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네들은 읊조리었다.
우리는 노래를 불렀네.
한 사람이 되뇌였다.
모두가 속삭였다.
한 사람이 속삭였다.
모두가 되뇌였다.
그네들은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읊조리었네...
- 고문헌 「세계는 깨어져나가고」 中 발췌
신거 (神去): 신 혹은 고귀한 존재의 죽음이나 떠남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 하얗게 말라붙은 유해들, 낮게 펼쳐진 천공. 사라진 신. 조금의 상처와 그 감내. 타오르는 감정. 죽은 하루.
빛바랜 자는 가만히 선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숨을 골랐다. 선혈이 온 몸을 덮고 있어 검붉은 주단 덩어리처럼 보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주변은 넓었다. 시원한 선풍이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머리칼을 움직여 얼굴을 간지럽혔다. 강적을 꺾었다는 환희, 더럽혀진 자를 위한 복수, 죽음 끝에 이룩한 성취. 빛바랜 자는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그리고 지금은 벽에 기대어 앉아 움직임이 없는 동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에 숨겨진 탑, 그 최상층에 있던 문. 사투 끝에 빛바랜 자는 황금의 총아와 사자 된 전사를 죽였다. 약속 위에 새겨진 약속을 부수었다. 죄도 인과도 떼어내어 버리고서 왕을 얻은 신의 길을 닫았다.
그랬어야 했을까, 하고 지금 빛바랜 자는 자신을 의심했다. 상냥한 세계, 사랑의 천년기. 그 땅은 과연 제대로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야 했을까? 모두가 평등한 세계. 미워하지 않고 미움받지 않는 세상...
그 의심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려와 빛바랜 자의 고개와 팔을 급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가열찼던 사투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함께했던, 그리고 이제는 죽어가는 자의 신음이었다.
"안스바흐 님! 아, 아아, 아직 살아계셨네요! 지금 당..."
노인이 다시 기침을 내뱉자 울컥 하고 피가 배어나왔다. 사명을 다한 몸은 생혈을 거부하는 듯 계속 그 밖으로 붉은 피를 밀어냈다.
"아아, 아, 안돼요. 이건, 출혈이 심해... 잠시만요, 제가 빨리 어떻게든, 손을 쓸게요."
빛바랜 자가 허둥지둥 움직이던 팔다리는 이내 노병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축축한 뜨거움에 얼어붙은 듯 멈춰버렸다. 생각도 갑자기 정지해버렸다. 그 온기는 그저, 마지막 맹세를 칼날에 담아 대적을 베어넘기고 천천히 죽어가는 순혈기사, 그 생명의 증거였다. 그 생명의 불씨가 꺼져간다는 증거였다.
"...그만두십시오, 빛바랜 자 님. 저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노구가 향할 곳은, 한참 전에 정해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래도..."
"오래 전에 도달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일 뿐입니다. 기사가 주군을 뵈러 감은 당연한데 어이하여 슬픔으로 마음을 어지럽게 하십니까."
빛바랜 자는 뭐라 말을 이으려다 고개를 떨구었다.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시선을 움직여 그저 검은 깃털에 덮인 채 흔들리는 어깨 너머를 보기를 택했다.
"그리고, 티에리에 님도... 분명 자신의 가련한 꽃을 만나러 가셨겠군요. 유약하고 덧없었지만 그렇기에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그 누구보다도 용감했던 사내였습니다. 저 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빛바랜 자는 흐느낌을 참으며 숨을 고르려 했다. 죽어가는 자는 조용히 미소 지었고 살아있는 자는 크게 동요하며 슬퍼했다.
또, 반복된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떠나간다.
"...무서...워요, 저는."
빛바랜 자는 겨우 물었다.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그 질문이 던져지고 잠시 침묵이 가라앉은 동안 노병은 고민하는 듯했다. 빛바랜 자가 겨우 고개를 들자 안스바흐는 가면을 벗었다.
상흔에 엉망이 된 얼굴은 그러나 세월의 더께에 덮여있어 묘한 경외심을 자아냈다.
"저도 두렵습니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 아니어서 빛바랜 자는 조금 눈을 부릅떴다.
노병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두렵습니다. 주군을 만나러 가느니 하며 멋대로 지껄였지만... 역시 무리였군요. 젊은 시절에는 언젠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건만, 결국 제가 아는 피와 실의 세계 너머는 끝까지 미지로 남을 모양입니다."
"그럼... 제가 뭐라도 해볼... 게요. 그러니까..."
"하지만 신록의 시기에 있던 저는 혈기로 넘쳤지요. 그래서 방자했습니다. 두려움을 미처 몰랐습니다. 죽음을 모르고 생명을 몰랐습니다."
생기를 잃어가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꺼지기 직전 가장 환히 타오르는 불길처럼, 맹렬히 명멸하는 그 눈빛은 아가리를 벌린 어둠을 향해 끝까지 울부짖고 저항하는 의지 같았다. 죽음으로 점철된 기나긴 세월에 조금은 굽어졌을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은 그 빛을, 빛바랜 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지켜보았다.
"지하수도에서 길을 잃고 죽어가다 주군과 처음 만났던 그 때도, 순혈기사로서 그저 찢고 베던 때도, 미켈라 님에게 매료되어 꺾인 칼날일 뿐이었던 때도, 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나 많이 앗아가고 죽여가며 나날들을 피로 덮었는데도 저는 그저 무지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아. 성에서 그 의식의 두루마리를 본 순간, 신에게 다시 맞서기로 결의한 그 순간, 어렴풋이 깨닫고야 만 것입니다. 두려움과 용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두려움을 알면 알수록 그것은 용기가 된다는 사실을."
순혈기사는 차분히 고개를 떨구었다. 기력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마주보던 눈과 눈 사이의 연결이 뚝 끊겼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말은 않겠습니다. 오히려 마음껏 두려워하십시오. 단, 공포에 잡아먹히지만 말아주십시오. 대신 그 중심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가 현란히 춤추십시오. 네, 사랑도 상냥함도, 저는 그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결국 투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대수입니까! 그러니 부디 언젠가는, 공포가 사납게 으르렁대도 그 얼굴에 대고 한바탕 웃어주십시오. 네가 무엇인지는 애저녁에 전부 알아냈다고."
빛바랜 자는 보지 못했지만, 노인의 손은 더 이상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다.
"그런 왕이 되어주십시오. 두려움으로 지배하고 마음을 꺾는 신 따위가 아닌, 두려움에 잡아먹히고 마음이 꺾여도 기어가고 몸부림치며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의 왕이."
빛바랜 자의 시선이 갈 곳 잃은 채 허공을 맴돌았다. 그 눈은 다시 반짝임을 잃기 시작한 노인의 눈을 분명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무슨... 무슨 말인지 잘 모, 모르겠어요. 안스바흐 님... 두려움을 알면 용, 용기가 된다는 게, 대체 무슨-"
수많은 죽음을 보아온 자로서의 본능의 소산일까, 빛바랜 자는 기운이 바뀌는 감각에 말을 멈췄다.
역시나 노인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빛바랜 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메마른 팔. 새로운 고통. 불씨와 나무. 피가 흘렀다. 무너져내리는 땅과 창공을 가르는 금속. 흐르는 황금과 펼쳐지는 날개.
어딘가에서 나직이 들려오는 탄식. 나를 비난하는가, 하는 생각이 빛바랜 자의 뇌리를 스쳤다.
"...왜, 다들, 나를..." 빛바랜 자는 중얼거렸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럴 리가,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가. 어렵고 어려워, 어렵기만 한 그 불가해함에 빛바랜 자는 몸부림을 쳤다.
빛바랜 자는 나한테 뭔가 맡기고 당연하다는 듯 죽어버리는 건 그만두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 보아온 이 광경은 이제 괴롭기만 할 뿐이었다. 죽음과 작별에 무슨 여운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죽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존재의 소멸은 비참한 비극일 뿐이다. 오롯이 자신만이 거듭 죽고 또 죽는 것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살릴 수는 없는 걸까. 그러나 결국 빛바랜 자는 살았고, 다른 이들만이 죽어 사라진다.
신의 문 바깥으로 나온 빛바랜 자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바람은 여전히 선선했건만 마음이 괴로워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솟은 톱니산이 보였다.
그 모습에 빛바랜 자는 잠시 여정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그런다면 약간의 평온이 마음에 내려앉을 거라 믿으며, 혹은 바라며.
용사냥꾼을 만났었다.
사지가 부서지고 마음이 망가지고서도 자신의 공포 된 용에게 똑같은 공포를 안겨주겠다는 집념과 증오 하나만으로 마지막 숨을 불어넣은 작살을 쏘고 또 쏜 이가 있었다.
빛바랜 자는 그 뜨거움이 마음에 들었었다.
어머니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이 두려워 끝까지 인정도 납득도 주지 않은 이가 있었다.
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처참함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오래 전에 뱉어야 했던 말을 유언으로밖에 남기지 못했던 이가 있었다.
빛바랜 자는 그 비극이 안타까웠다.
노병은 공포 속에 칼날을 단련해왔다.
모욕당한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장 두려운 반신에게 도전했던 순혈기사는 끝내 파란만장했던 여정과 그 갈등의 끝에서 해답을 찾아 빛바랜 자에게 넘겨주었다.
빛바랜 자는 그 뜻이 아직 아렴풋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약한 왕이 있었다.
강건하지 못한 신체 때문에 평생을 공포에 살다 끝내는 사랑했던 아내의 저주에 사로잡혀 미쳐버린 현자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았지만 바꾸지 못했던 노인은 마지막 순간에 분명 나의 눈을 보았던 것 같다, 고 빛바랜 자는 생각했다.
숨이 가빠져 잠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머나먼 여로. 이제는 끝이 잡힐 것만도 같다. 으레 그렇듯 끝에 대해 생각하자 시작도 눈에 선하리만치 새겨진다. 뜨거웠다.
수많은 갑옷과 장갑과 각반을 입어오면서도 빛바랜 자는 머리에 단 하나의 장식만을 둘렀다. 그것은 도읍에서 추방될 때 얻었던 눈가리개였다. 마지막은 불가마에서였던가, 빛바랜 자는 조심스레 눈가리개를 풀었다.
무르익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진물이 눈가리개를 샛노랗게 물들이다가 이제는 뺨을 타고 흘렀다. 달콤한 고통이었다. 침의 기사는 말했다. 시선이 주는 자극은 때로 과하기에 구도자의 고독을 흐트러뜨린다고.
빛바랜 자는 자신이 찾는 진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물었다. 아직도 아득히 멀리 있어 막막하기만 한 그 빛은 도대체 잡히기나 하는 것일까. 애초에 그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나 죽음과 광기 속에서도 원하는 바에 끝내 닿은 이들은 분명 있었다. 진리를 향한 탐구, 하늘을 바라보며 떠나온 여정. 드높은 이상을 목표로 언제까지고 진력할 수 있다면, 나만의 별과 나만의 뜻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지 모른다. 걸어갈 방향도, 정신의 지향도 정해졌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어차피 이 몸은 죽지 않는다. 죽고 또 죽어가면서도 두려움을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래서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이들조차 품을 수 있는 마음에 닿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저 위대하고 존엄하다는 자들조차 꺾고 그 절대성에 조소를 던질 수 있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온다면, 그 때는 무언가 보일지 모른다.
......
빛바랜 자는 갑자기 앞에 거대한 벽이 나타난 듯한 기분을 받았다.
추억에서 보았던 미켈라는 만물을 포용할 수 있는 완벽한 신 따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그저 온 세상이 무섭고 온 사람이 두려워 서로가 서로에게 상냥하기를 바라고 모두가 사랑을 주고받기를 바라는 겁쟁이였다. 몸을 깎아내고 사랑도 망설임도 버리며 사죄와 고행의 순례를 걸어 신이 되고자 한 이유는, 고작 그것이었다.
전사의 그것이 아닌 몸 때문에 왕을 바라고 신의 권능을 바랬던 미켈라는 두려움에 차 반쯤 미쳐버린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메스메르를 버리고 떠난 신 마리카는 그러나 자신부터가 가혹한 세상에 어려서부터 내던져진 신세였다.
소녀는 관습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만행이 두려웠다. 그저 목숨만 건져 증오로써 신에 등극한 여왕은 응보의 창끝이 되어준 아들 때문에 발목이 잡혀 다시 구렁텅이까지 끌어내려질까봐 두려웠다. 다른 마음의 반신, 배신과 전쟁, 학살. 그녀는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과거에 속한 것들을 봉하고 죽이고서 앞만 보고 뛰었다.
그 끝에서 처참하게 부숴질 뿐이었다.
베일은 그 먼 옛날 용왕 플라키두삭스에게 도전하여 패배했다.
그 대가로 사지가 잘려나가고 불구의 몸이 되었다. 왕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반역에도 자신을 충성스레 따라주었던 비룡들은 그러나 고룡에게 증오의 힘을 받은 용찬의 전사들의 손에 하나하나 베여나갔다. 그리고 그 심장은 먹혀 더 많은 비룡들을 죽일 힘이 되었다. 단 한 번의 반역, 비참한 몰락과 통렬한 대가. 베일도 용왕에게 분노를 불태우면서 마음 한켠에 공포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 포악함은 어쩌면 자신의 두려움에 맞서려는 필사적인 발버둥이었을까.
서로 같은 눈이 마주보았기 때문일까, 빛바랜 자는 미드라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의 기억을 보았다.
오래 전 태어난 왕을 품은 무녀 나나야는 뿔인간들의 현자 미드라를 왕으로 삼겠다는 집념 하나만으로 노인에게 접근했지만 그 인품에 서서히 감화되어갔다. 사랑이든 동경이든, 그것은 결국 이 사람만은 언젠가 왕이 도래할지라도 그 전까지는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결국 소기의 목표를 뛰어넘은 날이 있었다. 그 날은 나나야가 미드라의 대화방 안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으려던 날이었고, 미드라가 나나야의 눈 앞에서 세 손가락의 포옹을 받던 날이자 뿔인간 고문관들이 훗날 나락이라 불릴 숲에 첫 발을 디딘 날이었다. 나나야는 절망과 공포에 질려 용서를 구했다. 또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설득해보며 그 어떤 겁벌과 유혹이 있어도 제발 세상을 부수는 이가 되지 말아달라고, 당신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간청했다.
버텨주세요, 라고 말했다.
빛바랜 자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고귀하게 태어난 저 강대한 존재들도, 심지어 신조차도, 자신과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결국은 사랑을 원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또 여느 다른 이들처럼 공포에 질려 몸을 떨고 온기를 갈구하며 몸부림칠 뿐이라는 사실을.
...안돼.
꺾어왔고 또 꺾을 절대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의지도 공포도 오직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정은, 그 투쟁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어째서 여기에 숨을 쉬고 몸을 뒤채며 있는가.
모두가 옳고 모두가 그르다.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순수하다. 모두가 죽이고 또 죽임당한다. 고통을 받고 고통을 준다. 빼앗고 빼앗기며 복수하고 복수 당한다. 모두가 아이이자 어른이고 어른이자 아이이다. 모두가 현명하고 또 어리석다. 또 복잡하며 단순하고 왜소하며 거대하다. 그리고 버리며 버려진다.
세상은 평면일 수 없다. 단순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두가 언제까지고 겁에 질린 어린아이일 뿐인 세계에 나는 있다. 영원히 고뇌해야 할 내가 있다. 강할 수 없지만 약할 수도 없는 내가 있다. 특별할 수 없지만 평범할 수도 없는 내가 있다.
선할 수 없는 내가 있다. 끝없이 미워할 수 있고 끝없이 미움받을 수 있는 내가 있다.
위로도 아래로도 끝은 없다. 그 아득함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절망이 몸을 휘감는다. 지금까지 알아온 모든 것이, 그저 두껍디 두꺼운 고문헌의 양피지 한 장에 쓰여진 단 한 획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언제까지고 나아간다 해도 끝이 영영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영원함은 더 거대한 영원 앞에서 빛이 바랜다.
황금 나무도, 왕의 자리도. 도전과 승리도.
나의 사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망가져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결말이 없고 이유가 없다. 닿을 수 없는 목적 앞에서 나는 이내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온 세상이 의미를 잃는다.
그 대해와 같은 광막함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니. 모든 존재가 갈라지고 나뉘고 멀리 떨어졌음에도 결국은 그 허무 속에서 다시 녹아 합쳐져간다. 만물은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삼라만상이 다만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나처럼, 처음부터 실패작들이었던 것이다. 저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허망하다. 두렵다. 비참하다. 서글프다.
모두가 똑같다니.
.........
"모두가 같은 세상. 모두가, 같은 세상..."
조용히 읊조렸다.
눈이 욱신거렸다. 다시 진물이 흘렀다. 달콤했다. 뜨거웠다.
갑자기 머릿속의 구름이 걷혔다. 상쾌했다. 시원했다.
...아.
줄곧, 있었나.
여기였나. 여기인가.
죽음과 죽임, 모욕과 수치, 신성과 천함, 압제와 고두, 양면과 합일, 불역과 강물, 높고 낮음, 외부와 중심.
뒤로 펼쳐진 길을 떠올린다.
단지 약간의 망설임이었을 뿐이다. 적발의 영웅과 별의 짐승을 죽이고도 끝까지 각오가 부족했다. 신을 없애고 조용히 무너져가는 세상을 어떻게 할지, 결단은 오래 전에 내려졌다. 불가마에서 가시나무 모닥불을 피워놓고 유라 아닌 유라와 나눴던 대화에서 이미 길은 다져졌다.
그럼에도 마음에 고요히 일었던 그 약간의 망설임을 없애지 못해 이 자리까지 왔다. 반신의 팔을 만지고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왔다. 그 여정에서 안식은 없어 단지 좀먹힐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분노하고 슬퍼할 것임을 당연히 이해하면서도, 그렇게 한다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만물을 포용하고자 한 자라면 뭔가 다른 길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정해놓은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그저 믿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이 길은 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 황금 나무를 올려다보다 결국 공포에 질려 내뱉었던 예언 때문에 조롱받았다. 미래가 보이니 앞이 안 보여도 괜찮을 거라며 눈가리개가 씌워질 때는 분함에 눈물이 나왔다. 그저 세상을 지키고 나의 신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그렇게 피부를 갈아대는 듯한 질감의 옷을 입고 목에 칼이 씌워진 채 멸시받으며 도읍에서 내쫓겼던 이래로,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끊임없이 되뇌였다.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원망과 증오에 차 자신을 아주 조금씩 죽이고 죽여가며 그 말을 끝도 없이 되뇌였었다. 턱이 아파올 지경까지 이빨을 악물고 눈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다가 눈가가 퉁퉁 부어올랐더랬다. 비참했다. 만물이 잿더미로 변하고 나면 다만 그 안에 눕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죄와 슬픔을 인 채 같이 죽고 싶었다.
나를 버리고 또 내치고서 떠나간 신을 저주하며. 나는 결국 그저 겁에 질린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절히 통감하며.
모든 감정, 모든 저주, 모든 고통, 모든 고뇌, 모든 죽음, 모든 죄.
모든 절망.
전부 섞여 녹아들어갔다. 불타올라 하나가 된다. 뱃속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아, 하나가 되고 싶어.
버려지고 또 버리며, 나누고 합치며, 생각한다.
순전히 유아적인 충동으로 고른 길은 그러나 확실하고 또 편안할 것이라고.
회백색의 원 안으로 지문 자국이 새빨갛게 지져들어간 흉터가 욱신거렸다.
온 세상이라는 직선의 양편 끝을 구부려 한 점에 합칠 것이다. 말의 편자처럼, 결국 미움받고 미워하는 그 모든 이들이 하나 다른 점 없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렇게 시작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양극단을 합쳐 원을 만드리라.
그러면 이내, 나는 타오르리라. 그 검은 원 주변으로 일렁이는 노란 혼돈의 불에 나는 나 자신을 오롯이 맡길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끝이자 구원이다. 구원일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황금 나무를 올려다보며 절망한다.
곧 불씨가 불을 붙이리라.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나는 역시 엉터리 예언자야. 예언에서 보았던 불은 훨씬 더 생기 넘치고, 훨씬 더 새빨갛고, 훨씬 더 불다운 불이었다.
그런데, 이 불은... 이 역겹도록 노랗고 굽이치는 나선 속에 슬픔과 절망을 품어 눈을 태우고 짓무르는 이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불역의 경지까지 몰아붙이는, 이 불은, 너무나도 뒤틀려있기에 오히려 순수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너희들에게는, 나에게는, 이 쪽이 훨씬 더 잘 어울려.
황금률원리, 한 때 몸과 마음을 바쳤고 믿었던 그 학문, 그 가르침 그대로다. 이제 만물은 불역의 경지로 수렴하리라. 잿더미 속에서 삶과도, 그 고통과 고뇌와도, 영영 작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움과 아픔의 고리를 끊어내자. 시작도 끝도 무의미하다면, 모든 것이 그저 존재할 뿐이라면, 이런 결말도 결코 이상하지는 않다. 분명히, 분명히.
이제 할 일은 하나뿐.
눈가리개를 다시 둘러 묶고서,
돌무대로 향한다.
걸머지고 걸어간 끝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일어선다.
나를 버린 신과 서로 맞찌르고 비원을 이루기 위해.
떨쳐내고 떨쳐내어, 왕이 되기 위해.
고통을, 절망을, 저주와 죄와 괴로움을 태워 녹이기 위해.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노랫소리가 신의 문 너머로 날아갔다.
별빛 흐드러진 천공의 위까지, 저 멀리.
아주 멀리.
이전 시점: 눈과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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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점: 엇갈리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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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거 VS 단거
꼴짤은 어디 있죠
전편 후편 다 읽어봤는데 개지리네 나중에 시간나면 만화 같은 걸로 그려봐도 됨?
물논이죠!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야죠 그럼
갑자기 이 악물고 잘 쓴 문학 나오니까 당황스럽네
이건 시발 집가서 찬찬히 음미하면서 먹어야겠다 - dc App
근데 왜 대회탭이 아니라 창작탭 - dc App
클릭미스였어욞,,,,
신 포도 말하는줄
팩트) 샤브리리의 포도는 달다
아니 필력 미쳤네
와 개잘쓰네 작가임?
필력 현직같네 ㄹㅇ
보면서 빤쓰 3장 갈아입었다 이런거 더써다오
첫 댓글에 달린 전후편 링크 들어가보면 지금까지 쓴 것들 모아서 시리즈로 달려있어요!!
북마크해뒀음 ㄱㅅㄱ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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