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자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오두막,
황금나무의 빛조차 희미하게 스며드는 그곳에서
노교수 엘드릭은 낡은 양피지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안경 너머 눈빛은
틈새의 땅 곳곳에 흩뿌려진 파편적인 진실을 꿰뚫어 보려는 듯 형형했다.
"마리카... 라다곤... 그리고 멜리나..."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책상 위에는 부서진 비석 조각, 빛바랜 고서,
그리고 몇몇 유물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이 파괴된 세계의 기원에는 언제나 '신'의 존재가 있었다.
플라키두삭스...
고룡의 시대, 황금나무가 싹트기 전,
그는 떠나버린 신을 기다렸지.
그 신은 누구였을까?"
엘드릭은 양피지를 훑는 사이
한 손가락으로 고룡의 형상이 새겨진 작은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 밤빛 눈의 여왕... 그녀가 휘둘렀던 신 사냥의 검의 기록...
그 검에 새겨진 흑염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지.
신의 생명 자체를 거두는 힘...
어쩌면 그녀는 용왕의 신을 살해했던 것이 아닐까?"
엘드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틈새의 땅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들이밀었고,
그의 '프롬뇌'는 그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데 지칠 줄 몰랐다.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연구 노트에 새로운 가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마리카 이전 시대의 신 = 용왕의 반려인 이름 모를 신.'
밤빛 눈의 여왕은 이 신을 살해하고,
흑염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했으나,
말리케스에게 패배하고 운명의 죽음은 봉인되었다.
마리카는 이 사건을 통해
신성한 존재 또한 죽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리라.'
"교수님, 또 그 기록들을 탐구하고 계셨군요.
벌써 황금나무의 가지 사이로 밤이 찾아오려 합니다."
뉘역뉘역 저물어가는 창문 빛 사이로,
엘드릭의 조수, 레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틈새의 땅 외곽의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문의 영광보다는 서고에 쌓인 금기된 지식에 더 매료된 소녀였다.
그녀는 엘드릭이 펼쳐놓은 복잡한 신들의 가계도와 지도,
문서들을 능숙하게 정리하며 그의 곁에 앉았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미안하군. 늦게까지 자네도 고생이 많아."
그녀는 엘드릭이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프롬뇌'를 굴릴 때,
그를 현실로 붙잡아두는 유일한 닻이었다.
"아닙니다, 교수님의 사색을 돕는데 도움만 된다면 기쁠 다름입니다."
엘드릭이 펜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엘드릭은 약간 멋쩍은 모양이었다.
이럴때 그에게 필요한건 새로운 사색거리들 이리라.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불탄 손' 말이에요.
만약 멜리나가 정말 마리카의 숨겨진 딸이라면,
그녀의 불꽃은 세 손가락의 '광기'가 아니라
어머니의 '원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수님의 가설대로 멜리나가 흉조의 아이,
모그와 함께 세 손가락과 접촉 했다고 가정한다면,
피의 군주가 된 모그가 모습 없는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마 그에게서 거대한 공포를 보았을 거예요.
그녀가 세 손가락의 말을 듣고
미친불을 태우려는 그 '빛바랜 자'를 그토록 간절히 막아서는 건
단순히 사명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그 신체가 '타버리는 감각'을
모두가 겪지 않길 바란 연민일지도 몰라요."
엘드릭은 그녀의 새로운 시각에 감탄하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붉게 충혈된 눈을 비볐다.
"레아, 자네는 가끔 나보다 더 깊은 곳을 보는군.
내 가설들이 그저 노인의 망상처럼 들리지는 않나?"
"그럴리가요. 우리는 깨어진 파편의 세계를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인걸요."
그들은 사인과 갈고리 손가락을 사용하여
수많은 '빛바랜 자'들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어떤 세계는 어둠에 잠겼으며,
어떤 세계는 다시 과거처럼 찬란하게 부흥하였다.
그리고 어떤 세계는... 광기에 휩싸여 영원히 불타기도 하였다.
엘드릭이 수많은 세계를 관찰하며 탐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프롬뇌였다.
엘든링을 둘러싼 수많은 신과 전설의 영웅들의 이야기.
그 속에 숨은 진실들과 잊혀진 탐구거리들을 발굴하고 해석하는것은 엘드릭의 기쁨이었으며
그것은 이제, 레아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이제 그만 쉬세요. 멜리나의 사명도, 마리카의 눈물도 잠시 덮어두고요.
교수님이 쓰러지시면 어떤 진실들은 정말로 영영 묻혀버릴 테니까요."
창밖으로는 어느덧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레아는 엘드릭의 손에서 펜을 부드럽게 뺏어 잉크병 옆에 내려놓았다.
"고맙네, 레아.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벌써 미친 불에 타버린 망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엘드릭은 레아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비록 몸은 무거운 사색으로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그녀와 나눈 대화 덕분에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만 자야겠군.
내일은 바로 그 그림자의 땅을 탐구하러 가는 날이니 말이야."
"교수님? 그림자의 땅이라면..."
"맞아, 틈새의 중심, 온갖 죽음이 흘러들고,
온갖 죽음을 가라앉힌다는 곳이지.
새로운 빛바랜 자가 그 지역을 탐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네.
그곳에서 새로운 이야기와 숨겨진 진실들을 탐구하는걸세.
미켈라와, 고드윈, 마리카와 그 외 수많은 전설들의 이야기를 말이야!"
엘드릭은 그 답지 않게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혔고,
레아는 조용히 쿡쿡 거리며 커튼을 쳤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고,
책상 위에는 여전히 '신살의 여왕'과
'거짓 손가락의 무녀'의 이야기 담긴 양피지가
다음 밤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계속 되지 못한다.
......
"아니야!! 그건 분명 명예로운 죽음의 축제였어!
이런 불결한 결혼식의 전조가 아니었단 말이다!!"
엘드릭은 비명을 지르듯 내뱉으며 양피지들을 마구잡이로 찢어버렸다.
"교수님...?"
큰 소란에 깜짝 놀란 레아는 겁에 질린채 서고로 달려왔다.
"수 많은 전사들이 피를 흘리며 그에게 영예로운 안식을 주었지,,,
제렌과 빛바랜 자들이 일궈낸 그 숭고한 마무리가...
고작 철없는 어린아이의 변덕 섞인 약속 하나 때문에 번복되었다는 건가?
죽은 자의 시체를 기워 붙이고, 그 위에 영혼을 강제로 밀어 넣어 꼭두각시 왕으로 세우는 것이...
우리가 그토록 경외했던 '중력의 왕'의 본모습이란 말이냐!"
엘드릭은 신의 현현을 기대하며 파헤쳤던 기록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직관성도, 설득력도 없어.
이건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준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냥 설명하기 귀찮아서 던져둔 구멍일 뿐이야!!!
라단이 왜 그 약속에 동의했는지, 그의 의지는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런 묘사도 없이 그저 '결과'만 툭 던져졌다.
우리가 밤을 새우며 고민했던 그 모든 '프롬뇌'가,
결국 창조자의 부실한 전달력을 메우기 위한 가련한 몸부림이었다니...
하하!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는 진실을 목도한 콜린처럼 허망하게 웃었다.
"교수님, 일단 진정하세요!"
레아는 엘드릭의 곁으로 다가가 담요를 덮어주려 했지만,
엘드릭은 그것을 거칠게 밀쳐내었다.
그의 눈에는 이제 탐구심 대신 깊은 냉소만이 가득했다.
"라단이 조롱거리가 되었더군.
별을 부수던 용맹한 사자는 이제
미켈라의 꼭두각시마냥 휘둘리는 두창똥게이로 불리고 있어.
한 시대의 우상이었던 영웅이 이렇게 떨어지다니...
"라단. 단라! 라단!!!"
그는 사납게 울부짖었다.
"이건 신화의 종말이 아니야,
신화의 모독이다.."
엘드릭은 촛불을 훅 불어 껐다. 암흑이 오두막을 덮쳤다.
"레아, 이제 나가보거라. 더 이상 조사할 건 없어."
"하지만 교수님, 아직 마리카의 비밀이나..."
"마리카? 그 여자도 결국은 그냥 승리한 인간이었을 뿐이지. 신성함? 거대한 의지?
다 집어치우게. 이 땅의 역사는 그냥
망가진 쓰레기들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우리는 그저 똥 구덩이 속에서 보석을 찾겠다고 설쳐대던 머저리들이었다고!"
어둠이 내려앉은 서고에는 찢긴 양피지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한때 신성한 계시처럼 다루어졌던 고대어 기록들은
이제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교수님... 제발..."
레아는 떨리는 손으로 얼마 남지 않은 촛불을 키고는 공포에 질렸다.
불빛에 비친 엘드릭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수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식에 대한 갈망 대신,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통째로 부정당한 자의 지독한 허무만이 고여 있었다.
"레아, 저기 떨어져있는 모그의 기록을 보겠니..?"
엘드릭이 텅 빈 눈으로 구석 귀퉁이의 양피지를 가리켰다.
"우리는 그가 거대한 외신의 가호를 받아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던 야심가인 줄 알았지.
흉조의 저주를 축복으로 승화시키려던 고독한 혁명가인 줄 알았어.
..그런데 결과가 뭔가?
고작 어린아이의 매료 한 번에 넋이 나가 제 몸과 궁전까지 상납한...
세뇌 최면의 희생양에 불과했어.
그의 거창한 대의는 어디로 갔나?
그는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다고!"
엘드릭은 책상 위에 놓인 마리카의 석상을 손으로 쓸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쩍, 소리와 함께 여신의 머리가 박살 났다.
"우리가 퍼먹던 이 신화는 이제 없다 레아. 이건 신들의 서사시가 아니라,
뒤틀린 욕망을 가진 자들이 벌이는 역겨운 치정극이다.
마리카는 신이 아니라 그저 가해자가 된 피해자였고,
미켈라는 구원자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입맛대로 주무르려던 오만한 독재자였지.
이딴 걸 분석하겠다고 밤을 새웠다니, 내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군."
"교수님, 그래도... 우리가 찾아낸 다른 프롬뇌 조각들은..."
레아는 낮게 울먹이며 그의 옷깃을 집고 호소했지만,
"태워버리게."
엘드릭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자를뿐이었다.
"레아. 빛바랜 자가 엘데의 왕이 되어 라단과 미켈라를 쓰러뜨렸을 때,
나는 성취감이 아니라 공허함을 느꼈다.
우리가 얻어낸건 시대를 이끄는 규율이 아니었어.
근친과 기만으로 점철된 기괴한 연극의 막을 내린 것 뿐이었지.."
엘드릭은 비틀거리며 침상으로 향했다.
한때 틈새의 땅 모든 비밀을 파헤치겠다던 그 당당한 어깨는
이제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모두 끝이다. 내 모든 연구를...불태우거라."
꺼져가는 촛불, 빛을 잃어가는 서재에서 그녀의 나지막한 흐느낌만이 들려왔다.
오두막 밖, 황금나무는 여전히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경외감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거대한 코딩덩어리가 내뿜는 잔광(殘光)에 불과했다.
세키로 2만이 유일한 구원
존나씹명작
모그니뮤ㅠㅠㅠ
ㅋㅋㅋㅋㅋㅋㅋ
뭐냐 왜 진짜 명글이냐
눈을 떴구나 루비콘3로 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