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서, 헬리마는 아직 허드슨 하스에 사나요?”
“물론이죠.”
“결혼..., 했어요?”
한 번 꺾인 콧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까?
“왜 그 얘기를 들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요.”
시간은 흐른다. 그것은 바위를 깎아내는 파도와 같아서, 금세 많은 것들을 무뎌지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파도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내 아버지께서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어도 우리를 휩쓸어갈 급류는 항상 있는 법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그 파도 속에서 무뎌지기를 택했고, 헬리마는 그러지 않았다. 잊었던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기 시작했다.
34년, 자정이 지났으니 34년하고 5개월 22일이 지났다. 나는 달빛이 반사되는 개울가로 갔다. 밤이면 거울 대용으로 오던 개울이었다. 왕자를 모시던 장교는 콧수염마저 하얗게 세고 있었다. 장례식은 이곳에서 흔한 일이었다. 재작년에 두 명이 죽었기에, 남아있는 장교는 나뿐이고, 이제는 병사들도 한 손에 셀 수 있었다. 안주머니에 있던 헬리마의 편지를 꺼냈다. 대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꺼내본 적이 없었다.
허드슨 하스는 성과 가깝지 않은 곳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난 덕분에 나는 헬리마에게 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늘 마법의 숲으로 가는 거죠? 몇 번이고 말했던 것 같은데, 당신은 제복이 가장 잘 어울려요.”
“엊그제도 말했잖아요, 헬리마.”
“이 색이 당신 턱선을 더 힘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도 했어요?”
“그것도 엊그제 했어요.”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네요.”
헬리마가 슬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저 눈꼬리가 퍽이나 사랑스러웠다.
“참, 이번엔 얼마나 걸린다고 했죠? 엊그제는 얼마 안 걸릴 거라고만 했는데, 오늘 표정만 보면 서던 제도라도 가는 줄 알겠어요.”
“걱정 말아요, 아마 사흘 안에는 돌아올 것 같으니.”
나는 거짓말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그리고 헬리마는 항상 내 얼굴을 통해 그걸 간파 해냈다.
“알겠어요. 이건 도착하면 읽어요. 가는 길에 읽다가는 대위님께 혼날 거야.”
헬리마가 내 옷깃을 잡고는, 편지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언제나 그런 것 처럼 부드러운 양피지였다. 나는 어떤 말을 할지 몰라,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한 뒤에 떠났다. 지금 생각해도 참 뻣뻣한 걸음걸이였다.
세월이 지나고, 내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패어질 때면, 그리움은 내 무력함에 대한 자책으로 바뀌었다. 첫 몇 개월은 그렇게 계속 싸움을 했다. 시간은 지루하게 수십 명을 데려갔다. 그 후 일 년 동안은, 숲을 둘러싼 안개를 몇 바퀴고 돌았다. 안개는 벨 수가 없었고, 쥐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도 낼 수 없었다. 하루는 분에 찬 노병 한 명이 -지금도 살아있었다면 틀림없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돌덩이를 던졌고, 그것이 노덜드라의 진영으로 넘어가 싸움이 다시 시작된 적도 있었다.
요령이 늘어갔다. 무덤에 쓸 돌을 깎아내는 것도, 장검으로 멧돼지의 가죽을 벗기는 것도, 노덜드라와 싸우지 않게 마주치지 않는 것 또한 늘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무뎌져 갔다. 우리는 서로 아렌델에 대한 이야기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자 날짜를 세는 사람들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 또한 눈앞에 놓인 일을 했다. 그러나 헬리마는 그러지 못했다.
2.
매티어스에게
매티어스, 지금쯤 마법의 숲에 잘 도착했겠네요. 북쪽으로 꽤나 올라가는데, 춥지는 않나 모르겠어요. 설마 내 말 안 듣고 먼저 읽어 버린 건 아니죠? 당신이라면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조금 걱정이 돼요.
당신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죠? 그날. 엊그제도 당신 얼굴에 다 써있었어요. 나에겐 다 보여요. 당신이 호주머니에 반지를 숨겨둔 것도 말이에요. 땀 흘리며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얼마나 웃겼던지! 인정할게요. 그날 밤은 썩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얼마나 내게 진심이었는지도 알아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와서 다시 말해요. 반지는 받은 것으로 할 테니.
34년, 34년 5개월 22일. 나는 왜 지금까지도 날짜를 세고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은 내가 잊기를 원했던 당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뎌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잊고 결혼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나만큼이나 당신이 많이 바뀌길 기도했다. 그런데 당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지, 또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내가 그 무게를 헤아릴 수나 있을까?
3.
댐을 순찰하는 일은 이제는 오래된 관습이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댐 주변을 순찰하며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이끼를 걷어내며 을씨년스럽게 솟은 덤불들의 가지들을 쳐냈다. 그것이 우리가 아렌델을 위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이었다. 댐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허드슨 하스가 기억났다. 협곡과 가까이 있는 허드슨 하스는 언제나 강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댐으로 달려온 공주의 광대에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부은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공주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댐을 무너뜨려야 해요! 숲의 저주를 풀고, 안개를 없애는 길은 이것뿐이에요.”
“하지만 저희는 어떤 경우에도 아렌델을 지키기로 맹세했습니다.”
“루나드 왕이 모두를 배신했어요. 과거를 바로잡지 않으면, 아렌델에도 미래는 없어요!”
나를 지탱하던 것이, 툭 하고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대답을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제 언니가 진실을 위해 희생했어요.”
“제발요, 아렌델을 위해 옳은 일을 해야 해요.”
공주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서 다시 말했다. 나는 그런 공주 뒤에, 나무 사이를 들춰보는 바위거인을 보았다.
방패를 두드린 그 순간 당신이 왜 떠올랐는지. 헬리마, 이게 당신을 위한 일인지. 돌들이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날아오고, 내 뒤에 있던 병사를 낚아채면서도, 당신의 얼굴이 보였다. 이토록 당신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내 아버지께서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고 하셨다. 인생은 언제나 너를 예측 못 할 방향으로 던져놓을 것이라고,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우리를 휩쓸어갈 급류가 항상 있는 법이다. 댐이 무너져내렸다. 공주를 끌어올리고 나서, 나는 남은 벽돌 덩이에 걸터앉아 한참이나 떨어지는 물들을 지켜봤다. 부끄러웠다, 더는 허드슨 하스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아렌델과 여왕에 관한 생각보다 어쩌면 헬리마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당신이라면 아마 34년 전과 같이 내게 올 것이다. 눈웃음을 짓고, 나를 안아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것이다. 내가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아마 당신의 얼굴을 볼 때에도 그 대답을 준비할 수 없을 것이다.
안주머니에서 편지와 반지를 꺼냈다. 아직도 광택을 띄고 있는 얇은 금반지였다. 나는 안개가 옅어지는 것을 직감했다. 34년, 34년 5개월하고 23일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좋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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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탤릭체 반영이 안 돼서 재업하느라..ㅎㅎ
고마어!!
이런 얘기들이 모여 전체 얘기가 더 풍성해지는것 같다
퍄퍄
본인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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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분 해줘야했다 ㄹㅇ루..
ㅠㅠ매티어스쟝..
맞네 그 생각을 못했네 매티어스는 아렌델 왕국도 소중하지만 헬리마도 있었구나 35년이면 주임원사도 손사래치는 군 복무 기간인데 그간 수고하셨고 기다린 헬리마도 수고하셨어요
35년 중위달고 결혼 못하기.... 매티어스 정신력 진짜 칭찬해야함
와... 끝내준다... 새로운 시각을 넘어서 매티어스라는 캐릭터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문학이야
고마어오!
매티어스 이야기거리가 풍부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언제나 환영함! 나도 여력이 되면 매티어스 소재로 써보고 싶다 - dc App
이런 심경대변글 좋아
퍄
매티어스 심리묘사 대단하네ㄷㄷ 영화에도 조금 더 디테일하게 묘사됐으면 좋았을걸ㅠ
크으 매티어스의 심리묘사가 굉장하다. 사흘 뒤에 온다 한 표현이 찡하네..
와...너무 감동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