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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은 불타는 대검을 들고 우리를 맞이했다.

낡아빠진 의복과 빛바랜 황금장식들, 비틀려버린 왕관은 몰락의 편린일 뿐이었다

망자와도 같이 말라비틀어진 육신에, 동공과도 같은 눈.

이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그 모습이 그의 진정한 몰락이었다,


-불에 타올라 재와 같이 희미해진 저 모습이 진정 한때 신이라 불리던 존재였나

-태양이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위대한 왕이란 말인가.


 나는 대왕을 향해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맹렬한 공격이 아니라 그저 비통한 짐승의 발악이었다.

고통과 회한, 절망에 휩싸여 내지르는 검은 나의 눈물이었다. 마음이 흔들려 정교하지 못한 나의 검을 뒤집으며

대왕의 대검이 매섭게 나를 후려쳤다흐려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앞을 바라보았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나의 앞을 가로 막으며 그는 침착하게 대왕을 상대하고 있었다.

대검의 맹공과 불길을 방패로 막고, 쳐내고, 몸을 날려가며 대왕의 틈을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검이 대왕을 꿰뚫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그의 검이 대왕과 함께 

나의 영혼의 깊숙한 부분마저 꿰뚫어버렸다는 착각을 느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내던져지는 상실감이 온 몸에 젖어들었다.

대왕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재가 되어 사라져갔다.

이게 내가 바라던 태양의 모습인가.

그 드높던 태양의 신도 결국 그 끝은 이렇게 비참한 재의 부스러기와도 같은 것인가.


-나의 태양이란 것은 태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태양이라 불리던 존재도 그저 부스러기 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반짝이는 별도 없이 어두운 하늘과 불에 타 비틀어져버린 기묘한 기물들 사이에서 세찬 절망이 내 몸을 지배했다.

아니, 예전에 이미 마모되어버린 정신을 사명감이라는 사슬에 묶어 끌고 다녔을 뿐임을 깨달았다.


이제 끝났다.


 상실된 마음을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의 생에 끝맺음을 맞이할 체념을 얻었다.

고통을 애써 참아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실과 체념이 내 모든 힘을 앗아갔을 것이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대왕이 사라져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어떤 심정일까,

죽음은 두렵지 않다. 세상이라는 수라장에 내던져진 생물로서, 시련과 고난의 여정을 결심한

전사로서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의 모습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섰을 때, 그의 시선이 앞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 곳에는 한 자루의 나선검과 무너진 잿더미에서 희미한 불꽃을 태워 올리는 화톳불이 있었다.


-최초의 불


 모든 것이 안개에 휘감긴 아득한 시대에 나타나 불의 시대를 열게 한 위대한 신화의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숨이 끊어질 듯 말 듯 하며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잔불은 조용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끝이란 이렇듯 허망한 것이다. 그 어떤 강대한 존재라도, 생명이라도 현상이라도 그 말로는 언제나 비참하다.

하늘을 뒤덮는 어둠이 태양을 지워내듯 심연이 점차 우리의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최초이자 최후의 불이 사라질 때, 칠흑 같은 심연만이 남게 되리라

그렇다 한들 누가 그에게 불을 계승할 것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불타버린 재가 된 대왕을 보며 충격은 그 방향성은 다를지언정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태양의 말로를 보았으나 그는 자신의 말로를 본 것이다만약 그가 아직도 불사의 사명을 다하고자 불을 계승한다면

대왕과 같은 최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도 절망할 것인가.

태양을 찾지 못한 나처럼.


 왕의 사명에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었다. 그리고 주어지는 것은 허물에 다름없는 재의 육신과 사멸되는 이성 뿐

흔히 생각하는 명예와 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스러져가는 세상을 위한 희생양을 일컫는 말이었다.

불사자의 사명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그가 그런 식으로 희생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짧은 애도를 보내었다

우리가 본 것은 불의 시대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희생한 신의 고결함이 아니었다

그저 불에 탄 비참한 장작의 모습만이 있었을 뿐. 아마 그도 미혹하는 환상에서 깨어났겠지

어쨌든 마지막으로 남은 마음의 한 자락을 잘라내었으니, 이제 나도 끝을 맞이할 때였다.

마음의 힘이 다한 나는 심연 속을 배회하는 한낱 망자가 되겠지

그런 결말을 맞이할 것을 알기에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려 했다.


-그리고 그 때.


아니?’


그는 천천히 화톳불에 남은, 미약한 잔불만을 남긴 채 꺼져가는 최초의 불에 손을 뻗었다.

잔불밖에 남지 않았던 최초의 불이 점점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타오르던 불꽃은

방금 전까지 미약했던 모습과 다르게 흘러넘칠 듯 넘실거렸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눈부실 정도로 강력한 황금의 불꽃이 터져 나오며 모든 것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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