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화처럼 눈 앞에 밝게 타오르는 등불은.
자신의 기억처럼 서서히 꺼져가고있었다.
\"...\"
라프는 무거운 중갑을 입고는 침묵을 유지한채 계속해서 꺼져가는 등불을 지켜보았다.
꺼져가는 등불이 마치 자신의 기억과도 같아서인지 지켜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고개를 들어 재로 뒤덮어져있는 옛 성의 잔해를 주시했다.
하지만 재에 뒤덮인 성을 보면 볼 수록 재에 먹혀버린 성처럼 자신이 저주에 먹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절그럭, 라프는 반월을 닮은 대도와 묵직한 대형방패를 들고는 일어나려했다.
그 순간 성이 부르르 떨리며 무너졌다.
성의 탑 부분이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며 라프의 앞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먼지 속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본능일까, 라프는 먼지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다. 그는 기억을 잃은 망자가 아니였다.
그는 그을린 철로 만들어진 갑옷 위에 꾀죄죄한 천으로 후드를 만들어 입고있었다, 또한 그는 양손에 묵직해보이는 롱소드와 긁힌 자국이 수 없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있었다.
\"오, 당신. 아무래도 제대로 된 정신을 갖고있는 것 같네.\"
라프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기쁘다고. 이런 퇴적지에서도 어떻게든 만남은 있다는거군.\"
라프의 말에 기사도 기쁘다는 듯이 악수했다.
\"나는 라프라고 불러줘. 음... 그래, 진짜 이름은 잊어버렸어. 서로 협력하는 일도 있겠지. 그 때는 잘 부탁한다구.\"
기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을 재의 귀인이라고 소개했고 서로 뚜껑을 쓴 노파에 대해서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한 후 헤어지려는 직후에 라프는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너에게는 전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라프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망자야.\"
라프의 말에 기사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 라프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제대로된 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가능해도, 옛날 일들은 전부 잊어버렸지.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이런 모든 것들을...\"
막상 스스로 말해보니 부끄러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군 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찾고있어. 불의 시작에, 어두운 영혼을 발견한 난쟁이들의 마을. 고리의 도시, 그곳에 있다는 저주를 풀어주는 비석을.\"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샌가 그도 자신의 앞에 앉아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프는 공감해준 태도가 고마웠는지 피식하고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어, 그거다. 쪼그만 돌로는 이제 생각해낼 수가 없으니까 말이지... 뭐어, 그런거다. 그러니까 너에 대한걸 잊어버려도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알고있잖아? 망자라면 어쩔 수 없다는 걸.\"
말을 끝마치고 나니 귀인은 바쁘게 퇴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그를 생각할 때마다 옛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옛날의 라프는, 누군가와 말싸움을 하고있었다.
2.
\"오. 너, 또 만났군. 아무래도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라프는 또 다시 귀인과 만났다. 라프는 귀인의 롱소드에 얼룩진 피와 흠집이 더 늘어난 방패로 말미암아 귀인이 로스릭 기사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귀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제스처를 취하고는 라프의 옆에 앉았다.
\"그건 그렇고 여기는 세계의 끝의 퇴적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장소로군.\"
사방이 온통 잿더미에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귀인도 이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여기에는 갖가지 시대, 그리고 토지의 잔해가 있지. 그러니까 믿을 수 있다는거야. 고리의 도시가 이 퇴적지의 아래에 있다는 얘기를.\"
귀인은 심각해진 라프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아아, 미안하군. 너에겐 관계없는 얘기였을까. 어차피, 너 이외에 얘기할 수 있는 상대는 뚜껑 쓴 할매정도라서 말이지. 너무 떠들었는지도 모르겠어.\"
라프가 말을 마친 후, 잠시동안 정적이 맴돌았다.
라프는 망가진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급하게 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품 속에서 자신에게는 필요 없지만 분명히 귀인에게는 도움이 될 물건을 집었다.
\"...그 사과의 의미라고 하긴 좀 그렇긴 한데, 이걸 줄게.\"
라프는 품 속에서 까끌까끌한 검은 쐐기석 원반을 꺼냈다.
\"나는 알아. 너는 우수한 전사고, 사명도 있잖아. 그걸 너의 사명에 유용하게 써줘.\"
그러고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술을 꺼내 두 개의 잔에 가득차게 담았다.
\"그리고 이건 사소하지만 내 기분이야. 조금밖에 없어서 미안하지만, 축배를 들어도 좋아.\"
라프와 귀인은 서로 잔을 하나씩 들고 쨍! 소리가 날만큼 컵을 부딪혔다.
3.
털썩
떨어지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어두웠다.
마치 불에 그을린 종이처럼.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져서 여러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이끼낀 돌로 이루어진 썩어버린 건축물의 잔해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품고있는 듯이 웅크려있는 두 데몬이 눈에 띄었다. 라프는 대형 방패의 손잡이를 한 손으로 단단히 쥐고는 두 데몬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한 데몬의 몸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서 불의 시대가 시작하는 로드란이 떠올랐다.
분명 저 두 데몬도 각자의 사명을 품고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라프나 귀인이나 그런 것까지 고려해 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몸에 불이 피어오른 한 데몬은 이윽고 화산이 폭팔하듯이 일어서며 거대한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귀인은 데몬에게 달려가 왼쪽 날개에 롱소드를 휘둘렀다. 큰 피해는 주지 못한 것 같지만, 날개가 살짝 찢어지는게 얼핏 보였다.
라프는 데몬의 오른쪽 손을 향해 대도를 휘둘러 손가락을 하나 잘라 내었다. 데몬은 아프다는 듯이 울부짖으며 양 팔을 마구 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라프는 대방패로 간신히 막았지만 귀인은 미처 피하지 못했는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귀인이 부상을 개의치 않고 가까스로 일어나자 귀인을 따라서 그의 등 뒤에서 무언가 일어났다. 뚜껑 쓴 할머니가 말해줬던 로리안에게 상처를 입은 데몬임이 틀림 없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보기에도 흉한 상처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귀인은 당황하는 모양 없이 데몬이 일어나기 전에 데몬의 얼굴의 상처 부분에 롱소드를 박아 넣고는 수직으로 칼을 내려버렸다.
피부와 살이 격하게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물이 가득찬 통이 터지는 듯, 멀리서도 피가 뿜어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데몬이 얼굴의 상처를 감싸자 귀인은 이 빈틈을 놓치지않고 데몬의 오른쪽 다리, 그 중에서도 발목 쪽에 롱소드를 박아넣었다. 상처입은 데몬은 몸부림치며 귀인을 떼어 놓으려했지만 귀인은 모든 공격을 피하며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캬아아아아아악!!!\"
갑자기 라프와 대치중이던 데몬이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데몬은 양 손을 모아 라프를 향해 내리쳤다. 다행히 대형 방패로 막았지만, 데몬의 손에서 튄 불꽃이 라프의 팔을 천천히 태워먹는 동시에 데몬의 거대한 괴력이 그의 온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라프는 막거나 피하지않고 대도를 휘둘러 데몬의 귀를 베어냈다. 데몬이 잠시 휘청거린 틈을 타, 라프는 대도의 날 부분을 똑바로 세워 장작패듯 데몬의 정수리를 내려찍었고 박힌 대도를 뽑아 내려찍은 그 자리를 다시 한번 더 내려쳤다.
데몬은 아프다는 듯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지만 라프는 그걸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대도를 휘둘러 데몬의 머리를 작살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든 순간, 라프의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고 그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라프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귀인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귀인도 이미 데몬을 정리한 것 같았다. 라프는 가까스로 일어나 귀인에게 향했지만, 귀인이 쓰러트린 상처입은 데몬이 꿈틀, 꿈뜰 경련하더니 몸에 거대한 불이 붙었다.
귀인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어 상처입은 데몬과 거리를 두었다.
서서히 상처입은 데몬으로부터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더니 불이 데몬을 감싸자 데몬의 모든 상처가 나았고 이윽고 상처입은 데몬이 몸을 감싸던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그것이 과거 로리안과 접전을 펼쳤던 데몬의 왕자로 각성했다는 것을 라프와 재의 귀인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라프는 지친 몸을 이끌고 데몬의 왕자에게 돌격했다.
데몬의 왕자는 돌격하는 라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는 양 손의 위에서 화염구를 만들어내었다.
화염구는 맹렬한 열기를 뿜어내며 라프와 귀인에게 화염탄을 쏘아대었다.
돌격은 도저히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한 라프는 돌격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대형 방패를 땅에 내리꽂고는 귀인을 향해 소리쳤다.
\"내 뒤로 숨어!\"
귀인은 재빠르게 달려와 라프 뒤에 숨었고 라프는 화염탄을 받아내는 대형 방패를 온 힘을 다해 붙잡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접글할 수가 없어. 무슨 좋은 생각 있어?\"
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프의 대도를 집고 데몬의 왕자에게 돌격했다.
데몬의 왕자는 비웃는듯한 소리를 내고는 거대한 화염구를 귀인에게 던졌다. 물론 귀인도 가소롭다는듯이 몸을 낮추고 슬라이딩으로 손 쉽게 화염구를 피하고 파고들어 데몬의 왕자의 왼쪽 발목을 대도로 베었다..
그 뒤, 조금의 딜레이 없이 귀인 곧바로 오른쪽 발목도 대도로 베어냈다.
데몬의 왕자는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데몬의 왕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라프와 귀인을 쳐다보며 허공을 향해 입으로 화염을 내뿜기 시작했다.
뿜어져 나온 화염이 둥글게 뭉쳐 거대한 운석, 마치 조그만 태양이 되었을 때, 그 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데몬의 5배나 되는 크기의 운석이 강한 빛을 내자 조각조각 부서지며 지면을 향해 돌격했다.
귀인은 대도를 다시 한 번 꽉 쥐고는 데몬의 왕자에게 돌격했다.
대략 5초정도면 운석이 지면에 닿지만, 귀인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으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귀인은 데몬의 왕자의 오른쪽 무릎을 밟고 점프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귀인은 데몬의 왕자의 머리를 계속해서 대도로 내려찍었다. 한번, 두번, 세번, 마침내 일곱 번째 참격으로 머리에 큰 틈이 생기자 귀인은 그곳에 황금송진을 바른 롱소드를 꽂아넣었다. 그 뒤 롱소드를 발로 힘껏 밟아 데몬의 왕자의 머리 안까지 쑤셔넣었다.
데몬의 왕자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는 롱소드를 빼내려고 발악했다. 그러다 롱소드가 박힌 위치를 헷갈린건지 고통에 힘조절을 잊어버린건지 데몬의 왕자는 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절반으로 쪼개버렸다. 머리 틈 사이에서 용암같이 붉고 걸쭉하며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고 데몬의 왕자의 몸은 바닥위에 엎어져 이따금씩 움찔거리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격렬한 싸움으로 탈진한 귀인은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어버렸고 라프는 귀인에게 손을 뻗었다.
귀인은 그 손에 의지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라프의 손을 잡고는 서로 부축하며 둘이서 고리의 도시로 가기위한 굴 속으로 들어갔다.
4.
라프는 발코니에서 아래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거대한 흑수정, 심연에 잡아먹힌 헤럴드 기사, 정처없이 도시를 떠도는 고리의 기사등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지 이따금씩 착각하게 되었다. 뚜벅뚜벅,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발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귀인이였다.
\"오, 너.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귀인은 조심스럽게 라프 곁으로 다가왔다.
서로 큰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자 안심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같은 장소를 목표로 해서 함께 무사히 도착하다니, 기쁘구만.\"
라프는 웃으며 품에서 황금빛이 도는 에스트 술을 꺼냈다.
\"마지막 남은 술이 있어. 이걸로 축배를 들도록 하자구.\"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마지막 남은 술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술은 라프와 귀인의 인연처럼 더 찬란히 빛나보이는 것 같았다.
\"내 목적과 너의 사명에. 그리고 그게 눈 앞에 있다는 행운을. 자아, 건배하자.\"
쨍!
두 명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각자의 무기를 집었다.
\"그럼, 나는 저주를 풀어준다는 비석을 찾도록 하지. 그걸 발견하면, 분명 생각이 날 거야.\"
라프는 한동안 우물거리다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어떤 자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진짜 이름도... 그리고 계속 무엇을 미워했는지.\"
귀인은 그것을 어떻게 아냐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느낌으로 아는거야. 분명 나는, 그런 남자였다는 것을. 너, 내가 그런 사람이라도 미워하지 말아달라구.\"
5.
수 없이 많은 강적을 만난 귀인은 재정비를 할 겸 힘겹게 주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라프가 힘 없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아, 너, 또 만났군.\"
라프의 목소리는 상당히 초췌해보였다.
\"상황은 어때? 내 쪽은 별로 좋지않아. 저주를 푸는 비석을 발견할 수가 없어. 계속 찾고있는데 말이야. 혹시나, 그런건 처음부터 없었던걸까... 제길, 어떻게하면 되는거지...\"
저주를 푸는 비석.
귀인은 자신이 그 비석을 보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런 모습의 귀인을 본 라프는 자신이 귀인에게 걱정을 끼친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사과했다.
\"...미안하군, 너를 곤란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였어... 네가, 무사한 걸 보고 조금 긴장이 풀어졌었는지도 몰라. 부탁이니 잊어버려줘, 망자같이 말이야.\"
라프가 크게 한 숨을 쉬자 동시에 귀인은 그 비석이 어디에있는지 기억해냈다. 그러고는 라프에게 위치를 말 해 주었다.
\"...너, 그게 진짜야? 아니. 미안, 네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드디어,라는 생각에 라프는 너무나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고마워, 고마워, 바로 거기로 가볼게. 드디어, 모두 기억날 거야. 내가 어떤 자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진짜 이름도. 아아, 너 정말로 고맙다. 그리고, 내 진짜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나는 너의 친구다. 뭘 기억해내더라도, 내가 어떤 자였더라도. 네가 용서해주는 한, 너의 친구로 있게 해줘.\"
라프는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기어올라오는 정신을 부여잡은 채 비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비석으로 향하던 도중, 자신이 귀인을 만난 것이 언제이고 어디인지, 귀인은 어떤 사람인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자신의 시야도 심연에 들어간 것마냥 까맣게 변해버렸다.
6.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순간, 어둠이 걷히자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프의 눈앞에는 쓰러진 자신을 부둥켜 안은채 눈물을 흘리는 귀인만이 있었다.
라프는 어리둥절한 채 원인 모를 불편함이 느껴지는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중갑옷을 뚫은 귀인의 롱소드가 박혀있었다.
피가 손쓸 도리 없이 쏟아져나왔고 피가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다. 라프는 흐릿해진 의식사이에서 겨우 알아차렸다.
\"나는... 망자가 되었던거야?\"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라프의 질문에 귀인은 그저 말없이, 눈물범벅인 고개만 끄덕였다.
귀인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이성을 잃었던 자신이 공격하는 바람에 생긴 상처라는 것을 라프는 깨달았다.
목표가 코앞이였는데....하필이면 그때...
절망감, 안타까움, 허무함. 온갖 감정이 죽어가는 라프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렇지만 라프는 귀인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게 있었다.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있었다.
라프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힘들여 닫혀있던 입을 떼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끝이였는데... 어째서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미 늦었군. 공격해서 정말로 미안해. 그래도, 그래도, 죽여줘서 고마워. 너에게, 친구에게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
라프의 육체는 하얗게 빛나며 서서히 손끝부터, 발끝부터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귀인은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사라져가는 라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것은 그와 보냈던 지나간 시간처럼, 사라져가는 기억처럼 손에 도무지 잡히질 않았다.
라프가 쓰러져 있던 곳에는 그저 라프의 갑옷과 그의 무기만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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