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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비웃듯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은 다시 잿빛으로 물들었다.

"이것은 신께서 내리신 마지막 자비입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구원이 될테니'

사제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수도원 밖으로 배웅했다.
하지만 그분이 등을 돌리는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수도원의 골칫덩이이자 '저주받은 괴물' 이었던 나를
마침내 합법적으로 내쫓을 수 있게 된것에 환희하고 있음을

그 숨죽인 안도에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나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림벨드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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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차가운 돌바닥과 사람들의 꺼림칙한 시선.
내 첫 기억이었다.

존재를 인지한 시점에서 부모의 온기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내 또래 아이들은 나를 보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고,
어른들은 내가 지나간 자리에 소금을 뿌렸다.

불길한 아이.
생명을, 힘을 빨아들여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저주받은 삶.
어린 시절, 배고픔보다 무서운것은 힘의 갈망이었다.

갈증이 한계에 다다르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더이상 견딜수 없을 때면,
나는 숲으로 도망쳐 짐승들을 잡아먹었다.

처음은 작은 토끼였다.
그 작고 여린 눈망울이 손아귀에서 꺼져가는 것을 보는것은 괴로웠다.

하지만 속에서 타오르는 갈증을 잠재우지 않는것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 뜨거운 피와 살을 씹으며 생명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것을 느끼자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내가 인간이 아님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집요해졌다.
힘을 섭취하지 못하는 날이면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떨림과 통증이 몰려왔다.

제발 멈춰달라며 신에게 빌면서, 버티고 버티다 정신을 차리고나면
내 팔은 이빨 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뜯어먹어서라도 힘을 흡수하려는 뒤틀린 본능.
그것이 나의 실체.

살아가는 매 순간이 고문이다.
하지만 죽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무섭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는
나를 비참한 생의 끈에 매달리게 했다.

그 공포를 동력 삼아 나는 전장을 전전했다.
수많은 이들의 인생이 시작되고 끝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시체 더미 위에서 그들이 흘린 생명력을 탐하며 연명했다.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하며 '장의사'라 불렀다.
죽음을 수습하는 자.
하지만 나는 죽음의 찌꺼기를 먹고 사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 줄 수 없다.
고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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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흐린 날. 바다에서 밀려온 거품 섞인 파도가 오늘따라 유독 검고 탁해 보였다.

림벨드에 퍼진 '밤의 힘'.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에겐 재앙이었지만,
내겐 기이한 안식과도 같았다.

사제들이 축복이라 불렀던 성수보다,
전장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던 비릿한 생명력보다
이 차갑고 묵직한 밤의 공기가 내 갈증을 더 확실하게 달래주었다.

저주를 저주로 덮는 격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느끼는 '평온'은 너무나도 달콤하다...
사제님의 말대로 이곳이 나의 구원인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저주, 나에겐 축복.
입에 대면 소름 끼칠 정도로 쓰고 불쾌한 뒷맛이 남았지만,
그 힘이 혈관을 타고 흐를 때면 평생 나를 따라오던 불안과 떨림이 가라앉는다.

‘만약 이 밤을 극복한다면, 나도 변할 수 있을까?’

변하지 못한다면?

밤의 힘은 놓아버리기에는 아깝다...

....

그러고 보니 오늘 긴히 부탁할게 있다고
하인 인형님이 말했던 것 같다.

부탁이라면 뭘까, 또 누군가의 장례식이라도 치르는걸까.
메이스를 만지작거리며 하인 인형님이 계신곳으로 갔다.

"...아, 와주셨군요. 당신께 전해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인형님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한 정중한 부탁이 아니었다.

"밤을 건너는 전사들은 밤을 죽이기 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밤을 흡수하지 않으면 힘을 유지할 수 없는 몸.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도가 지나쳤어요.
당신은 밤 그 자체와 다름없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장 두려워하던 말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섬뜩한 선언과 함께 하인 인형은 품속에서 수많은 팔을 꺼내 무기를 치켜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수천 번은 휘둘러 손때가 묻고 문양이 닳아버린 메이스가 공기를 갈랐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인형의 머리를 부숴버리자
그는 바닥에 쓰러지며 처절하게 외쳤다.

'아아...뭘 하신 겁니까...밤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여러분...! 제발 아무나 이분을... 죽여주세요....!

그의 비명은 신호탄이었다. 예배당의 어둠 속에서 원탁의 동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들은 더 이상 동료가 아닌 처형자였다.

가장 처음 집행자가 무자비하게 요도를 휘둘렀다.

얕게 베였다. 피가 난다.

안돼...

피가 나면...

억제할 수 없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몸이 야수처럼 날뛴다.
이어지는 공격을 제빠르게 피하고는 메이스를 휘둘렀다.
갈대의 땅에서 온 사무라이는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다.

다음으로는 수호자와 은둔자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나를 미워하고 있어. 역시 다들 나를 괴물로 보고 있었어.'

비참함이 분노가 되어 메이스에 실렸다.

'해버려!'

어둠속 목소리가 사납게 소리쳤다.

목소리를 따라 목구멍에 손을 넣고 그대로 뽑아내었다.
뒤틀린 뼈에 이끌린채, 그대로 방패를 부수고 지팡이를 부러뜨린다.

추적자, 철의 눈...

내가 의지하려 했던, 혹은 나를 받아들여 줄지 모른다고 믿었던 이들이
차례로 나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고,

나는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러 그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

마침내 정적이 찾아왔다.
사혈이 멈추자 트랜스의 후폭풍이 몰려왔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자 시야가 심하게 일렁인다.
어지러워 무릎을 꿇었다.
  
"그만 하세요!"

그 순간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이 고막을 찌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발치에는 시체도, 핏자국도 없었다.

여기는... 예배당...?

내가 부쉈다고 생각한 두개골은 목재 가구들이었고
부서진 줄 알았던 하인 인형은 다른 문 쪽에서 걸어와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이 되셨나요?"

인형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방금 전 나를 괴물이라 매도하며 죽이려 들던 그 섬뜩한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꿈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힘없이 무기를 떨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주변이 엉망이다.

"...죄송해요."

"....다행이네요, 이대로 영웅님이 미쳐버리시나 했어요.
이제는 괜찮습니다. 제 목소리가 닿았습니다. 이곳은 안전해요.
잠시 편히 계세요... 저는 저쪽에 있겠습니다."

인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내 안의 폭풍은 잦아들지 않았다.
방금 본 환각은 내 무의식이 투영된 결과였다.
언젠가 저들이 나를 죽이러 올 것 이라는 공포가
밤의 힘과 뒤섞여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다시 찾아온 갈증이었다.
환각 속에서 힘을 쏟아부은 탓인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무 목이 마르다...'

그러지 마.

'힘을 삼켜야 한다...'

안돼.

이성보다 본능이 앞선다.

나는 예배당 구석, 농밀한 밤의 기운이 스며 나오는 벽으로 걸어갔다.

콰득!

끼기긱!

메이스로 벽을 거칠게 부수자
원탁에 스며든 차가운 밤의 힘이 안개처럼 쏟아져 나왔다.

"으으음..."

그리고 나는 품위를 잃은 야만인처럼 그것을 허겁지겁 들이킨다.

"핥짝...츠르릅...꿀꺽..."

쓰다. 역겹다. 뜨겁다.. 차갑다.. 그럼에도 달콤하다...

벽에 매달려 어둠을 집어삼키는 내 모습은 누가 보아도 발정난 짐승 그 자체였다.

"하아...하아..."

더 먹고 싶어... 더 핥고 싶어... 전부 빨게 해줘..

"......!"

그순간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는 핥고 있던 벽에서 입을 떼고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에는 아직 밤의 잔재가 검게 묻어 있었다.

내 추하고 굶주린 밑바닥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누군가 보고 말았다.

들켰다...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발자국의 정체를....확인해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