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칭궁이 이리도 잘 보인다니, 길운이구먼.”
구름 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인의 눈에는 희미한 기쁨이 엿보였다.
하지만 기쁨을 느끼던 것도 잠시, 노인은 이내 굉음을 머금은 설풍에 옷깃을 꽉 여미었다.
늦은 겨울이 잠들고 초봄이 기지개를 켜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북부 대륙의 칼바람은 그렇지 않다는 듯 매섭게 울어재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설원의 칼바람이 그렇듯 성난 돌풍이 한번 휩쓸고 난 자리는 엉망진창이 되기 마련.
꺼졌던 낡은 램프에 불을 다시 붙이고, 온통 진눈깨비로 휩쓸린 자신의 작은 안식처를 담담히 치우던 노인은 저 멀리 언덕의 능선 너머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희미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늦은 시간에 손님이라니.”
간이 참 크기도 한 손님이로군, 수많은 몬스터들을 만났을 텐데.
누군지 몰라도 분명 어디서든 한가락 하는 사람일 테였다.
아니, 저 덩치를 보아하니 몬스터도 지레 겁먹고 도망쳤을 수도 있겠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노인은 지그시 문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기다렸다.
“어서 오시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외지까지는 어쩐 일로?”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배낭, 검은 사슴 가죽으로 두껍게 덧댄 두꺼운 튜닉과 본래는 흰색이었을 때가 탄 검은 후드.
오랜 시간 손질하지 못한 듯한 낡은 대검은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듯 서린 한기와 비릿한 혈향을 뿜어냈다.
남자는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
담담히 서 있는 그의 모습과 후드로 가려져 알 수 없는 표정에 당황할 법만도 했지만, 노인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관록이 있었다.
“그래, 모험가 양반. 일단은 피곤하고 힘들 테니 들어오시게.”
작은 여관의 문을 열자 바깥과는 달리 따듯한 온풍이 볼 사이로 스며들었다.
계단과 이어지는 카운터 사이로 보이는 조촐한 테이블 몇 개. 중앙의 커다란 솥단지에는 무언가 끓는 듯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근래 들어 서리폭풍이 자주 치니 인적이 얼마나 뜸한지 원, 분명 설산의 정령 니뮤에님이 노하신 게야. 그래도 오늘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니 기쁘기 그지없군.”
친근한 말과 따듯한 온기는 마치 동화속의 어느 구절처럼 사람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녹이곤 했다.
노인은 항상 그래왔듯 남자를 가까운 테이블에 앉힌 뒤 능청스레 걸려있던 솥의 스튜를 담으며 물었다.
“어서 들게, 할 일이 없다면 이 늙은이의 대화 상대나 잠시 해주겠나?”
남자는 후드도 벗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눈앞에 놓인 스튜를 들이켰다.
그렇게 얼마간 정적 사이로 스튜를 삼키는 소리만 들리던 찰나, 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침묵은 긍정이라. 내가 생각한 뜻이 맞았으면 좋겠구먼.”
수없이 많은 사람을 겪으면서 노인은 지난날에 비해서 퍽 뻔뻔해지기도 했다.
사연 없는 이가 어디 한 둘인가? 이런저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
이제는 약관이라 불릴 초로의 노인은 눈앞의 무뚝뚝한 떠돌이를 안주 삼아 자신의 얘기들을 한창 들어놓았다.
자신이 젊었을 적 하바나의 명소인 여명의 호수에서 오색 순록을 잡았다든지, 거기서 자신의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아내를 만났다든지 하는 옛 추억을 넘어 이제는 시시콜콜한 대화가 계속 이어질 즈음.
“잘 들었어.”
남자는 무심하게 스튜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노인네의 인생 얘기가 뭐가 재밌겠나, 그저 들어줘서 고마울 뿐이라네.”
“그래도, 일개 AI의 구문 치고는 썩 매끄러웠어.”
AI라니. 노인으로써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어감의 단어였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비밀을 찾아다녔던 일류 모험가였건만. 이제는 시대와는 썩 멀어진 뒷방 늙은이라는 얘기인가.
뭐, 아무래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잔주름이 펴질 정도로 넉살좋게 껄껄 웃어 보였다.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자네의 얘기도 듣고 싶구먼, 여러 모험가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이 늙은이의 작은 낙이거든.”
“내 얘기라.”
사내는 낡은 후드를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짧게 잘라 묶은 머리와 부리부리한 눈, 코끝에서 턱까지 사선으로 그어진 짙은 자상과 수많은 흉터 자국.
분명 평범한 용병의 외관이지만 노인은 무언가 어색하고 알 수 없는 꺼림직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에는 너희 같은 사람들이 0과 1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요즘은 무서울 정도로 현실과 다른 점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해.”
“그게 무슨 말인가? 이 노인네가 요즘 문물에는 영 어두워서 말이지. 칭찬을 해도 잘 못 알아듣는다네, 껄껄!”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일개 퀘스트 NPC 주제에 짜증나게 진짜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었어.”
그리고는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던 대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이 두려울 만도 했지만, 노인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키득거리며 웃었다.
“특출난 모험가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돈냄새를 맡은 사냥개였군.”
“사냥개? 아, 암살자 퀘스트.”
분명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불쌍하게도. 사람과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기껏해야 게임 내의 설정에 묶여 있는 코드 덩어리라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가기 전에 밤하늘을 한번 보고 싶구먼. 카나반의 거무죽죽한 하늘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네. 죽은 사람 부탁도 들어준다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모닥불을 지나 문고리를 향해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나는 그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한 치의 불안함도, 이상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완숙하고도 노련함이 느껴지는 감정 절제. 하지만 그것이 주인공 앞이라면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게임 플레이어라면 말이다.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쪽 말을 들어주면 퀘스트 완수가 안 되거든.”
발걸음이 멈칫함과 동시에 무언가 쾅 하고 터지는 소리가 노인의 귓가를 울렸다.
“흑… 으아앙…!”
“라울!”
여유로웠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화들짝 놀라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어린아이를 부축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쟤까지 못 잡으면 경험치가 안 들어와서.”
“잠깐, 잠깐만 기다리게! 이 아이는 우리 가문과 아무런 상관도 없네, 그저 어쩌다 알게 된 아이란 말일세!”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제발, 저 아이는 살려주게. 나만 죽이면 되…”
촤악 하고 나무판자에 붉은 피가 흩뿌려지는 소리.
아마도 그것이 노인이 이번 생에서 했던 마지막 유언이었을 것이다.
“그런 얘기는 다음 생에 개발자들한테나 하라고.”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아이는 충격 받은 듯 멍하니 주저앉아 떨고 있었다.
“미안. 저승에서 안부 전해줘.”
****
일을 마치고 나온 뒤 갑작스레 든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분명 살을 베었을 때 들었던 더러운 감촉 때문이었으리라.
< 퀘스트 완료 : 가문 몰살 >
리타이너의 혈육을 포함하여 반역자들의 가문을 멸문시켰습니다.
완벽한 임무 달성입니다. 추가 경험치가 지급됩니다.
[ EXP + 120,000 ]
무색의 감정 없는 메시지가 시야에 잡혔다.
이건 게임이다. 눈앞의 메시지가 이를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메시지를 뺀다면 현실과 뭐가 다른 거지?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 있던 낡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온 몸에 피칠갑이 되어 있는 끔찍한 몰골. 마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피에 미친 살인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직 식지 않은 붉은 피가 여기저기 기분 나쁜 끈적임을 만들어냈다.
“일개 경험치잖아. 퀘스트. 그래픽이라고.”
나도 모르게 혼자서 되뇌였다.
문득, 아이가 지르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살려주세요, 제발, 잘못했어요...!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 어지럽다.
머리보다 한 발 늦은 몸이 지금까지의 행동을 인지한 듯,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싶어서 한 게 아니라니까... 다 퀘스트가 시켜서 한 거라고!”
애써 그렇게 말하며 부정해 보지만, 머리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들어낸 세상. 그렇다고 해도 그들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며 살아가는 일부였던 것이다.
철저히 허구라고 말해준 들 누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의 입증. 철학적 질문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 철저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죽였다.
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득 차가운 느낌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
차갑다. 시리고도 포근한 느낌이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샌가 물에 젖은 무거운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마물의 피 냄새 보다는 조금 더 얕은.
미칠 듯이 현실과 똑같은 오감이 더욱 이 세상을 현실감 있게 만들었다.
내가 그들을 죽였다.
“아아악! 아냐! 아니라고!!”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럴 리가 없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눈이 붉은 색으로 물들 때까지, 그렇게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fin.-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가벼운 내용이 아닌 시리어스한 글을 자주 쓰게 되네요. 현실이 팍팍해서 그른가
뭐냐 글 개잘쓰네; 소름돋았음
와;;;; 님 혹시 현업자임? 진짜 몰입하면서 잘 봤다
좀 치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