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는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 겸, 다같이 바닷가로 휴가를 가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다들 고된 싸움으로 지쳐있었고, 눈치없는 은둔자의 한마디에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철의 눈 만큼은 달랐다. 과거 암살자 집단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었던 그는 팀워크의 필요성을 몸소 깨닫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조만간 원탁의 구성원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은둔자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녀의 수영복을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삶의 기쁨일지라. 그의 날카로운 눈이 후드 속에서 번뜩였다.
한편, 복수자는 이번 휴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둔자, 그녀는 음탕한 몸뚱아리로 추적자를 유혹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다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은둔자는 계속해서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일단,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지만 마냥 기뻐하는 추적자를 보니 그녀는 휴가 계획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말 못할 고민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 젖소년을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의 볼품없는 몸매로는 어떤 수영복을 입더라도 그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반면 그 흑녀의 몸매를 보라. 같은 여자로서,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탄탄한 허벅지와 윤기가 흐르는 가슴은 같은 여성이라도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초조했다. 결국 복수자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야 만다.
림벨드의 한구석. 한때 전장이었지만, 지금은 골렘과 결정인의 파편만이 가득한 곳. 복수자는 그곳에서 어떤 인물과 만나기로 했다. 그것을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섬뜩하다. 자신이 그를 직접 불러냈다는 것이 그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밖에.
음침한 망토 속에서 '그것'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래다."
짤막한 한마디. 완전을 갈망하는 광자의 목소리. 이루지 못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그런 느낌이 드는 듯한 목소리. 복수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자신은 지금껏 그들과 싸워왔다. 지금은 헬렌도, 프레드릭도, 원탁의 동료들도 없지만 이대로 겁을 먹을 수는 없다. 여기선 강하게 나가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에 말했던 대로. 너의 조건은 뭐지?"
"어리석군."
마치 조롱하는 듯한 대답과 함께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한낱 인간에게 빠져 하늘이 주신 기회를 얻었음에도 스스로 그 천운을 내려놓으려 하다니...역시 암컷이란.. 그 무녀도 그렇고."
'그 무녀'라는 말이 걸리긴 했지만 지금의 복수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급한 마음에 그것을 재촉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너의 조건을 말해!"
"육체는 영혼으로. 영혼은 육체로. 어느 한 쪽이 빠지는 순간 다른 한 쪽도 성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밤의 악마 리브라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말한다.
"육체를 온전히 바꾸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 즉, 영혼이 필요하다."
"너의 요구대로 육체를 변화시켜주마. 대신 너의 영혼은 나의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런 조건으로는 형평성에 어긋나지."
"하루의 시간을 주마. 만약 너가 그 시간 내에 주어진 육체로 그의 마음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면 너의 영혼 극히 일부분만을 가져가도록 하지. 그러나..."
리브라는 킬킬대며 말을 잇는다.
"만약 기한 내에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너의 영혼 전부 나의 소유가 된다. 너는 육체, 영혼 모두 인형이 되어 영원히 나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거래하겠나?"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소중한 존재는 모두 잃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추적자 한 명뿐이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창녀에게 그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리라.
"거래하겠다."
"잇 이즈 던."
순간 밤의 마력이 그녀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친불 기도를 사용하는 듯한 뜨거움에 그녀는 신음했다.
"크흐흑!!"
정신을 차려보니 복수자의 육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가련하고도 냉혹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마치 미의 여신이 현세에 강림한 듯한 모습이었다. 더 이상 관절의 접합부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고, 스스로 은둔자의 가슴과 비교하며 움추리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읏!"
순간 하복부에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재빨리 옷깃을 들춰 확인하자, 그곳에는 천칭의 문양이 아주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기억해라. 기한은 하루. 기한이 끝나면 그 문양이 너를 집어삼키리라."
악마는 유유히 사라졌다. 복수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추적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레이디를 위한 피타빵을 굽고 있었다. 철의눈과 수호자는 책을 읽는 은둔자를 훔쳐보고 있었다. 각자의 사정의 따라, 밤을 건너는 자들은 내일 아침 휴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다음편에 계속
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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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10분안에 안써오면 31일 차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