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전쟁터에 순수한 어린아이가 되고싶다.




총성과 폭발음이 작열하는 절망스러운 전쟁터 한가운데를

순진무구한 얼굴로 유유히 배회하는 어린아이가 되고싶다.


화약냄새와 흙먼지로 더럽혀진 모습에

왼손에는 항상 꼬질꼬질한 곰인형이 들려있으면 한다.


어째서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행여나 그것이 환영이나 귀신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그런 미스테리하고 기이한 미소녀였으면 한다.




낮에는 지뢰가 잔뜩 매설되어있는 황무지 위를 천진하게 뛰어놀거나,

참호속에 이리저리 흩뿌려져있는 탄피로 병정놀이를 하고싶다.


가끔씩 내가 궁금해 다가오는 병사들에게,

나는 그저 키득키득, 해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하루종일 그렇게 목적없는 놀이를 계속하다,

이내 질려 폴숲속에 몸을 폭, 뉘었으면 한다.


석양이 낮게 깔린 저녁,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고된 작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병사들에게 비몽사몽 노근한 인사를 건내고 싶다.


오늘도 하루종일 참호를 파다 잔뜩 지쳐 삽을 질질 끌며 들어오는 병사는,

나를 보고는 멋적게 다시 슥 그 어깨를 펴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잠에 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면 나는 문득 참호를 울리는 거대한 폭음소리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둠속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기습에, 병사들이 혼란스럽게 참호속으로 뛰어들어갈 때,


나만은 혼자 놀란 눈으로 이글이글 솟아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다.


어린아이의 눈으로는 결코 그 의미를 알수 없는 그 새빨간 화염은,

나에게 두려움, 그 이상의 어떤 거대한 상실감을 남겼으면 한다.


무어라 나에게 소리치는 병사의 목소리를 끝내 듣지 못한 채,

그의 손에 낚아채져 끌려오듯 참호속으로 들어오고 싶다.




자신의 머리보다 한참 큰 방탄모를 푹 눌러쓴 병사들은,

모든 신경을 저 멀리 능선 너머에 집중한 채,

참호 밖으로 총을 겨누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방아쇠를 잡은 그들의 떨리는 손끝을,

오직 나만이 참호 안에서 쭈그린 채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이내 방아쇠가 당겨지고,

어쩌면 쉼없이 허공을 찢어발기는듯한 날카로운 총성들과

해석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함성소리, 혹은 절규소리에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게 되어도,


그 눈만은 오로지

소염기에서 터져나오는 화염, 밤공기 속에 흐트러지는 매캐한 화약연기를

똑바로 응시했으면 한다.




방아쇠는 쉼없이 당겨지고, 이제 지휘관의 입에서 나오는 괴성에 가까운 명령은 구태여 해석할 필요 마저 없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내 어떤 병사가 뒤로 튕겨지듯 참호 안으로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가 목숨을 믿고 맡겼던 낡은 철제 방탄모에 뚫려있는, 섬뜩할 정도로 깔끔한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구멍이,


어쩌면 그리도 무심하게 그가 살아온 날의 끝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내가 떨리는 작은 두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힘껏 잡아 끌어도,

작은 내 몸으론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그 한명의 '어른'은, 잔혹하고 덧없게도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조금은 가슴아픈 현실에 나는 아마 넋놓아 울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조그만 소녀의 오열을, 쉼없이 울리는 전쟁터의 총성이 늘 그래왔듯 무심히 덮어줬으면 한다.





6시간을 내리 지속된 전투는 해가 밝게 뜨고 나서야 겨우 소강상태에 이르르게 될지도 모른다.


자욱했던 아침안개가 걷히고 폭음소리는 언제그랬냐는 듯 잦아들 것이다.


그럼에도 참혹했던 전투가 간밤에 대지에 아로새기고 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는

쉽사리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화약냄새와 흙먼지로 더럽혀진 모습에,

왼손에는 항상 꼬질꼬질한 곰인형이 들려있는 기이한 전장의 소녀는,

병사들이 자신의 전우를 직접 땅에 묻는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고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내일도 누군가는 싸늘하게 죽어갈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잘려나간 팔을 붙잡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직접 묻기위해 삽을 들게 될지도 모른다.



어젯밤 2명의 절친한 친구를 잃은 병사가 터벅터벅, 나에게로 다가왔으면 한다.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보는 소녀의 지저분한 머리를

쓸쓸한 미소로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전쟁이 계속되어도,


매일밤 누군가가 죽어나가며 또한 누군가를 죽이게 되어도,


그 피비린내 나는 고통에 매일밤 심장을 토해내 이내 가슴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어쩌면, 그것은 한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 때문은 아닐까.. 같은 생각을하며,


조금은 슬퍼보이는 미소로 그를 향해 베시시 웃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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