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이고 엮이고,
아울러 얽힌다.
칼날은 언제나처럼, 다시 배를 뚫는다. 날은 녹슬었되, 오직 가로막는 것을 베어낼 부분만이 빛을 번득인다. 살점과 갑옷과 피가, 하나 되어 칼날을 움켜쥔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달라는 듯.
머릿속은 기이할 정도로 깨끗했다. 기억에는 이제 결여된 부분이 한 티끌만큼도 없다.
그렇기에 괴롭다.
나는, 애초에 기억 따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밤을 건너야 한다는 막연한 정서 하나면 족했을 터인데. 대체 무엇이 그리도 아쉽고 무엇이 그리도 서글펐던 것일까.
우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칼날이 배를 뚫고 뽑혀나온다. 참으로 흉측한 광경.
나는, 분명 과거에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하나같이 우스울 정도로 결연했던 모습이었다. 바람이 들을 어루만질 때면 아직도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꿰뚫고, 타자를 베었다. 싸움의 와류 속에서 핏빛에 우리는 물들어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구별될 수 없었다. 갈라지지 못했고 나뉘어지지 않았다.
나는 생명의 흐름을 알았다. 그 속에 있었다. 혼돈이자 질서. 혼돈이자 균형. 혼돈이자 규율. 태초의 유류. 모든 것에 대한 긍정. 나는 만물에 얽여드는 자.
나는 빛의 춤을 알았다. 그것을 타고 흘렀다. 짓이겨진 나무열매와 짓이겨진 벌레로 찬란함을 담아냈다. 시체로 시체를 그렸다. 모든 것에 대한 부정. 나는 만물을 엮어내는 자.
속죄하고 싶었던 것일까? 누군가의 죄를 대속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죄인이 있기는 했을까. 수많은 나는 저주 속에서 하나 되어 뒤섞였고, 이내 본질적 갈라짐마저 메워졌다.
사실 나는 네가 조금 싫었다, 는 영문 모를 말을 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 오두막에서 우리는 결코 갈라져있지 않았고, 서로에게서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여주지 못할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것조차 만들어진 가면이 아닐까, 하는 의문은 언제나 있었다.
나는 처형인, 나는 갈대의 객, 나는 기사, 나는 화가, 나는 도가니, 나는 낭인, 나는 손님, 나는 도, 나는 축복, 그리고 저주.
나는 결코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구분될 수 있는」 자로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나는 없었다. 「내」가 있었다.
갈라짐도 장막도 없이, 새벽 공기처럼 깨끗하게 들여다본 나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이제 「나」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인을 긍정함으로써 나 자신도 긍정받기를 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있는 그대로의 나는 그저 조금 추하고, 조금 아름다울 뿐이었다.
밤과 하나 되어 밤으로 향하는 자. 밤에 녹아들어 황금을 향해 몸부림치는 자. 어쩌면 저 너머 멀리 있는 꿈에 닿을 수 없다는 것 따위 오래 전에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원히 헤엄칠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안에서, 이미 찾았으니까.
「나」는, 밤을 건너는 자. 어둠을 타고 흐르며 피와 화염을 뚫고 기어가는 자. 그저 베고 또 베는 자. 태어난 이상은 생을 향유할 수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길은 보이지 않고, 그렇기에 길은 필요없다.
그래, 길 따위는 필요없었다. 밤을 건넌 너머, 그 무색의 피안에서, 반드시 나의 빛, 나의 태양, 「나」의 이상향을.
「황금 나무」를.
돌아가자. 아직 못 다 그린 그림을 마무리지으러.
그 화폭은 아직 오두막 곁에 있으려나.
이건 개추 507882개 마려운데 진짜
@Psychedelic_surreal 넌 프롬갤의 자랑이다(아마도)
지팽자 감성있어
저널 문체가 제일 맘에 들었어요 간결해서
@Psychedelic_surreal 간결하고 뚝뚝 끊기는 시적인 문체가 취향임
프갤의 문학노인인데숭
웨 노인...?
안 그래도 엘드리치로 하나 쓰고 있어요 훨씬 길게
@Psychedelic_surreal 그윈돌린 구출하는 소설이 필요함 그윈돌린은 행복항 자격이 있음...
@가면군 눈치...
갤의 보배인데숭
우히히
3줄 요약좀
페르소나에게도 사랑받을 권리는 있다
@Psychedelic_surreal 3줄이 아닌데
@ㅇㅇ 3줄 Vs. 요약 후자 승
이거보고 황금나무 불태우러간다
저기 시리즈 보면 알겠지만 몇 년 전 글로 이미 탔습니다 수구
@Psychedelic_surreal 아하! 나올때마다 태워야 문학이 나오는구나!
@leechaem 미친 불 문학은 근데 이제 소재가 없어서 물론 진짜 좋아하긴 해요 다이스키
집행자가 황금나무에 왜 매료되었는지 배경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어떤 연관점이 있는지 모르겠음
그건 원작이나 여기서나 그냥 "보면 웅장하고 멋있고 따뜻하다" 정도의 정서라 그리고 이 글에선 애초에 영원히 밤을 떠돌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수단으로 택한 것이 황금 나무라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어요
@Psychedelic_surreal 아 글 컴플레인이 아니라 밤통 집행자 얘기였음 저널 기억이 안나던데 화가가 그리던게 황금나무던가
@ㅇㅇ ㅖ 저널 마지막 보면 언제 봐도 감동할 수밖에 없다면서 황금 나무에 감탄하는 걸 보면 진짜 그냥 개쩌니까! 정도의 이유인 것 같아요
@Psychedelic_surreal 아니 그러면 저번에 집행자 글카스에서 봤던 추적자 뜌따이에 환장하는 그런 정서랑 별 다를게 없던거였네
@ㅇㅇ 십ㅋㅋㅋㅋㅋ
왜잘씀
히히 감사합니다
엘드리치 문학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