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도 고대 프롬갤의 유물을 가져왔소


두려운 자들은 뒤로가기를 눌러 지금이라도 벗어나길 바라네


























빌헬름은 눈을 떴다.


첫번째로 드는 의문은 자신이 왜 아직 망자가 되지 않은 것인가


두번째로 드는 의문은 불 꺼진 재는 어디로 간 것인가


세번째로 드는 의문은… 자신이… 왜… 묶여 있는가…


첫번째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의 가슴팍에 단검이 꽂혔던 자리에서 에스트의 잔향이 풍겼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에스트를 먹인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두번째 의문과 함께 그의 눈 앞에 서있었다.


불 꺼진 재.


그는 팔짱을 낀채로 빌헬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빌헬름을 살린 것도 결박한 것도 아마 그이리라.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 내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하라."



엘프리데를 섬기는 명예로운 기사인 빌헬름에게 포로로 잡힌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치욕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인질로 잡혀 자신의 주인에게 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럴 바에야 죽음을 택하는 것이 기사의 도리이리라.


그러나 불 꺼진 재는 비열한 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을 똑똑히 지켜보도록."



빌헬름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빌헬름의 시선이 어두운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른채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듯한 화가 소녀가 있었다.


눈과 같던 하얀 피부는 무엇에 맞았는지 거칠게 부어올라 붉게 되었고 눈물이 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자신이 감금했던 아이이지만 물리적인 폭력은 행사한 적도, 그럴 생각도 전혀 해본 적 없는 빌헬름이었다.


다만 불 꺼진 재의 악랄함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본 인간 중 최고의 쓰레기로군."



씹듯이 뱉은 말에 드디어 불 꺼진 재가 반응했다.



"하지만 너는 그 쓰레기에게 굴복하게 될거야."



그리고는 품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해주석. 망자의 신체를 일순간 인간으로 되돌리는 기적의 돌.


론돌에서는 꽤 흔한 물건이었으나 회화 세계로 몸을 숨기고 난 후에는 본 적 없는 물건이다.


불 꺼진 재는 해주석을 빌헬름의 투구 사이로 억지로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 녹아내린 해주석이 빌헬름의 육신을 감싸며 그를 서서히 인간으로 되돌렸다.



"앗, 크윽…!"



그러나 망자를 기준으로 맞춤한 얇은 갑옷이 그의 부풀어오르는 육신을 크게 짓눌러왔다.


산채로 매몰되는듯한 고통에 빌헬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오, 갑옷 안은 꽤나 비좁은가보군. 내가 좀 도와줘야겠는데."



그러면서 그 거친 손으로 빌헬름의 갑옷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어깨를 덮고 있던 천을 거칠게 잡아뜯고 갑주의 연결고리를 풀어내 하나하나 천천히, 빌헬름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갑옷까지 바닥에 떨어지자 빌헬름은 해방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알몸이 된 자신의 처지에 이내 수치심이 그의 얼굴을 붉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인간의 모습이 된 것이 대체 얼마만인가.


비좁은 갑주 속에서 오랜세월 햇빛조차 닿지 않은 그의 피부는 백옥과 같이 하얀빛을 띄었고, 쉼없는 단련으로 형성된 그의 다부진 근육은 그를 신화 시대 전사의 나신처럼 아름다운 형상을 띄게 만들었다.


그런 빌헬름을 보며 불 꺼진 재는 입맛을 다셨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지?"



불 꺼진 재는 대답 대신 빌헬름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고는 그 귀에 그의 입술을 가까이 했다.



"말했듯이, 너는 나에게 굴복하리라."



그 순간 분홍빛의 마력 덩어리가 빌헬름의 귀를 타고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그의 고간 사이, 오닉스 블레이드가 서서히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묻겠다, 빌헬름. 너의 주인은 누구지?"



"나의 유일한 주인은 엘프리데님이시다…!"



그 순간 불 꺼진 재는 오닉스 블레이드를 잡고는 손으로 검집을 만들었다.


납도,


발도,


납도,


발도,


제사장 달인의 검술이 이랬을까, 엄청난 속도로 반복되는 납도술과 발도술에 빌헬름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불 꺼진 재의 말이 다시 한 번 빌헬름의 뇌리를 강타했다.



"다시 묻겠다, 빌헬름. 너의 주인님이 누구지?"



"나의… 주인님은…!"



촥-


그 순간 오닉스 블레이드의 검신 끝에서 엘프리데의 흑염이 뿜어졌다.


다만 그 흑염은 지극히 백색을 띄고 있었으며 불꽃처럼 일렁이기보단 물처럼 흘러내린다는 것이 차이점이리라.


동시에 빌헬름의 뇌를 벼락 말뚝이 강타라도 한듯이 엄청난 쾌락이 내달렸다.


그의 눈은 치켜올려진채로 허공을 바라보았으며 벌어진 입에서는 못다한 쾌감의 신음이 새어나왔다.



"앗… 읏… 큿…"



결박당한 채로 허리를 잔뜩 튕겨올린채 흑염을 질질 흘리는, 지극히 꼴사나운 모습이었으나 그 모습이 오히려 불 꺼진 재를 자극한 모양인지 그는 허리춤을 풀었다.


아직까지도 쾌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빌헬름이었으나 무언가 자신의 허리춤을 굳게 잡는 느낌에 그는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고야 말았다.


거대한, 아주 거대한 검을.


그 말도 안 되는 거대한 형상을 보고 빌헬름은 당황하여 급히 말했다.



"대체 무슨…!"



빌헬름의 것이 오닉스 블레이드라면,


불 꺼진 재의 그것은 마치 어둠 변질 그레이트소드.


인간이 들 수 있는 한계라 칭해지는 모습답게 그것은 매우 검었으며 또한 매우 거대했고 또한 짓물러 있었다.


분명 관통 속성이 없는 특대검일진데 불 꺼진 재의 그것은 서서히 빌헬름의 다크-링을 관통하기 위해 다가서고 있었다.



"이 미치광이 자식…!"



그것이 빌헬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의 언어였다.


이후로는 흡사 짐승의 울부짖음, 절규만이 어두운 공간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수시간이 흘렀다.


빌헬름의 백옥과도 같이 새하얗던 피부는 불 꺼진 재의 흑염에 가차없이 유린당했고


단단히 닫혀있던 그의 다크-링은 무참히 관통당하여 약간의 피와 함께 흑염을 줄줄히 뿜어냈다.



"이제 마지막이다…! 화가여, 지금 이 모습을 똑똑히 그려내라!!"



불 꺼진 재는 빌헬름의 두 허벅다리를 단단히 잡은채,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쳐올렸다.


동시에 중후한 음색을 자랑하던 빌헬름의 목소리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아웃, 큿, 하흣…!"



그리고 불 꺼진 재의 목소리가 빌헬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빌헬름. 너의 주인님이 누구지?"



파아앗-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흑염이 불 꺼진 재의 그레이트소드로부터 뿜어져나오며 빌헬름의 다크-링을 가득 채우고, 이마저도 부족하다는듯이 다크-링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 형상은 마치 고리의 기사의 갑주와도 같았다.


빌헬름은 아득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저의… 주인님은… 불 꺼진… 재님…"



'아아, 엘프리데님…'



이제는 그녀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 빌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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