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번개가 하늘을 찢어놓았다.
세차게 휘몰아치던 눈보라조차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푸른 하늘 아래 사라져갔다.
지축이 흔들리며 거대한 무언가가 그 존재감을 서서히 드러냈다.
처참하게 파괴된 우주 공항을 배경으로 거대한 그것은 끝을 모르고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불길한 노란빛을 뿜어내는 3개의 거대한 눈동자… 아니, 드릴 3쌍.
흉포한 짐승의 눈알 같은 그것과 눈을 마주했다.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WARNING: 급격한 심박 수 상승 감지]

그의 AC, '나이트폴'의 파일럿 콕핏 내부가 붉게 물들며 경고음을 연신 뿜어냈다.
거칠게 고동치는 심장이 뿜어내는 피가 그의 온몸을 내달렸다.
동시에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뇌를 강타했다.
망막에 비친 심박수 로그는 순식간에 천장을 부술듯 요동치고 있었다.

[WARNING: 급격한 심박수 상승 감지]
[WARNING: 급격한 심박수 상승 감지]
[WARNING: 급격한 심박수 상승 감지]
<…븐. 레이븐?>

"…"

그는 눈을 떴다. 눈을 떴음에도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그의 잠자리, 속된 말로 '관짝'이라 불리는 그것은 외부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는 구조인 탓에 빛도, 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강화인간들은 죽은 듯이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래, 죽은 듯이.
감정이 거의 거세된 강화인간인 그에게 '꿈'이란 과거의 유물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악몽이라. 그것의 공포는 강화 인간의 뇌리에조차 깊이 새겨진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레이븐? 앓는 소리를 내던걸요.>

그의 머릿속 환청-환청 본인은 스스로를 '에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이 걱정스럽다는 듯 안부를 물어왔다.

"꿈을… 꿨어. 머리가 아프군."

<너무 무리한 모양이네요.>

"그럴지도."

철컥.
둘의 대화를 끊고 관짝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의 귀에 박힌 이어폰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어났나, 621. 곧 아이스웜 토벌전에 대한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다. 합석하도록.]

"예."

대답을 마친 강화인간 621, 레이븐은 일어나는 대신 망막에 비치는 메뉴를 조작했다.
뇌에 직접 영상을 때려 박는 기술 덕에 합석이랄 것도 없었다.
그의 주인, 월터가 공유해준 채널에 들어가자, 알아볼 수 없는 벌레 같은 글자가 수도 없이 나타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보안 인증 절차를 끝마친 시스템이 드디어 정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MAIN SYSTEM]
[MISSION BRIEFING]
[LOADING…]

마침내 로딩이 끝나자 평소에 다를 바 없는 칙칙한 브리핑 창이 그의 망막을 한가득 메웠다.
아니, 평소와는 조금 다르긴 했다.
웬일인지 서로 만날 일 없는 두 세력, 발람과 아르카부스의 인물들이 브리핑 창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의문을 품기도 전에 월터의 목소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잘 들어라, 621. 이건 발람과 아르카부스 양사가 협력해 입안한 작전이다. 지금부터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과연 그런가.
브리핑 창 아래에는 발람과 아르카부스의 쟁쟁한 인물들이 가득했다.

발람 인더스트리의 AC 부대, '레드건' 대장인 G1 미시간과 그 수하 G5 이구아수.
아르카부스 코퍼레이션의 AC 부대, '베스퍼'의 실세인 V.II 스네일과 V.IV 러스티.
거기에 RaD의 수장인 신더 칼라까지.

그야 말로 이 행성, 루비콘의 핵심 세력의 수장들이 다 모여있는 듯한 형세였다.
그런 사람들이 레이븐,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흠, 흠.]

누군가는 헛기침 소리만으로도 거만함을 연출할 수 있는 유별난 능력이 있었다.
그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 스네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말을 하면서도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거만함이 방울져 떨어지는 듯 했다.

[먼저 제가 전제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건 양사가 합의한 일시 정전 협정에 기반한 행성 봉쇄 기구에 대한 동시 습격 작전입니다.
목표는 적측이 보유한 거점군 및 강습 함대, 그리고 일전에 기동한⋯]

치지직-
그리고 통신관을 찢는 듯한 잡음이 스네일의 말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호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브리핑에 끼어들었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요컨대 루비콘 각지에서 봉쇄 기구와의 총력전이 일어날 거다.
그리고 네놈들은 꽝 제비를 뽑았지! 이곳에 있는 면면이 맡을 임무는 가장 큰 위협인 빙원의 괴물을 퇴치하는 것이다!]

지루하고 현학적인 브리핑에 질린 듯, 미시간이 짧고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딴 걸 누가 할까 보냐. 난 멀리서 구경만 하도록 하겠어.]

곧이어 불만 가득한 볼멘 소리가 무전에 날아들었다.
레이븐과 여러 악연을 쌓고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파일럿. 이구아수였다.

[G5! 전선에 나설 멤버가 하나 확정된 것 같군.]

이구아수의 파업은 미시간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브리핑 창 중앙에 이구아수의 AC, '헤드브링어'의 사진이 박혔다.
그 옆에 적힌 [FRONTLINE]이라는 글자가 그의 역할을 말해주었다.

다음으로 신더 칼라의 독거미 앰블럼에 빛이 들어왔다.

[아이스 웜의 다중 코랄 방벽을 무효화할 수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그건 프라이머리 실드와 세컨더리 실드, 두 겹의 실드로 인해 철벽의 방어력을 자랑하거든.]

[첫 번째 실드를 돌파할 수단은 아르카부스에서 제공하겠습니다.
최신 병기 「스턴 니들 런처」입니다. 이걸 안면부에 맞추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테죠.]

스네일이 영상 자료를 내보내며 치고 들어왔다.

날개를 펼친 듯한 미사일을 장착한 신병기의 모습.
미사일이 아이스 웜에 부딪히자 쉴드가 소멸하는 시뮬레이션이 보였다.

[두 번째는 어쩔 거지?]

탐탁치 않은 듯한 미시간의 목소리에 곧바로 신더 칼라가 반응했다.

[철야해서 만든 장난감이 있어. RaD 근제 「오버드 레일 캐논」이지.
버트럼 구 우주 공항의 대기 전력을 돌리면 위력은 충분할 거란 계산인데⋯ 문제는 명중 정밀도란 말이지.]

[그런 거라면 사수는 맡겨달라고. 저격에는 자신이 있거든.]

지금껏 조용히 있던 러스티가 사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연이어 스네일이 직접 현장 감독으로 나서고, 신더 칼라는 탄막 요원으로 채티를 추천했다.

[남은 건 스턴 니들 런처를 누가 맞히러 가느냐인데⋯]

러스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면 가운데에 'G13' 아이콘이 날아들었다.
미시간이 멋대로 G13, 즉 레이븐을 런처 담당자로 내보낸 것이다.

[최전선에서 날뛰는 담당이라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G13! 이야기는 들었겠지? 즐거운 소풍의 시작이다!]

미시간의 독단에 의한 결정임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일까.

그러나 그 레이븐의 머리 속에서는 아이스 웜의 누런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의 공포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마주하고도, 그는 움츠러들지 않을 것인가.

브리핑은 몇 가지 세부사항을 조정하는 것으로 곧 마무리되었다.
떠들석하던 것이 거짓말인 듯 조용해진 통신관으로 월터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이 정도의 세력이 한자리에 모이는 작전은 거의 없다. ⋯다녀와라, 621.]

두근.
두근.

아직 전장에 나서기 전임에도 심장이 요동쳤다.

---

덜컹.
충격이 레이븐의 기체를 뒤흔들었다. 천천히 운반용 헬리-컨테이너의 문이 열리며 햇빛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내부에 수납되어 있던 레이븐의 AC, 나이트폴의 단안 카메라에 볕이 들며 붉은 반사광이 안광처럼 돌았다.

[메인 시스템: 전투 모드 기동]

망막에 글자가 드리우며 나이트폴이 짧은 잠에서 깨어났다.

[제너레이터 상태… 37%… 78%… 99%… 20%… 양호]

기체 후면의 제너레이터가 출력을 올림에 따라 포효했다.
동시에 등 뒤와 다리 관절 등 각 부에 심어진 부스터 모듈에서 푸른색 불꽃이 짧게 여러 번 뿜어져나왔다.

[부스터 상태 양호]

철컹. 철컹.
금속끼리 서로 마찰하고 때리는 소리가 컨테이너 내부를 울렸다.
나이트폴의 왼손에 들린 거대한 근접 전투무기, 'PB-033M ASHMEAD' 일명 '파일벙커'의 쇠말뚝이 전진-후퇴하는 소리였다.
어깨에 장비한 로더에서도 '송버드'와 'BLM-G1/P32DUO-03'의 미사일 발사관도 금방이라도 발사할 것처럼 전개되다가 다시 접혀들어갔다.

[화기관제 시스템 양호]

모든 점검을 마친 나이트폴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그 침묵 사이로 월터의 무전이 들어왔다.

[…시간이다, 621. 준비는 됐나.]

레이븐이 OK 사인을 보내자 컨테이너 내부의 크레인이 나이트폴을 헬리-컨테이너 외부로 운반했다.

시야가 트이며 주변이 레이븐의 눈에 확 들어왔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무한한 설원의 절경.
몰아치는 눈보라 덕에 시계가 썩 밝지 않았다. 눈이 햇빛마저 삼킨 것이다.
어디가 땅이고 하늘인지조차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런 광경도 잠시, 망막에 박힌 지도에서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다.

[작전 지역까지 도착 예정: 10… 9… 8…]

카운트 다운에 맞추어 그의 심장 박동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전에 없었던 신체 반응에 레이븐도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작전의 중심은 당신입니다, 레이븐.>

그때 에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가죠. 저도 최대한 서포트 하겠습니다.>

레이븐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잠금쇠가 풀리고, 설원 한가운데에 어둠이 스산하게 내렸다.

수북이 쌓인 눈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며 내려선 나이트폴은 곧장 부스터를 전개했다.
초고열로 분사되는 주황색 포효가 뒤쪽으로 길게 꼬리를 남기며, 나이트폴은 유성처럼 날아갔다.

이미 그의 눈에는 작전에 참가한 3대의 AC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각양각색의 무장을 장비한 AC들이 저마다의 궤도로 비행하며 설원을 내달렸다.

통신 채널에 불이 들어오며 미시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발람과 아르카부스의 합의에 기반해 혼성 AC 부대에 의한 작전 행동을 개시한다.
시작한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들아!]

저 멀리 보라색과 은색으로 도장된 AC, 스네일의 '오픈 페이스'에서도 무전이 날아들었다.

[어중이떠중이 제군들, 통솔을 잊지 않도록.]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축이 흔들렸다.
천지가 통째로 뒤엎어질 듯한 기세로, 그것이 지표를 부수며 튀어나왔다.

IA-02: 아이스 웜

인류에겐 아직 너무 일렀던 코랄 병기. 그리고 인류가 상대하기엔 너무 벅찬 무언가.
지렁이 같은 길쭉한 몸체는 거의 파괴 불가능한 장갑판으로 덮여있다.
그나마 이빨이 박힐 만한 부분은 정면의 굴착용 드릴 부분.

그걸 노린다는 건, 아이스웜의 정면에 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꿀꺽.
레이븐은 긴장 속에 침을 삼켰다.

-우우우웅-!!!!!

거대한 제너레이터가 작동하는 소리가 대기를 흔들었다.
아이스 웜도 AC 부대를 인식했는지 곧바로 땅을 파고들며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먼저 귀찮은 방벽을 벗긴다. G13! 아르카부스가 억만금을 때려 부은 초호화 전용 병기를…]

잠시의 어색한 침묵.
당황한 듯 화면을 두들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이 자식! 갖고 오지 않은 거냐! 준비물 확인은 소풍의 기본이잖냐, 바보 자식!]

[월터의 똥개, 지금 제정신입니까?!]

[들개 자식… 우릴 다 죽일 생각인건가.]

<하아…>

심지어는 에어마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서야 레이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브리핑 당시 아이스 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그만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머리에 공격을 집중할 수 밖에 없겠군요.>

다행스럽게도 아이스 웜의 1차 방벽도 그저 무적이진 않았다.
공격을 퍼붓다 보면, 언젠가 그 방벽도 무너져내릴 것이 자명했다.
탄환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쪽은 베스퍼 4, 러스티. 레일 캐논은 준비됐다.
전우, 내가 나설 무대는 만들어 달라고.]

러스티의 가벼운 타박과 함께,

[내방자, RaD의 채티 스틱이다. 보스의 전언이다. '이런 작전, 자주 없으니까 즐기고 와.' 라더라.]

채티 스틱의 격려까지.
레이븐의 신경계가 달아오르며 나이트폴과의 동조율을 높였다.

띠띠띠띠-
불길한 경고음과 함께 레이븐의 시야 한구석이 붉게 물들었다.

<옵니다, 레이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이 폭발하듯 솟구치며 아이스 웜이 돌진해들어왔다. 3개의 드릴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맹렬하게 회전했다.

'스쳐도 죽는다.'

위기감이 머리를 때렸다. 레이븐의 뇌에서 뻗어나간 전기신호가 신경회로를 타고 내달렸다.
곧장 나이트폴의 부스터에서 주황색 불꽃이 튀기며 곡예 같은 움직임을 선보였다.

천지가 뒤집히는 중력 가속도.
AC의 관성 중화 시스템마저도 관통한 G가 레이븐의 머리를 때렸다.
머리로 쏠린 피 탓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기절하고도 남았겠지만, 강화 인간의 강철 같은 신경은 기절을 허락하지 않는다.

혼란하게 급변하는 시야 속에서도 레이븐의 눈은 정확하게 아이스 웜의 거체를 좇았다.
거리로 수 미터, AC로서는 종이 한 장과도 같은 거리를 아이스 웜이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나이트폴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텅-!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총격의 반동이 나이트폴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거대한 라이플 탄환이 초음속으로 날아가 정확하게 아이스 웜의 머리에 직격… 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것은 다른 표적을 찾아 움직였다.

'한참 부족하군.'

레이븐 스스로조차 단발로 잡아낼 것이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멀어지던 아이스 웜의 거체가 속도를 줄이더니 거대한 몸을 뒤틀었다. 노란 눈알이 AC 부대를 바라본 순간, 틈을 놓치지 않고 스네일의 명령이 떨어졌다.

[제군들, 화력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4기의 AC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역전의 용사.
명령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여, 저 괴물이 가장 약한 타이밍을 물어뜯었다.
수백의 총탄과 포탄, 미사일이 날아들어 화면을 뒤덮었다.
기지 하나를 뒤엎을 정도의 화력 투사. 단 하나의 표적에게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화력이었음에도…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욱한 폭연을 뚫고 세 쌍의 노란빛이 떠올랐다.

'흠집도 안 나는건가.'

<아니요, 레이븐. 효과가 있습니다.>

에어의 말과 함께 아이스 웜의 머리 부분이 확대되어 보였다.
머리에 두른 프라이머리 쉴드에 희뿌연 균열이 생긴 것이 레이븐의 눈에 들어왔다.

[균열이 생겼군요. 몰아붙이십시오, 제군들.]

[말 안 해도 알아!]

이구아수의 헤드브링어가 끈질기게 아이스 웜을 추격하며 총탄을 퍼부었다.
그 뒤로 스네일의 오픈 페이스가 레이저를 난사하며 실드를 깎아냈다.

한동안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아이스 웜이 눈을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러더니 곳곳에서 작은, 그럼에도 AC와 비슷한 사이즈의 드론이 눈을 뚫고 올라왔다.

[내방자, 목표가 부속기를 전개했다. 대처하겠다.]

채티의 음성과 함께 사방으로 미사일이 쏘아올려졌다.
폭죽처럼 터지는 수십의 부속기 드론 사이로, 아이스 웜이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타이밍은,
지금!

투캉!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송버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쉴드에…

키이이잉-!!!

초고주파수의 공명음과 함께 아이스 웜의 펄스 쉴드가 조각조각 흩어졌다.
아이스 웜이 펄스 쉴드를 복구하기 위해 제너레이터 출력을 높였다.
몸체 사이사이에서 새빨간 코랄 입자가 피처럼 흩뿌려졌다.
피를 흘리는 짐승처럼 도망쳐, 그것은 눈 사이로 파고들었다.

<목표, 프라이머리 실드 소실!>

에어의 보고.
이어서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러스티의 목소리가 통신관을 울렸다.

[실드 소실 확인.
레일 캐논 발사 시퀀스에 들어간다.
EML 모듈 접속.
에너지 터빈 개방, 출력 80%…]

지평선 저 멀리, 등대처럼 주홍빛 광원이 떠올랐다.
거리로는 대략 수십km.

오버드 레일 캐논.
그 신더 칼라가 직접 호언장담한 괴물 같은 병기가 탐욕스럽게 에너지를 집어삼켰다.
무려 공항 전체를 가동할 수 있는 에너지가 레일 캐논 곳곳에 설치된 캐퍼시터에 강물처럼 담겼다.
그리고 100m 짜리 레일 끝에 포탄이 걸렸다.

지름만 1m에 달하는 텅스텐 탄자.
착탄하는 순간 소형 운석에 맞먹는 파괴를 흩뿌리는 순수한 물리력의 화신.

[조준 보정 양호. 90, 95…]

출력을 높임에 따라 주홍빛 광원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띠띠띠-
방위계에 경고등이 켜지며 아이스 웜이 다시 한 번 지표 위로 부상했다.
놈의 상승이 더뎌진 바로 그 짧은 순간,

[놓치지 않겠다.]

번쩍.

한 줄기 주홍빛 섬광.
마하 10으로 발사된 '그것'은 소리를 뒤에 두고왔다.
착탄하는 순간 아이스 웜의 '세컨더리 실드'는 눈송이처럼 부스러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플라즈마화 된 텅스텐 파편이 아이스 웜의 본체를 직격, 궤멸적인 충격을 때려박았다.

상정 이상의 파괴력에, 아이스 웜의 시스템이 다운되었다.
그 거대한 몸체가, 눈밭 위로 천천히 쓰러졌다.

<세컨더리 실드 소실!>

[G13! 머리에 직접 공격을 먹여줘라!]

이미 레이븐은 아이스 웜의 머리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단기 화력.

총탄을, 포탄을, 미사일을 무자비하게 쏟아부었다.

그의 뒤로, 아군 AC가 발사한 수백의 탄환, 수십의 미사일과 레이저가 아이스 웜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죽어!!]

절규와도 같은 이구아수의 포효.
섬광과 폭연으로 모두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가까이 있던 레이븐은 보았다.
아이스 웜의 드릴에 노란 불빛이 점멸했다.
그리고 붉은빛으로…

[떨어져라, 621!]

본능적인 위기 감지와 월터의 경고에 레이븐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갑자기 고개를 쳐 든 아이스 웜이 사방으로 새빨간 코랄을 뿜어냈다.

지직-
지지직-

[뭣?]

파지지지직-!
모두의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강렬한 코랄의 폭풍이 벼락처럼 뿜어져나와 AC의 몸체를 바짝 구워냈다.

외마디 의문성과 함께 이구아수의 헤드브링어가 단숨에 전선에서 이탈.
스네일의 오픈 페이스와 채티의 써커스 또한 벼락의 스친 것만으로도 기체 상당 부분이 맛이 갔다.
순간적인 기지로 거리를 크게 벌린 레이븐만이 약간의 장갑판 손실로 그쳤다.

[기체는 한계인가… 어쩔 수 없다, 후퇴하겠어!]

덜컥 겁이라도 난 것인지, 무장 스네일의 오픈 페이스가 연기를 끌며 이탈했다.
얼마나 빠르게 달아나고 싶었던 것인지, 멀쩡한 무장마저 퍼지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은 건 채티와, 레이븐 둘 뿐.

[베스퍼 4! 다음 탄 장전 준비!]

[지금 막 끝난 참이야, 미시간 총대장]

<코랄이… 폭주하고 있어…?!>

아니, 눈에 보이진 않지만 러스티와 에어도 전투에 함께하고 있었다.

아이스 웜에서 순수한 코랄의 에너지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어찌나 강력한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ECM 효과가 일어나 조준계에 노이즈가 꼈다.
이미 레일 캐논에 관통 당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은 설원을 마음껏 헤엄치며 땅과 하늘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그 파괴의 위력은 기계라기보다 재해 현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위기 속에서도, 레이븐은 틈을 노려 계속 포탄과 총탄을 쏟아부었다.
코랄의 폭풍이 한 뼘 차이로 기체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레이븐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가 아이스 웜의 주의를 적극 끌어준 덕분에 채티도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설 수 있었다.
조금씩, 실드가 깎여나갔다.

한편, 수십km 밖에서 전투 현장을 관측 중이던 러스티는 붉은 폭풍과 벼락을 보며 작전을 변경했다.

[이건… 여유 부릴 때가 아닌 것 같군. 레일 캐논의 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겠어. 피해가 커지기 전에 끝을 내야 해.
…다음이 마지막 한 발이라고 생각해 두라고.]

그럼에도 우선은 프라이머리 실드를 부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곧이다, G13! 한 방 먹여줘라!]

실드에 균열이 나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균열이 심해질수록, 아이스 웜의 움직임에도 난폭함이 더해졌다.

레이븐은 곡예와도 같은 비행으로 아이스 웜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하필 그것의 시야에 채티가 걸려들었다.

띠띠띠띠-
채티의 AC, 서커스에 경보음이 가득 찼다.
시야를 가득 메운 코랄 미사일.
서커스가 회피기동을 시도했지만 근접 신관으로 미사일이 터질 때마다 플라즈마 폭풍에 장갑이 증발했다.
마침내…

덜컹!
서커스의 코어가 분리되며 채티는 파일럿 긴급 탈출을 시도했다.
남겨진 서커스의 동체는 코랄 미사일에 연신 얻어맞으며 먼지로 화했다.

[…미안하다, 내방자.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이제 전선에 남은 것은 레이븐, 단 한 명.

[무기 잔탄 없음.]

설상가상으로 남은 탄환마저 떨어진 상황. 레이븐은 쓸모없게 된 고철을 미련없이 퍼지해버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겐 아직 파일 벙커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레이븐의 시선이 설원을 샅샅이 뒤졌다.
온통 하얀색과 붉은색 뿐이라 구분이 쉽지 않았다.

띠띠띠-
게다가 아이스 웜이 지치지도 않고 뿜어내는 코랄 미사일까지.
신기에 가까운 조종으로 피해를 최대한 흘렸지만, 플라즈마에 스칠 때마다 장갑판이 증발했다.

[WARNING: 급격한 심박수 상승 감지]
[WARNING: 신경계 과부하 감지]

나이트폴에 가해지는 부하만큼, 레이븐의 신경계에도 막대한 부담이 지워졌다.
뇌가 익어버리는 느낌.

[SYSTEM: 진정제 투입 권고]

"무시."

조금이라도 감각이 둔해지면 곧장 저 짐승에게 물어뜯기리라.
뇌수가 끓어오르는 감각 속에서 레이븐은 마침내 찾아냈다.

곧장 어썰트 부스트로 날아간 레이븐은 공중제비를 돌며 설원에서 그것을 낚아챘다.

VP-60LCD.
스네일이 꽁지를 빼며 버리고 간 확산 레이저 캐논.

나이트폴의 OS가 오류 메세지를 뱉어냈다.

[ERROR: 호환 시스템 미설치.]
[ERROR: 조준 보정 불가.]
[ERROR: 제너레이터 EN 출력 불안정.]
[ERROR: …]

끝도 없이 올라오는 메세지를, 레이븐은 깡그리 무시했다.

“메뉴얼 컨트롤 모드 전환.”

단 한 발이면 충분했다.

<레이븐, 옵니다!>

정면.

레이븐의 심박수가 전례없을 정도로 요동쳤다.
그의 시선 속에서, 아이스 웜의 움직임이 멈췄다.
조금씩 조금씩, 정지한 듯한 시간 속에서…
나이트폴만이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쾅!
아이스 웜의 거체가 나이트폴이 있던 자리를 깔아뭉갰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흩뿌려진 눈 탓에, 전투를 관측하던 모두의 시야에서 나이트폴이 사라졌다.

나이트폴의 생명징후 장치에서 보내오는 신호만이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621! 살아있나!]

월터는 관측 카메라를 보며 소리쳤다.
대답 대신, 거대한 세 쌍의 노란빛이 눈먼지를 뚫고 부상했다.

[G13, 대체 어디에…]

누구보다 빠르게 나이트폴을 인식한 카메라가 그것의 모습을 확대해주었다.
아이스 웜의 머리 바로 옆, 레일 캐논이 관통했던 바로 그 자리에 나이트폴이 매미처럼 붙어있었다.

총구를 그것의 머리에 겨눈 채로.

푸른 섬광이 터졌다.
붉은 코랄이 쏟아져나왔다.

<프라이머리 실드 소실!>

[아주 잘해줬다, 전우.]

레이븐은 곧장 이탈해 공중으로 부상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기계일 뿐인 저것에서, 분노가 전해졌다.
실드의 회복보다도 나이트폴을 부수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그것은 레이븐을 쫓아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에 러스티는 레일 캐논의 출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EML 모듈 전체 접속. 에너지 터빈 전개, 출력 80, 90…]

또다시 지평선 너머에 주홍빛 광원이 떠올랐다.

[긴급 밸브 전체 폐쇄, 리미터 해제…!]

아까보다도 더 밝게, 아침의 노을처럼 타올랐다.

[100, 110… 115… 레… 캐논 …대 출력]

한계를 넘어선 축전이 전파 간섭을 일으키는지, 통신관에서 들리는 러스티의 목소리에 노이즈가 꼈다.

<레이븐!>

아이스웜의 거대한 드릴이 나이트폴에 송곳니를 박아넣기 직전에…

[끝이다!]

러스티는 방아쇠를 당겼다.
한계까지 전기를 담았던 캐퍼시터가 줄줄이 터져나갔다.
수백미터에 달하는 레일 캐논이 발사 반동으로 뒤로 밀리며 지축을 뒤틀었다.
포탄이 지나가는 경로마다 기다란 레일이 제멋대로 뒤틀리며 망가졌다.
반쯤 플라즈마화된 텅스텐 탄환이 하늘을 할퀴었다.

탄속은,
마하20.

탄환은 앞으로 나아갔다.
무적이라 칭해지는 코랄 실드도,
두께만 수m에 달하는 장갑판도,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나아갔다.

그저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레이븐에겐 그렇게 보였다.

다음 순간 엄청난 충격파가 그의 기체를 뒤흔들었으며,
반쯤 기절한 채 간신히 눈 위에 내려섰을 때야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코랄의 빛무리를 볼 수 있었다.

[해치웠나…?]

러스티가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입니다, 레이븐!>

쓰러진 아이스 웜의 거체가 다시 한 번 시동을 걸려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레이븐은 레이저 캐논을 퍼지했다.
역할을 마친 그것은 이미 발사관이 폭발해 수명을 다했다.

더 가벼워진 몸으로, 나이트폴은 날아들었다.
그리고 쏘았다.
그가 가진, 최대의 화력을.

철컹.
공이치기가 올라가며 쇠말뚝이 후퇴했다.
주먹을 날리는 것처럼, 왼손을 박아넣었다.
묵직하고도 익숙한 반동과 함께, 약속된 파괴를 선사했다.

파일 벙커가 새어나오는 코랄 사이로 박혔다.
이어지는 것은 유폭.

머리에서부터 일어난 코랄 폭발이 몸통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폭발의 힘만으로 아이스 웜의 거체가 하늘로 들렸다.

[G13! 폭발한다, 떨어져!]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레이븐은 황급히 뒤로 부스터를 전개했다.
아이스 웜의 동체 전체가 붉게 발광하며…

핵폭발을 연상캐하는 위력으로 코랄 폭주를 일으켰다.
폭발을 마지막으로 내장된 코랄을 전부 태워버린 것인지 아이스 웜의 거체가 힘없이 쓰러졌다.

[…끝난 모양이군.]

상황을 지켜보던 월터의 헬리-컨테이너가 불빛을 비추었다.

[621, 돌아가서 쉬어라. 앞으로는 바빠질 것이다.
…잘해줬다.]

기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레이븐은 나이트폴을 컨테이너로 몰았다.

격렬한 전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설원에는 다시 고요가 자리했다.
아이스 웜 위로 쓸쓸하게 눈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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