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이제 끝이다.
나의 자매들은 모두 저기 들끓고 있는 부패의 늪에 가라 앉았다.
처절한 혈투 끝에 얻은 승리.
하지만 기쁘진 않았다.
오랜 시간 모험을 하며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겼었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엔 왠지 모를 환희와 명예, 긍지가 새겨져 왔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온몸이 고통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
침을 빼내며 해방한 부패의 각인이, 내 몸을 좀먹고 있다.
이젠 진짜로 끝이구나.
나의 모험은 아무래도 여기까지 인듯 하다.
전해주고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내가 느꼈었던 긍지를… 환희를… 명예를…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은 후련했다.
사명을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굳이 미련을 찾는다면,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면…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 늪을 헤쳐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올려다 보았다.
시야가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아,
그래 역시 너구나…
넌 언제나…
2.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분명 이렇게 아팠었지.
부패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나는 죽어가고 있었지.
차라리 이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른팔을 주저없이 잘라냈음에도 이 목숨만큼은 어째선지 베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겁쟁이였던 걸까?
그렇게 절망 속에서 홀로 죽어가던 나에게, 그가 찾아왔다.
허름하고 낡은 갑옷을 입은, 머리 위로 흩날리는 하얀 술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방금까지 격렬한 전투를 했던 것인지 그의 몸엔 피와 붉은 빛의 점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투구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인 사내였다.
나는 그에게 경고했다. 부패에 절여져 썩어가는 내 몸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나 자신을 잃고 너를 헤칠 수도 있다고.
그런 경고에도 그는 별다른 대답없이 고개를 숙여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따스한 온기와 빛을 내뿜는 기이한 힘이 감도는 황금빛 침이었다.
나는 순간 영문을 모른채 그와 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 쥐고 있는 것 만으로 몸 속에서 꿈틀대는 부패가 조금 멎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귀한 것을 어떻게? 그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대로 죽을 바엔
널 믿겠어.
푹 하고 찌르는 순간 나의 내부에서 접혀있던 꽃잎이 만개하듯, 검붉은 먹구름이 개어 사라지듯 부패의 저주가 잠들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물러나며 그간 매몰되어 있었던 욕구가 갑자기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전에 나는 의식을 잃었다.
옅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가 나의 몸에 천 보자기를 덮어주는 것이 느껴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하루가 지나있었다.
그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그저 말 없이 내 옆에 묵묵히 앉아만 있었던 걸로 보인다.
나는 부끄러움에 헛기침을 하곤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 또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끄러워.
“흠흠… 저기, 일단 옷 매무새 좀 가다듬을테니 쳐다보지 말아줘…”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최대한 가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교회 벽 기둥 뒤로 걸어갔다.
3.
고통은 그 뒤로 눈녹듯이 사라졌다. 나의 생명을 갉아먹던 붉은 부패도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 그가 내게 건내준 황금빛의 침이 분명 효과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그는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벙어리인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응, 그래, 아니’ 같은 단답형으로 짧게나마 대답은 하는 걸로 보아 그냥 무뚝뚝한 사람인가 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 덕분에 나는 사명을 위한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 전부 생각났어. 끔찍한 부패가 사라지며 내가 잊고 있었던 사명이.
“전부 네 덕분이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나는 그만 활짝 웃어버렸다. 그는 대답 대신 내게 이것저것 먹을 것과 림그레이브의 지도를 건내준 후 뒤를 돌아 사라졌다.
역시 이상한 녀석, 나는 풋 하고 혼자 피식했다.
4.
그렇게 나는 나의 사명을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거인들의 산령을 향하기 위해 나는 리에니에 호수 끝자락에 위치한 폐광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그와 재회할 수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나를 발견했지만 딱히 놀라거나 기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반응에 살짝 시무룩해졌지만 그는 곧 내게 삶은 새우(?) 를 비롯한 림그레이브의 온갖 진미를 곱게 포장하여 내놓았다.
이 녀석은 내가 먹보인 줄 아는 걸까. 하지만 뭐 됐어.
다시 만났으니 그걸로 족해.
폐광산 정상에서 길을 막고 있던 토룡을 함께 물리치고 마침내 알터고원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실력은 실로, 엄청났다.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낡아빠진 곡검 두 자루를 쥐고 거대한 토룡을 말 그대로 도륙을 내버렸다.
나 또한 검술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는 감히 그것을 자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이 팔만 완벽했다면 널 더욱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을텐데…”
어린아이같이 바보같은 푸념이었고 곧바로 난 그 말을 바깥으로 내뱉은 걸 후회했다. 그러자 그는 우두커니 서서 나의 잘려나간 오른팔을 보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그를 멈춰세우려 했지만 그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오지마.”
내가 한 말에 기분이 상한 걸까? 내가 실수라도 한 걸까? 그는 어딘지도 모를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렇게 사라진 그의 뒷모습만 멍 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나는 알터 고원 초입 인근 유적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어쩌면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를 떠난 걸지도 몰라.
그 생각이 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그렇게 멍 하니 앉아있던 그때였다.
그가 저 멀리서 영마를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난 그때처럼 그는 이번에도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낡고 헤진 갑옷 위로 불결한 녹색 진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것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으며 품 속에서 천 보자기로 덮힌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천을 펼쳐보니 살짝 빛바랜 황금빛의 의수가 들어있었다.
“이거… 혹시 나를 위해서…?”
얼떨떨한 나에게 언제나 그랬듯 그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곧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가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에게…
나는 이미 그에게 충분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나에게 늘 이것저것 많은 것을 챙겨준다.
정작 자신은 아무 도움도 받지 않으면서.
하지만 이 의수만 있다면 분명 그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을 거다.
“… 새우(?)라도 잡아와서 삶아놓을까.“
나는 잠든 그를 바라보며 오른팔에 의수를 장착했다.
5.
그렇게 우리는 함께 알터 고원을 좀 더 동행했다. 그가 마련해 온 의수는 굉장히 멋진 장비였다. 그간 소극적이었던 나의 전투방식을 충분히 메꿔줄 만큼 출중한 성능을 보였다.
물론 의수를 달았다고 해서 여전히 그의 실력엔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나는 확실히 자신감을 얻었고 그가 하자는 건 무엇이든 함께했다.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룬베어를 퇴치하고 마을을 장악해 주민들의 살가죽을 제물로 받던 가래떡(?) 괴물도 함께 퇴치했다. 힘들게 사냥해서 얻은 새우(?)도 진미였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의 사명을 잊게할 정도로 즐거웠다.
언제까지고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함께.
6.
“붉은 싸움에… 가세해줘서 정말… 고마… 워…”
마지막 순간 결국 나를 배웅하는 건 너구나.
기뻐서, 너무 행복해서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끔찍한 고통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간신히 뜻을 전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내 꼴은 처참했다. 몸에선 붉은 부패의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고통으로 인해 흘러내린 눈물에는 붉고 불결한 액체가 섞여있었다. 너에게는 건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에게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우두커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훗, 그래. 넌 항상 그랬지.
말수도 적고 무뚝뚝하고 새우와 게를 좋아하는 너를
나는…
난…
“잠시.. 혼자 있게… 해줘… 붉은 부패가… 심… 꿈틀… 저주… 너를… 다치게…“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비참하네.
결국 난 끝까지 내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보다 더 큰 미련을 찾는다면…
결국 끝까지 해주지 못했던 그말을…
털썩.
그때 잠자코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내 옆에 주저 앉았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부패를 아랑곳 않고 그는 자신의 어깨에 나를 기대게 했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진 않지만, 나는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처럼.
우리는 그렇게 한 동안 함께였다.
나비 한 마리가 내 눈앞을 스쳐 날아간다.
“내 이름은 밀리센트.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자.“
그냥 갑자기 꽂혀서 쓴거라 두서가 없다 ㅋㅋ 재밌게 읽었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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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고 밀리센트가 언젠가 살아날 수 있도록 꽃으로 만들어줬어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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