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든링 최고의 흑막은 다 알다시피

라니도 아니고 미켈라도 아니고 마리카라고 할 수 있음



마리카가 엘든링을 부순 진정한 이유는 뭐였는가?

축복의 인도로 그 많은 삧을 불러들인 이유는 뭐였는가?

왜 엘짐을 무찔러도 마리카는 여신 상태로 부활하지 않는가?



인게임에서 이 모든 의문에 시원하게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마리카의 진정한 의도는 프롬뇌 영역에 있을 수밖에 없음



다만 마리카-라다곤 신왕 체제, 그리고 그것이 무너진 후에 남겨진

모든 지식을 탐구하여 자기 안에 새긴 기드온 오프닐은

황금나무 대성당에서 삧을 막아서며 이렇게 말한 바 있음



“왕이 되려는 의도는 좋지만 이뤄야 할 바가 아니다“


"마리카는 우리가 영원히 발버둥치길 원한다“



기드온의 깨달음이 정말 마리카의 의중에 닿았다고 전제한다면,

마리카가 원한 세상은 “모두가 왕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모두가 영원히 실패하는, 아나키 상태의 틈땅“이 됨



다시 말해 마리카가 원한 것은 새로운 왕이 아니라,

왕이 부재할 수밖에 없는 무정1부주의 시대를 지속하는 것이었음



그럼 마리카는 왜 그런 카오스 상태를 초래하려 했을까?




2



DLC까지 스토리를 연결해보면 엘든링의 주제의식은 아주 명확함

아무리 완벽한 규율, 흠결없는 시스템을 세우려 해도

필연적으로 다른 규율을 박해하거나 반대자들을 억압하면서

독선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음



이건 현실에 대입해봐도 똑같음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가장 유력한 정치 체제로 떠올랐지만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암튼 그렇게 현재의 지배적인 규율에 억압당한 다른 규율들은

저주의 형태로 현 규율(황금률) 내에 자신의 원리를 새김

엘든링에선 그게 마리카가 낳은 자식들이 흉조로 태어나거나

부패의 외부신에 의해 오염된 채로 태어나는 식으로 묘사됨



그러니까 마리카는 어느 순간 깨달았을 거임

아 이거 절대 안 끝나겠구나

내가 그림자땅의 ‘나선율‘을 배신하고 황금률을 치켜든 것처럼

배신과 저주, 억압과 쿠데타가 그냥 영원히 반복되겠구나



그래서 내가 추측하기로 마리카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끝낼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 같음

정복 전쟁이 끝나고 자기 남편을 틈땅 바깥으로 추방할 때까지만 해도 

마리카의 계획은 '언젠가 엘짐을 해치우고 외부신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기'였을 거임



그러나 마리카가 황금률의 탐구를 시작하고

도가니 시대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규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결코 외부신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게 아니었을까 싶음



그러니까 엘짐을 처단해도 다른 외부신이 간섭하여 새 규율을 심으려 들 것이고,

마리카 자신과 같은 '신'은 그 외부신의 꼭두각시 노릇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신'을 지키는 왕은 규율을 수호하고 감시하는 외부신의 개 역할을 하게 되는 거지

마치 라다곤이 그랬던 것처럼




3



내가 추측하기로 마리카가 꾀한 것은 신왕 체제의 근본적인 붕괴가 아니었을까 싶음

현실에 비유하자면 왕을 갈아치우거나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왕조 시대' 자체를 끝내고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 한 거지



하지만 구시대의 질서에 속하는 마리카 자신이 엄연히 살아있는 한   

그런 계획이 무난하게 실행되기는 어려웠을 거임

엘짐이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마리카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수는

현 규율을 유지시키는 엘든링을 부수고 그 꼭두각시인 자기도 함께 부서져 버리는 것임  

그런 다음에 '엘든링을 수복하라'는 명분으로 틈땅 외부의 빛바랜 자들을 계속 끌어들여서

무정1부주의적인 대혼란이 계속되도록 유도하는 거지



왜 그런 대혼란이 필요한가?

기존의 신왕 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하기 때문임



기드온은 네펠리에 대해 평하면서 "범인의 의지 따위는 흉조의 뿔보다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마리카가 진정 원하는 것은 그런 평범한 인간들의 의지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음     

어쩌면 마리카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역은 자신의 계보에 속하는 데미갓,

또는 손가락의 선택을 받은 반신들(미켈라, 말레니아, 라니)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빛바랜 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4



하지만 마리카도 알고 있었을 거임

자기가 초래한 대혼란이 어떤 결과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거



데미갓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그중에 하나가 왕 자리를 꿰찰 수도 있고,

빛바랜 자가 새로운 규율을 들고 와서 다시 엘든링을 수복할 수도 있고,

하다 못해 미친불이 온 세상을 태워버릴 수도 있겠지

스스로 부서져버린 마리카가 대혼란 이후의 일을 통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마리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단지 '규율의 유지' 또는 '규율의 수복'과 구별되는

제3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뿐이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황금률을 대체하는 또 다른 '규율'을 세우는 엔딩은

마리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결말과는 부합하지 않았을 거임

실제로 엘든링을 수복하는 엔딩들의 컷신을 보면

빛바랜 자만 고독하게 왕좌에 앉아 있고 마리카의 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음



그런데 라니 엔딩은 좀 다름

라니 역시 어두운 밤하늘의 규율을 치켜든다는 점에서 '규율의 수복' 엔딩에 속하지만,

그 규율이라는 게 매우 독특하기 때문임



라니의 규율은 신과 왕이 함께 손잡고 이 세상을 떠나버리는 것임

규율을 품고 떠나버렸으니 새로운 외부신이 규율을 심을 수도 없고

신과 왕이 저 너머에 엄연히 존재하니 새로운 신왕 체제가 나타날 수도 없음



그렇게 본다면 라니는 마리카를 계승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마리카의 의지를 계승한 존재가 됨

아까 말했던 대로 마리카가 원한 것이 신왕 체제를 근본적으로 무화하는 것,

규율에 의한 통치를 끝장내는 것이었다면 말이지

 


신과 인간이 머나먼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구별되어 서로 만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오로지 '범인의 의지'가 모여 세상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현실에 비유하자면 왕조 시대가 끝나고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과도 비슷해보임

신왕이 존재하긴 하지만 상징성만을 독점할 뿐 실제로 지배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전제로 하는 현대 입헌 군주제와의 유사성도 있고






+ 번외



고드프리는 어쩌면 마리카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듦




로데일에 입성할 명분이 가장 뚜렷한 존재가 최후반부에야 등장한다는 거 (사실 지각충이라서)


삧을 막아선 기드온이 고드프리는 막지 않았다는 거 (사실 오체분시 당할까봐 무서워서)


삧이 도착할 때까지 안 들어가고 뻐기고 있었던 거 (사실 탑신병자라서 ) 등등



몇몇 석연치 않은 점들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어쩌면 고드프리는 삧과 싸워서 이긴 다음에도 그냥 거기 죽치고 앉아서


모르고트보다 더한 악질 제초충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듦


자기를 이길 만한 존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세줄요약



1. 마리카는 아예 신왕 체제가 붕괴되길 원했다 


2. 라니의 해법은 그런 마리카의 의지에 가장 잘 부합한다


3. 고드프리는 탑신병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