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욱

재의 귀인은 자신의 두 배는 될 법한 몸집의 거구의 가슴팍에서 검을 뽑아냈다.

그가 애용하던 롱소드는 검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든든했던 강철의 갑옷은 태양의 힘이 깃든 창에 그슬려 군데군데 산화해 있었다.

재의 귀인은 담담히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왕들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그 날, 잿빛의 왕좌는 공석이 되었다.


* * *


왕들의 화신이 재의 귀인에게 패퇴한 지 3일 째 되는 날,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장소를 전전하며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는 평소 자신이 머물고 있었던 이젠 자신에겐 고향이나 다름 없는 곳이 돼버린 제사장으로 이동했다.

변한 구석이라곤, 귀인을 믿어주었고 간간히 귀인을 위해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던 난쟁이 왕, 루드레스의 부재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변함이 없는 제사장.

그런 제사장의 한 가운데에서 타닥 타닥 타오르는 화톳불을 응시하던 귀인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어서 오세요, 재의 영웅이시여. ”

“ ... ”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딱딱한 어조로 귀인을 반기는 화방녀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인사를 받고는 몸을 돌려 제사장의 밑바닥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제사장의 이름 모를 시녀와 대장장이 안드레이였다.

귀인보단 내 소울과 무기에 더욱 관심이 있을 그들에게서 관심을 끈 귀인은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딛고 내려갔다, 평소의 그였다면 시간이 아까워 이 낮은 계단 조차도 조급하게 내려갔을 테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귀인은 느긋하게 층계를 하나 하나 밟았다.

그러자 굴다리 밑에서 재의 귀인에게 아는 체를 해오는 이가 있었다.

“ 귀공, 무슨 일 있는가? 어째 평소랑은 다른 느낌인 것 같구나. ”

그러자 재의 귀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를라는 미소를 지은 채 재의 귀인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 호오, 귀공이 감정을 드러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아니, 처음이라고 해야 하려나? ”

“ ... ”

마치 놀리는 듯한 어조로 물어오는 카를라, 재의 귀인은 당황해 손을 휘저으며 아무 일도 없었음을 어필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카를라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 후후, 그래. 이 이상 귀공의 발걸음을 묶어선 안 될 일이겠지. ”

- 귀공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어느새 다가온 귀인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카를라. 그렇게 말하는 카를라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재의 귀인은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짐짓 모르는 체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귀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카를라는 생각했다.

귀인은 본래 특별한 용무가 없을 때는 잘 찾지 않았던 밑바닥에 갑작스레 찾아왔으며, 제사장의 면면들을 하나 하나 뇌리에 새기려는 듯 제사장을 돌아다녔다.

또, 항상 시간에 쫓기던 귀공이 여유를 되찾았고, 시답잖은 농에도 지나치지 않고 반응했다, 내가 어둠의 마술에 대해 가르쳐 주었을 때도 본 적이 없었던 감정이 드러난 반응.

그가 인간의 모습을 되찾아간다는 건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끝이 도래했다는 것이겠지.

“ 이젠 이별인가, 귀공.. ”


* * *


유난히 웃음이 많았던 마녀 카를라를 지나쳐 도착한 곳은 낡고 헌 돗자리의 위였다.

마치 어딘가에서 훔쳐온 장물을 팔기라도 했는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두서 없이 늘어져 있는 돗자리의 위.

돗자리와 돗자리 위에 놓인 장물들을 응시하던 귀인은 돗자리에 조금 더 다가섰다.

한 때 악명 높은 대도로 이름을 날리던 그레이렛의 돗자리의 위에는 푸른 색의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횃불을 제외하면 광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제사장 속에서도 제 빛을 내며 떨어져 있었다.

귀인은 허리를 숙여 그 목걸이를 손으로 한 번 쓸더니 배낭에 고이 집어넣었다.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카를라를 지나친 귀인은 곧이어 주술의 스승, 코르닉스를 찾아갔다.

그에게 다가가자 마치 인자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귀인을 맞아주는 코르닉스의 모습에 귀인의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다.

제사장의 다른 누구보다도 그에게 가장 마음을 열었던 만큼 귀인은 무언가 아쉬운 듯 온갖 제스쳐를 취하며 말하고 싶은 바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코르닉스는 그럴 필요 없다며 귀인을 제지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다 안다, 오늘도 이자리스의 주술을 가르쳐 달라는 뜻이겠지?”

“ ... ”

귀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코르닉스는 그제서야 농담이었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을 정정하는 코르닉스.

“ 당연히 농담이지 않겠느냐, 하지만 내게 작별 인사는 필요 없단다. ”

“ ...? ”

그렇게 말하자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의 귀인에게 코르닉스가 설명했다.

“ 네가 나를 잊지 않는 한, 나도 너를 잊지 않는단다. 그게 사제 관계라는 것이니. ”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재의 귀인, 그 뒤 코르닉스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끊겼다.

“ 그래, 다녀오거라, 돌아올 때는 새로운 주술을 가르쳐 주마. ”

“ ... ”

고개를 끄덕이던 귀인은 뒤이어 카림에서 화방녀가 되고자 찾아온 성녀, 이리나를 찾아갔다.

“ 영웅.. 이셨군요, 평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누가 오고 있는 건지 한참을 생각 했답니다, ”

말을 듣고 있던 귀인이 말 없이 손을 잡아주자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는 몸을 움찔 떨었다.

“ 여.. 영웅이시여.. ”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녀가 눈을 뜰 수 없다는 것과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버리면 그녀가 곤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황급히 그녀의 손과 마주잡은 손바닥을 떼어냈다.

“ ... ”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리나와 좁은 공간 안에서 단 둘이 있는 것이 어색했는지 괜히 바깥을 둘러보던 귀인은 결국 앞을 볼 수 없는 그녀에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는 포기한 채 카림의 이곤에게 떠맞기기로 했다.

카림의 이리나에게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용 형상의 투구를 쓴 중갑 전사, 카림의 이곤이 눈에 들어오자 그에게로 다가가는 재의 귀인.

“ 무슨 일이지? ”

그러자 재의 귀인은 코르닉스에게 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제스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고, 마지막엔 이리나에게도 전해달라는 듯한 묘한 제스쳐를 취해보이자, 이런 식의 대화는 익숙했는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곤에게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이곤 마지막으로 화방녀를 찾아가기로 한 재의 귀인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화방녀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화방녀의 모습은 제사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결국 귀인은 홀로 태초의 화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 * *


푸른 색의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목에 건 채 두꺼운 중갑을 걸친 기사는 태초의 화톳불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닥의 잿더미에 새겨진, 지금은 부르는 것이 금지된 화방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뇌까리자, 흰 사인은 빛을 내며 서서히 타들어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사인 위로 모습을 드러낸 화방녀는, 말 없이 태초의 화로 앞에 서서 불씨에 손을 서서히 뻗기 시작했다.


* * *


“ 반푼이, 있나? ”

이곤의 중후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퍼졌다.

이리나가 머물고 있는 동굴의 내부는 이리나와 그녀의 옆에 놓인 점자성서를 제외하면 정말 아무 것도 놓이지 않은 채 휑한 상태였으며, 이리나는 어째선지 창백한 안색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쯧.

이곤이 작게 혀를 찼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상태라면 보통 공황 상태인 경우였기에, 이곤은 그녀를 어루만져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던 중, 이리나는 갑자기 뻗어 오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고는 마치 누구인지 확인하듯 역으로 이곤을 어루만지던 이리나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리나에게 이곤은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 무슨 일이지? ”

“ 영웅.. 은 가셨나요? ”

“ 그래, 아마 사명을 다할 셈이겠지. ”

“ 아니.. 아니에요..!"

갑자기 이리나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고, 이곤은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 그건 그 사람의 사명이 아니란 말이에요! ”

“ 그건 또 무슨 소리지? ”

평소라면 악몽으로 인한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아까부터 그녀가 보여주는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이곤은 진지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 지금 영웅의 갑옷을 뒤집어 쓰고 태초의 화로로 향한 건 가짜에요..! ”

이곤은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한참을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이리나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헛소리였겠지만, 시력을 잃은 채 반평생을 살아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이 극도로 발달해있던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기도 힘들었다.

“ 그러니까, 지금 태초의 화로로 향한 재의 귀인은 귀인의 갑옷을 뒤집어 쓴 가짜라는 말인가? ”

그런 이곤의 말에 이리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화방녀는 알고 있었다.

귀인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화방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여태 자신이 섬기던 재의 귀인과는 다른 존재였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귀인의 인연들을 대상으로 기만하고 농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저 사람 또한 재의 귀인이었으며, 자신, 화방녀라는 족속들은 불을 돌보며 재의 귀인을 섬기도록 돼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재의 귀인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불씨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화방녀는 결국 몸에서 힘을 뺄 수 밖에 없었다.

목덜미 뒤로 드리워진 서슬퍼런 곡검과 우악스러운 손길에 밀려 앞으로 넘어진 화방녀의 머리가 구릿빛 갑옷을 걸친 사내의 발 아래에 깔렸다.

분명히 태초의 화로에는 재의 귀인과 자신 만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니 내 뒤에서 나를 기다리던 가짜의 본색이 바로 이 구릿빛 갑옷의 기사라는 걸까.

화방녀는 단순히 소울을 매개로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뿐, 그 자신이 강해질 수단은 없었기에 완력으로 기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태초의 불씨를 빼앗기고 말았다.


* * *


그 날, 잿빛의 왕좌는 여전히 공석으로 남았지만, 망자의 왕좌는 그 임자를 얻었다.

재의 영웅을 죽이고, 그의 인연들을 농락하고 기만했으며 끝내 그의 사명까지 갈취한 기사는 투박하게 생긴 구릿빛 갑옷의 투구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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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닼린이 불의 찬탈자 엔딩 봤어용 ㅎㅎ


- 재의 귀인 完 -


일천한 작문 실력으로나마 도전해봅니다.

떡밥을 뿌린다고 뿌렸는데 잘 됐는지도 모르겠고 길게 써보려고 했는데 14년 된 노트북으론 발열이 너무 심해 길게는 못 쓸 것 같아 짧게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