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꿈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어릴 적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신문을 펼치고 담배를 뻑뻑 피우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등을 돌린 채 설거지하던 어머니의 모습만이 어릴 적 기억의 대부분이다. 집의 공기는 창 하나 열지 않은 것처럼 항상 무거우면서도 건조했다. 나는 그런 부모님의 뒷모습을 잠깐 훑어 보고는, 걸음 소리를 죽인 채 2층의 내 방에 들어가 공책을 펴곤 했다. 공책에는 글과 그림이 가득했다. 삐뚤빼뚤하지만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빼곡했다. 그건 내가 만든 게임이었다.
소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2학년이었을 수도 있고.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학급 위원장의 집에 친구들과 함께 얼떨결에 놀러 가게 되었고, 처음으로 게임기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금이야 게임이라는 것이 흔한 것이지만, 당시만 해도 게임기는 돈깨나 있는 집에서만 가질 수 있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위원장 놈이 버튼을 누르면 티브이 안의 사람이 몸을 움직였다. 악당들을 물리치며 나아가던 그 사람은, 마주친 거대한 붉은 용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붉은 용이 거의 다 죽었을 때, 위원장의 어머니께서 해가 곧 지니 슬슬 돌아가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위원장의 방에서 나가기 전까지 그 붉은 용에게서 눈을 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용을 생각하며 걷다가 전신주에 코를 박기도 하였다. 코 박고 철퍽 넘어진 주제에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아까의 망상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아파할 겨를이 대체 뭐가 있을까, 그때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꿈을 꾼 날이었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눈치가 썩 있는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그러니까 공기를 잘 읽을 줄 아는 꼬마였다. 철없는 소학생이지만 우리 집이 게임기를 살만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갖고 싶다고 땡깡을 부려봤자 달라지는 건 전혀 없고, 그날 저녁이나 굶게 될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곤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은 공짜였고, 내게 퍽 관심 없던 아버지도 그때 정도는 내가 장하다는 듯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도서관에서 한 것은 면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승을 만나 훌륭한 마술사가 되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용맹한 기사가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내는 이야기, 꼬마 닌자가 전국시대 무장을 도와주는 이야기 따위를 읽는 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학교 꼬마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상상으로 이야기의 구멍을 메우며 어떻게든 읽어내곤 했다.
책 한 권을 읽어낸 후에는, 그 책을 게임으로 만들었다. 공책에다가. 무기 하나를 만들면 그것의 공격력이나 특수기술, 그리고 그 무기에 전해지는 전설 따위를 써 내려가며 시간을 보냈다. 강력한 적의 모습과 체력바를 그리고, 주사위를 굴려 유효타를 날리는 데 성공하면 체력바를 지우개로 지우면서 놀았다. 그것이 그 당시의 내가 정말로 즐기던, 잘 살던 위원장네 게임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재미나던, 나만의 꿈이 녹아있는 게임이었다. 물론 그러한 놀이에 함께하고자 하는 친구는 없었다. 나를 괴짜라고 보고, 혼자 놀길 좋아하는 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었으니.
고교생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맞았다. 그날은 내가 게임 회사에 다니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린 날이었다. 조용히 공부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아오던 내가, '그따위 밥벌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칠칠찮은 곳'에 가고 싶어 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고. 아버지 얼굴이 묘하게 붉고 눈이 살짝 풀려있던 것을 미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좀 더 좋은 날에 말씀드리는 편이 좋았을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며, 그딴 생각 다시는 하지 말라고, 넌 미야자키 츠토무 얘기도 못 들어봤냐고, 그런 범죄자 오타쿠들이나 상종하는 걸 진정 업으로 삼을 생각이냐며 쏘아붙였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방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다. 평소보다 더 무겁고 건조한, 소름 끼치는 공기가. 억겁과도 같은 정적을 깬 것은 아버지였다. 그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현(県) 내의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할 것을 권하였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맞은 날인 동시에, 처음으로 아버지께 반항해 본 날이었다. 나는 죽어도 게임 만들 거라고.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꾼 적 없는 유일한 꿈이라고. 세상은 변하고 있고, 언젠가 게임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주류 문화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게임을 꼭 만들어 낼 것이라고. 그 충혈된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나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든 일이 잘 풀린 모양이다. 국내에서 유명한 게임 회사 중 하나에 입사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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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이후, 나는 게임에 나오는 괴물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내는 업무를 맡았다. 공포 게임에 디자인에 참여할 때는 퇴근 후 공포 영화로 밤을 새웠다. 거대한 괴수들이 나오는 게임의 디자인에 참여할 때는 고지라 같은 괴수 영화뿐만 아니라 공룡에 대한 전문 서적을 펼쳐가며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내 수명 깎아가며 일하던 거였지만, 사실 지금 되돌아봐도 그때만큼 재미있던 시절은 또 없지 싶다. 어린 시절 공책에 빼곡히 글과 그림을 그리던 것과 비슷한 것이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내게도 매너리즘이 찾아오게 된 모양이었다. 게임 회사에 다니는 것이 일처럼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꿈이었을 텐데,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나 자신의 변화가 무서웠다.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이곳에 온 것이었는데, 스스로가 틀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가슴에 걸린 가래처럼 생각이 떠나가지 않고 내 목을 죄었다. 아버지가 옳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떠오를 때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회사 부장에게 사표를 건네고 있었다.
이름 알아주는 게임 회사에서 일했던 만큼, 퇴사한 나를 받아줄 기업은 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작은 규모의 회사에 들어갔다. 이 정도의 작은 회사라면, 나 정도 되는 사람은 금방 프로젝트를 따 나만의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 이유였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게임 디렉터가 되어 내 진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아니라 오만이었겠지만, 사실 그 당시의 회사는 알 사람만 아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게임 업계 종사자였던 나조차 잘 알지 못하던 회사였으니. 그 회사의 이름은, 「프롬 소프트웨어」였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매니아들만 할법한, 변태 같은 게임 위주로 뽑아내던 회사였다. 진 나오토시 사장부터가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나베시마 토시후미라는 인간은 그야말로 변태 같은 사람이었으니. 나와는 취향이 좀 많이 다르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게임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좋아한다는 점에서 의외로 이야기가 통하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사장이 나를 불러내더니, 게임 프로젝트를 담당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말을 꺼냈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일단 표정을 굳히고 정중히 거절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내가 게임을 좋아하고 잘 알고 있으니까, 분명 맡으면 잘할 것이라고 치켜세워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드디어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났구나. 나는 사장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부족한 실력이지만 맡겨주신다면 한번 잘 견인해 보겠노라 뜻을 밝혔다. 정말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사장실에서 문을 열며 나가던 나에게, 사장이 덧붙인 그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자네는 일단 경험이 부족하니까, 이번 외주작을 맡아보면서 경험을 쌓으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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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저 인간은 말이 좀 통할 줄 알았는데. 외주작이라니. 당장이라도 내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만들어 팔아치워도 모자랄 판에 내게 외주작을 맡긴다니. 그런 건 다른 사람에 맡겨도 되는 것 아닌가? 가진 게 이상한 로보트 게임밖에 없는 회사 주제에. 사장이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으니까 아직도 이 모양이지.
모니터의 빈 화면만 쳐다보며 분을 삭인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나는 그제서야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슈퍼로봇대전으로 유명한 반프레스토와의 협업 프로젝트라.
뭐... 솔직히 나한테 신규 IP 게임 개발을 맡긴 게 아니라는 점이 상당히 유감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프롬의 아머드코어 시리즈보다 더 나은 형편에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매니아 층에만 소비되는 매니악한 게임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가지고 만드는 것이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임'을 만드는 내 꿈에 가까워질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내가 이 게임을 통해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 바보 같은 사장도 나를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사무실의 불이 꺼질 때까지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다.
시리즈의 첫 번째 게임이 발매되었으나 대중의 평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메카니컬한 전투를 구현하기 위해 리얼함을 중시한 작품이었다. 나름 야심작이었다. 하지만 작품의 외적인 것에만 신경 쓰는 사람들 때문에 평가가 깎이는 것이 참으로 야속했다. 하지만 게임은 결국 팔려야 지속될 수 있는 것임을 게임 업계에 종사한 지 오래인 나도 잘 알고 있다. 씁쓸하긴 하지만 다음에는 좀 더 사람들에게 먹힐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뒤이어 개발한 2편의 평은... 내 성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전작에 비해 발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거두었다. 리얼함은 감추고 팬 서비스 측면의 요소들을 더 넣었다. 밸런스를 균일하게 잡기 위해 열심히 검토하며 일했다.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걸리는 점이 조금 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 하나가 순식간에 디렉터 자리를 먹고 아머드코어 게임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발매일도 비슷해서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쓰일 수밖에 없었다. 훨씬 더 전에 입사한 나조차 외주작이나 찍어내고 있는데 참 괘씸하다. 하지만 그 자식이 전작 요소를 치워버리고 오버밸런스를 만들었다는 점이 참 어린놈의 발상이라고 느껴졌다. 저렇게 해서는 오래 못 갈 게 뻔하다.
이후 만든 3편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을 받은 모양이다. 당연한 결과다. 난이도 요소를 도입해 유저들에게 도전 거리를 던져주었고, 전작보다 편의성을 크게 개선했다. 게임 업계의 트렌드를 반영해서, 무쌍 요소를 도입하여 시원한 맛을 넣어주었다. 사실 내가 정말로 생각하는 게임과는 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시리즈를 만들면서 나의 이름을 세간에 알릴 수 있었다. 그래, 시간은 좀 오래 걸리게 되었지만 이런들 저런들 어떠한가. 어찌 되었든 나는 나의 꿈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 어린놈의 디렉터가 –실제로는 게임 업계 밖에 있다가 뒤늦게 와서 나이는 많지만– 아머드코어의 새 게임을 발매한 모양이다. 나름 매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긴 하는 모양인데... 전작보다 발전이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당연한 것 가지고 입에 발린 말이나 하고 있다. 게다가 멀티 요소나 프레임 유지, 밸런스 따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막 지르는 모습은 선임 디렉터로서 보기 안 좋았다. 저놈 어쩌다가 진 나오토시 사장의 눈에 들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저러다 큰코다치고 회사에서 짐 싸게 될 것이다.
내가 한 말이 현실로 온 모양이다. 그 꼴 보기도 싫던 신임 디렉터 놈이 결국 쫄딱 망해버렸다. 발매 전 SCE 사장에게 똥겜이라고 욕이나 처먹더니, 결국 발매 첫 주에 3만 장을 조금 넘게 판매할 정도로 시원하게 말아먹은 모양이다. 그러게, 나처럼 게임 업계의 공기를 읽고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아야지, 구르지도 못하는 독늪을 넣는 등 생각 없이 불쾌한 게임을 개발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적당히 벤치마킹할 건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믿을 수 없다. 시리즈의 4편이 나름의 기대를 받으며 발매를 앞두고 있는데, 그 망할 신임 디렉터의 게임이 역주행이라니? 대체 그 자식이 무슨 수를 쓴 거지? 매진이라니, 국내를 넘어 유럽에도 인기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요즘 게이머들의 수준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게임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은 사라져가고, 이상한 것만 퍼먹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기어코 이런 일이 터져버리고 만 걸까. 내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시리즈 4편이 시리즈 중 최악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험담하는 유저들이 나오고 있다. 게임 디렉터라면 이런 일부 소수의 큰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더 좋은 게임을 개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맞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젠장, PS3 기반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그래픽도 화려하게 바뀌었고, 아머드코어 팬들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나인볼도 넣어줬는데. 죄다 억지로 까 내리기나 하고 있어. 락온이나 부스터의 너프는 게임성을 위한 의도적인 너프였는데, 너프면 무조건 족쇄 채운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진짜 문제다. 성장 요소를 통해 콤보를 만들어가는 시스템도, 게임 실력 안 되는 놈들이나 어렵다고 징징거리고. 이런 악질들이 편견 없는 게이머들이 시도조차 할 기회를 빼앗아 가고 있지 않은가. 젠장, 젠장, 젠장
...그놈의 신임 디렉터는 이제 중견 디렉터가 되어 새로운 IP의 게임을 개발하고 있단 말이다. 나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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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디렉터 직을 내려놓은 지 오래다. 내가 오랫동안 담당하던 시리즈는 PSP 버전의 발매와 함께 침몰해버렸다. PSP 기반이라 제한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이 게임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하며 역대 최저의 평가를 받고 말았다. 진 나오토시 사장은 나를 사장실로 부르더니, "잠깐 쉬면서 다른 업무를 맡는 게 어떻겠냐?"라며 사실상 권유 아닌 강요를 내게 해왔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게 외주작 따위가 아니라 내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줬으면 다 잘 풀렸지 않겠냐', 고.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을 내 목구멍 밖으로 토해내는 일은 없었다. 게임 업계는 게임 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곳이다. 시리즈를 말아먹은 나는 그곳에서 죄인이오, 패배자였기에.
나와 달리 그 디렉터 양반은 잘 팔리고 있다. 내 시리즈가 망하고 몇 달 뒤 발매된 그 게임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작은 회사 규모에 비해 이례적으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 중이라 한다. 뭐... 아직 멀티플레이나 밸런스 관련으로는 제대로 아는 게 없는 티가 나는 게임이지만 말이다. 그래, 인정할 건 해야 할 것이다. 그 디렉터는 어딘가 어설프지만 똑똑한 양반이라는 것을. 그리고 전작–비록 판권 문제로 다른 IP가 되어버렸지만–과 같은 방향성의 게임이 먹혀들었다는 것은, 게이머들의 취향이 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마 한동안은, 몇 년 정도는 이러한 종류의 게임이 잘 팔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회사 내에서도 아머드코어와 함께 이걸 주력 시리즈로 밀자고 하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 게임을 똥겜이라 욕했던 소니 측에서 먼저 우리와 접촉하려고 한다는 얘기도 회사 내에 돌고 있다.
회사가 유명해지는 것, 잘 팔리는 게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회사에 자본이 돌면 인력도, 장비도, 기술도 늘어나게 될 테니. 하지만 그러기에 진 나오토시 사장이 고깝다. 그딴 망할 놈의 외주작을 맡기지만 않았어도, 프롬은 '투 트랙'이 아니라 '쓰리 트랙'을 밀게 되었을 텐데. 그 디렉터 양반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래,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사람에 비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젠장, 사장만큼은 꼭 바뀌었으면 좋겠다.
들려오던 소문이 사실인 모양인지, 소니 측에서 회사에 접근해서 차세대 콘솔의 독점 게임을 함께 만들어 보고자 제안해왔다. 그 잘나가시는 우리 디렉터님께서는 그 제안을 덥썩 수락하였다. 자연스러운 망토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나 뭐라나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게 자기가 만들고 호평받은 게임의 후속작을 내팽개칠 정도인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광적으로 빠는, 소위 오타쿠라 불리는 종류의 사람인데도 자기가 만든 게임에 애정이 그렇게도 없는 건가. 그나저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후속작 개발 프로젝트는 그대로 취소가...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이거, 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
"...제가 그 프로젝트를 맡겠습니다."
...
"그러니까 사장님, 이건 기회란 말입니다!"
...
"제가 주로 맡아온 게임이 메카 장르라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 거,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프롬 소프트웨어에 오기 전부터 다양한 게임의 디자인을 해왔습니다."
...
"단지 기회가 닿지 않았을 뿐이지, 저는 중세 판타지가 주력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줄곧 해오고 싶었던 일인 만큼, 누구보다 잘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
"저는 디렉터로서의 경험도 풍부하고, 자질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회사에 나베시마 디렉터를 제외하면 저처럼 많이 디렉터 직을 맡아본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디렉터가 바뀌는 건 게임 업계에서 흔합니다. 그리고 더 큰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고요. 팬들에게 가장 명작으로 꼽히는 파이널 판타지 VII도 초대 디렉터인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아니라 키타세 요시노리의 작품이었습니다."
...
"전작이 훌륭한 게임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에 대한 비평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선임 디렉터로서, 제가 그 부분을 보완하고 더 좋은 게임으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습니다."
...
"......"
"...알겠네. 후속작의 개발은 자네가 맡아보도록 하게. 부 디렉터는 내가 추후에 임명하고 알려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후회 안 하실 겁니다."
"아, 그리고..."
"예?"
"근시일에 알게 되겠지만, 나는 이 회사의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걸세. 일단 그건 알아두게."
"...예"
*
나는 그렇게 프로젝트 'FRPG2'를 따냈고, 다시 한번 디렉터로서의 일을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게임의 후속작이라는 점이 여전히 마음속에 걸리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후속작이라고 해서 전작과 꼭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더 잘 만들어 낸다면 그 정도의 사소한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후속작 개발의 디렉터로서 시작한 점은, 이 게임의 어설픈 점을 도려내는 대수술이었다. 전작인 1편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후속작마저 이대로 계속 간다면 금방 대중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게임의 스케일을 키우도록 하자. 후속작인 2편은 넓은 지역을 탐험하는 준(準) 오픈월드 게임으로 개발하고, 도전적인 난이도는 유지하되 대중성을 챙기기 위해 많은 요소를 넣는 것이다. 그래, 아까 사장을 설득할 때 파이널 판타지 얘기를 잠깐 했었지. 이번 게임도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처럼 세계관의 스케일을 확장하는 것이 내 계획이다.
너무 어두워서 쉽게 지치는 전작보다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싶어지는 판타지 세계를 구현하는 데 집중하자. 높은 산꼭대기 위에 걸쳐있는 함선이라든지, 지하 난쟁이들의 냄새 나는 마을,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용암지대, 거미줄에 휘감긴 바위산같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세계를 구축하는 거다. 이런 판타지 세계라도, 모험하느라 지친 플레이어가 힐링할 수 있는 장소도 필수적일 것이다. NPC들이 모이는 평화로운 해안 마을을 만들고, 그곳을 안내해 주는 말괄량이 트윈테일 히로인도 넣어주면 완벽할 것이다.
전작의 우중충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지속되면 유저들이 중간에 이탈하기 마련이다. NPC는 그런 분위기를 환기해 줄 좋은 장치라고 생각한다. 플레이어와 가장 많이 엮이는 NPC를 백치미를 가진 활발한 여기사 히로인으로 설정하자.
적들도 개와 쥐, 인간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 좀 더 판타지스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주면 더 좋은 게임이 될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룡, 큰 도끼를 든 드워프, 사자 머리를 한 수인, 인간과 전쟁을 벌인 거인족,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골렘들. 그리고 말할 줄 아는 동물도 넣으면 분명히 인기 많을 것이다. 클리셰와 오마쥬라는 녀석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나오는 거지. 좀 더 멋있는 판타지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냥 투사체 날리면 끝이던 이전의 주문도 좀 더 화려하게 손을 봐주고... 그리고 이도류나 쌍날검도 판타지의 단골 소재니까 넣어주면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다. 대부분의 무기 모션을 뜯어고치고, 통일되어 있던 잡기 모션도 화려하게 바꾸자.
솔직히 말해서 전작은 편의성 제공에 하나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불쾌하게 느끼도록 의도적으로 한 요소가 많다. 전작과 좀 달라도 상관없으니, UI를 보기 편하도록 뜯어고치고, 지역 이동과 보스 재도전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도록 한다. 그리고 유저 다 떠나갈 정도로 복잡하던 무기 강화는 쉽게 단순화시키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전작의 멀티플레이도 편의성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 보스를 잡으면 막히는 협력 플레이도 가능하게 해주고... 멀티플레이 중 체크포인트를 못 켜고 회복 아이템도 못 쓰는 건 테스트도 안 해보고 만든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기능이니, 꼭 고쳐주도록 하자. 캐릭터 빌드 밸런스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도록 잘 확인해 주고. 그리고 전작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오던 저레벨 구간의 멀티플레이 중 캐릭터의 격차도, 공평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레벨 대신 누적치를 기준으로 구간을 나누어 매칭하도록 하자. 이러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친구끼리 멀티를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기 쉽게 해주는 수단도 제공하자. 이 게임은 분명 멀티플레이로 흥할 것이다.
게임 회사에 종사한 지 오래지만, 이렇게 재미있던 적이 또 있었던가? 나는 지금 내 꿈을 실현하는 중이다. 잘 써지지도 않은 질 낮은 연필로 공책에 그려내던 그 시절의 꿈과 상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만들어만 갈 수 있다면, 정말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부 디렉터를 맡은 후임이 종종 태클 거는 게 맘에 안 들긴 하지만, 어떻게든 잘될 거다.
...다만 개발 시간이 너무 빡빡하고 사업금도 이렇게 적은 게 걱정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름 오랫동안 게임 업계에 몸담은 "시부야 토모히로"가 아닌가. 이 게임은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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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회사 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첫 번째 이유는 조만간 회사가 문어발식으로 확장한 카도카와에게 인수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전작을 버리고 소니와 함께 '프로젝트 비스트'를 개발 중인 "미야자키 히데타카" 디렉터가 곧 프롬 소프트웨어의 사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진 나오토시 사장이 이전에 말하던 게 그거였던가.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우리 팀이 많이 힘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부하 직원 둘이 탕비실에서 이러다가 프로젝트 망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잡담을 우연히 듣기도 했다. 젠장, 젠장... 그러게, 처음부터 시간도 충분히 주고 사업비도 많이 챙겨줬어야지. 왜 항상 내 주변에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고 제대로 투자해주는 사람도 없는 건데... 왜 나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건데... 왜 항상 내게만... 왜 미야자키라는 놈이 다 나한테서 빼앗아 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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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사장으로부터 결국 디렉터 하차 요구를 받았다. "블러드본" 개발에 바빠 신경쓰지 못했지만, 자신이 만들었던 "다크소울"의 후속작이 이런 지경에 처해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담당하고 싶었던 후속작을, 그래도 나니까 믿어서 맡겼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부족한 건 내가 아니었는데 나를 탓한다니. 외주작이나 맡다가 기회를 놓친 사이 미야자키 당신이 주목을 받았고, 당신에게 이목이 쏠린 사이에 내게 시간도 돈도 인력도 관심도 어느 것 하나조차 주어지지 못했다. 환경이 갖추어지지 못해 실패한 것인데. 탓하려면 내가 아니라 당신네들을 탓해야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당신네들 눈을 탓해야지. 보고도 기회를 놓친 당신네들의 판단력을 탓해야지. 지금이라도 투자하지 못할망정 내쫓으려고 하는 당신네들의 멍청함을 탓해야지. 대체 왜 모두 나를 비난하는 것인가. 모두들... 나를, 나를 그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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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나는 그 요구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곧장 프롬 소프트웨어를 떠났다. 부 디렉터를 맡았던 "타니무라 유이"가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다크소울2"를 발매하였다. 그래픽 다운그레이드 이슈와 전작과 다른 이질감에 비평도 존재하였지만, 꽤 좋은 후속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준수한 판매 성적을 기록했다. 사실 내가 만든 것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판매한 것도 아닌데, 저것 대부분 내가 다 만든 건데 사람들은 내 덕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미야자키 사장은 PS4 독점 게임인 블러드본을 발매하여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프롬 소프트웨어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다크소울3"는 미야자키와 타니무라가 함께 만들어서, 프롬 소프트웨어 사상 가장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한다.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이한 듯한 결말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나는 지금도 꿈을 이루기 위해 게임 업계를 방황하고 있다. 지구방위군 시리즈의 외전을 함께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아,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캡콤"에 입사해 "바이오하자드"와 "몬스터헌터"의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 퇴사하였고, 이후 프롬 소프트웨어에 들어가 "Another Century's Episode" 시리즈의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다크소울2의 개발을 담당하다 제지당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다사다난한 인생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 언젠가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게임을 만들고 말 것이라고.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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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싸질러보는 갤 문학. 읽으면서 눈치 챘겠지만 다크소울2의 전 디렉터였던 시부야 토모히로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전부 내가 지어낸 이야기고, 의도적으로 미야자키의 어린 시절 일화를 부분 차용해 써내려 갔다.
이후 내용은 대체로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해냈다.
시부야가 캡콤에 디자이너로 입사하였다가 프롬의 A.C.E. 시리즈의 디렉터로 활동한 것, 미야자키가 아머드코어4로 시작해서 아머드코어 포앤서와 데몬즈소울, 다크소울, 블러드본을 개발한 것, 그리고 미야자키가 블러드본을 개발하는 동안 시부야가 다크소울2의 디렉터를 맡았다가 쫓겨난 것.
사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잘 조합해 글을 써봤다.
원래는 퇴사하는 시부야를 미야자키가 납치해 지하실에 감금한다는 급커브 엔딩을 생각했고, 중간 과정도 꽤나 러프하게 묘사하며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갤이 글카스 도배가 일어나는 걸 보고 노선을 변경했다
뭐 어찌 됐든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글은 나온 듯하다.
아, 마지막으로 이 글은 전부 술에 취한 상태로 썼습니다. 술술 써내려가더라. 이런 안주가 또 없어
시부야추
호 - dc App
너무길아 - dc App
미야자키 이 미친새끼
술빨고 쓴거맞음? 개잘썼노
한줄요약좀
빼갈을 마구마구 먹여버리고싶구나
크흐흑
내리면서 미야자킨가 시부얀가 계속 고민하다 2편 얘기에서 확신했다
와 진짜 글 맛있게 쓰네 술술 읽힌다
뭔가 이상하다싶더라니 시부야 또 당신이야
글 개잘쓰노 - dc App
나는 다시 프롬 소프트웨어로 돌아와 미야자키의 인격을 지배하고 엘든 링의 디렉터가 되었다
개재밌다 개추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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