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님께 그런 영광을 받았다니, 부럽다."

 나는 조용히 투덜댔다. 옆에서 머쓱하게 멍청한 웃음을 짓는 이 남자를 보니 그래도 모든 근심이 날아가는 듯 했다. 해사하게 웃는 그 순진함에, 곧 나도 잘 될거란 그 말에, 내가 춥지 않게 슬쩍 안아주는 그 다정함에, 나는 이미 빠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을 받아 빛을 뿜어내는 눈들이 내 눈을 시리게 한다. 법왕의 좌안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그가 '출정'을 가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나라고 모를까. 법왕 앞에서 춤을 추는 한낱 무희일지라도, 그 의미를 모를까. 그러나 내 옆에 있는 이 남자는 내가 그걸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계속 쭈뼛대고만 있다. 마치 어찌할 줄 모르는 강아지처럼.


 "그게, 이거..." 좌안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말을 계속했다. "곧 가야 된다고 하셨어, 법왕님이. 저 아래 어딘가에 있는 로스릭의 높은 벽이라는 곳으로. 너랑 같이 갈 수 있는지 내가 꼭, 법왕님께 여쭤볼게." 일부러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치려 하자 시야가 흐려졌다. 잔뜩 물 먹은 그의 얼굴이 내 눈에 아른거린다. 형체가 흐려진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빨개진 볼에 손을 얹었다.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는 이루실에서 몇 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이 추위가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장갑을 낀 손에 볼의 온기가 전해질리 없을 터, 야속한 장갑을 두 짝 다 내던지고 그의 양 볼을 잡았다.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너무나 깊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그의 눈동자가 꿈뻑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매일 나한테 왜 이름을 알려주지 않냐고 투덜대던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이별의 의미로 그에게 내 생애 가장 큰 웃음을 지어주었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젠 며칠째 이러는 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키가 클 시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키가 나날이 커지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고, 손가락도 징그러우리만치 길어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법왕을 찾아갔다.


 법왕은 보이지 않는 얼굴 그 너머로 소름 끼치는 웃음을 내게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했다. 순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치밀어 올랐다. 법왕의 방을 뒤로 하고 나오자마자 밟히는 나의 투구의 반짝거리는 베일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볼드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면, 나의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조차 사랑해주었을까. 나의 이런 흉해진 모습조차 괜찮다고 말해주며 끌어안아 주었을까. 그 때 법왕의 부름이 들렸다. 베일을 걷어차며 다시 법왕에게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충성의 자세를 취한 뒤에야, 그는 말을 시작하였다.


 내용인 즉슨, 나의 쌍마검을 들고 로스릭의 높은 벽으로 가 로스릭 성으로 가는 길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그리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법왕의 무희가 될 때 충성을 맹세한 몸으로써 본능적으로 명령을 따랐다. 그곳까지 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 쯤, 커다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커다란 소리에도 내 정신은 깨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엠마의 비명소리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툭하고 끊어졌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몸이 제멋대로 요동쳤고, 온갖 족쇄들을 깨부수어 버렸으며, 엠마에게 칼을 꽂고 맹세의 수반을 올리려 한 자의 눈 앞에 큰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그 남자의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내 몸이 쌍마검을 들고 그에게 겨누었다. 이성의 목소리는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계속된 공격에 그 남자는 고통스러워 했다. 내 손을 멈추려고 해도, 될 리가 없었다. 그저 본능대로 춤을 출 뿐인 괴물이 되어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내 몸 곳곳이 터지는 듯한 육체적인 고통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직접 베고 있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나를 괴롭혔다.


 그의 커다란 검이 내 다리에 꽂혀 내가 쓰러질 때 비로소 알았다. 법왕의 좌안을 소지한, 조그마한 다른 남자였다. 소리내어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내 얼굴이 피와 눈물로 물들어 시야가 검어질 때 쯤 속삭였다.


 "어떻게, 네가 그걸."


 참 멍청했다. 볼드라면 엠마를 벨 이유조차 없었을 텐데. 왜 나는 이 남자를 볼드라고 착각한 것일까. 그가 나를 확인사살 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매한 착각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아득한 눈의 세계 그 어디 쯤, 그가 보였을 때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볼드, 나는 이름이...!"












호고곡곡ㄱ 너무 부끄러운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