되는 실태.

그 사이, 이변을 감지한 데몬들이 지하수로로 증원을 보냈다.

데몬 주술사가 내지른 포효가 전투 함성이 되었다.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2층에 자리 잡고 휘하 데몬들을 내려보낸다.
좌우 계단을 타고 밀려내려오는 데몬 석상들. 아까와는 숫자부터 비교가 안되었지만 그 뒤를 따르던 카오스 이터들까지 있었다.

'젠장...!'

발릭은 절체절명의 위기라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나는 혼돈에서 이보다 더한 놈들과도 싸웠었다.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특대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팡. 데몬 주술사가 생성한 떠오르는 혼돈의 화염구가 내 갑옷을 때렸으나, 조금도 타지 않았다. 고룡의 불도, 태초의 불도 자신을 완전히 태우지 못했는데 이딴 촛불이 위협적일까.


"오른쪽은 내가 맡는다."

"아니, 무슨—!"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발릭은 알리사를 데리고 빠지려 했으나, 내가 데몬 석상들 쪽으로 뛰어들어가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콰아앙! 강렬한 대검이 한번 내려쳐지자 수많은 데몬 석상들이 밀려나고, 또 박살났다.

"저놈의 주술은 제가 막을게요!"

파아앗 펑! 알리사의 소울 마술이 떠다니는 화염구를 정확하게 노려 요격한다. 발릭은 창을 한바뀌 돌리더니 각오를 다잡고 왼쪽에서 몰려오는 석상들을 향해 뛰었다.

"흐으읍!" 벼락의 힘을 담은 창이 가장 선두의 석상을 꿰뚫었고, 강력한 휘두르기로 한번에 다섯 마리의 적을 처치했다.
그러나 적이 너무 많았다. 좁혀오는 포위망에 발릭을 최선을 다했지만, 석상들이 내뿜는 화염 브레스가 그의 몸을 조금씩 태웠다.

"크아아앗!"

격심한 화상통에 그만 창을 놓치고 무릎 꿇고 말았다.
그러나—.


"일어나라!! 대왕을 섬기는 기사가 어찌 그리 쉽게 무릎 꿇는가?! 고룡의 숨결은 이보다 휠씬 더 뜨거웠다!"


"크윽!"

선배 은기사의 호통에 발릭은 정신을 다잡으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래. 자신은 은기사였다. 비록 고룡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풋내기지만 은기사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파지지직! 벼락을 두른 직검이 석상들을 야채 베듯이 가볍게 베어갈랐다. 보글보글보글. 혼돈이 낳은 역겨운 흉물, 카오스 이터가 그 징거러운 촉수를 자신에게 향했다.
물리력이 강한 거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방패가 막아냈다.

"흡!"

거품을 막아낸 발릭은 벼락의 검으로 촉수들을 베어냈고, 그대로 그 검은 눈동자 속에 쑤셔넣어주었다. 키에에에엑! 단말마를 내지르는 데몬을 빠르게 뒤로 하고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가 주술사를 노린다.

데몬 주술사와의 1대1 대결.
휘하 데몬들을 모조리 잃었으나 놈은 도망갈 생각이 없다는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거대한 대형 도끼가 내리쳐졌으나, 가볍게 방패로 패리하며 쳐냈다.


!?!?

"혼돈으로 돌려보내주마."


도끼를 휘두른 팔이 힘없이 쳐지자 놈은 딩황했으나, 주술사 따위가 주술을 버리고 은기사와 접근전을 벌였으나 당연한 결과였다.
푸슉! 파지지직!! 직검이 그대로 주술사의 몸을 관통했고 놈은 힘없는 옹알이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끝났다 생각한 그 순간-.


끼요오오옷!


'한 마리 더 있었다고!?'


피슝! 뒤에서 울린 울음소리에 다급히 등을 돌렸지만, 발릭의 검보다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놈의 미간에 박혔다. 그것은 자신의 창이었다.


"겨우 그 정도 벼락으로는 은기사라고 인정해주기 힘들겠군."


창을 날린 것은 자벨이었고,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자기 쪽의 데몬들을 전부 해치운 뒤였다. 벼락의 힘 따위 없어도 그는 발릭 같은 덜떠러지 은기사에 비하면 휠씬 강했다.
필시 이것이야말로 대왕께 선택받은 진정한 은기사의 저력이리라. 발릭은 한없이 순수한 존경의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벼락과 은빛은 사라지고 검게 그을렸지만, 그의 무용은 시간 따위가 변질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네."


최초의 은기사들은 주신 그윈과 함께 고룡들을 사냥한 전설적인 존재들. 그런 기사 중 한 명에게 칭찬받는 날이 오다니. 발릭은 이보다 큰 영광은 없다고 생각했다.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그..."

"그러고보니 아직 귀공에게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군. 자벨일세."

"감사합니다. 자벨 경."

"경은 빼게. 난 더 이상 은기사가 아니니."

발릭은 흑기사와 악수를 하였다. 은기사로 임명된 이래로 이보다 기쁜 순간이 없었다. 남은 일생 오늘을 잊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