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없었다기보다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불타지 못한 재였으므로, 기억될 이름은 없었고 칭송될 업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재에게 이름은 불필요했다.
화방녀는 이름 없는 그를 ‘재의 귀인’이라 불렀다.
그 여자의 슬기는 서늘했다. 그 여자는, 그가 가진 지위를 존중해주는 척하면서 종소리의 ‘재’라는 신분을 명칭으로 상기시켰다.
“위대한 재여.” 반대로 마법사 노야의 속삭임은 꿀처럼 달콤했다.
“불에게 버림받은 자여. 버림받았으되, 어찌하여 아직까지도 그 가증스러운 것에게 충성하느냐?”
그 속삭임은 사방에서 고혹적으로 메아리쳤다.
노야는 한 명이되 여러 명이었고, 여러 명인가 싶으면 또다시 한 명이 되었다.
“혓바닥이 길어졌군.”
재의 귀인은 스물다섯번째 노야의 시체 위에 서서,
칼끝을 낮추고 허리춤에서 에스트 병을 꺼내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재의 행동은 민첩했다.
이내 힘에 겨워 쳐졌던 어깨에는 전에 알지 못하던 새 힘이 돌았고 욱신거리던 팔다리에서는 통증이 멎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노야들과, 그가 올라서 있던 노야의 사체가 갑자기 땅속으로 꺼졌다.
“……심연으로 나아오라.” 멀리 강단 위에서 노야가 땅에서 솟아났다. 첫 대면 때 노야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 택하심을 입은 자여.”
노야의 목소리는 높고 가늘어서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그 소리를 잡아낼 수 없었다.
강단 위의 노야는 본체임이 분명해보였다. 재는 확신했다.
저것에게서는 형태 그 이상의 것이 느껴졌다. 살기, 분노, 그리고 두려움. 재는 두려움의 냄새를 사냥개처럼 훅 끌어당겨서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재는 싸늘하게 웃으며 노야에게 다가갔다.
“마법사란 족속은 어째 늘 한결같군. 마력이 부족해지면 영창 대신 헛소리를 떠벌리며 시간을 벌지.”
한때 위대한 마법사였다던 노야의 외형은 진실로 끔찍했다.
뼈만 남은 체구는 괴물처럼 거대했는데, 거대화하는 과정에서 유독 머리와 팔만 커진 탓에 비율이 괴이했다.
커다란 두개골 때문에 노야는 거대한 모자를 써야했고, 옷도 나풀거리도록 길고 헐렁한 옷을 입어 짧고 흉측한 다리를 가렸다.
ㅡ노야 님께서는 심연을 감시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신 대마법사에요. 한때 사람들은 경외감을 갖고 ‘결정의 노야’라고 불렀죠.
아둔하고 나약한 상급기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ㅡ지금은 비록 심연에 사로잡혀서 불사대의 서약을 저버렸지만…… 그분의 업적에 맞는 죽음을 해줄 의무가 있어요. 그래요. 당신도 그…… 명예에 서약한 기사라면요.
재는 이따금 그 앙리라는 상급기사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의 칼은 약했고, 칼의 감각이 둔감했다.
지크벨트가 그 여자와 절친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앙리는 칼에 살기를 담지 못했고 적에게 공세攻勢로 나아갈 때도 수없이 주저했다.
그럼에도 그 여자는 늘 명예를 운운했다.
그 약한 여자는 명예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의 소유임을 모르는 듯했다.
약한 여기사는 살기 대신 명예를 칼에 두르고 휘둘렀다.
명예가 그 약한 칼날의 방편이었을까. 아니면 본래 명예를 중시하던 자가 칼을 잡았던 것일까.
재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재는 기사가 아니었다.
아니라기보다는 아니었기를 바랐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종소리와 함께 관에서 깨어났을 때 이 하급기사의 갑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생전에 실패한 재일 뿐만 아니라 지위마저 하급기사였던 모양이었다.
재는 하급이라는 직위가 아니라 기사였었다는 과거가 부끄러웠다.
지금의 재는 기사가 아니었으므로, 명예를 취할 필요도 없었고 예를 갖출 필요도 아니었다.
노야는 적이었고, 적은 베어서 그 영혼을 탈취해서 가지면 끝나는 문제였다. 명예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오…… 심연이시여, 불이 제게로 다가오나이다……” .
노야는 그 백골 아가리로 기도문을 외면서 최후의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재는 곧바로 그 적의敵意를 감지했다.
잘은 보랏빛 미광微光들이 노야의 구슬 주위에서 춤추었다. 노야의 기도문은 가끔씩 몇몇 구절이 얼버무려졌다. 노야는 기도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영창을 외고 있음이 분명했다.
재는 나아가면서 길 곳곳에 박혀 있는 결정더미를 발로 걷어찼다. 쩡 하며 부서져내리는 소리가 나름 경쾌했다.
‘속검인가? 아니면 또 분신으로 산개할 작정인가?’
또다시 분신을 펼쳐서 산개할 만한 마력이, 노야에게는 없을 것이었다. 재는 확신했다.
아마도, 단 한번의 일격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결정을 앞세워 공격해올 것이었다.
승부는 찰나에 이루어질 것이었고 그 일격으로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일격이 존망을 가를 것이었다.
재는 칼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칼끝을 올리고, 칼에 살기를 담았다.
칼은 차갑게 우짖으며 그 살기에 답해주었다. 노야의 비릿한 피냄새가 벌써부터 나는 것만 같았다.
열…… 아홉…… 일곱…… 여섯……
다섯 걸음을 남긴 순간, 재는 기합을 지르며 노야를 겨누어 달려들었다.
노야의 해골 눈두덩에서 보랏빛이 반짝였다. 그러자 노야의 자줏빛 구슬이 폭발적인 빛을 내뿜었다. 노야의 살기가, 구슬의 마력과 뒤섞여 재에게 바싹 근접했다. 재는 왼쪽으로 회피할지, 아니면 뛰어오를지 철저하게 고민했다. 곧 판단을 내린 재는 왼발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다음 순간, 살벌한 결정 칼날이 재가 있던 지면을 꿰뚫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태양을 가리도록 거대했고, 높이 솟은 결정 칼날은 그 어떤 강철 칼날보다 예리해 보였다.
재는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었고, 그 비틀림을 칼날에 담아 노야의 머리를 베었다.
노야의 목을 긋고 지나가는 칼날에서 삶의 모질고 질긴 실이 끊기는 감각이 오른팔로 전해져왔다.
잘려나가 떨어지는 노야의 머리통이 무어라 속삭였으나 그 목소리는 희미하고 또 아득하여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야의 몸은 그 결정이라는 이명처럼, 빛의 결정으로 변해가다가 곧 깨어지며 스러졌다.
재는 가볍게 노야가 서 있던 자리에 착지했다.
노야에게는 피냄새가 없었다.
재는 왼팔을 뻗어서 땅에 떨어지는 노야의 구슬을 깨어지기 전에 잡아냈다. 요엘이 그에게 부탁했던 물건이었다.
“해내셨군요, 왕의 재목.”
등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친근함을 담아 그를 불렀다.
재는 묘하게도 그 목소리가 관능적이라고 생각했다. 재는 천천히 뒤를 돌아 목소리에게 칼을 겨누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유리아라고 합니다. 요엘에게서 제 알현에 대한 이야기는 먼저 접하셨겠지요.”
재는 요엘의 말을 떠올렸다.
ㅡ이 허약한 몸이 직접 가지는 못하오만, 제 동료가 당신을 뵈러 갈 것입니다. 재목이시여, 부디, 그자를 안타까운 소인으로 여기시고 구슬을 인계해주소서.
재는 칼을 내렸다. “동료라고 하기엔 요엘과 그 외모와 복장이 너무 차이나는군.”
돌연 흉부에 뚫린 구멍들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요엘은 재의 가슴에 그 구멍을 뚫을 때 ‘진정한 힘을 개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재는 유리아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여자의 몸이었고,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여자는 까마귀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머리 뒤로 늘어뜨린 긴 머리는 은발이었다. 불길한 색이었다.
“동료가 아니지요. 저는 론돌 흑교회의 세 수장 중의 한 명입니다.”
유리아의 웃음은 남성의 육욕을 자극하여 취하게 하는 듯한 힘이 있었다. 위험한 여자다……, 재는 생각했다.
“확실히 저는 마지막 구멍이 개방된 뒤에, 요엘이 그 소명을 다한 후에 뵈러 올 예정이었습니다만
저희 동지 중 한 명이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서 이렇게 재목을 조기에 알현할 권리를 얻었지요. 이 또한 위대한 어둠의 은총이겠지요.”
론돌의 수장 유리아는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까멨다.
어깨에 걸친 갑옷과 신발은 물론이고 칼과 로브까지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 어둠의 색의 극점과 빛의 색의 극점이 대비되어 처절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재는 노야의 구슬을 유리아에게 무심하게 던졌다.
유리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구슬을 받았다. 구슬은 아직 은은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리아가 검은색 비단으로 구슬을 싸매어 봉했다.
“용무가 끝났으면 이제 사라져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희 론돌이랑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벌레가 이 구멍들을 좀먹는 것만 같다.'
재는 말을 맺지 못했다. 갑작스런 통증으로 숨을 헉 들이켜야 했던 것이다. 재는 가슴을 움켜쥐고 켁켁거리다가 이내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예리한 연장이 ‘힘의 구멍’들을 베고, 내리찍고, 저미는 것만 같았다.
“네년이 지금 감히 마법을……” 재는 힘없이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리아가 빙그레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 마법은 이런 고귀하고 강력한 힘을 내지 못합니다. 왕의 전능함이 노야의 비천함을 흡수하며 더욱 위대해지고 있을 뿐이지요.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유리아의 목소리는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분명하면서 희미하게 멀어져갔다. 유리아가 멀어져가는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이 몽롱한 것인지 재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귀가 윙윙거렸고 사위가 흐릿해져 사물을 식별할 수 없었다.
힘의 구멍에서 알지 못하는 불덩어리들이 격렬하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소명에서 벗어나지 말고 굳게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어둠의 은총 아래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의식이 몸으로부터 아득해져갔다. 재는 그 의식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무력할 뿐이었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어서 성당으로 향해야 한다는 간절한 울림이 들렸다.
또 들렸고, 한참 뒤에 나직이 들렸고, 들리지 않았다.
ㅡ정말 자네 혼자서 괜찮겠나? 내 노야를 홀로 상대하는 귀공이 너무 걱정되네.
지크벨트의 중후한 목소리는 늘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ㅡ여러 번 같이 싸워봤지만 그대와 나의 협공은 부드럽지 못하오. 차라리 나 혼자서 싸우는 게 낫소. 그리고 저 앙리라는 여자는 당신과 달리 못미덥소. 미치광이 마법사는 혼자서도 족하니 먼저 성당으로 가시오.
지크벨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웃을 때 온 얼굴로 웃었고, 그 웃음은 불처럼 환했다.
ㅡ귀공, 이를 기억하게. 힘이란 무력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네. 그대도 언젠가는 앙리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겠지.
‘양파 기사’ 지크벨트는 재를 ‘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귀공이라고만 불렀다.
재는 말했다.
ㅡ앙리의 힘? 태초의 화로에서 양파 타들어가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기나 하시오. 곧 따라갈 테니.
지크벨트는 호탕하게 웃어젖혔었다.
그리고 그는 떠나기 전에 재에게 말했다.
ㅡ귀공, 내 성당에서 기다리겠네.
1편
http://gall.dcinside.com/darksouls/212547
2편 http://gall.dcinside.com/darksouls/212972
3편 http://gall.dcinside.com/darksouls/213823
4편 http://gall.dcinside.com/darksouls/216701
5편 http://gall.dcinside.com/darksouls/220099
리메이크 에디숀으로 재집필 됩니다
이 앞, 문학의 왕있다
안읽어도 개추야
노야 재해석 좋다 크림힐트가 이글을 낮게 평가
문학추
선추
자주와서 글좀 싸고가 개추
없는 꼬추도 서게하는 유리아.... 당신은 대체...?
이 앞, 보물있다.
태초의 화로에서 양파 구워먹고싶다
존나재밌네
딴거 링크좀
다른 편 링크좀
필력보면 진짜 감탄밖에 안나옴ㄷㄷ 어디서 연재라도 하다왔나 - dc App
고마워 - dc App
형님 자주 오셔서 글좀 올려주십셔
개추 개추 문학추
그런데 할아버지법사 목소리가 고혹적으로 메아리쳤대서 띄요옹 했다
헐 님 방금 1~5편 읽고왔는뎅 ㅠㅠㅠ 작성 시기가 오래전이라 접은줄 알고 걱정함 ㅠㅠㅠㅠㅠㅠㅠㅠ 계속 연재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 재밌다
아 이거 스토리 바탕으로 만화그렸음 좋겠다 ㅠㅠ 내가 그림만 좀더 잘그리면 도전해볼텐데 - dc App
이아재 뒤진거 아녔냐
문학추~ 이 재의 결말은 찬탈일까? 계승의 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