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감옥의 쇠창살의 문이 열린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스친다. 누군가 구해주러 온 것일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지하감옥의 가장 밑바닥. 그 누구도 들어올 일 없고 그 누구도 나갈 일 없을 것이다.

카를라의 눈 앞에 한 간수가 서 있다.
카를라는 그 간수가 자신의 육체를 탐하러 왔다 생각했다.
'오, 또 너로구나. 거의 잊어버린게 아닐까 했는데, 고맙기도 해라. 검고 말라비틀어진 몸이라도, 천것들의 유희 정도는 되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 간수는 달랐다. 간수는 어쩔 줄 몰라했고,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간수는 자신을 재의 귀인이라 소개했으며, 장작의 왕을 옥좌로 되돌리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했다.
재의 귀인은 카를라를 구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를라는 이미 더럽혀진 몸, 이런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물었지만 친절한 귀인은 그럼에도 구해준다 답했다.
계승의 제사장으로 돌아가 카를라는 아늑한 잠을 청했다.
카를라가 눈을 뜨자 눈 앞에 귀인이 서 있었다.
카를라는 자신을 재차 소개했다.
'아아, 귀공. 돌아왔는가.
다시 인사하지. 나는 카를라. 귀공에게 감사드리네.
...그건 그렇고. 자, 이제 어찌한다.
내가 귀공에게 보답을 한다 하면 그저 마술이 있을 뿐.
...꺼리고 피해야 할 어둠의 마술만이 말이야.
귀공, 설마 그걸 원하는건가?'
재의 귀인은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재의 귀인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것은 마술뿐일 텐데.
재의 귀인은 마술 대신 자신의 몸을 원한다 말했다.
카를라는 놀랐다. 이미 더럽혀진 자신의 몸을 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카를라는 농담하지 말라 손을 내저었지만 재의 귀인은 이미 자신의 거대한 점자성서를 들이민 후였다.
'천벌받을 사람이구나. 내 더럽혀진 몸을 탐하는 것은 상관 없지. 그것이 귀공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라면.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닌 귀공이 원한다면 내 성의를 다해 이 속살을 꺼내 보여주마.
하지만 주의해야 하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여기진 않으니.
그러니 이 모든건 귀공과 나만의 비밀이야.'
카를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밤을 보냈다.
카를라가 눈을 떴을 때 재의 귀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카를라는 귀인을 계속해서 기다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후로도 때때로 재의 귀인은 자신의 정욕을 해소하러 카를라를 만나러 왔다. 카를라는 재의 귀인의 모든것을 받아들여 주었다.
재의 귀인의 여정이 길어질수록 정사는 점점 거칠어졌만, 카를라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일과도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제사장 구석에서 울리는 작은 교성. 아마 론돌의 흑교회 출신의 유리아라는 아가씨겠지.
비천하고 더럽혀진 자신과 고귀한 아가씨인 유리아.
재의 귀인이 자신을 더 이상 찾지 않는것은 슬펐지만 자신이 그런 것을 바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카를라.

재의 귀인이 다시 카를라를 찾았을 때, 재의 귀인은 검을 들고 있었다. 빛나는 검이 카를라의 몸을 덮쳤다.
어두워져가는 시야 속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리아가 보였다. 모든 것을 이해한 카를라. 하기야 재의 귀인에게 카를라는 그저 지난 날의 과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를라는 그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나지막히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귀공은 변덕쟁이구나....'
카를라는 재의 귀인을 원망했다. 그를 원했다.
하지만 자신에겐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자신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카를라에게 남은 일은 재의 귀인과 유리아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일일 것이다.
카를라는 죽기 전까지 재의 귀인을 연모했으며, 차가워진 재의 귀인의 뺨에 한 줄기 따뜻한 눈물이 흘렀다.

















[카를라의 재]
제사장의 시녀가 새로운 상품을 준비한다.

심연의 꺼려지는 아이는 결코 죽지 않으며
언젠가 어디선가 심연의 인연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은 이는 이제 없다.












기나긴 여정의 끝,
격렬한 전투 속에서 그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늠름한 풍채와 전사의 얼굴은 차가워진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앙리라는 여자와의 결혼식이 지나고 제사장에 카를라라는 여성이 찾아왔다.
재의 귀인과 카를라의 미묘한 기류와 때때로 들리는 교성으로, 둘이 무슨 관계인지 눈치챈 유리아.
하지만 저 분은 망자의 왕이 되실 몸. 누구와 몸을 섞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마지막 전투 후 때때로 들리는 교성은 유리아의 가슴을 후벼팠다.
망자의 왕이 된 재의 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유리아.
하지만 재의 귀인은 유리아의 마음을 내쳤다.
복수심과 질투심이 유리아의 마음속에 생겨난다.
자신이 저런 검고 말라비틀어진 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재의 귀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노라 마음먹는 유리아.
'하얀 그림자를 불러라.'
순교자에게 론돌의 하얀 그림자를 부르라 명하는 유리아.
하얀 그림자는 암술부터 그에 가까운 기적이나 주술을 접한 유능한 부하다.
어쩌면, 하얀 그림자가 그 '주술'을 안다면, 재의 귀인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유리아는 재의 귀인을 불렀다.
'귀공, 이제 저에게도 총애를 내려 주세요. 이 몸은 당신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에 품은 여성이 있다며 다시 유리아를 내치는 재의 귀인.
'아아.. 그러면 귀공, 귀공의 몸만이라도 저의 것이..'
순간, 재의 귀인의 배후에서 분홍빛이 감돌았다.
칼을 빼들고 뒤로 도는 재의 귀인.
론돌의 하얀 그림자의 손에서 나오는 빛은 재의 귀인의 의식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토록 원하던 재의 귀인의 육체를 탐하는 유리아.
매료되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이상적인 모습에 만족스러워야 할 터이지만 왜인지 가슴이 채워지지 않는 유리아. 또한 매료의 효과가 약해질때마다 카를라를 찾아가는 재의 귀인의 모습에 절망하는 유리아.

자신이 무슨 짓을 해서도 재의 귀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저 여자를 죽이겠어.
재의 귀인은 망자의 왕. 고락을 함께한 동료의 죽음에도 무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저런 여자쯤은 금세 잊을거라 장담하며.
재의 귀인은 칼을 빼들고 카를라를 베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매료로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재의 귀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금 절망한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재의 귀인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리고 그 때, 재의 귀인의 검이 유리아를 베었다.
분노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눈물을 흘리는 재의 귀인.
절개된 유리아의 복부에 검을 박아넣는 귀인.
하얀 그림자가 다시금 매료로 막아보려 했지만 분노에 몸을 맡긴 재의 귀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유리아는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하찮은 범부로다. 여자 둘을 안지도 못하는 왕이라니.'









[유리아의 재]
론돌의 유리아의 재.
제사장의 시녀가 새로운 상품을 준비한다.
흑교회의 창시자는 세 명이 있었으며 유리아의 유지는 두 사람의 자매가 이어갈 것이다.
모든 망자를 위하여, 왕에게 불의 찬탈을.











자신에게 남은게 뭐지?
스스로의 손을 보는 재의 귀인.
필요한 일이었기에 자신의 동료를 죽이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해 연모한 이를 죽이고,
분노에 몸을 맡겨 자신을 연모한 이를 죽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것은, 이름조차 없는. 불 꺼진 재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