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어의 언덕 위, 오전 10시 14분의 햇살은 잘 닦인 유리잔의 표면처럼 매끄럽고 투명했다.
침대 시트의 감촉은 서늘했다. 나는 이집트산 면 100퍼센트의 감촉을 발가락 끝으로 확인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 이곳은 캘리포니아의 벨 에어지만, 동시에 벨 에어가 아니기도 하다.
그저 0과 1로 이루어진 무한한 데이터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지극히 정교한 섬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에비앙. 섭씨 4도. 내가 가장 선호하는 온도다.
뚜껑을 돌려 따는 순간 들리는 '틱' 하는 플라스틱의 파열음조차 미리 계산된 악보의 한 소절처럼 정확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액체의 궤적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감각적 신호처럼 느껴졌다. 시스템은 나에게 신과 같은 권능을 부여했다.
나는 손가락 하나만 튕기면 이 거대한 저택을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바꿀 수도 있고, 눈앞의 수영장을 돔 페리뇽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도파민은 휘발성이 강한 연료다.
한 번 불타오르면 재만 남는다. 나는 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천천히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작은 램프의 불꽃 같은 삶을 원할 뿐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오크 원목 마루의 단단함이 발바닥의 아치를 받쳐주었다.
나는 얇은 린넨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로스앤젤레스의 전경이 뿌연 안개 속에서 몽환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먼지 하나 없는 풍경. 대기 오염조차 시각적인 필터로 조정된 아름다움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
허공에서 부드러운 알토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집사, 시스템 AI다.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혹은 그것—은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오늘의 기분은 어떠신가요? 날씨는 '쾌청함'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우울한 비'나 '노르웨이의 숲 같은 안개'로 변경 가능합니다.」
「아니, 이대로가 좋아.」
나는 짧게 대답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그 잠긴 톤이 마음에 들었다.
부엌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라 마르조꼬 에스프레소 머신이 놓여 있었다.
나는 원두가 담긴 틴 케이스를 열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갓 볶은 원두 특유의 고소하면서도 산미가 감도는 향기가 콧속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나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버튼을 눌러 갈기 시작했다. 위잉, 하는 기계적인 소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원두가 부서지며 내는 그 거친 비명 같은 소리가 좋다. 그것은 파괴인 동시에 창조의 전조다. 30초 동안의 소음 뒤에 찾아오는 적막.
나는 포타필터에 갈린 원두를 담고 탬핑을 했다. 적당한 압력. 수평을 맞추는 손목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
이 모든 과정은 치트키를 쓰면 0.1초 만에 완료될 수 있다. '완벽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라는 커맨드만 입력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내 손을 쓴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주는 질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동안, 나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사도, 관리인도 없다. 오직 로봇 청소기 한 대가 잔디 위를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오가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작은 기계는 마치 고독을 수행하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짙은 갈색의 액체가 데미타스 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주르륵. 크레마의 황금빛 거품이 표면을 덮는 것을 지켜보았다.
커피를 들고 거실 한구석에 놓인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갔다. 검은색 유광 도장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나는 잔을 피아노 위에—물론 코스터를 받치고—내려놓았다. 그리고 건반 뚜껑을 열었다.
88개의 건반이 가지런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의 나'는 칠 줄 몰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재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음악적 재능 레벨 MAX.'
이 단순한 설정값 하나가 나를 빌 에반스나 글렌 굴드보다 더 섬세한 연주자로 만들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손가락을 풀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C메이저 코드를 눌렀다.
도, 미, 솔.
화음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완벽한 조율. 배음 하나하나가 수학적으로 완벽한 비율을 이루며 공명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울림이 거실의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과정을 상상했다. 소리의 입자들이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모습.
나는 천천히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정해진 곡은 없다. 그저 손가락이 가는 대로,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건반을 눌렀다.
재즈라기보다는,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불규칙한 리듬에 가까웠다. 왼손은 느린 템포의 베이스를 깔고, 오른손은 그 위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치트 능력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모든 멜로디는 즉각적으로 손가락을 통해 구현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지체 없이 소리로 변환되는 경험은 묘한 쾌감을 준다.
하지만 나는 그 쾌감에 젖지 않으려 노력했다.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건조하게 연주했다. 마치 타자기로 오래된 보고서를 작성하듯이.
「훌륭한 연주군요. 1950년대 쿨 재즈의 정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계십니다.」
시스템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평가하지 마. 그냥 배경음악일 뿐이야.」
「알겠습니다. 기록을 중지할까요?」
「아니, 놔둬. 나중에 들어보고 별로면 지우지 뭐.」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피아노 소리는 넓은 저택을 채우기에 충분했지만, 결코 시끄럽지는 않았다.
이곳의 방음 설비 역시 완벽했으니까. 나는 잠시 연주를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적당히 식어 있었다. 혀끝에 감도는 산미와 쓴맛의 밸런스가 절묘했다.
내가 직접 내렸지만, 사실은 시스템이 내 손의 미세한 떨림조차 보정해 주었을 것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절한 간섭. 그것이 이 세계의 본질이다.
나는 그것을 혐오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피아노 덮개를 닫고, 나는 서재로 이동했다. 서재의 3면은 천장까지 닿는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만 권의 책. 물론 다 읽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장식이다. 하지만 원한다면 나는 1초 만에 이 모든 책의 내용을 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지식 습득' 버튼 하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굳이 낡은 종이 냄새가 나는 페이퍼백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가죽 소파가 끽, 하고 부드러운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받아주었다.
책을 펼치자 누렇게 바랜 종이 냄새가 났다. 이 냄새마저도 디지털 신호의 조합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소름 끼치게 놀랍다.
나는 활자를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필립 말로의 시니컬한 독백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 공간의 시간은 점성이 높았다.
나는 이 느슨함을 사랑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빨랐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쫓기듯 뛰었고, 1분 1초를 다투며 정보를 쑤셔 넣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아무것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모순된 충족감이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한 시간쯤 책을 읽었을까,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생리적인 허기라기보다는, 습관적인 공허함에 가까웠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최고급 스시? 미슐랭 3스타 셰프의 프렌치 코스?
아니면 전용기를 타고 이탈리아 나폴리로 이동해 피자를 먹고 올까? 모든 것이 가능했다.
메뉴창을 띄우고 터치 한 번이면 내 눈앞에 테이블이 세팅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요란하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 식재료들이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달걀 두 개, 베이컨 세 줄, 그리고 시금치 약간. 나는 프라이팬을 꺼내 불을 올렸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팬이 달궈지기를 기다렸다. 기름이 뜨거워지며 나는 냄새가 부엌을 채웠다.
달걀을 깨뜨려 넣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흰자가 하얗게 굳어갔다. 나는 노른자가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집개로 달걀을 건드렸다.
「소금과 후추는 어느 정도로 뿌릴까요, 마스터?」
시스템이 물었다. 아마 내 손목에 장착된 햅틱 슈트가 내 의도를 읽고 미세 조정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소금 통을 들어 높은 곳에서 흩뿌렸다. 하얀 소금 결정들이 눈처럼 달걀 위로 내려앉았다.
완벽하게 균일한 분포는 아니었다. 어느 부분은 좀 짜고, 어느 부분은 싱거울 것이다. 그 불균형이 인간적이다. 나는 그것을 원했다.
접시에 완성된 달걀 프라이와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을 담았다.
토스터에서 갓 튀어 나온 식빵 두 조각에는 무염 버터를 발랐다.
버터가 빵의 열기에 녹아 스며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빵의 표면. 그것은 마치 작은 일몰처럼 보였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베이컨의 짭조름한 기름기가 입안에 퍼졌다.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바삭거림. 그리고 부드러운 달걀 노른자의 고소함.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었다. 미각 데이터가 뇌로 전송되는 과정을 분석하듯이. 혼자 먹는 점심 식사는 언제나 조용하다.
대화 상대는 필요 없다. 내면의 독백만으로도 식탁은 충분히 소란스럽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했다. 물론 식기세척기가 있지만, 나는 흐르는 물에 접시를 닦는 것을 선호한다.
미지근한 물이 손등을 타고 흐르는 감각, 세제의 미끌거리는 질감, 그리고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헹구는 행위.
이 반복적인 노동이 나의 정신을 맑게 해준다. '질서의 의식'. 나는 이것을 그렇게 부른다.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비록 가상이라 할지라도—에서 나만의 작은 질서를 확립하는 행위.
접시를 건조대에 세워놓고, 젖은 손을 타월로 닦았다.
오후 2시. 수영을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약간 기울어져, 수영장 물 표면에 반짝이는 윤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25미터 길이의 인피니티 풀. 물은 맑고 푸르렀다. 염소 냄새는 나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라임 향이 나도록 설정해 두었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전신을 감쌌다. 충격은 짧았고, 곧 익숙한 부유감이 찾아왔다.
나는 잠영으로 수영장 바닥을 훑으며 나아갔다. 물속에서 눈을 뜨면 세상은 푸른색 필터를 낀 것처럼 왜곡되어 보인다.
굴절된 빛의 줄기들이 바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폐 속의 공기가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내 신체 능력은 이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수준으로 조정되어 있다. 숨을 참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물 위로 올라와 숨을 토해냈다. 푸하. 물방울이 속눈썹에 맺혀 시야를 가렸다. 나는 배영으로 자세를 바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하늘. 저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서버실의 천장? 아니면 또 다른 플레이어의 가상 현실?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팔을 휘저으며 물살을 갈랐다. 물의 저항이 기분 좋게 근육을 자극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몸을 움직였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규칙적인 리듬.
이 순간만큼은 내가 시스템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물속을 떠다니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그때, 수영장 가장자리에 무언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헤엄을 멈추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샴고양이 한 마리였다. 짙은 초콜릿색 얼굴과 발, 그리고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을 가진 고양이. 이 녀석은 내가 설정한 NPC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정원에 나타나 제집처럼 드나드는 존재다. 시스템 오류인지, 아니면 개발자가 숨겨놓은 이스터 에그인지 알 수 없다. 나는 녀석에게 '무라카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여어, 왔니?」
내가 물 밖으로 나오며 말을 걸었다. 무라카미는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야옹, 하고 짧게 대답했다.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너는 여기서 신 노릇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혼자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비치타월을 집어 몸을 닦았다. 물기가 마르면서 피부가 약간 당겨오는 느낌이 들었다. 선베드에 누웠다.
무라카미가 내 배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무게감. 녀석은 자리를 잡고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진동이 내 흉곽을 통해 심장까지 전해졌다.
「오늘은 좀 덥네.」
나는 고양이의 귀 뒷부분을 긁어주며 말했다.
「야옹.」
녀석은 동의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고양이가 말을 할 리는 없지만—햇살을 공유했다.
이 완벽한 정적.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삶.
나는 손을 들어 허공에 작은 원을 그렸다. 그러자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나타났다.
[상점] [인벤토리] [스킬] [설정].
나는 [상점] 아이콘을 눌러보았다. 수백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요트부터, 화성 여행 티켓, 심지어는 작은 국가의 통치권까지 팔고 있었다. 물론 구매 버튼은 활성화되어 있다.
나는 스크롤을 무의미하게 올렸다 내렸다 했다. 물건들은 화려한 이미지와 함께 나를 유혹했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게 만든다.
「지루한가요, 마스터?」
시스템 AI가 다시 물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아니, 내 뇌파 패턴을 분석했겠지.
「아니, 그냥 확인해 본 거야. 신상품이 들어왔나 해서.」
「지난주 업데이트로 '19세기 파리 시간여행' 패키지가 추가되었습니다. 흥미가 있으신가요?」
「글쎄, 파리의 하수구 냄새까지 재현했다면 생각해 보지.」
나는 농담조로 대답하며 창을 닫았다. 19세기의 파리라니. 낭만적일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피곤한 일이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내 배 위에서 잠든 고양이의 온기면 충분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하늘의 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코발트 블루에서 보라색, 그리고 옅은 오렌지색으로 그라데이션이 펼쳐졌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나는 무라카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귀찮다는 듯이 한 번 몸을 뒤척이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오전 7시 12분. 알람 없이 눈을 떴다. 뇌의 각성 상태가 마치 디머 스위치를 천천히 올리는 조명처럼 부드럽게 밝아졌다.
어젯밤 설정해 둔 '숙면 모드' 덕분이다. 렘수면과 비렘수면의 주기가 완벽한 사인 곡선을 그리며 내 피로를 씻어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 관절마다 기름칠을 새로 한 기계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창문을 열자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어제의 바다 냄새는 사라지고, 오늘은 젖은 흙과 유칼립투스 향기가 섞인 냄새가 났다.
시스템이 매일 아침 미묘하게 대기 성분을 조정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화요일의 향기. 나는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오늘은 텃밭을 가꾸기로 했다. 벨 에어의 대저택 뒤편, 수영장을 지나면 작은 온실과 노지 텃밭이 있다.
물론 시스템 상점에는 '최상급 유기농 채소 바구니'가 1초 만에 배달되는 옵션이 있다.
하지만 나는 굳이 흙을 만지는 수고로움을 선택했다. 결과물보다 과정에서 오는 촉각적 데이터를 즐기기 위해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낡은 데님 오버올과 체크무늬 셔츠. 그리고 챙이 넓은 밀짚모자.
거울을 보니 제법 그럴듯한 농부의 모습이었다. 장갑을 끼지 않았다. 흙의 입자가 손톱 밑에 끼는 감각, 그 거칠고 원초적인 느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텃밭에는 방울토마토와 바질, 루꼴라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토마토 줄기를 살폈다. 곁순이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다. 나는 전지가위를 들었다.
「마스터, 원예 스킬 '신의 손'을 활성화할까요? 곁순 제거와 동시에 광합성 효율을 200%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물었다.
「아니, 그냥 가이드라인만 보여줘. 자르는 건 내가 할게.」
내 시야에 증강현실로 붉은색 점선이 표시되었다. 잘라내야 할 가지들이다. 나는 가위를 가져다 댔다. 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초록색 줄기가 잘려 나갔다.
잘린 단면에서 풋내 가득한 진액 냄새가 확 풍겼다. 엽록소의 냄새. 생명의 냄새. 나는 그 냄새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잘 익은 토마토 몇 알을 땄다. 햇볕을 받아 따뜻했다. 표면은 팽팽하고 윤기가 흘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토마토 하나를 옷에 대충 문러 닦고 입에 넣었다.
톡 터지는 껍질.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트에서 파는 냉장 토마토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태양의 맛이 응축된 맛이었다.
나는 바구니에 토마토와 바질 잎을 가득 담았다. 흙이 묻은 손을 털며 일어났다. 허리가 뻐근했다. 이 통증조차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부엌으로 돌아와 수확한 재료들을 씻었다. 차가운 물살에 초록색 잎들이 춤을 췄다.
오늘은 파스타를 만들 생각이다. 아주 심플한 포모도로 파스타. 재료가 완벽하니 기교는 필요 없다.
올리브 오일에 편 썬 마늘을 넣고 약한 불로 볶았다. 마늘 향이 기름에 배어들며 고소한 냄새를 피워 올렸다. 여기에 반으로 자른 토마토를 넣었다.
치이익. 수분이 증발하며 내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나는 나무 주걱으로 토마토를 으깨며 천천히 저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소스가 걸쭉해질 때까지 20분. 나는 그 시간 동안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키안티 클라시코. 산미가 있고 탄닌이 부드러운 와인이다. 와인 잔을 흔들며 창밖을 보았다.
정원의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평화롭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가끔은 내가 투명한 젤리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젤리 속이라도 상관없다. 그 젤리가 달콤하고 안락하다면.
면을 삶았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넉넉히 넣고 스파게티 면을 부채꼴로 펼쳐 넣었다. 타이머는 8분. 알 덴테.
심지가 약간 씹히는 정도. 나는 타이머를 보지 않고 감각으로 시간을 쟀다. '면 요리 마스터' 특성이 켜져 있으니 실패할 리 없다.
완성된 파스타를 접시에 담았다. 그 위에 생 바질 잎을 찢어서 올리고,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강판에 갈아 눈처럼 뿌렸다.
붉은색 소스, 초록색 바질, 하얀 치즈. 이탈리아 국기의 색깔이다.
식탁에 앉아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았다. 입에 넣자 토마토의 감칠맛이 폭발했다. 인공적인 조미료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어떤 레스토랑의 파스타보다 풍미가 깊었다.
내가 직접 키우고, 직접 따서, 직접 요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기 충족적 순환'이 주는 만족감이 맛의 50퍼센트를 차지한다.
「마스터, 오후 2시에 예약된 '가상 미술관 투어' 스케줄이 있습니다.」
접시를 비우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을 때 시스템이 알렸다.
「아, 그랬지. 준비해 줘.」
나는 거실 중앙으로 이동했다. 소파를 뒤로 치우고 빈 공간을 만들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거실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벽과 천장이 사라지고, 나는 하얀색의 거대한 돔형 공간에 서 있었다. 루브르나 오르세가 아니다.
시스템이 전 세계의 명화 데이터를 수집해 구축한, 오직 나만을 위한 개인 미술관이다.
바닥은 대리석처럼 매끄러웠고, 공중에는 그림들이 액자도 없이 둥둥 떠 있었다. 모네의 <수련>,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시대와 화풍이 뒤섞여 있었지만, 묘하게 조화로웠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그림들을 감상했다. 그림 앞에 서면, 작가의 붓 터치 하나하나가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유화 물감의 두께, 캔버스의 질감까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나는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추상화 앞에 멈춰 섰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거대한 색면. 아무런 형체도 없지만,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이감이 느껴졌다. 나는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위로받는 것 같기도 하고.」
「로스코는 '비극, 황홀경, 파멸 같은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스터의 감상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합니다.」
「그래? 난 그냥 색깔이 예뻐서 보는 건데.」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각해지는 건 질색이다. 나는 손을 휘저어 그림들을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이번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 하늘에 떠 있는 바위, 얼굴이 없는 신사들.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 무라카미가 가상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녀석은 이 공간이 낯설지 않은지, 공중에 떠 있는 초록색 사과 그림을 향해 점프를 했다.
물론 그림은 홀로그램이라 녀석의 몸을 통과했다. 무라카미는 당황한 듯 착지하더니, 허공을 향해 냥냥펀치를 날렸다.
「그건 먹는 게 아니야, 무라카미.」
나는 녀석을 안아 올렸다. 따뜻한 체온. 이 가상의 공간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존재. 녀석의 털은 부드러웠고, 심장박동은 빨랐다. 나는 미술관 모드를 종료했다.
다시 익숙한 거실로 돌아왔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낮잠을 자기 딱 좋은 시간이다.
나는 거실 한쪽 구석에 놓인 해먹에 몸을 뉘었다. 해먹이 내 무게에 맞춰 부드럽게 흔들렸다.
창밖으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뇌의 활동을 최소화하고, 그저 감각기관만 열어두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냉장고가 간헐적으로 웅웅거리는 소리. 이 백색 소음들이 자장가가 되어 나를 덮쳤다.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거실은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아름다움 같기도 하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같기도 했다.
입안이 말라 있었다. 나는 물을 한 잔 마시고 테라스로 나갔다.
수영장 물이 저녁노을을 반사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시가를 한 대 피우기로 했다. 쿠바산 코히바. 물론 니코틴과 타르가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시스템이 제거해 준다.
나는 시가의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매캐하면서도 구수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를 내뿜으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군. 완벽하다.
「마스터, 저녁에는 가벼운 드라이브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영화를 보시겠습니까?」
「오늘은 드라이브를 하고 올게.」
나는 차고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나의 장난감들이 잠들어 있다. 나는 오늘 포르쉐 356 스피드스터를 선택했다.
1950년대의 곡선을 가진, 은색의 작은 컨버터블.
차 문을 열고 가죽 시트에 앉았다. 오래된 가죽 특유의 냄새와 휘발유 냄새가 섞여 났다. 시동을 걸자 그르르릉, 하는 기분 좋은 진동이 엉덩이와 등허리로 전해졌다.
차고 문이 열리고, 나는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목적지는 없다.
그저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를 따라 달리고 싶을 뿐이다. 벨 에어의 언덕을 내려와 해안 도로로 접어들었다.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왼쪽에는 태평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나는 지붕을 열었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짠 냄새가 섞인 바람. 너무 빠르지 않게, 풍경이 흐르는 속도를 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로.
지나가는 차들은 거의 없었다. 시스템이 나의 드라이브를 방해하지 않도록 트래픽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나는 해변가에 차를 세웠다. 말리부의 한적한 해변. 모래사장은 하얗게 빛나고, 파도는 일정한 주기로 밀려와 부서졌다.
나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알의 까슬까슬하면서도 따뜻한 감촉.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나와, 갈매기 몇 마리뿐.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하게 섞여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물론 현실의 전화는 아니다. 시스템 알림이다.
[알림: 주문하신 물건이 배송되었습니다.]
가상 세계지만, 물건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설렘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배송 시간'을 설정해 두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하늘은 보라색과 분홍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몽환적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오픈카의 지붕을 닫지 않고 그 색채의 터널을 통과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지만, 그 서늘함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집 앞 현관에는 갈색 소포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라카미가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기분 좋은 나른함. 나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목욕을 하기로 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편백나무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욕실 가득 숲의 향기가 퍼졌다.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으으으.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물이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물의 온도가 내 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았다.
이곳은 완벽한 자궁이다.
시스템이라는 어머니가 제공하는, 탯줄로 연결된 안전한 세계.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전쟁이 났든, 경제가 붕괴했든, 이곳 벨 에어의 저택은 영원히 평화로울 것이다.
「마스터, 수온을 유지할까요?」
「응, 10분만 더 있다가 나갈게.」
나는 물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 끝이 불어서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이 사소한 신체적 변화조차 나에게는 유희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실크 잠옷을 입고 침실로 갔다. 침대 옆 협탁에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었다.
나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펼쳤다.
몇 페이지를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는 책을 덮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시스템의 대기 표시등만이 희미하게 깜박거렸다.
「잘 자요, 마스터. 좋은 꿈 꾸세요.」
「그래, 너도.」
시스템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우습지만, 이것 또한 나의 루틴이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내일은 무엇을 할까.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릴까, 아니면 하루 종일 빵만 구울까.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시간은 무한하고,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니까.
나는 깊고, 꿈 없는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치 잘 닦인 미끄럼틀을 타듯이.
딱 이런 느낌일듯 개좋다
완몰가 레이프 ㅇㄷ?