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bbc771e3c833f177ba83b7479f2e2df242de72105ec41d15af561140

2cb1d223f7c676ac7eb8f68b12d21a1db86c19292171

드랭글레이그에서의 여정을 마무리 짓고, 친우의 가면을 쓴 채 활동하기를 오랜 세월이 지났을 무렵



긴 세월 동안 망자들을 학살한 그 경험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살 이전의 강함과 더해졌기 때문에 아마 그 시점 최강자



지각변동으로 인한 것일까, 아니면 본인만의 여정을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넘어 건너온 것일까. 뭐가 어찌되었든 저주를 짊어졌던 사내는 분명히 이 곳 로스릭의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 로스릭 땅에서 어느 젊은이와의 인연이 생긴다.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근처 숲에서의 일이었다. 로스릭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사내는 주변에 퍼지는 이상한 굉음을 들었다. 소리의 근원을 찾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사내는 분명히 목격했다.



그것은 어느 젊은이가 커다란 그레이트 액스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본인만의 훈련을 하는듯한 모습. 묵직하고 투박하면서도 신중한 움직임을 항상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기합을 내지른 후에 강렬한 기세로 도끼를 지면에 내려찍기도 한다.



지나가던 일반인이 보기엔 그저 주변을 깨부수며 깽판을 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야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내의 눈에 띄었던 점은, 저 젊은이가 제대로 걸친 옷이 없다는 점이었다. 멀쩡한 부위 없이 헤진 곳 투성이의 바지 하나만 대충 걸치고 장작 없는 맨바닥에 도끼질이라니, 그것은 누가봐도 기인(奇人)이었다.



이를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던 사내는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혼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젊은이에게 다가간다.












젊은이가 예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의 친화력을 갖고있던 덕분에, 사내는 본인도 인지하지 못할만큼 젊은이와 순식간에 친해진다. 그리고 젊은이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젊은이가 스스로를 칭하되, 일명 '사자기사'. 사자기사는 포로사의 사자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사내가 껴입은 금속의 갑옷 또한 그 사자기사단의 물건이다. 현재는 그 명맥이 끊긴지 오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스스로가 사자기사라는 이 젊은이는 포로사라는 국가의 존재만 겨우 알고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본인이 포로사의 후예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장담을 한다. 조상님이 포로사 출신이었다는 이유였다.



망국의 후예인데도, 젊은이는 그럼에도 자랑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사내는 그런 젊은이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속세와 떨어진 곳에서 야영하며 도끼질을 하는 망국의 후예라니. 이런 바보같은 이야기를 누가 믿을까?



아차, 이번엔 젊은이가 사내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출신이라거나, 이름, 나이, 성경험 여부, 짐가방 속에 있는 노인 모양의 가면 등.



젊은이의 질문 공세에 의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을 느낀 사내는 곤란한듯이 웃으면서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답변을 멈추지 않았다.



이 후로도 둘은 틈이 날 때마다 재회하며 오랫동안 친밀함을 이어갔다. 풋내기인 젊은이를 위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내는 어느샌가 젊은이가 동경하는 인물이 되어갔다.


사내에게 있어서도 젊은이와의 만남은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사내가 찾아오는 날이 점점 드물어지기 시작한다.



홀로 앉아서 사색에 잠긴 젊은이는 이전에 사내와 벌였던 대련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내가 오지 않는 날에는 대련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 유일한 심심풀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사내에게 이긴 적은 한번도 없었지. 갑옷도 괜히 걸친게 아니라고,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통해 완성된 사내의 무력은 젊은이가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이기겠다. 그런 심정으로 꾸준히 단련을 거르지 않았던 젊은이였지만... 그래도 사내를 이기는 것은 너무나 먼 길이다.



툭. 투둑. 툭.



사색에 잠겨있던 사내를 깨우듯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랑비에 그칠 줄 알았던 빗물은 어느샌가 거센 빗물이 되어 피부를 따갑게 찌른다.



오늘은 재수가 꽝이라는듯, 혀를 차며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젊은이에게 빗소리로도 숨길 수 없는 반가운 발소리가 들려온다. 들뜬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젊은이는 확실히 목도했다.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있는 사내를. 그리고 투구를 처음 벗은 사내의 맨얼굴을.



거센 빗물 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침묵을 지키며 젊은이에게 짐가방을 건넨다. 어마어마한 무게였다. 가방 안에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이 있는게 분명하다.



가방을 풀어헤치고 눈에 보인 것은 지금까지 사내가 입고있던 그 갑옷.



눈가에 흉터와 비슷한 모양으로 흠집이 난 투구.

바싹 말라붙어 잡초와 비슷한 꼴이 된 털뭉치 장식이 달린 갑옷.

수많은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진 장갑.

유일하게 천 재질이지만 형체를 용케도 유지한 부츠.



그리고 마지막으로 꺼내진 것은 황금색 문양으로 장식된 청색의 방패. 젊은이는 갑자기 왜 사내가 이 장비들을 건넨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수리를 맡기려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작은 흠집이 군데군데 있긴 하지만, 수리가 필요한 정도의 손상은 아니였다.



오랜 침묵을 깬 사내는 이 갑옷이 사자기사단의 제식 장비였음을 젊은이에게 뒤늦게 밝히며, 젊은이만을 위한 장비라며 갑옷을 양도한다. 앞으로는 제대로 입고 다니라는 사내의 잔소리는 덤이었다.



오랜 세월을 걸치고 싸운, 사내만의 든든한 전우나 다름없던 갑옷을 젊은이에게 양도한 채로 사내는 어딘가 어두우면서도 서글픈 표정과 함께 자리를 벗어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남겨진 것은 굳은 채로 서있는 젊은이였을까, 아니면 빗물에 젖어가는 갑옷들이었을까. 하지만 그 순간에 젊은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내로부터 받는 최고이자, 최후의 선물인 것을.












두번 다시 그토록 동경하는 사내를 만나지 못한 채, 로스릭 곳곳에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사자기사는 여기 있다.



그 이름은 알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